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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28, 마지막 회)] 17세기 초 ‘신세계 개척자’ 야마다 나가마사 

바다를 건넌 사무라이 동남아 일본인 전설이 되다 

평소엔 무역, 유사시엔 용병… 태국 아유타야 왕국 군 최고위직 올라
전쟁마다 이겨 세력 커지자, 반대파 실세 왕족 견제로 비운의 죽음


▎태국 방콕 북쪽의 왓 차이왓타나람 사원. 이 사원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아유타야 고대왕조 유적지의 상징적 건물이다.
한통의 편지가 인도네시아 자가타라(현 자카르타)에서 일본으로 날아든다. 당시 그곳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령(領)이었고 바타비아라 부르던 곳이었다.

“곱디고운 시월이군요”로 시작해 “어머 일본, 사랑스러워라. 그리워라, 보고 싶구나”로 마치는 편지다.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17세기 당시 국제 편지다. “편지는 도착하는데 왜 나는 고향에 못 가는가”라는 소녀의 편지는 일본인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런데 여기에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그 시절 왜 자카르타에 일본인 소녀가 가 있었을까? 그리고 왜 입국하지 못했을까?

발신인의 이름은 자가타라의 오하루(1625?~1697). 간에이 2년(1625) 포르투갈 상선의 항해사인 이탈리아인 니콜라스 마린과 나가사키 무역상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다.

소녀는 용모가 수려할 뿐 아니라 읽고 쓰는 데도 능숙했다고 전해진다. 간에이 16년(1639) 6월에 발포된 제5차 쇄국령으로 그해 10월, 나가사키에 살던 외국인과 그 가족이 바타비아로 추방됐을 때 소녀는 어머니·언니와 함께 일본을 떠났다. 당시 소녀의 나이 14세였다.

네덜란드 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같은 배편으로 일본을 떠난 사람 중에는 게이쵸 5년(1600) 윌리엄 애덤스(미우라안진) 등과 함께 일본에 도착했던 선원도 있었다. 오하루가 후세에 이름을 남긴 이유는 자신의 고향인 일본을 그리는 절절한 내용의 편지 때문이다.

쇄국이란 에도 막부가 기독교국(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인적 내항 및 일본인의 동남아 방면 출입을 금지하고 무역을 관리·통제·제한하는 대외정책이다. 일본의 고립 상태, 외교 부재 상태 및 일본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 경제권을 가리키기도 한다. 해외와의 교류·무역을 제한하는 정책은 에도 시대 일본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당시 동북아시아 각국에서도 ‘해금령(海禁令)’을 채택했다.

무역 독점 위해 쇄국령 내린 에도 막부


▎17세기 초 태국으로 건너가서 현지 국왕의 큰 신임을 받은 야마다 나가마사.
쇄국이라 하지만 일본은 조선이나 류큐 왕국과의 통신, 중국(명조와 청조) 및 네덜란드(동인도회사)와의 통상은 열어놓았다, 일반적으로는 간에이 16년(1639)의 포르투갈 선박 입항 금지부터 가에이 7년(1854)의 미·일 화친조약 체결까지 기간을 쇄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쇄국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메이지 이후이며 최근에는 제도로서 ‘쇄국’은 없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에도 시대 초기에 막부는 쇄국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간에이 10년(1633) 일본인의 해외 도항을 금지하는(해외 도항 금지령) 동시에 이듬해 남만인 및 그들과 일본 여성 사이의 혼혈아 287명을 마카오로, 이어 외국인 혼혈아와 일본인 어머니 등 32명을 바타비아로 추방했다.

그 추방된 사람들이 고국에 보낸 서한을 ‘자가타라의 글’이라 불렀다. 자신들의 근황을 전하고 선물 목록을 곁들이는 게 보통이었다. 처음에 편지 통신은 금지됐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금지령이 완화됐다. 지금도 히라도(平島)에 원본 5통이 남아 있다.

오하루는 1646년 동인도회사 직원으로 히라도 태생의 혼혈 네덜란드인 시몬센과 결혼해서 4남 3녀를 낳았다. 그녀의 남편은 사무원보에서 시작해 세관장, 중국인 유산관리위원, 고아재산관리위원을 역임한 뒤 교회 장로가 됐다. 오하루가 나가사키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이 지금도 남아 있다. 18세기 간행된 [나가사키야화초(長崎夜話草)]에 실린 그녀의 편지는 어린 소녀의 글치고는 워낙 명문이어서 위작설이 대두할 정도였다.

