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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4)] '농사직설' 편찬에 서린 군왕의 집념 

추수철도 몰랐던 ‘농본주의’ 조선의 농민들 

중국 농서와 영·호남에서 수집한 우수 농사기술 집대성
기하학 등 전문지식 갖춘 양전관 육성해 농지 대폭 확대


▎지난해 4월 전남 나주시의 한 육묘장에 깔린 모판에서 볏모가 자라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오늘날 한국의 곡물 자급률은 23%다(2019년). 국내총생산에서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2%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곡물의 자급능력은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농업을 홀대하면 곤란하다. 세계 주요 국가 중에는 곡물 자급률이 100%를 초과하는 나라가 적지 않다.

세종의 시대에는 사정이 어땠을까. 그때는 백성들의 주업이 농사였다. 누구나 시화연풍(時和年豊) 즉,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현실은 비참했다. 특히 즉위 초년에는 해마다 가뭄이 심했다. 이상 기온으로 여름에 갑자기 추위가 찾아오기도 했고, 초여름인데도 눈이 내렸다. 또, 농사기술 수준도 낮아 실농(失農)하는 농민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해마다 흉년이 들다시피 하였고, 그때마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한 해만 유이민 7000명이 전라도로

나의 독일 유학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유럽 농업사를 공부하며 두어 가지 깨달은 점이 있었다. 첫째, 19세기 이전에는 4~5년 간격으로 흉년이 늘 되풀이됐다. 둘째, 30~40년 간격으로 대기근이 찾아왔다는 점이다. 셋째, 기후가 농사에 적합한 적이 오히려 드물었다는 점이다. 내 지식으로 판단할 때 세종 때는 기후도 불안정하고 대기근이 겹치는 시기였던 것 같다. 만약 왕에게 위기를 돌파할 리더십이 없었더라면 신생 왕조는 좌초했을지 모른다.

예외라면 기해년, 곧 세종 원년(1419)이었다. 그때 대풍년이 들었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흉년의 참상은 그래서 더 끔찍했다. 특히 세종 4~5년경의 기근은 유난했다. 실록에는 당시의 참상을 기록한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세종 5년(1423) 2월 26일의 기사를 보면 가난한 백성들은 어린 자식과 연로한 부모를 버려두고 뿔뿔이 헤어졌다.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국토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빈발했다.

유이민의 대다수는 곡창인 전라도로 몰려들었다. 다행히 그곳은 흉년이 심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10일, 전라도 관찰사는 지난 10개월 동안 얼마나 많은 유이민이 밀려들었는지를 조정에 보고했다. 각지에서 총 5848명의 백성이 전라도로 몰려왔다고 했다. 서울(190명)·개성(621명)·충청(2394명)·강원(1043명)·경상(1455명)·황해(22명)·평안(10명)·함길도(107명) 등이었다. 정확한 통계를 작성하기 어려웠던 그때 사정을 고려하면, 유이민의 실제 숫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세종은 긴장했다. 해마다 유이민이 대량으로 발생하면 치안도 문제요, 결국은 각지의 농업기반도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왕은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식량자원과 행정력을 총동원해서 기근의 피해를 줄이려 했다. 그러나 흉년은 세종 5년에도 강원·경상·경기·평안도를 강타했다.

세종은 추수철이 되기 전부터 각도의 관찰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다음 해의 춘궁기를 넘길 궁리를 했다. 아무리 심한 흉년이 들어도 피해 규모는 지역에 따라 편차는 있었다. 왕은 관찰사들과 협력해 현지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했고, 행정력을 동원해 미리 준비했다. 그들은 침착하게 몇 달 뒤 다가올 춘궁기를 대비했다.

이윽고 춘궁기가 끝나갈 무렵인 세종 6년(1424) 4월 23일, 앞서 말한 4개 지방 관찰사로부터 보고서가 올라왔다(실록참조). 춘궁기에 그들이 구휼한 백성은 총 9265명이었다. 쌀과 콩 등 곡식이 857섬 정도 사용됐고, 된장용 콩도 115섬쯤 썼다. 그 밖에도 빈민들에게 꾸어준 곡식이 4만8915섬이었다. 요컨대 그해 춘궁기를 벗어나기 위해 국가는 5만 섬의 곡식을 사용했다.

