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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14)] '먼나라 이웃나라' 만화가 이원복 선생 

“좋아하는 일 해야 오래가고 깊이 들어가야 틈새 보입니다” 

학습·교양 만화 선구자 “다닌 나라 원체 많아 하늘에, 호텔에 엄청 돈 뿌렸죠” 만화로 세계 역사 지도 만드는 게 꿈… “펜 들 힘 있는 한 청춘으로 남고 싶어”

▎서울 역삼동 작업실에 앉은 이원복 선생. 자신이 들고 있는 작업용 펜이 1000원짜리라고 밝히면서 그는 “만화는 밑천이 가장 적게 드는 콘텐트”라며 웃었다.
만화가 이원복(74) 선생은 만화에 ‘학습’과 ‘교양’을 입힌 선구자다. 1980년대 초반, 그는 [소년한국일보]에 ‘먼나라 이웃나라’를 연재했다. 유럽 국가들의 문화와 역사를 다룬 이 만화는 해외여행 자유화의 붐을 타고 1987년 단행본으로 묶여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유럽 6개국(네덜란드·프랑스·독일·영국·스위스·이탈리아)으로 시작한 작업은 일본(2권)·한국·미국(3권)·중국(2권)을 거쳐 스페인 편까지 15권으로 완성됐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보는 만화책으로 성가를 높인 이 시리즈는 그동안 수차례 업그레이드됐다. [새 먼나라 이웃나라](1998),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2003), [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2012)가 나왔고, 2018년 [업그레이드 먼나라 이웃나라]로 1차 마침표를 찍었다. 시즌 2도 나왔다. 발칸반도·동남아·중동 편에 이어 캐나다·호주·뉴질랜드를 한 권에 넣었다. ‘오스만제국과 터키’ 편까지 20권을 채웠음에도 그의 펜 끝은 쉬지 않는다.

이원복 선생은 일러스트레이터로도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 덕성여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를 거쳐 총장(2015~18)도 역임했다. 지금은 모든 직책을 떠나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서울지하철 2호선 선릉역 근처에 있는 작업실에서 이원복 선생을 만났다. 그는 여전히 활기차고 호기심 많은 ‘만년 소년’이었다. “아무리 좋은 직업도 정년이 있고 임기가 있는데 난 그런 게 없잖아요. 우리 정년은 건강이죠. 아직 팔팔합니다”라며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인터뷰 내내 그의 얼굴에는 미소와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얼마 전에 러시아 편을 끝냈다면서요.

“작년 말에 탈고했고 5월에 책이 나옵니다. 책 만든다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8일간 러시아 대륙횡단을 했어요. 두 번 할 건 아니더라고요(웃음). 네 명이 갔는데 나이를 합치니 300살이 넘어요. 좁은 침대칸에 네 명이 타면 18시간 이상 밖으로 나오지를 못하고, 차창 밖 풍경은 끝도 없는 자작나무 숲이죠. 우리는 중간중간 10개 도시에 내려 구경도 하고 했지요. 지금은 인도 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국내 만화가 최초 인세 받아… 처음엔 정가의 5%


▎이원복 선생 자신을 모티브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내레이터.
지금까지 [먼나라 이웃나라]를 몇 부나 찍었고 인세 수입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얘기 나올 줄 알았어요(웃음). [먼나라 이웃나라]는 1987년 초판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계속 찍고 있습니다. 제가 쓴 다른 책들과 합쳐서 1400만~1700만 부 정도 팔렸다고 합니다. 초판 때 권당 2000원이었는데 인세가 정가의 5%였어요. 국내 만화로서는 최초의 인세였죠. 당시 만화는 매절(賣切)이라고 해서 원고 저작권을 일시불로 파는 거였거든요. 1만 부가 팔리든 100만 부가 팔리든 작가와는 상관없었죠. 인세가 권당 100원이었으니 1만 권을 팔아야 100만원을 받았다는 얘기죠. 당시 독일 한번 갔다 오는 비행기 값이 딱 100만원이었거든요. 초판 나오고 5년 정도 지난 뒤에 인세가 10%로 올랐고 책값도 올랐으니 그때부터는 좋아졌죠. 그런데 다닌 나라가 원체 많으니 하늘에, 호텔에 엄청나게 돈을 많이 뿌렸죠.”