쇄국 이전의 일본은 섬나라답게 해양국가였다. 일본이 섬을 벗어나 외국으로 진출한 사례는 663년 덴지 천황 때 백제 백촌강 전투가 처음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 이은 태평양 전쟁 등이 일본이 해외에서 일으킨 대표적인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또 학문 연구를 위해 파견한 견당사나 송·일 무역(宋日貿易), 전국시대 말기와 에도 시대 초기 짧은 기간 펼쳐졌던 주인선 무역(朱印船貿易)도 일본의 주요 해외 활동으로 꼽을 수 있다.

주인선 무역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시행한 관제 무역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인선 무역을 개시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판을 더 키워나갔다.

막부가 무역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 도항선(渡航船)은 허가제로 하고 주인장(朱印状)을 발행했다. 주인장을 가진 무역선을 주인선이라고 불렀다. 시마즈 집안이나 호소카와 집안 등 서남의 유력 다이묘와 교토·오사카·사카이·나가사키의 유력 상인이 주인장을 받아 동남아시아 각지에 무역선을 파견했다. 일본은 구리·칠기 등을 수출하고 생사(生絲)·견직물·사슴가죽·한약재·설탕 등을 수입했다.

쇄국정책이 시행되기 직전인 1635년까지 일본의 주인선은 타이완·필리핀·베트남·캄보디아·타이 등과 교역했다. 동남아시아 각지에 도항한 일본인은 아유타야나 마닐라 등지에 일본인 마을을 만들어 거점으로 삼았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는 그 시절에 방문한 일본인의 낙서가 남아 있기도 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까지는 주인선 무역이 왕성하게 펼쳐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선교 활동도 묵인됐다. 이에 따라 남만 문화(포르투갈·스페인)도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확대됐다. 그리스도교 금지령은 1587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그리스도교 추방령 이후 포교 금지와 무역 간의 모순이 커졌다.

1613년 막부는 전국에 금교령을 내렸다. 더욱이 161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망하자 막부는 쇄국정책으로 기울었고, 1631년에는 해외에 도항하는 선박의 경우 주인장 이 외에 로쥬호쇼(老中奉書)를 구비하게 했다. 또 1633년에는 호쇼선(奉書船) 이외의 해외 도항을 금지함으로써 주인선 무역은 막을 내린다. 1635년에는 일본인의 해외 도항, 해외로부터의 귀국도 전면 금지한다.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스(德川家光)가 쇄국정책을 실시, 세계와 교류를 닫을 때까지 많은 일본인이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해외 각국에 진출해 일본인만의 일본인 마을을 구축하곤 했다. 1639년 완전 쇄국이 이뤄질 때까지 아시아 해역을 왕래한 주인선의 수는 350척이고 바다를 건너간 일본인은 1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태국의 아유타야, 베트남의 호이안, 필리핀의 마닐라에는 일본인 마을이 생겼다.

에도 막부가 쇄국령을 내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토 확장이나 선교를 막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에도 막부가 외국 무역을 독점하겠다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지 않을까 싶다. 유럽 열강이라 하더라도 일본이라는 동아시아의 대국을 식민지화할 정도의 힘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막부가 무역 통제를 통해 독점적 이익을 취함에 따라 거의 자급자족할 수 있는 수준의 시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해외로 눈돌려


▎일본 나가사키 현의 하우스텐보스는 중세 네덜란드의 도시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리조트형 테마파크다.
네덜란드에 문호를 개방한 나가사키 데지마(出島) 이외에 해외와의 무역을 금지한 에도 시대에도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주인선 무역을 통해 동남아시아로부터 철포(鐵砲)와 화약 원료를 수입하고 그에 따라 상인 교류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무역으로 돈을 버는 상인뿐만 아니라 해외에 가서 귀국하지 않고 그대로 정착한 사람도 많았다. 이윽고 그런 지역에는 일본인촌이라 불리는, 일본식 상투를 틀고 칼을 찬 일본인 무사가 활보하게 됐다.

필리핀의 루손 섬에는 일본인 인구가 많아져서 마침내 일본인촌이 형성된다. 간에이 5년(1708)에 일본에 온 이탈리아인 상인의 말을 종합한 서적 [채람이언(采覽異言)]에 의하면 마닐라 교외에 약 3000명의 일본인이 서로 이웃하며 일본인의 의복·생활습관·풍속을 그대로 유지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마닐라 외에도 마카오나 말레이반도 중부 동안의 바탕, 말라카, 하노이, 캄보디아의 프놈펜, 태국 등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 마을’이 탄생했다. 당시 해외 일본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 1590?~1630)다. 그는 주인선 무역 시대에 태국에서 활약했다.