해마다 기근의 규모는 달랐다. 농업 위기가 깊어지자 세종은 이 문제를 임시방편으로 적당히 넘기려 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풀어나가려 했다. 사료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세종의 리더십은 네 가지 경로를 통해 발현됐다.

첫째, 최고의 전문 지식을 활용한 계몽 활동이 효과를 거뒀다. 즉, 세종은 당대 최고의 농사법을 조사·정리해서 전국에 보급하여 성과를 냈다. 둘째, 농사에 필수적인 물 관리 업무를 지방관의 근무평가에 포함했다. 제도화를 통해 일선 지방관의 책임감을 일깨운 것이 성공의 또 다른 비결이었다. 셋째, 전문적인 양전관(농지측량관)을 양성했는데 이 또한 도움이 됐다. 전문가가 만든 정확한 토지대장이 국가에 대한 신뢰를 높였기 때문이다. 끝으로, 지방관들에 대한 관리 감독도 철저했다. 지방관의 나태와 횡포를 막지 못했더라면 제아무리 훌륭한 정책이라도 실패했을 것이 틀림없다.

흉년이 거듭된 이유를 찾다


▎지난해 9월 종로구 사직단에서 사직대제(大祭)를 봉행하고 있다. 사직대제는 땅과 곡식의 신에게 올리는 조선시대 국가제례다. / 사진:연합뉴스
특히 세종 10년(1428) 이후에는 농사방법의 개량에 역량을 집중했다. 요샛말로 농업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빈곤 문제를 극복한 것이다.

흉년이 거듭되는 가운데 세종은 뜻밖의 사실에 주목했다. 농민 중에는 농사의 기본지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수라는 점이었다. 또, 지방관 중에도 아무 생각 없이 백성을 함부로 징발해 농사를 훼방하는 이들도 있었다. 세종 12년(1430) 6월 2일, 세종은 호조에 명령해 모두가 농사원칙에 충실하기를 촉구했다. 왕의 말은 이러했다.

“지금 밀과 보리가 한창 여물어간다. 백성들이 농사방법을 잘 몰라서 곡식을 제때 거두지 못할까 봐 걱정이다. 호조는 각도의 지방관에게 공문을 보내서 그들이 마음을 쏟아 농사를 장려하게 하라. 곡식이 여물면 바로 베고 거두어서 때를 놓치지 말라.”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다. 농민이 농사철을 제대로 모르다니. 그러나 한 번도 농사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관행적으로 잘못을 되풀이하는 농부가 많았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중국에서 간행된 농업 서적을 바탕으로 정평이 있는 농사기술을 널리 보급하는, 요샛말로 농촌계몽사업을 벌였다. 세종 5년(1423) 6월 1일에도 호조를 통해 가뭄으로 벼농사가 실패한 지역에 대안을 제시하면서 “곧 메밀을 뿌리되, [농상집요]와 [사시찬요]에 나오는 경작법을 따르라”고 했다.

농촌 계몽사업이었던 <농사직설> 편찬


▎2006년 7월 28일 집중호우로 경기 안성시 가현동 일대가 침수됐다. 침수된 오른편 마을의 물을 빼기 위해 인근 제방 30m 구간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풀리지는 않았다. 중국의 농사법은 우리 현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풍토에 맞는 양질의 농업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발단을 제공한 것은 평안도와 함길도(함경도)의 연이은 흉년이었다. 세종 10년(1428) 윤4월 13일, 세종은 우선 경상도 감사에게 미션을 부여했다.

왕은 자신의 걱정을 털어놓았다. 함길도의 토질은 좋은 편이지만 백성들이 낡은 관습대로 농사를 짓다 보니 생산량이 최저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상도 관찰사의 협조가 필요했다. 정평이 있는 농부들에게 씨 뿌리고 밭 갈고 김매고 수확하는 방법을 물어서 종합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주문했다. 또, 각종 곡식의 재배에 알맞은 흙의 성질도 조사해서 알려주기 바란다고 했다. 아울러, 잡곡을 교대로 심을 때는 어떤 품종이 서로 어울리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말하자면 조선 최고 농부들의 지식을 토대로 함길도 백성을 계몽하겠다는 것이었다.