‘그림떼’라는 곳과 공동창작을 한다고 하던데요. 작업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그분들은 컬러링 작업을 해 줍니다. 제가 원본을 아날로그로 작업한 뒤 그걸 스캔을 떠서 컴퓨터에 올리면 거기에 컬러를 입히는 거죠. 자료 수집-콘티 작성-밑그림 작업 등을 모두 제가 여기서 다 하니까 가내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죠. 글과 그림 작업을 따로 하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제가 원하는 스토리가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림을 맡긴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나올 수가 없죠. 그래서 둘 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식객]을 쓴 허영만 화백처럼 극화 그리는 분들은 스토리 라이터가 따로 있어요. 그건 엔터테인먼트고 저는 교양 쪽이니 혹시라도 오류가 있으면 안 되죠.”

복식(服飾)이나 무기 등을 그리는 데 고증이 필요하지 않나요?

“저는 거의 옛날 문헌 기록과 도판을 참고합니다. 전쟁 장면에 나오는 무기나 총 같은 게 당시와 다르다는 얘기도 할 수 있는데,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니니까 정밀하게 고증하기는 어렵죠. 총을 쐈다는 거지 어떤 총으로 쐈다는 건 도판을 참고할 뿐이지요. 그런 걸로 시비 거는 사람은 아직은 없었어요. 저는 신문 기사를 쓰는 게 아니라 창작하는 거니까요.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신경 안 쓰고 SNS도 안 합니다. 댓글 읽으면 기분이 나빠지는데 시간들여서 기분 나빠지는 일을 할 필요가 없죠. 그리고 댓글에 흔들리면 작품 못 합니다.”

집필을 위한 취재 여행은 혼자 가십니까?

“가끔 팀으로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혼자 갑니다. 그래야 맘껏 돌아다닐 수 있지요. 주로 렌터카를 운전해서 다니고, 사진도 직접 찍습니다. 전에는 삼성 카메라로 찍었는데 요즘은 휴대폰을 씁니다. 사진 전문가가 아니니까 많이 찍어서 쓸만한 걸 건져내죠. 5개국어 정도를 할 수 있는데 언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콩글리시도 좋고 보디 랭귀지도 좋고, 의사만 통하면 되는 거죠.”

다니신 곳 중 가장 인상적인 나라는 어디였나요?

“주제에 따라 다른데요. 문화적으로 가장 다양한 곳은 스페인이죠. 아랍과 유럽 문명, 가톨릭과 이슬람 문화가 다 있으니까요. 도시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단연 이스탄불(터키)입니다. 로마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데 사실 서양의 중심이죠. 이스탄불은 동서양의 중심입니다. 아시아와 유럽이 맞닿는 곳이니까요. 정말 아름다운 나라로 이번에 발견한 곳이 러시아입니다. 러시아정교회 성당은 가톨릭 성당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실내에 어떤 조각도 없는 대신 벽과 천장 등 모든 곳에 그림이 있어요. 유럽에서 가장 통일이 늦게 돼 도시마다 개성이 뚜렷한 독일도 좋습니다.”

“가서 살고 싶다, 이런 곳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한국이 젤 좋죠. 하하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한때는 캐나다가 정말 좋다고 생각했는데 골프를 안 하니 별로 할 일도 없고, 술도 혼자 먹을 수 없어서 답답했다고 한다. “한국이 역시 다양하고 다이내믹한 나라죠.”

[먼나라 이웃나라]는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창작 뮤지컬로도 무대에 올랐고, 코커서스 등 이색 풍물 기행에 이원복 교수가 강연자로 참여하기도 한다. [먼나라 이웃나라] 덕분에 만화로 한자를 익히는 [마법 천자문], 국내외 위인과 유명인사의 삶을 조명한 [Who?] 등 학습만화·교양만화 시장도 점점 커지고 있다.

만화는 밑천 가장 적게 드는 1차 콘텐트


▎독일에서 유학한 이원복 선생은 독일 통일에 대한 강의도 자주 한다.
1차 콘텐트로서 만화의 위력을 실감하시겠네요.

“만화는 미디어·패션·교육·공연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될 수 있는 콘텐트의 원형입니다.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 Use, 한 가지 재료로 여러 가지 결과물을 만드는 것)라고 하지요. 만화는 원가가 제일 적게 드는 작업입니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되니까요. 만화가 히트를 하면 팬시 용품, TV 드라마, 영화, 이모티콘 등으로 영역이 확장됩니다. [마법천자문] 같은 건 만화로 보지 말고 비주얼(시각물)로 봐야 합니다. 리딩(reading·읽기)에서 보는 걸로, 비주얼에서 비디오·유튜브 등 영상으로 가는 거죠.”