1590년 야마다 나가마사는 스루가(駿河, 시즈오카 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염색 가게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무사를 동경하며 자란다. 그러나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 했다. 잇속에 밝아야 하는 상인이나 묵묵히 견뎌야 하는 쇼쿠닌(職人)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누마즈 번주(현 시즈오카 현 누마즈시)의 오쿠보 타다스케 밑에서 가마꾼 노릇도 해봤다.

나가마사는 무사로서 출세를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가 끝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태평천하’가 막을 올리려 하자 그는 무사의 꿈을 접기에 이른다. 나가마사는 해외로 눈길을 돌린다. 그때부터 해외에서 무사로 살았던 사내의 장대무비(壯大無比)한 역사가 시작한다.

나가마사는 1612년 주인선을 타고 시암(현 태국)의 아유타야에 건너갔다. 나가마사가 건너갔던 때 시암은 아유타야 왕조(1351~1767) 시대였다. 명군이라 칭송되던 손탐 왕의 치세였다. 나가마사는 손탐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일본 의용군 총사령관 역할을 맡는다. 당시 시암은 안팎으로 많은 분쟁을 겪으며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일본 의용군은 세카가하라 전투 등에서 활약했던 수백 명의 무사·낭인들이 뭉친 정예군이었다. 대체로 무역상으로 활동하던 그들은 시암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국왕의 요청에 따라 군을 편성해 용감하게 싸웠다.

‘쇄국’ 이미지가 강한 에도 시대지만 쇄국이 제대로 시작된 것은 제3대 쇼군인 이에미쓰 시절이었다. 초대 쇼군인 이에야스는 무역에 적극적이었다. 이에야스의 무역 목적은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침향(沈香)을 수입하는 데 있었다. 주인선 멤버 중에는 상인뿐만 아니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주군(主君)을 잃은 낭인도 많았다.

당시 아유타야는 에도와 런던에 뒤지지 않는 인구 15만의 대도시로 활기가 넘쳤다. 전성기에는 일본 외에 약 40개국 출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국제도시였다.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갖춘 아유타야는 인근 국가들과 스페인으로부터 침략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가마사 등 일본인들은 평상시에는 상인으로 무역하면서 만일의 경우에는 아유타야의 용병으로 활약했다. 전국시대에 전쟁의 경험을 가진 낭인들은 즉시 전력(戰力)으로 아유타야 왕조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탰다. 그 즉시 전력이 된 일본인을 이끈 것이 나가마사였다. 나가마사는 약 1500명이 있던 일본인 마을의 리더가 됐다.

아유타야의 네덜란드 상관장 요스토스 하우틴은 당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썼다.

“국왕의 수륙 양군의 병사는 제후와 국민으로 구성돼 있다. 모루인·말레이인 그 외 소수의 외국인도 혼성됐다. 그중에서도 500~600명의 일본인은 주력이 되는 대원으로 주변 나라들로부터도 용맹 과감한 정신을 높게 평가받을 뿐 아니라 국왕으로부터도 존경받았다.”

나가마사는 일본 의용군의 장군으로 맹활약하며 겐나 7년(1621)에 위관급으로, 간에이 원년(1624)에는 영관급으로, 나아가 간에이 3년(1626)에는 더 높은 계급으로 승진한다. 간에이 4년(1628)에는 군인 중에서는 최고위직인 장성급에 이르렀다. 나가마사는 육군장관을 제외하고는 시암왕국 안에서 제일 높은 계급에 오르게 됐다. 1629년 스페인의 침공을 두 번이나 막아낸 나가마사는 손탐 국왕으로부터 큰 신뢰를 받아 왕녀와 결혼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국민 신망이 두터운 손탐 국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사망한다. 그리하여 아유타야 왕조는 국정 실권을 두고 후계자 분쟁에 휘말린다. 나가마사는 손탐 국왕의 유언대로 손탐 국왕의 아들 15세의 체터 친왕을 즉위시킨다. 그런데 왕위를 노리던 손탐 국왕의 사촌동생 시월라원은 새 왕의 후견인이 돼 실권을 잡게 된다.