석 달 뒤 세종은 충청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도 같은 요청을 했다(실록, 세종 10년 7월 13일) 그해가 다 가기 전, 나라 안에서 가장 농사를 잘 짓는 농부들에게서 수집한 농업기술 정보가 세종 앞으로 모였다.

그 사이 왕의 계몽 욕구는 한층 더 커졌다. 그는 농업지식을 집대성해 한 권의 계몽 서적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 이듬해(세종 11년) 5월 16일, 왕은 정초·변효문 등에게 명해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하라고 했다. 남부지방에서 수집한 농사기술을 알기 쉽게 정리해 학식이 부족한 백성들도 따라 할 수 있게 만들 것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우리의 고유한 농사기술을 총정리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책이 완성되자 왕은 이 책을 서울의 고관(2품 이상)과 각 지방의 관청에 골고루 나눠줬다.

이 책은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도 영원한 베스트셀러였다. 한문으로 서술됐으나 쉬운 책이었다. 관리와 지주를 통해 그 내용이 농민들에게 널리 전파됐다. 함길도와 평안도는 물론 전국의 농사 수준이 향상되었음은 물론이다. 계몽은 세종의 리더십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제방 관리를 지방관 근무평정에 포함


▎미국 기상위성의 사진을 토대로 분석한 ‘가뭄지수’ 지도(왼쪽부터 지난해 4월 마지막 주, 5월 첫째 주와 둘째 주). 노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할수록 가뭄 정도가 심각하단 의미다. / 사진:연합뉴스
농사를 잘 지으려면 물 관리가 필수적이다. 요즘은 해마다 논농사가 풍작이다. 최상의 물 관리와 최적화된 농사법 덕분이다. 세종은 물 관리의 중요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물 관리를 하려면 한꺼번에 많은 인력이 동원돼야 한다. 공권력이 투입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방죽과 보(洑) 등 관개시설의 운용이었다,

요컨대 제언(堤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면 지방관이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부왕(父王) 태종 역시 제방의 중요성을 인식해 전문가인 우희열에게 맡겨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 마침 세종이 즉위한 해 10월 8일, 청주 목사로 있던 우희열이 제방 관리의 방법을 자세히 아뢨다.

그의 견해를 수용해 세종은 세 가지 조치를 강구했다. 전문가의 조언을 바탕으로 물 관리의 제도화를 결정한 것이었다.

첫째, 각도의 관찰사는 지방관의 근무성적을 평가할 때 제방 관리상태를 함께 고려한다. 둘째, 고을마다 제방 및 관개시설의 수를 기록해 호조와 대궐에 바친다. 끝으로, 해마다 조정에서 수확을 평가하는 관리, 즉 손실 경차관이 지방에 내려가는데, 그때도 방죽의 관리상태를 반드시 점검한다.

세종은 지방관들에게 물 관리 임무를 중요 업무로 취급하게 했다. 문종은 즉위 직후(1450) 부왕 세종이 제언 관리에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회고했다. “(전대에는) 제언을 보수하고 신축하는 방법은 [원육전(元六典)]과 [속육전(續六典)]에 자세히 수록했다. 또, 지방관의 성적을 평가할 때 천방(川防)과 제언 관리를 지방관의 7가지 임무에 포함했다. 관련법의 세부사항이 극히 자세하고 정밀했다.”(문종 즉위년 10월 3일) 여기서 보듯, 세종은 관련 법규의 제정과 제도화를 통해 지방관들이 물 관리에 매진하기를 요구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세종 12년(1430)에는 각지에 물레방아를 설치해 물 관리의 효율성을 더욱 높이려고 했다. 알다시피 중국과 일본에서는 물레방아를 이용해 농사에 큰 도움을 얻었다. 그런 사실을 안 세종은 물레방아의 설계도까지 모든 지방관에게 보급했다. 또, 지방관들의 근무평가에 물레방아의 운용까지 포함하라고 지시했다(세종 12년 9월 27일). 그런데 아쉽게도 물레방아는 효과가 별로 없었다. 조선의 하천은 흐름이 빠르고 수량도 날마다 큰 폭으로 바뀌어 소기의 성과를 보지 못했다.