저도 초등학생 때 만화방 갔다는 이유로 담임선생님한테 손바닥 맞은 적이 있거든요.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때는 유일한 엔터테인먼트가 만화방 가는 거였잖아요. 비디오가 있었나요 게임이 있었나요. 그런데 보수적인 부모님들은 만화를 저질문화로 생각했던 거지요. 80년대까지만 해도 어린이날이 되면 만화방에서 ‘불량만화’를 수거해 불태우고 그랬어요. 그런 시대에 [먼나라 이웃나라]가 나왔죠. 지금은 휴대폰으로 보는 웹툰이 세계 최고 수준이죠. 만화의 성격도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어요. 만화가 출판물일 때는 독자와 작가 사이에 편집자가 있어서 편집자의 필터링을 통과한 것만 독자를 만날 수 있었어요. 편집자 눈에 들게 잘 그려야 했고 절제와 형식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다 하니까 편집자가 없고, 그림의 퀄리티보다 얼마나 감각적·감성적·직선적이냐가 중요해졌어요. 요즘은 발가락으로 그렸는지 손가락으로 그렸는지 엉망인 그림이 있는데 오히려 그런 게 인기가 있어요. 참신한 대사나 아이디어ㆍ메시지 등으로 승부 하는 거죠.”

“책은 세상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면 죽은 거다”고 하셨는데요.

“그래서 개정판을 계속 내는 겁니다.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 편은 1982년부터 썼으니 통독(1990년) 전이잖아요. 통일이 됐는데 동독·서독 하면 말이 안 되죠. 사회란 건 살아있는 생물이나 마찬가지니까 그 변화를 팔로우업해 줘야지요. 그렇다고 모든 변화를 다 담을 순 없고 주요 사건만 잡아주면 됩니다. 예를 들어 독일 통일, EU(유럽연합) 출범, 브렉시트(EU 탈퇴) 같은 거죠.”

‘꼰대’가 되지 않으려 끊임없이 노력


▎그동안 나온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를 펼쳐 보이는 이원복 선생.
만화 중간중간에 양념 역할을 하는 유머 코드를 넣은 게 돋보이는데요.

“예를 들어 2008년 펴낸 [신의 나라 인간 나라]에는 당시 개그 프로그램 유행어인 ‘이 천박한 것들, 나가 있어’ 같은 표현을 자주 썼는데요. 요즘은 잘 안 씁니다. 젊은 층에 와 닿지도 않고 괜히 꼰대 소리만 듣거든요(웃음).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TV를 잘 안 보고, 개그 프로그램은 더 안 보게 됩니다. 전에는 사회 현상을 잘 집어내 풍자로 엮은 코너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잘 안 보이거든요. 대신 신문을 꼼꼼히 보면서 젊은 층의 용어를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라떼는 말이야’ 라며 꼰대 직장상사를 비꼬는 말 같은 거죠. 저도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대전에서 태어난 이원복 선생은 다섯 살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 꽤 부유했던 집안은 전쟁으로 쑥밭이 됐다. 아버지는 7남매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나가 노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한 이원복은 집안에서 책을 보고 낙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공부 머리는 좋아 수재들만 간다는 경기중-고를 나왔다. 재미로 시작한 만화는 고교 시절 짭짤한 아르바이트꺼리가 됐고,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다니면서는 거의 직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먼저 유학간 형들의 도움으로 독일 뮌스터대 디자인학부로 유학을 떠난 이원복은 [새소년]에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을 연재하면서 받은 원고료로 원없이 놀러다니며 견문을 넓혔다고 한다.

만화가로서 데뷔를 언제로 잡아야 하나요?

“경기중 2학년 때 학교에서 발간하는 [순간경기(旬間京畿)]라는 신문에 네 컷짜리 만화를 그린 게 데뷔 무대라 할 수 있겠네요. 경기고 시절 [소년한국일보] 조풍연 주간께서 ‘너 아르바이트 하나 해라’ 하시면서 미국 만화를 습자지 대고 베끼는 일을 주셨어요. 어린이 신문에는 만화가 필요한데 만화가를 고용할 돈은 없으니까 고등학생 시켜서 외국 만화를 베껴 그리게 한 거죠. 그것도 좋은 연습이 됐습니다. 특히 신문의 생리를 알고 마감을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느끼게 됐죠.”

덕성여대에서 가르치실 때도 그걸 강조하셨다면서요.

