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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4)] ‘풍류’ 돋보이는 오운정과 침류각 

신선이 머물던 곳에선 흐르는 물을 베개 삼았다더라 

청와대 내 남아 있는 건물로 한국 전통미 고스란히 간직
언제 누구 지시로 지었는지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오운정과 함께 서울시 유형문화재(제103호)로 지정된 침류각. 계단 동쪽에는 신수(神獸), 서쪽에는 두멍(물을 많이 담아 두고 쓰는 큰 가마나 독)이 놓여 있다. / 사진:이성우
2019년 12월 23일 위례 신도시에서 서울지하철 8호선 복정역과 산성역 사이에 위례추가역(가칭) 신설을 위한 착공식이 거행됐다. 도면을 보면 이 역은 지하철 5호선 마천역에서 경전철 위례선으로 연결돼 위례신도시 중심부를 지난 후 8호선과 이어지도록 계획돼 있다.

남한산성 자락에 있는 위례신도시 지역은 원래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육군종합행정학교(남성대), 국군체육부대(상무부대), 학생중앙군사학교(문무대) 등 군부대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군부대가 떠나고 난 뒤로도 남성대골프장·성남골프장이 있었다.

이 가운데 미군이 운영하는 성남골프장은 아직도 있다. 이 지역은 통틀어서 ‘남성대(南城臺)’라는 별도의 명칭으로도 불리었는데, 1969년 11월 11일 육군종합행정학교 건물 준공식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한산성의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 명명한 데서 비롯됐다.

위례추가역은 당초 2017년 완공이 목표였으나 사업이 지연되면서 2019년 말이 돼서야 겨우 착공하게 됐다. 아직 역 이름은 확정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최초 역 이름은 우남역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신도시에 먼저 들어선 아파트들 가운데 ‘우남’이라는 명칭이 포함된 아파트들이 많이 있다. 위례신도시는 장지동(송파)·거여동(송파)·창곡동(성남)·복정동(성남)·학암동(하남) 등으로 구성돼 있다.

복정역과 산성역은 복정동과 산성동이 있어서, 마천역은 마천동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우남동이라는 동은 없는데 어떤 연유로 우남역이라는 명칭을 붙였을까.

성남의 복정역에서 수어장대까지의 도로는 우남로였다. 한남대교 남단에서 염곡동 지하차도까지를 강남대로라고 하고, 염곡동 지하차도에서 내곡동과 위례신도시 앞을 거쳐 산성역까지 이르는 11㎞ 구간을 헌릉로라고 한다. 헌릉로는 내곡동 근처에 조선의 세 번째 임금인 태종과 부인 원경왕후 민씨의 묘인 헌릉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도로 명칭에는 주변에 유명한 능이나 건물·지역 또는 사람의 이름을 붙인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서오릉로·화랑로·송파대로·청계천로·을지로·퇴계로·율곡로·고산자로 등등 언뜻 필자의 머릿속에도 이런 길들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역이라는 명칭도 새로 생기는 역사 인근에 과거 헌릉로의 성남시 일부 구간이었던 ‘우남로(雩南路)’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남’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하 ‘이 대통령)의 호다. 그렇다면 우남로는 이 대통령과 관계가 있다는 뜻인데 이 도로에는 왜 우남로라는 명칭이 붙었을까.

이 대통령은 남한산성을 자주 방문했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9월 6일에도 남한산성을 방문했던 이 대통령이 10월 16일 국무회의에서 남한산성 수축(修築)을 지시했다고 한다. 1953년 12월 22일 경기도지사가 국립박물관장 앞으로 보낸 국가기록원 자료를 보면 ‘대통령 특별 분부에 의해 남한산성 내에 소재한 각종 고적을 대폭적으로 보수공사를(…)’이라는 내용의 공문이 확인된다. 남한산성과 그 주변을 돌아본 이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음이 확실하다.

