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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3부)] 근·현대 서구화와 기독교 수용의 주역들(1) 이승훈 

주자 대신 천주(天主) 양반들의 세상에 반기 

실학자 이익·정약용과 ‘한 집안’… 소외된 지식인들 서양 종교에 심취
타락한 기득권 타파 위한 저항, 중인·여성 중심 천주교 확산 불지펴


▎1780년대 천주교를 이끌었던 신자들이 지금의 서울 명동인 명례방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 1984년 화가 김태가 그린 그림으로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소장하고 있다. /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이승훈은 한국 역사상 천주교 세례를 최초로 받은 기독교인이다. 그는 평창 이씨로서 영조 32년(1756) 한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동욱, 어머니는 여흥 이씨다. 12세 되던 영조 43년(1767) 어머니 여흥 이씨가 세상을 떠났고, 20세 되던 영조 51년(1775)에는 정약용의 누이인 나주 정씨와 혼인했다.

25세 되던 정조 4년(1780)에는 진사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처남 정약용과 절친하게 지냈다. 이런 배경에서 이승훈의 삶은 외가 쪽 사람들은 물론 처가 쪽 사람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됐다.

이승훈의 어머니 여흥 이씨는 이용휴의 딸이다. 즉 이용휴는 이승훈에게 외할아버지가 된다. 이용휴에게는 딸 한 명과 아들 한 명이 있었는데, 그 딸이 이승훈의 어머니이고 아들은 이가환이다. 다시 말해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 된다. 또한 외할아버지 이용휴는 조선 후기 남인 실학자로 유명한 성호 이익의 조카가 되므로, 성호 이익은 이승훈의 외가 쪽 어른이 된다.

이런 인연으로 이승훈은 어린 시절 외가 어른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됐다. 그 결과 이승훈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은 성호 이익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됐다.

잘 알려진 대로 성호 이익은 18세기 남인 실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자학은 물론 양명학·서학(西學) 등에 두루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나아가 성호 이익은 당시 알려진 서양 종교 즉 천주교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발천주실의(跋天主實義)’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발천주실의’란 예수회 선교사로 명나라 말에 천주교를 전도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고 쓴 독후감이다. [천주실의]는 제목 그대로 천주(天主) 즉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해설서로서 마테오리치가 중국인들에게 천주교를 전도할 목적으로 저술됐다. 성호 이익은 그 [천주실의]를 읽고 독후감을 쓸 정도로 천주교에 관심이 컸다.

명나라에 천주교를 전도한 마테오리치 등에 대해 성호 이익은 ‘발천주실의’에서 “그가 중국에 이르렀는데 그 동료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푸른색이며 네모진 두건에 푸른 옷을 입고 동자(童子)의 몸을 지키어 혼인한 적이 없었다. 중국 조정이 벼슬을 줘도 배례(拜禮)를 하지 않았으며 오직 날마다 대관의 봉록을 받고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 책을 읽었다”고 소개했다.

‘동자의 몸을 지켜 혼인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마테오리치 등이 천주교 선교사였기에 독신을 지켰다는 뜻이고, ‘벼슬을 줘도 배례(拜禮)하지 않았다’는 것은 십계명의 우상 금지를 지키기 위해 명 황제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보통의 조선 유학자였다면 이렇게 행동하는 서양 사람들을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오랑캐’라고 비난했을 테지만 성호 이익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성호 이익은 서양 사람인 마테오리치 등이 서양풍습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했던 듯하다.

