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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1) 서동과 선화공주] 공주를 사랑한 스파이… 행간으로 읽는 서동요 

그들은 인질혼에 발탁됐던 백제 총각과 신라 처녀였다 

알야산성 주고받은 대가로 양국 비밀 화친 추진
‘마’는 정보의 은어, ‘서동’은 공작에 쓰이는 암호명

한국사는 거창한 명분으로 포장돼 있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사소한 데서 말미암은 일이 많다. 남녀의 사랑이 그러하다. 사랑은 가장 사소한 개인사 같지만, 알고 보면 가장 사회적인 관심사다. 사랑은 그래서 힘이 세다. 나라의 흥망, 전쟁의 승패, 영웅의 영욕, 권력의 향방 등을 가르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제 남녀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국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 시대상을 개인의 삶에 녹이고, 개인사를 시대정신으로 확장할 것이다. [편집자 주]


▎백제 무왕과 왕비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간직한 미륵사지. 국경을 초월한 두 사람의 사랑이 주춧돌에 남아 오늘에 전한다.
"사랑은 가장 은밀한 남녀의 일 같지만, 알고 보면 가장 궁금한 세상의 일이지요.”

용화산 사자사(寺)의 지명법사가 화두를 던지자 부여장과 선화공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지만 의미심장한 눈빛 교환이 이뤄졌다. 머지않아 민심을 사로잡게 될 한 왕자의 사랑 이야기가 경건하고 엄숙한 절집에서 두런두런 무르익고 있었다.

서기 600년 백제 법왕(法王)이 쓰러져 병석에 누웠다. 나라에 비상이 걸렸다. 598년 12월 위덕왕이 재위 44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에는 왕위를 물려받은 동생 혜왕이 죽었다. 혜왕의 맏아들 법왕마저 잘못되면 2년도 안 돼 국왕 셋을 잃는 꼴이었다.

게다가 법왕에게는 적통(嫡統) 후계자도 없었다. 백제인들은 불안에 떨었고 신라와 고구려의 위협은 커졌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대성팔족(大姓八族)이 나섰다. 백제 8대 귀족 성씨들은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좌평회의를 틀어쥐고 새 임금을 추대해 왔다. 왕실의 위기는 그들로선 기회였다. 대성팔족은 저마다 주판알을 굴리며 혈통 좋은 왕족을 찾기 시작했다. 허수아비 왕을 보위에 앉히고 그 대가로 실권을 잡겠다는 장삿속이었다.

법왕에게는 사실 민간인 과부 소생 서자(庶子)가 있었다. 부여장! 어머니의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로 귀족 세력은 외면했지만, 엄연히 국왕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이 ‘반쪽 왕자’에게 주목한 것은 불제자(佛弟子)들이었다.

법왕은 백제 땅에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키려 한 임금이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명을 내려 일체의 살생을 금했다. 민가에서 기르던 매를 놓아줬으며 물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법왕 1년’). 승려들은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아비의 포부를 아들 부여장이 잇기를 바랐다.

물론 서자가 왕위를 쉽게 얻을 수는 없었다. 대성팔족을 필두로 귀족들이 거세게 반대할 것이다. 백제가 흔들리고 있는 시점이었다. 정통성 없는 자를 왕위에 앉혔다간 나라가 끝장난다고 일축할 게 틀림없다. 기댈 언덕은 백성뿐이었다. 어느 시대나 민심은 곧 천심이다. 어떻게든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다.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묘안을 내놨다. 그는 익산 출신 승려로 부여장 부부와의 인연이 깊었다. 법사는 백성들이 ‘이야기’를 좋아하니 입소문을 퍼뜨리자고 제안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다.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널리 퍼져나간다. 여기에다 부여장이 왕의 재목임을 넌지시 드러내면 민심을 얻을 수 있다.

이야기를 전하는 언로는 바로 불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백성과 직접 만나는 지식인 집단이다. 백제 사람들은 승려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설법뿐만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듣고자 했다. 부여장을 왕위에 앉히려면 백성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까? 지명법사는 국경을 뛰어넘은 소년의 사랑 이야기를 꺼냈다. 얄궂은 노래 한 자락과 함께….