스페인 침공 막아낸 뒤 왕녀와 결혼설


▎2010년 개봉된 태국 영화 [야마다, 아유타야의 사무라이]의 한 장면.
국왕의 후견인 역으로 권력을 휘두르게 된 시월라원에게 나가마사는 눈엣가시였다. 궁정의 신하들은 그의 눈치만 살피며 아무도 제대로 된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나가마사만이 과감하게 직언하며 사무라이다운 기개를 드러냈다고 한다. 자타공인의 실력자인 시월라원이지만 국민 인기가 높고 절대적인 세력을 자랑하는 나가마사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데 큰 부담을 느꼈다.

시월라원은 전략을 수정한다. 아유타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 분국(分國)에 ‘불온분자 진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나가마사를 리골(현 나콘시탐마랏) 총독으로 임명한다. 리골은 말레이반도의 동안(東岸)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지정학상 타국과 국경이 맞닿은 거점이었다.

시월라원은 왕조에서 지위와 무역상으로서 재력을 겸비한 나가마사가 지금보다 더 큰 권력을 지니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하여 외국인이지만 나가마사를 시암의 요충지인 리골의 총독에 임명한 것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로 말하자면 일국의 영주가 된 셈이다.

시월라원의 노림수는 눈엣가시였던 나가마사를 벽지로 보내놓고 궁정에서 뜻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일본인 한 명만 없으면 자기 뜻을 거스르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위험한 야망과 계산이 권력자의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나가마사가 부임한 리골이라고 하는 지역은 언제든지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정세가 불안한 곳이었다. 시월라원은 내심 반란군과의 충돌로 인해 자연스레 나가마사가 제거되길 바라고 있었다.

시월라원의 의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나가마사가 이끄는 일본 의용군은 리골에서 일어난 반란을 깔끔히 진압해버린다. 그 누구도 평정할 수 없었던 지역을 나가마사가 손쉽게 정복한 것이다.

승전 축하한다며 궁정 잔치 초대해 ‘독살’


▎일본 나가하마 구도심 전경. 시가지에 들어서면 에도 시대를 연출한 영화 세트장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리골 영주로서 외국의 거듭된 침공을 막아냈지만 그 지역의 분쟁은 계속된다. 시월라원에게 나가마사는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된다. 지금처럼 나가마사가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면 시월라원의 지위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월라원은 공훈을 세운 나가마사를 궁전에 초대해 그에게 미녀와 식사·술을 대접한다. 나가마사는 술에 독이 들어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나가마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 40세(1630년)였다.

나가마사의 죽음과 관련해 다른 설도 있다. 전쟁 중에 입은 상처에 고약을 발랐는데 그 안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확한 진상은 알 길이 없다. 아무튼 나가마사는 리골의 총독이 된 1년 후에 사망한다.

나가마사는 시암에 건너가서 고위직에 올랐음에도 일본을 잊지 않았다. 아유타야 왕조에 에도 막부가 때때로 사자를 파견하면 나가마사는 사자를 정중하게 치하하고 위로했다.

막부의 신하인 도이토시가쓰(土井利勝)에게 서간(書簡)과 금품·보물 등을 보낸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간에이 3년(1626)에는 슨푸에 있는 아스마 신사에 전함(戰艦)을 그린 에마(絵馬)를 봉납했다. 유감스럽게도 화재로 소실됐지만 그 사본이 지금까지도 소장되고 있다고 한다.

나가마사의 사후 리골과 시암의 정세는 어떻게 됐을까? 리골의 총독은 나가마사의 아들 오인이 계승한다. 그러나 오인은 정적의 모략에 걸려들어 실각한다. 나가마사 시대에 단결력이 강했던 일본 의용군도 내부 분쟁과 파벌 다툼이 잦았고, 결국 오인이 그 일부를 데리고 캄보디아로 망명하게 됐다.

캄보디아에서 환영을 받은 오인 일행이었지만 때마침 그곳도 노왕(老王)과 장자가 왕위를 놓고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오인 일행은 강력한 군사집단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노왕 측의 부탁을 받아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패하고 만다.