신서파와 공서파로 갈린 성호의 제자들

이런 면에서 성호 이익은 서양문화에 대해 나름대로 존중하는 자세를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예컨대 성호 이익은 ‘발천주실의’에서 “그들이 저술한 책이 수십 종이나 됐는데, 천문과 지리를 관찰하고 역법(曆法)을 계산해 내는 오묘함은 중국에서 일찍이 없던 것이다. 마테오리치가 머나먼 지역의 외신(外臣)으로서 먼 바다를 건너와 중국의 학사·대부들과 교유했는데, 학사와 대부들이 모두 옷깃을 여미고 높여 받들며 선생이라 칭하고 감히 맞서지 않았으니, 그 또한 호걸 같은 인물”이라고 해 서양의 천문·지리·역법이 중국보다 우수함을 인정했고 마테오리치 또한 중국 학자 못잖은 호걸이라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성호 이익은 서양의 종교 즉 천주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발천주실의]에서 “그 학문은 오로지 천주를 지존(至尊)으로 삼는데, 천주란 곧 유가의 상제(上帝)와 같지만 공경히 섬기고 두려워하며 믿는 것으로 말하자면 불가(佛家)의 석가(釋迦)와 같다. 천당과 지옥으로 권선징악을 삼고 널리 인도해 구제하는 것으로 야소(耶蘇-예수)라 하니, 야소는 서방 나라의 세상을 구원하는 자의 칭호다. (…) 그러나 마테오리치가 불교의 가르침을 극도로 배척하면서 자신들도 결국은 똑같이 황당무계한 데로 귀결된다는 것을 도리어 깨닫지 못했다”고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성호 이익은 서양의 천주교를 불교처럼 황당무계한 종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천주교의 천당 지옥 가르침 때문이었다. 성호 이익은 불교의 천당 지옥 이야기를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했기에 비슷한 가르침을 펴는 천주교 역시 황당무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성호 이익의 이 같은 비판은 그의 제자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호기심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스승 성호 이익의 독후감에 언급된 ‘천주교의 황당무계함’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했고, 그래서 [천주실의]를 비롯한 천주교 책들을 열성적으로 읽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 책을 읽은 제자 중에서 뜻하지 않게도 천주교를 믿는 제자들이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제자들을 ‘신서파(信西派)’라고 했는데, ‘서양 종교를 믿는 파’라는 뜻이었다. 이병휴·권철신·권일신·이가환·이벽·정약전·정약용 등이 대표적인 신서파였다.

반면 천주교 책을 읽은 성호 이익의 제자들 중에는 스승처럼 천주교를 황당무계한 종교라고 결론지은 제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공서파(攻西派)’라고 불렸는데, ‘서양 종교를 공격하는 파’라는 뜻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안정복·신후담·이기경·홍낙안 등이었다. 이렇게 천주교를 놓고 성호 이익 제자들은 신서파와 공서파로 갈렸는데 신서파를 성호 좌파(左派), 공서파를 성호 우파(右派)로 부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이승훈은 성호 이익 문하에서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신서파로 불리던 외삼촌 이가환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이승훈은 천주교에 큰 호기심과 호감을 가지게 됐다. 이런 상황은 이승훈이 20세 되던 영조 51년(1775) 나주 정씨와 혼인하면서 더욱 강화됐다. 처남인 정약전·정약종·정약용은 물론 정약용의 큰형수 동생인 이벽, 그리고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황사영 등이 모두 신서파였기 때문이다.

이승훈이 24세이던 정조 3년(1779) 겨울, 신서파 인물들인 권철신·이벽·정약전·정약용 등 10여 명이 경기도 광주 우산리에 소재한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에 모여 열흘 정도 집단 하숙하며 주자학과 천주교 등을 집중적으로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천주교는 신봉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천주교의 천주와 유학의 상제가 서로 같은 존재로서 유학의 근본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천주교는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 같은 입장에서 신서파 인물들은 공자 시대의 ‘상제·천’ 등의 개념과 ‘5경(五經)’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됐다. 이는 주자가 주자학의 이론으로서 ‘이기(理氣)’와 ‘4서3경’을 강조한 것에 대한 저항이며 도전이었다.