사랑 이야기로 왕위 판도 바꾼 불제자들

부여장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도읍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고 아들을 낳았다. 어릴 적 이름은 ‘서동(薯童)’이었다. 늘 마를 캐서 팔아 생활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서동은 재주와 도량이 커서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웠다([삼국유사] ‘무왕’).

이야기는 ‘출생의 비밀’로 막을 올린다. 은유와 상징은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과부 엄마가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해 낳았다? 용은 임금을 뜻한다. 못의 용은 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이다. 임금이 아닌 왕족 남성이라는 말이다. 짙은 안개를 헤치고 수수께끼의 진실을 찾는 재미가 있다. 법왕은 위덕왕 재위기에 궁궐 근처에 사는 과부와 관계해 자식을 봤다. 당시 그는 임금의 조카로 유력한 왕족이었다.

민간인 과부 소생 혈육은 왕실에서 드러내기 껄끄러운 존재다. 부여장은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마를 캐서 파는 아이, 서동으로 자라난다. 용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불우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소년의 처지는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비천한 삶을 사는 백성들은 어느새 동병상련을 느끼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쯤에서 승려들은 애초 목적한 패를 빼 들었다. 서동의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단다. 이제 그가 임금 자격을 갖춘 능력자임을 밝히겠으니 잘 들으라는 것이다. 임금의 능력을 입증하는 소재로 가장 무난한 것은 전쟁이다. 신라나 고구려를 공략해 성을 빼앗는다면 더할 나위 없다. 청중도 당연히 무용담을 예상했다.

하지만 부여장에게는 가당치 않았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병법을 써서 군대를 지휘해야 하는데 왕자 교육을 받지 못한 그로서는 언감생심이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뻥치면’ 이야기의 개연성이 떨어진다. 과연 무엇으로 귀 기울이는 백성들을 만족하게 할 것인가? 승려들은 색다르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것은 뜻밖에도 무용담이 아닌 연애담이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가 어여쁘다는 말을 듣고, 서동은 머리를 깎고 서라벌로 들어갔다.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니 모두 그를 따라다녔다. 아이들을 꾄 서동은 동요를 지어 노래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 서방을 밤마다 안는다네.”

동요가 서라벌에 널리 퍼지자 궁궐이 들끓었다. 신하들은 선화공주의 행실을 따졌다. 결국 왕은 딸을 멀리 귀양 보냈다. 공주가 유배지로 가는 길에 서동이 나타났다. 넙죽 절을 하고 자신이 모시겠다는 것이었다. 선화공주는 의심스러웠지만 듬직해 보여 따르게 했다. 두 사람은 곧 가까워져 정을 통하게 됐다. 서동은 그제야 자기 정체를 밝혔다. 그가 동요의 주인공임을 알자 공주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함께 백제로 왔다([삼국유사] ‘무왕’).

부여장의 능력을 입증하는 근거는 바로 기지를 발휘해서 신라 공주를 얻었다는 것이다. 서동은 머리를 깎고 승려로 행세하며 적국 수도 서라벌에 잠입한다. 아이들을 꾀어 외설적인 노래를 퍼뜨린다. 이 가짜 염문에 선화공주는 궁에서 쫓겨난다. 서동은 유배 떠나는 공주에게 나타나 마음을 얻는다. 마침내 진정한 사랑을 나누고 백제로 데려온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서동은 교묘한 책략가이자 담대한 용자(勇者)로 청중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더구나 그가 얻은 여인이 무려 신라 공주다. 귀족들이야 신분을 따졌지만 백성들은 눈맞으면 사랑하고 결혼했다. 바로 그 평민의 사랑법으로 비천한 소년이 고귀한 공주를 아내로 삼은 것이다. 참으로 짜릿하고 환상적인 대리체험이 아닌가.