4·19 이후 사라진 ‘우남’의 흔적들


▎1997년 12월 31일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된 오운정. 오운정은 현재 청와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정자다. / 사진:이성우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새로 단장한 남한산성 공원’이라는 제목의 1954년 필름을 보면 약 7개월간의 보수공사를 마친 후 5월 16일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 공사 완료를 축하하는 행사를 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듬해인 1955년 6월 15일에는 이 대통령의 80회 생일을 기념해 이 대통령이 방문했던 남한산성 수어장대에 송수탑(頌壽塔)을 세웠다. 그리고 이날 복정동에서 송수탑이 있는 수어장대까지의 연결도로를 ‘우남로’로 명명하는 표지석도 세웠다.

‘송수’는 회갑(回甲: 61세)·고희(古稀: 70세)·희수(喜壽: 77세)·미수(米壽: 88세)·구순(九旬: 90세)·백수(白壽: 99세)처럼 80세의 다른 용어다. 그러니까 1875년생인 이 대통령의 80회 생일축하 기념탑인 셈이다. 그러나 이 송수탑은 1960년 4·19혁명 이후 철거돼 근처 땅속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남로 표지석 역시 1960년 4월 이후 철거됐다. 우남로라는 명칭은 대곡로·헌릉로·약진로를 거쳐 2002년 우남로의 이름을 되찾았으나 2009년 또다시 헌릉로가 됐다.

이런 역사를 가진 도로 인근에 신설되는 역이다 보니 ‘우남역’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08년 새 역을 계획하면서 서울도시철도공사는 ‘우남역’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 그러나 2016년 성남시는 민원 발생 우려라는 이유로 명칭 사용 반대 의견을 서울도시철도공사에 전달했다. 결국 성남시의 의견이 반영돼 ‘우남역’ 대신 ‘위례추가역’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승만 정부 당시 전국 곳곳에 남긴 이 대통령의 흔적은 송수탑이나 우남로 표지석의 경우처럼 4·19혁명의 제2공화국과 5·16군사쿠데타의 제3공화국을 거치면서 많이 사라졌거나 명칭이 바뀌었다.

조선시대 남산은 목멱산이라 불리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면서 한양의 수호신으로 경복궁 뒤쪽의 백악산을 진국백(鎭國伯)으로, 경복궁 앞쪽의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았다. 그리고 수호신사(守護神祠)로 백악산 꼭대기에는 백악신사(白岳神祠)를, 남산 꼭대기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는 사당을 짓고 왕실의 번영과 국가의 안녕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목멱신사는 1925년 일제가 남산 지역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그들의 신궁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헐면서 지금의 인왕산 국사당 자리로 옮겼다. 그 자리에는 1959년 이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정(雩南亭)이라는 정자가 건립됐으나 1960년 철거됐다. 지금의 남산 팔각정은 1968년 그 자리에 다시 건립된 것이다.

대일 항쟁기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안중근 의사기념관과 남산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그 자리에도 1956년 1월 이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졌으나 역시 1960년에 철거됐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인 시민회관의 명칭도 처음에는 ‘우남회관’이었다. 공사는 1956년 6월에 시작했으나 4·19혁명 이후 이승만 정부의 몰락 여파는 우남회관의 명칭 변경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울시의회에서는 시민회관으로,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는 세종회관으로, 충무공기념사업회에서는 충무회관으로, 사월혁명유족회에서는 사월혁명회관으로 바꿔야 한다는 등 각계의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서울시가 예산을 투입하고 서울시를 대표하는 건물이라는 서울시의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시민회관으로 바꾸는 것으로 결정됐다. 공사는 5·16군사쿠데타 이후까지도 계속됐다. 1961년 10월 31일 건물이 준공되고 1주일 후인 1961년 11월 7일 마침내 시민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함으로써 5년 4개월간의 험난했던 여정이 마무리됐다. 그러나 1972년 12월 2일 시민회관은 화재로 소실돼 역사의 그늘로 사라지고 말았다.