물론 제방 관리도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해마다 토사가 쌓여 수십 년 뒤에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는 일도 있었다. 또는 갑자기 호우가 내려 둑이 터지기도 했다. 국내에서 관개시설이 가장 발달한 곳은 경상도였다. 낙동강의 완만한 흐름을 이용한 덕분이었다.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에서도 제방이 발달했다. 세종 10년경에는 김제의 벽골제를 비롯해 태인과 고부 사이에 있는 이평제, 부안의 동진포, 고부의 눌제가 효율적으로 관리돼 농사에 큰 도움을 줬다.

세종은 홍수가 날 조짐이 보이면 바로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관찰사는 지방관과 협의해 수재를 구제할 방법을 보고하라고 했다. 아울러 제방의 물길을 언제 터야 할지를 미리 결정하라고 당부했다(세종 12년 9월 27일).

이처럼 심혈을 기울인 덕분에 세종 때는 제방이 터져 큰 피해가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왕의 관심과 지도력 덕분에 논농사가 수월해졌다.

백성은 자신의 농경지에 관해 정확한 문서가 작성되기를 바랐다. 경작지의 면적과 등급이 사실과 일치해야 세제상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식적인 바람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문적인 능력으로 무장한 양전관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농민들의 의욕을 고취하고 조세의 공평한 부과를 위해서, 세종은 양전을 중요한 국사의 책무로 인식했다. 세종 10년(1428) 8월 18일, 왕은 의정부 찬성(종1품) 권진과 양전관의 문제점을 논의했다. 권진은 자신의 지방관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양전관의 전문화를 주장했다. 요즘 말로 측량기술과 기하학에 관한 지식이 양전관에게는 필수적이라는 것이었다. 세종은 호조판서 안순에게 사무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 양전관을 선발하라고 지시했다. 꼼꼼하기로 유명한 안순은 왕의 뜻에 부응해 약 40명의 양전관을 양성했다.

“과인이 양전관의 실력을 알아보겠다”


▎지난해 9월 대구 달서구에서 열린 ‘2019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전’ 개막식에서 대구 무형문화재 3호 ‘욱수농악’이 시연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어서 안순은 양전관의 업무에 관한 상세한 방침을 마련했다. 그 요점은 네 가지였다. 첫째, 이 기회에 묵은 밭도 조사해 별도의 장부(속문적)를 만든다. 둘째, 경작지가 많아서 양전관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우면 이웃 고을의 지방관과 수학(산학)에 밝은 중앙의 6품 이상 관원의 도움을 받는다. 셋째, 임시 파견직 관리(차사원)도 함께 파견해 효율성을 높인다. 넷째, 만약 양전에 문제가 새기면 법전에 따라 가차 없이 죄를 다스린다(세종 10년 8월 25일).

왕은 전문 관리의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일이 차질 없이 수행되도록 계획을 꼼꼼히 검토했다. 양전을 어느 지방부터 시작할 것인지도 검토할 사항이었다. 세종은 우선 자신의 최측근인 승정원 관원들과 이 문제를 토론했고, 이어서 공론화했다. 사간원을 비롯한 언관의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폭넓게 청취한 다음, 세종은 강원도와 전라도부터 시작하라고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다.

다른 한편으로, 왕은 양전관 세 명의 실력을 점검했다. 그들에게 경작지를 지정해주고 측정 시험을 치르게 했다. 측정 결과에 약간의 오차는 있었으나, 호조판서 안순은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세종은 안심했다(세종 10년 9월 24일).

양전의 결과는 놀라웠다. 고려 말 전국의 경작지는 약 50만 결이었다. 그런데 세종 때의 결과는 그보다 무려 세 배 이상 늘어난 171만 결이었다(세종실록 지리지). 이 숫자는 태종 4년(1404) 4월 25일에 의정부가 보고한 78만 결보다도 두 배가 넘었다. 세종과 호조의 노력으로 양전관의 전문적 역량도 향상됐고 사업에 필요한 행정지원도 획기적으로 개선됐기 때문이다.