나가마사가 사라진 후 아유타야의 일본인 마을은 기로에 선다. 일본인들의 복수를 두려워한 시월라원에 의한 탄압이 시작된다. 어떤 자는 저항하고 어떤 자는 국외로 도망하는 등 혼란 양상을 드러낸다. 국왕의 명령으로 일본인 마을의 재건이 도모됐지만 과거만큼 융성하긴 어려워졌고, 마침내 쇠락의 길을 걷는다. 또한 일본에서 발포된 쇄국령이 결정타로 작용하면서 양측의 연락 통로가 두절된다. 일본과의 무역이 막히자 아유타야에서 일본인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게 됐다.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름잡던 장보고가 활약하던 시절 중국의 해안 지방에 신라방이 속속 생겼다. 7세기 백제·고구려와의 전쟁이 끝나자 신라인들의 지속적인 당나라 이주가 이뤄졌다,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왕족과 귀족들, 신분차별에 갇혀 좌절한 인재 등이 바다를 건너갔다.

주인선 무역으로 동남아에 진출한 일본인들도 비슷한 이유로 신세계를 꿈꾸고 파도에 몸을 맡겼다. 일본인이 주인선 무역 시대 동남아에 대거 진출한 것은 일본 내 정치·경제적 상황 때문이었다. 평화가 찾아오고 쇄국정책이 세워지면서 실직한 로닌 사무라이나 그리스도교 탄압 등으로 바다를 건너간 사람들이 증가한 결과다. 야마다 나가마사도 생존을 위해 고국을 떠났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았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활약을 시대 요구에 따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영화·소설 등의 단골 소재로 등장

나가마사는 일본보다는 태국에서도 유명한 일본인이다. 2010년 [야마다, 아유타야의 사무라이]라는 제목으로 태국에서 액션 사극으로 제작돼 인기를 얻었다. 일본과 태국의 오래된 역사부터 유대관계를 보여주는 영화였다. 요즘 들어 한국이 동남아에서 약진하고 있지만 일본은 오래전부터 태국이라는 동남아 최대 국가를 친일국가의 교두보로 삼아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다.

나가마사와 관련해 일본에서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는 때는 그의 사후 70년이 지난 18세기 초반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로 전해지다가 메이지 시대 교과서에 등장한다. “나가마사는 시암의 외구(外寇)를 방어하고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의 공적으로 재상에 승진하고 리골의 왕으로 봉해졌다”고 기술됐다. 다소 픽션이 가미되기도 하면서 다소 확실치 않은 태국 왕녀와의 결혼설도 나오기 시작한다.

교과서가 아닌 일반 서적은 나가마사에 대해 “모모타로의 진화다. 야마토 남자의 의기를 해외에 빛낸 자랑할 만한 인물”이라고 묘사한다. 모모타로는 ‘복숭아 왕자’로 불리는 일본의 전설에 나오는 귀신을 물리치는 대중적인 영웅이다.

이후 40여 년 동안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던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때였다. 일반 사회에서도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대동아공영권, 팔굉일우(八紘一宇, 세계의 많은 나라 사람을 일가 일족처럼 천황이 지배한다는 사상)의 실현을 목표로 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최근에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주인선 무역이 왕성해지자 해외에 이주하는 일본인도 증가해 남방 각지에 자치제를 행한 일본인촌이 만들어졌다. 도항한 일본인 중에서 야마다 나가마사처럼 아유타야 왕조의 왕실에 중용된 사람도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나가마사 이야기는 일본에서도 영화·소설 등의 단골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드라마적인 픽션이 섞이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1959년 다이에이(大映)의 영화 [왕자의 검]은 일본과 태국의 합작영화였다. 그러나 양국에서 공통으로 수용할 만한 나가마사상(像)을 만들지 못한 탓에 태국에서는 흥행에 실패한다.

1969년 역사소설가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야마다 나가마사]에서는 나가마사가 시암으로 향한 이유를 한정된 국토에 인구 문제가 심각했던 당시, 해외에서 활로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리고 그가 죽게 된 이유를 일본과 시암의 무역을 방해하려는 네덜란드의 음모로 진단했다.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한창 진출하던 1970년대 벌어진 반일운동을 염두에 두고, 그가 독살된 원인을 동남아시아인을 깔보는 태도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논문도 등장한다. 유명 작가인 엔도 슈사쿠는 [왕국의 길 - 야마다 나가마사]에서 그의 사인(死因)을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 약점 두 가지로 파악하기도 했다. 하나는 육지 생활에 순응하지 못하고 일본적인 생활을 했던 것, 또 다른 하나는 철저한 합리주의나 냉정함을 갖지 못하고 정에 얽매인 점이라고 보기도 했다.

스토리만 있으면 역사는 언제든지 편집이 가능하다. 콜롬비아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말을 음미해보자.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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