1944년 1월 공원으로 고시된 부산의 용두산 공원은 대일항쟁기 일제의 신사(神社)가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 패망 직후인 1945년 11월 17일 방화 혐의가 농후한 화재로 인해 소실·철거됐다고 한다. 6·25전쟁 당시 이곳에는 피난민들의 판자촌이 형성돼 있었는데 1951·1952·1954년 등 여러 번의 화재로 다 소실됐다. 그 후 이승만 정부에서 공원으로 재정비하면서 1955년 3월 우남 공원으로 이름을 바꿨으나 1961년부터 다시 용두산 공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오색구름 창연한 신선 세계 상징


▎우남로 표지석. 우남로 개통식은 1955년 6월 15일에 개최된 것으로 확인되지만 표지석의 위치는 확실치 않다. / 사진:국가기록원
이 밖에 동전과 우표가 발행되기도 하고, 여러 건물이나 조형물 등도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대부분 철거되거나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대통령의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배재대의 우남관, 배재고의 기숙사이자 학생식당인 우남학사, 우남동산 등 이 대통령의 호를 딴 건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대통령은 배재학당 1회 졸업생이기도 하다.

이 대통령은 과거시험을 위해 열세 살부터 열심히 붓글씨를 배웠다. 그러다 보니 전국적으로 많은 곳에 글씨가 남아 있다. 관동팔경 중 하나인 ‘청간정(淸澗亭)’ 현액(懸額)이나 영주 ‘부석사(浮石社)’의 현액 역시 이 대통령의 글씨다.

청와대 내에도 이 대통령의 흔적은 남아 있다. 바로 대통령 관저 근처에 있는 정자 오운정(五雲亭) 현액이다. 청와대에는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두 채의 건물과 보물한 점이 있다. 그 두 채의 건물 중 한 채인 오운정은 청와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정자로 지금의 대통령 관저 자리에 있던 것을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신축할 때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오운’이란 ‘오색(五色)의 구름으로 자연의 풍광이 신선 세계와 같다’고 해 별천지, 신선 세계 등을 상징한다. 이 오운정이란 이름은 원래 고종 5(1868)년과 고종 6년 사이에 경복궁 후원에 지어졌던 오운각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북궐후원도형’과 대일 항쟁기 여러 도면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 이 대통령 재임 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이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정사각형 건물인 오운정의 지붕은 네 모서리가 한 꼭짓점에 모이는 사모지붕 형태로 돼 있다. 주위에 난간을 두르고 사방으로 문을 냈다. 문짝을 들어올리면 자연스럽게 주변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으며 규모는 약 7.6㎡다. 바닥은 마룻바닥에 사방 창호지 문으로 돼 있다. 천장은 오색으로 단장돼 있고 외부에도 주칠(朱漆)과 화려한 단청을 입혔다.

‘五雲亭’은 이 대통령의 글씨로, ‘이승만인(李承晩印)’과 ‘우남(雩南)’ 등 인장 3과(顆: 인장·사리 등을 세는 단위)가 새겨 있다.

이 밖에도 청와대 지역에는 2~3개 정도의 정자가 있었다고 추정되지만 오운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졌다. 필자가 근무하던 시절에도 대통령 관저 서쪽 산 절벽의 바위 위에 사모정자가 있었다. 사방에 문만 없을 뿐, 정자 바닥이 나무마루라는 점과 천장에 전통식 단청을 입힌 점 등으로 봐 오운정과 거의 같은 구조였다. 그러나 이 정자는 보존 가치가 없다고 판단돼 1999년 철거했다고 한다.

다른 1개의 정자는 구(舊) 본관 동쪽 계곡쯤에 있었는데 창덕궁 청의정(淸猗亭)처럼 초가를 지붕에 얹은 육모정자였으며, 또 다른 1개는 춘추관 뒤 언덕쯤에 있었던 정자로 추정된다. 두 정자 모두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는 있었던 것으로 확인은 되지만 그 후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지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기 어려워