“디자인학과 학생들한테 ‘콘텐트 좋은 디자이너보다 고객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디자이너가 더 낫다. 마감을 잘 지켜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신문사에서 볼 때도 제일 좋은 작가가 마감 잘 지키는 작가 아닙니까. 저는 30~40년간 연재하면서 한 번도 펑크낸 적 없고, 심지어 독일에서 연재할 때는 우체국 가서 원고를 항공편으로 부쳤는데도 한 번도 문제 생긴 적이 없어요. 독일에서 공부할 때 헤르만 교수라는 분이 디자인 수업 첫 시간에 ‘디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는 질문을 했어요. 학생들이 ‘디자인은 예술입니다’ 어쩌고 대답을 하니까 그분이 ‘아니다. 디자인은 서비스다. 고객과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진정한 디자인이다’고 하셨어요. 그 말씀을 지금도 가슴에 새기고 삽니다.”

만화가로서 성공적인 외길을 걸어오셨는데요. 자신에게 ‘만화가 DNA’ 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화가 DNA? 그건 나중에 생긴 것 같아요. 저는 당구도 골프도 칠 줄 모르고, 주색잡기 중에서 주(酒)만 할 줄 알아요. 바람 핀 적도, 스캔들도 없고, 바둑·고스톱도 안 해요. 오로지 할 줄 아는 게 만화밖에 없는데 이걸 벗어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죽어라 했죠. 그랬더니 만화가 DNA가 생긴 게 아닌가 싶어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취미도 갖는데 저는 만화 그리는 게 취미고 직업이고 수입원입니다. 지금도 이 일 하면서 즐거워요. 그 즐거움은 나만 알지 말로 표현할 수 없죠. 그리고 이 작업을 하게 되면 외부 사람들하고 어울리거나 휩쓸릴 일이 없어서 좋아요.”

술 먹는 것 빼고 할 줄 아는 게 없어


▎와인 전문가인 이원복 선생이 자신이 고른 와인 컬렉션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도 대학 총장까지 하셨는데요

“그 자리는 저와는 정말 안 맞는 자리였는데 떠밀려서 입후보하게 됐어요. 선거운동 기간에 남미 2주 여행을 갔고, 선거인단에게 전화 한 통 안 했는데 덜컥 당선된 겁니다. 덕성여대를 남녀 공학으로 바꾸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는데 막상 총장 돼서 보니 이건 아니구나 싶었어요. 남녀 공학으로 바꾸면 남자 화장실부터 증설하고, 실력 있는 남학생들을 장학금 주고 데려와야 하는데 그 돈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물론 공대도 만들고 학교를 위해 봉사할 기회가 있었다는 건 좋았지만 가장 아쉬운 건 작품 활동을 못 했다는 거죠. 총장실에서 만화 그릴 순 없잖아요(웃음).”

70년대 초반에 [야망의 그라운드] [불타는 그라운드] 같은 스포츠 만화도 그리셨네요.

“축구 월드컵 출전이 꿈이었던 시절이었죠. 마지막 장면이 ‘우리도 언젠가는 월드컵 무대를 밟을 거야’ 였어요. 하하하. 월드컵 4강까지 갔으니 꿈이 이뤄진 거죠. 해외에서 한국을 최고로 인정하는 것 중에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게 기업과 스포츠입니다. 70년대 우리는 곰인형이나 가발 만들어 파는 수준이었지요. 1989년 서울대 상대 송병락 교수와 함께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쓰려고 러시아에 가서 기절초풍했습니다. 모스크바 공항에 내렸는데 모든 카트에 삼성 마크가 있는 겁니다. 당시 민주화 바람을 타고 젊고 배웠다는 사람들이 대기업을 착취의 온상으로 인식했잖아요. 우리가 내린 결론은 ‘대기업을 욕할 게 아니다. 대기업과 재벌은 다르다. 대기업 10개만 있으면 대한민국은 먹고 산다’였어요.”

스포츠는 어떻습니까?

“86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2등을 했습니다. 동네잔치지만 우리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거죠. 88 서울올림픽은 홈에서 4등, 2002 한·일월드컵도 4등을 했습니다. 결정적인 게 2012 런던 올림픽 5등입니다. 미국-중국-영국-러시아 다음이 한국입니다. 홈팀 영국을 빼고는 전부 1억 이상 인구에 국토는 우리의 몇십 배잖아요. 사람들이 무관심한 것처럼 하지만 다 지켜본단 말이에요. ‘Who is Korean? (한국인은 누구냐)’ ‘What is Korea?(한국이 뭐냐)’고 했죠. 그때 싸이가 뜬 겁니다. ‘한국은 더 이상 후진국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싸이를 즐겨도 거리낄 게 없다’는 일종의 면허증을 받게 된 겁니다. 싸이가 뜬 이후 방탄소년단도 마음껏 즐기게 된 거지요. 방탄이 그냥 나온 게 아니고, 뒤에는 한국의 스포츠와 기업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원형이 된 작품이 있다면서요.