백성은 국경을 뛰어넘은 사랑 이야기에 열광했다. 승려들도 신바람이 났다. 설법하다가 즉석에서 ‘서동요 노래교실’을 열기도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 서방을 밤마다 안는다네.” 노래가 유행할수록 부여장의 인기는 치솟았다. 차기 임금감을 물색하던 귀족들은 당황했다. 난데없이 ‘반쪽 왕자’가 대세로 떠오른 것이다. 백제 땅에 ‘서동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백제 첩자’가 서라벌에 잠입한 까닭


▎SBS 드라마 [서동요]의 주 촬영지였던 부여 세트장.
부여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린 시절 그는 천덕꾸러기였다. 백제 왕족의 핏줄이지만 천한 과부 소생이었다. 왕실에서는 일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방치할 수도 없었다. 부여장은 도읍을 떠나 익산으로 가서 비밀 임무를 맡았다. 선화공주와 부부의 연을 맺은 곳이다. “내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땅에 금이 흙더미처럼 쌓여 있소.”([삼국유사] ‘백제 무왕’)\

궁에서 살던 선화가 생계를 걱정하자 부여장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째서 마를 캐던 곳에 금이 널려 있을까? 황금은 곧 재물이다. 그가 재물을 가지고 캔 것은 마가 아니었다. 사실 부여장은 정보를 캐는 첩자였다. ‘마’는 정보를 뜻하는 은어였고, ‘서동’은 공작에 쓰이는 암호명인 것이다. 첩자가 정보를 수집하려면 재물이 넉넉해야 하는 법이다.

위덕왕 때 백제는 유능한 첩자들을 길러냈다. 서기 475년 백제 개로왕이 오랜 도읍 한성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비참하게 죽은 까닭은 무엇인가? 고구려 승려이자 첩자인 도림이 개로왕의 눈과 귀를 가렸기 때문이다.

554년에는 백제 부흥에 앞장선 성왕이 관산성으로 향하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목이 달아났다. 신라 장군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의 첩자에게 이동 경로를 간파당한 대가였다. 백제가 첩보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계기들이다.

고구려·신라와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정보는 승패의 관건이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적국의 정보를 수집해 거기에 맞는 전략·전술을 짜야 한다. 이 때문에 수많은 첩자가 국경을 넘나들었다. 부여장 같은 왕족의 서자는 첩자로 쓰기에 좋은 자원이었다. 드러내기도 곤란하고, 방치할 수도 없는 존재에게 음지에서 나라에 공을 세울 기회를 준 것이다.

부여장은 신라 방면의 첩자로 뽑혔다. 본격적인 투입에 앞서 고도의 첩보전 훈련을 받았다. 적국의 정보를 캐서 보고하는 법은 기본이었다. 적지로 잠입하고자 변장술도 익혔다. 신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유언비어 유포도 빼놓을 수 없다. 죽기살기로 훈련을 마친 부여장은 유능한 첩자 서동으로 다시 태어났다.

신라는 576년 진지왕이 즉위하면서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그는 국력을 크게 키운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맏이인 동륜태자가 572년 사고로 죽는 바람에 대신 보위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죽은 동륜태자에게는 백정이라는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 정통성이 취약한 진지왕으로선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577년에는 백제가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략했다. 아버지 성왕의 죽음이 사무친 위덕왕은 오랜 세월 힘을 비축하다가 신라 왕권이 흔들리자 복수의 칼을 빼 들었다. 이찬 세종이 이끄는 신라군이 이를 격퇴하기는 했지만 진지왕은 근심에 빠졌다. 내부에 골칫거리를 둔 상태에서 외부의 도발이 계속되면 큰일이다. 내우외환은 초짜 왕에게 버거운 짐이었다.

고심 끝에 진지왕은 578년 백제에 알야산성을 넘겨주기로 했다(與百濟閼也山城,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지왕3년’). 알야산성은 백제 익산과 맞닿은 군사 요충지였다.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얼마 전 백제의 침략을 물리친 신라가 아닌가. 하지만 입지가 불안한 진지왕으로선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었다. 내우외환에서 벗어나려고 적국에 뇌물을 준 셈이다.