▎1956년 거행된 우남회관 착공식. / 사진:국가기록원
원래 위치는 현재보다 아래쪽에 있었으나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신축할 때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침류각(枕流閣)에서 ‘침류’란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이다. 지금의 건물에는 현액도 주련(柱聯: 시구를 널빤지에 새겨서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여 놓는 장식물)도 없다. 하지만 과거 사진을 보면 건물 전면 기둥에 풍류와 관련된 문답 형식의 주련 7개가 부착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외관은 팔작지붕(측면에서 봤을 때 양쪽 지붕면 사이에 삼각형의 합각[合閣]이 있는 형태)에 ‘ㄱ’자 모양의 곱패집(평면 모양이 ㄱ자임은 물론이고 지붕의 용마루도 ㄱ자 모양으로 꺾인 집)이다. 중앙에 방과 넓은 마루인 대청을 두고, 앞쪽으로 한 단 더 높게 만든 누마루를 설치해 한옥 건물의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침류각이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인터넷상에서는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것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적절하지 않은 듯하다. 침류각도 오운정과 마찬가지로 ‘북궐도형’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 1900년대 초에 세워진 건물은 분명히 아닌 것 같다.

이 시기 고종 황제는 이미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을 거쳐 경운궁(덕수궁)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말해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경복궁과 후원 구역은 임금 또는 황제라는 통치권 행사 권한을 가진 사람이 없었던 빈집이 돼버린 셈이다. 그런데 경운궁에 있는 황제가 때때로 가볼 것이라고 이곳에 침류각을 지으라 했다? 당시 정치·경제·사회적 여건에 전혀 맞지 않은 상상이다.

순종 황제 역시 1907년에 즉위했으나 고종과 떨어져 줄곧 창덕궁에서 지냈다. 그렇다면 결국 고종 또는 순종 황제가 1900년대 초 침류각을 지으라는 명은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궁궐로서 기능 상실하게 되는 경복궁


▎구 본관 동쪽 계곡에 있었던 육모정자. / 사진:국가기록원
건물은 1~2년만 관리하지 않으면 온통 잡초로 그득하게 되고 쉽게 망가진다. 궁궐도 예외는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생활하는 곳이 궁궐인데 임금이 다른 궁궐로 옮기게 되면 관계되는 모든 사람도 따라서 옮겨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남겨진 궁궐은 기본만 간신히 유지하기도 쉽지 않게 될 것이다.

1898년 9월 21일 [매일신문(每日新聞)]에는 ‘경복궁 궁장 아래 풀이 길게 자라 사람이 통로(通路)하기 어렵고 대궐문 밑에 똥이 쌓였다’는 기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 이미 경복궁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의 내용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과 후원 구역이 비워진 지 겨우 2년 후의 일을 설명하고 있다. 만약 경술국치 해인 1910년을 기준으로 계산한다면 14년 동안 비어 있는 셈이다.

물론 아관파천 이후에도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나름대로 관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주인 없이 10년 이상 사용하지 않은 단독주택이 어떤 상태일지 상상해 본다면 쉽게 이해가 간다.

뿐만 아니라 아래의 1908년 5월 13일 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1910년 4월 26일 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기사 내용에서도 경무대가 궁궐 후원 구역으로서 기능을 이미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1908년 5월 26일 자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운동회 비용으로 고종 태황제가 이백환을 하사한다’는 내용으로 미뤄 고종 황제 역시 어쩔 수 없이 경복궁과 후원 구역을 임금이 머물 궁궐로서는 더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궁내부 관리들의 운동회는 오는 일요일에 경복궁 대궐 안 경무대에서 할 터인데 기악도 있다더라. _[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 13일 자

전보(前報)와 같이 재작일(再昨日)에 궁내부관리가 경복궁 내 경무대에서 운동회를 거행하는데 해비(該費)를 태황제폐하께옵서 이백환(貳百圜)을 하사하옵시고 내장원에서 삼백환을 출급(出給)하야 한요리(韓料理)를 설(設)하였는데 궁내부 각 관리에 출렴(出斂)은 중지하였다더라. _[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 26일 자

한성내 각 은행과 관설(官設) 제 금융기관, 창고 등은 탁지부 재무국(度支部 財務局) 발기로 내이십사일(來二十四日)에 경복궁 내 경무대에서 대운동회를 개(開)한다더라. _[황성신문] 1910년 4월 20일 자