“[새소년]에 연재한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입니다. 외국 나가기 힘든 시절에 제가 독일 유학을 가 있으니까 [새소년] 편집자가 해외여행 경험을 써 보라고 해서 시작했죠. 두 아이의 해외 견문록 형식인데 모든 게 경이롭고 신기했던 시절이라 감탄이 너무 많고 오류도 곳곳에서 발견됐어요. 그래서 더 이상 찍지 않기로 하고 판형을 없앴죠. 그걸 업그레이드한 게 [먼나라 이웃나라]입니다. 책 제목은 시인이신 [소년한국일보] 김수남 사장님이 지으셨어요. 소주 한잔 하면서 유럽의 역사 이야기를 만화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니까 즉석에서 ‘어, 그럼 먼나라 이웃나라네’ 하시며 제목을 던져주신 겁니다.”

“역사를 아는 건 세계를 보는 축을 갖는 거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아는 만큼 보이는 겁니다. 왜 히틀러가 나왔고 푸틴이 나왔는지는 역사를 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러시아에는 푸틴, 중국에는 시진핑, 터키에는 에르도안이 있습니다. 이 세 나라는 한 번도 개인주의를 경험해 보지 못한 공통점이 있어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러시아 학자들은 러시아의 정체성을 애국심·차리즘(차르주의)·러시아정교로 봅니다. 애국심은 대지와 자연에 대한 순종, 차리즘은 권력에 대한 순종, 정교는 신에 대한 순종이죠. 모든 게 순종으로 귀착하다 보니 절대군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중국도 천자(天子, 황제를 일컫는 말) 이후 장개석-마오쩌둥-덩샤오핑-시진핑으로 절대권력이 이어지고 있잖아요.”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이라는 만화책도 쓰실 만큼 와인 애호가라고 들었습니다.

“와인을 알아야 하는 건 잘난 척하려는 게 아니라 가성비 때문이지요. 1만5000원에서 3만원 사이에 좋은 와인이 정말 많습니다. 같은 1만5000원짜리라도 알고 사면 딱 잡히는 게 있어요. 결론은 내 입에 맞는 와인이 최고라는 겁니다. 이성(異性)도 마찬가지고, 취미나 운동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운동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워낙 게으른 데다 몸 움직이는 걸 싫어해요. 그래도 지금까지 잔병치레하거나 병원 신세 진 적 없어요. 제 건강 철학은 ‘몸은 세상에서 가장 정밀한 기계다. 아껴 쓰면 오래 쓴다’ 입니다. 그렇지만 운동 체질인 사람은 운동을 해야지요.”

잘하는 일은 반드시 나를 추월하는 사람 나와


▎자신의 작업실에서 후배가 그린 그림을 배경으로 지구본을 들고 포즈를 취한 이원복 선생.
이원복 선생은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많다고 했다. “우리 세대는 초근목피로 연명했지만 모든 분야가 블루오션이었어요. 지금 세대는 풍요롭긴 한데 모든 게 레드오션이거든요. 신분상승의 사다리도 걷어차여 버리고…”라며 젊은 세대에 미안함을 표현한 그는 ‘잘하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고 했다. “잘하는 일은 반드시 나를 추월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좋아하는 일은 누가 나보다 잘해도 상관이 없어요. 좋아하는 일을 해야 오래갑니다. 우리 교육의 문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게 만든다는 겁니다. 처음에 고생하고 실패하는 것 같지만 그런다고 굶어죽지는 않아요. 좋아하는 일 하다 보면 깊이 들어가고, 그러면 틈새를 보게 됩니다.”

만화로 세계 역사 지도의 퍼즐을 완성하는 꿈을 갖고 있다는 이원복 선생은 “인도와 아프리카 편까지 나오려면 3~4년 정도 걸리겠죠. 그리고 나면 또 하고 싶은 일이 생기겠죠. 펜을 들 힘이 남아있는 한 저는 영원한 청춘으로 남고 싶어요”라며 ‘소년 미소’를 지었다.


▎1. 1970년대 초반 어린이 잡지 [새소년]에 연재한 축구 만화 [불타는 그라운드]. / 2. [먼나라 이웃나라] 세 번째 개정판인 [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2 편.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 사진 신인섭 선임기자 shinis@joongang.co.kr

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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