알야산성을 대가로 신라와 백제 사이에는 비밀 화친이 추진됐다. 화친을 맺을 때는 왕실 간의 인질혼(人質婚)이 따라붙는다. 화친이 깨지지 않도록 결혼을 빙자해 왕족을 볼모로 잡는 것이다. 인질로는 임금의 먼 친척이나 서자가 주로 선택됐다. 이 비밀 화친과 인질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부여장이 익산으로 파견됐다.

미륵의 이름으로 보낸 선화의 ‘효도선물’

백제 위덕왕이 신랑감으로 내놓은 인물은 바로 부여장이었다. 자기 동생의 손자인데 민간인 과부 소생이므로 무늬만 왕족이었다. 반면 신라 진지왕은 죽은 동륜태자의 손녀이자 백정의 딸인 선화를 신부로 골랐다. 백정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선화를 인질로 보내 백제와 화친하는 한편 잠재적인 정적을 억누른 것이다.

최종 합의를 위해 부여장이 직접 서라벌에 잠입했다. 유능한 첩자답게 승려로 변장해 국경을 넘었다. 불제자는 국적과 상관없이 어느 나라든 출입을 허용하는 게 삼국의 관행이다. 첩자로 암약하는 승려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게다가 부여장은 백제 말과 비슷한 신라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신라 국경을 넘나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서라벌에 도착한 그는 서동이 돼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 서방을 밤마다 안는다네.” 노래에 제 암호명을 넣음으로써 선화의 짝이자 화친의 사자로 서동이 서라벌에 와 있음을 알린 것이다. 여기엔 결혼 상대가 정해졌으니 신라왕은 약속을 이행하라는 숨은 뜻이 담겨 있었다.

합의한 대로 진지왕은 선화를 궁에서 내보냈다. 부여장은 인질 신부를 맞이하고 알야산성을 접수했다. 이로써 화친은 이뤄졌다. 큰 공을 세운 그는 익산과 알야산성을 근거지 삼아 정치적 야심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결실을 볼 순간이 다가왔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백제 왕위가 일개 서자의 품에 굴러떨어질 줄이야.

선화는 지난날이 꿈만 같았다. 어린 나이에 궁을 나와 백제로 왔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다. 남편과 함께 익산에 정착했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섭기만 했다. 부모님과 언니들 생각에 날마다 눈물을 삼켰다. 신앙의 힘이 아니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나고 자란 신라 왕실은 석가모니 일족을 자처했다. 그 신앙심으로 용화산을 올랐다. 터지려는 숨을 참고 참다가 비탈길을 올라채며 숨 몰아쉬니 사자사였다. 끝까지 차오른 울음을 참고 참아 지명법사에게 토해냈다. 선화가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은 그이 덕분이었다.

지명법사는 미륵신앙을 설파하는 승려였다. 미륵신앙은 석가모니의 제자인 미륵보살이 도솔천 사자좌에서 환생하고 먼 훗날 용화수 아래로 내려와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한다는 믿음이다. 법사는 익산의 용화산 사자사를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삼고 포교에 나섰다. 이 새로운 설법에 감복한 선화는 기꺼이 그의 후원자가 됐다.

겨우 안정을 찾은 선화에게 또다시 풍운이 몰려온 것은 579년의 일이었다. 신라 동향을 파악하던 부여장이 어느 날 놀라운 소식을 들려줬다. 신라 왕실에 정변이 일어날 거란다. 그 주역은 선화의 아버지 백정이었다.

알야산성을 내주고 백제와 화친을 맺은 진지왕은 곧 궁지에 몰렸다. 579년 2월 백제는 우현성과 송술성을 쌓아 마지현성·내리서성 등 신라 서쪽 변경을 틀어막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지왕 4년’). 한강 일대로 연결되는 통로를 위협함으로써 신라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화친이 사실상 깨지고 국익이 심각하게 훼손되자 진지왕의 위신은 곤두박질쳤다.