일선에서 백성을 직접 상대하는 것은 지방관들이었다. 그들이 백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성심껏 편의를 돌봐줘야, 백성의 삶에 희망이 생길 터였다. 기근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방관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이 왕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왕은 지방관에 대한 아낌없는 격려와 철저한 통제를 어떻게 할지 오랫동안 숙고했다.

우선 그는 전국의 지방관들이 그동안 어떤 성과를 냈는지를 정밀하게 조사했다. 그리하여 이례적인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세종 8년 2월 12일). “지난 30년 동안 모든 지방관의 근무 성과를 조사해 내게 보고하라!” 그동안 누가 어디서 어떤 업적을 쌓았는지 일일이 알아내, 유능한 관리들로만 자신의 조정을 채우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세종은 지방관들을 설득하고 위로하기 위해 부임하는 모든 관리를 일일이 만났다. 당초에는 관찰사와 같은 고위 관리만 면접했으나 차츰 그 대상을 확대하였다. 세종 10년(1428)쯤이면 임지로 떠나는 모든 지방관을 만나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예컨대 그해 7월 15일에는 경상도 안음 현감 군자용, 전라도 여산 현감 박질 및 임실 현감 이존충 등의 인사를 받았다. 그 자리에서도 왕은 지방관들이 본연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가슴에 새기게 했다.

세종 21년, 함길도에서 온 풍년 소식

“올해 농사는 조금 잘 됐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가뭄으로 인해 실농한 백성들이 있다. 그들은 생계를 잇기 어려울 것이다. 그대들은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백성을 더욱 잘 보살피라.”

나아가 세종 13년(1431) 1월 6일 왕은 각도의 관찰사들에게 당부했다. 2월 초하루부터는 강도·살인·간통 등 풍속에 관계되는 일 등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잡다한 소송을 중지하라는 엄명이었다.

왕은 지방관과 향리의 비리와 부정에 대한 감찰도 엄격히 했다. ‘행대감찰’이라 해 사헌부 관리를 문제가 있어 보이는 지역에 파견해 현지 실정을 조사하게 하든가, ‘중사(中使)’라 불리는 환관을 보내 지방관의 잘잘못을 조사했다. 세종 6년(1424) 3월 11일에는 충청도 아산의호장 전근을 벌줬다. 백성의 경작지를 빼앗아 대농장을 설치한 죄였다. 고위 관리라도 탐관오리는 죄를 용서하지 않았다.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장윤화가 그랬다. 그는 일찍이 충청도 서천과 전라도 순천 및 남원에서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관청의 물건을 마음대로 훔쳤다.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는 백성들에게 터무니없이 많은 세금을 걷어 들여 일부는 권문세가에 뇌물로 바치고, 일부는 자신이 가졌다. 그러다가 자신의 범죄사실이 드러나자 이를 은폐하려고 전라감영의 창고에 불을 질렀다. 세종은 장윤화의 비리가 드러나자 임명장(고신)을 모두 빼앗고 충청도 부여로 귀양 보냈다(세종 4년 5월 6일).

왕은 임지로 떠나는 지방관을 일일이 불러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도 해주었으나, 그것만으로 백성을 보호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철저한 근무평가와 입체적인 감찰활동으로 관리들의 기강을 잡는 일도 중요했다. 세종은 강온 양면의 전략으로 지방관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재위 말년에도 큰 어려움이 있기는 했으나, 세종 16년부터 수년 동안 여러 지역에 풍년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농사일로 왕에게 늘 걱정을 끼치던 북도의 백성들도 드디어 풍작의 기쁨을 맛봤다. 세종 21년(1439)에는 함길도에서 풍년 소식이 들려왔다(그해 11월 12일자 실록). 그로부터 2년 뒤에도 함길도에 또다시 풍년이 찾아왔다. 바로 그해, 세종 23년(1441)에는 황해도에서도 풍년이 왔다(그해 9월 1일자 실록).

풍년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세종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세종 23년(1441) 윤11월 4일, 왕은 미래를 내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금년은 다소 풍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놀고 마시느라 곡식을 탕진할까 두렵다. 이제 새 법을 집행하여 군량미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 어떠할까.”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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