2019년 내용을 수정한 후 새로 제작해 설치해 놓은 침류각 안내 표지판에는 ‘1920년대의 한옥 건축 양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시기의 건물로 추정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 역시 납득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침류각이 표지판의 내용대로 1920년대의 양식으로 건립된 한옥일지라도 당시 일제는 이미 궁궐로서 기능을 상실한 경복궁과 후원 구역의 많은 건물을 훼철하고 있던 시기였다. 한쪽으로는 없애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새로 건립한다는 것이 썩 타당하다고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연혁 규명은 숙제로 남아


▎1955년 경무대를 방문한 시민들이 침류각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 사진:국가기록원
고종 13(1876)년 11월 경복궁에 큰 화재가 발생해 건물 830여 칸이 소실됐으나 국고 부족으로 6년이 지난 고종 19(1882)년까지도 재정비가 되지 못하고 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또한 1898년 1월 18일 [독립신문]에는 ‘경복궁에 있던 순검막 세 좌를 옮겨 경운궁 생양문·포덕문·평성문에 다 설치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1910년 3월 27일 자 [황성신문]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롯한 불용 건물 4000여 칸에 대한 매각 공고 기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 자의든 타의든 이미 궁궐 지역의 훼철은 일찍부터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순종은 마침내 1911년 5월 17일 경복궁을 조선총독부에 인계했고, 경복궁은 공식적으로 일제의 소유가 됐다. 그 이후부터 일제는 경복궁뿐만 아니라 후원 구역의 건물들도 입맛대로 처리가 가능하게 됐다.

경복궁(景福宮) 전체 면적 19만 8624평 5합 6작을 총독부(總督府)에 인도(引渡)하였다. _[순종실록부록] 4(1911)년 5월 17일

일제는 1915년 시정(施政) 5주년을 기념해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1913년부터 공진회를 준비하면서 이미 심하게 손상된 건물들과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건물들을 말끔히 훼철했다.

1921년 4월 20일 자 [매일신보] ‘槿域誌(66), (44) 名勝古蹟, (1) 京畿道, 景福宮’의 기사에는 융문당·융무당·경농재·오운각 등이 남아 있다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융문당과 융무당은 7년 후인 1928년 헐려서 일본계 용광사라는 절에 무상 대여됐으며, 경농재의 부속 건물 중 하나인 대유헌은 1939년 삼청동으로 이전했다.

1926년에 작성된 신무문외관사배치도(神武門外官舍配置圖)와 1929년에 작성된 광화문통관사배치도(光化門通官舍配置圖)를 보면 조선총독부 직원들이 사용할 관사를 계획 또는 신축하기 위해 경농재를 비롯한 경복궁 후원 구역의 여러 건물들을 이미 훼철할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경복궁 후원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인 [궁궐지]나 ‘북궐후원도형’은 물론 [고종실록] [순종실록]에도 나오지 않는 침류각이라는 건물은 과연 언제 건립된 것인가?

확실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니 단정할 수는 없다. ‘청와대 건설지’에 의하면 1989년 대통령 관저 신축공사를 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는 것, 1960·1985·1986년 세 차례에 걸쳐 개·보수를 했다는 사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국가기록원의 1955년 침류각 사진 자료 등을 참고한다면 침류각이 1955년 이전부터 있었던 건물이라는 것만은 확실한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국가기록원의 1955년 ‘경무대 소식(안익태씨 연주회, 경무대 일반인 공개)’이라는 뉴스 영상에서도 확인된다. 영상에는 침류각뿐만 아니라 오운정도 얼핏 보인다. 오운정도 1955년에 이미 있었다는 의미다. 어쩌면 침류각과 오운정이 같은 시기에 지어졌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왕조실록 등 2019년 기준으로 모두 16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독일·영국·폴란드에 이에 세계 4위이자 아시아에서는 단연 선두다.

기록 문화의 중요함을 알고 있는 우리인 만큼 향후 침류각 수리 공사 시 상량문이나 사라진 침류각 현액이 발견되기를 희망하며 확실한 근거 자료가 확인되기 전까지 침류각과 오운정의 건립 시기와 연혁 규명은 숙제로 남길 수밖에 없겠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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