579년 7월 진지왕은 나라 사람들에 의해 임금 자리에서 쫓겨났다. 정치가 어지럽고 사생활이 음란하다는 죄목이었다([삼국유사] ‘도화녀와 비형랑’). 이 정변의 중심에 백정이 있었다. 어쩌면 진지왕이 즉위할 때부터 예고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정은 진흥왕의 맏손자이자, 동륜태자의 맏아들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정통성 있는 왕의 재목이 아닌가.

장인이 임금 자리에 오르겠다는데 사위가 가만있을 수는 없다. 선화가 아버지에게 재물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하자 부여장은 주저 없이 승낙했다. 거사를 치르려면 자금이 든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 재물을 백정에게 신속히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선화는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찾아갔다. 편지를 써서 황금과 같이 절 앞에 갖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력을 발휘해 하룻밤 만에 신라 서라벌로 보냈다([삼국유사] ‘무왕’). 지명법사의 신통력이란 다름 아닌 미륵결사였다. 미륵 신앙을 전파하려고 조직한 미륵결사가 이미 백제를 넘어 신라 땅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사위의 ‘효도선물’은 그 조직망을 타고 장인의 손에 제때 들어갔다. 결국 거사는 성공했고 백정이 왕위(진평왕)에 올랐다.

현재는 과거를 재구성하는 힘을 갖는다. 선화가 처음부터 공주는 아니었다. 인질혼으로 백제 땅에 왔지만 거꾸로 남편과 지명법사를 움직여 아버지를 돕고 공주가 된 것이다. 부여장도 이제 장인은 신라왕이고, 아내가 공주인 유력자다. 그 달라진 위상이 서동과 선화공주의 환상적인 연애담을 빚어낸 것이다. 진실은 모호한 은유와 상징의 행간에 숨어 있다.

‘즉위담’이 된 ‘연애담’ 그러나…


▎지난해 보수·정비 준공식을 갖고 일반에 공개된 익산 미륵사지석탑.
서기 600년 5월 백제 법왕이 세상을 떠났다. 차기 국왕은 국경을 뛰어넘은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 신라왕이 늘 편지로 안부를 묻는다는 사위, 부여장이었다. 서동은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삼국유사] ‘무왕’). 연애담은 그렇게 즉위담이 됐다.

즉위식에 맞춰 익산을 떠나 도읍으로 가는 길. 부여장은 야망에 불타올랐다. 그의 야심은 백제 임금 자리에 그치지 않았다. 신라왕 백정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다.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르면 사위인 부여장에게도 국왕 자격이 생긴다. 백제에 이어 신라 왕좌를 차지하리라. 듣지 않으면 군마로 쓸어버리리라. 천하에 ‘무왕(武王)’의 깃발을 펄럭이리라. 부여장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지명법사는 백제를 미륵의 성지로 만들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새 임금은 이미 익산에 미륵사를 짓겠다고 약속한 터. 3불당 3탑의 전무후무한 대역사가 곧 시작될 것이다. 그곳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셔오고 미륵불의 원대한 희망을 심을 것이다. 나의 임금은 전륜성왕이 되시리라. 용화수 아래서 미륵을 영접하고 정의롭게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 중생을 전쟁과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전륜성왕이 되시리라.

선화공주는 안색이 어두웠다. 사비성에 모인 대성팔족은 신라 출신 왕비를 반대한다고 들었다. 벌써 사택씨의 여식을 궁궐에 들이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하기는 백제의 숙원이 성왕의 복수인데, 그를 죽음으로 내몬 진흥왕의 증손녀를 호락호락 왕비로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선화는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든 어린 아들, 의자(義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 아이의 운명은 어찌 될까? 그래, 어미가 너를 꼭 지켜 내리라.

세 사람이 저마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부소산에 우뚝 솟은 백제 왕궁이 드디어 위용을 드러냈다. 백마강 너머로 뉘엿뉘엿 기우는 해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황혼 녘, 새 임금의 행차는 굽이굽이 구릉길을 돌아 사비성에 이르렀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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