중국 사신 맡은 부친 따라 북경 견학


▎마테오 리치가 1605년에 세운 베이징의 천주교회 남당. 우리나라 첫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이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를 집단 토론하던 신서파 인물들이 천주를 매개로 주자학에 도전하게 됐다는 것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남인의 신서파 인물들이 조선 건국 이후 주류 사상으로 군림하던 주자학의 대항 사상으로 천주교를 선택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남인의 신서파 인물들이 주자학에 도전한 배경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치적 측면에서 본다면, 인조반정 이후 정치권력은 노론에게 집중됐고, 그 결과 남인은 배제됐다. 이에 대한 불만에서 남인들 특히 신서파 인물들은 노론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주자학에 반감을 갖게 됐다.

경제적·사회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농업경제가 파탄 난 상황에서 국가와 민생을 살리기 위해 대대적인 경제적·사회적 개혁이 필요했지만 노론은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해 개혁에 미온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서파 인물들은 참혹한 정치·경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주자학을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대안으로 천주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고려 말 불교가 타락한 상황에서 대안 사상으로 등장했던 주자학이 이제는 거꾸로 신서파 인물들에게 타락한 사상으로 비판당하면서 천주교의 도전을 받게 된 셈이었다.

주어사와 천진암의 집단 토론에는 이승훈도 참석했다. 신서파 인물들과의 집중 토론을 통해 24세의 이승훈은 천주교에 대한 식견과 신심을 크게 고양할 수 있었다. 다음 해 이승훈은 진사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고, 그로부터 3년 후에 처남 정약용이 성균관에 입학하자 절친 관계가 됐다. 이승훈보다 6세 아래의 정약용은 정조 7년(1783) 4월 진사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렇게 외가와 처가의 신서파 인물들과 어울리던 이승훈의 삶은 정조 7년(1783) 겨울 큰 전기를 맞이하게 됐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동왕 7(1783)년 6월 24일 이동욱이 동지사(冬至使) 서장관으로 임명됐다. 이동욱은 이승훈의 부친이었고, 동지사는 청나라 황제에게 동짓날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는 정기 사신이었다.

당시 중국으로 파견되는 정기 사신의 정사·부사·서장관은 ‘자제군관(子弟軍官)’이라고 하는 수행원을 직접 선발해 대동할 수 있었다. ‘자제군관은’ 말 그대로 아들, 동생 등 친족으로 충원되는 수행원이었다. 서장관 이동욱 역시 관행에 따라 아들 이승훈을 ‘자제군관’으로 선발했다. 이에 따라 성균관에서 정약용과 함께 공부하고 있던 28세의 이승훈은 서장관인 부친을 수행해 청나라 북경에 가게 됐다.

이승훈이 북경에 가게 되자 신서파 인물들은 숙원을 해결하고자 했다. 정조 3년(1779)의 주어사와 천진암 집중토론 이후 신서파 인물들은 천주교에 대한 식견이 깊어지면서 보다 구체적인 천주교 자료를 갈구하게 됐다. 기회를 엿보던 그들은 북경으로 가는 이승훈을 통해 천주교 자료를 사고자 했다.

황사영의 [백서(帛書)]에 의하면 이승훈이 북경에 가게 되자 정약용 큰형수의 동생인 이벽이 비밀리에 찾아와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천주당에는 서양 선비로서 전교하는 이가 있으니, 자네가 찾아보고 신경(信經)한 부를 청하는 동시에 영세 받기를 청하면 서양 선비가 반드시 크게 사랑할 것일세. 신기한 물건과 노리개를 많이 얻어 가지고 오고 반드시 그냥 돌아오지 말게”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승훈보다 2세 위인 이벽은 당시 과거도 포기한 채 천주교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다.

유교 지식인들 스스로 천주 신앙에 접근


▎1. 한국 역사상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최초로 받은 이승훈. / 2. 조선에서 순교한 중국인 천주교 신부 주문모.
이승훈이 참여한 동지사는 정조 7(1783)년 10월 24일 한양에서 출발해 12월 3일 만주의 심양에 도착했고 12월 21일에는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에 도착한 동지사가 40일 정도 머물며 외교 활동을 벌이는 동안 이승훈은 천주교 자료를 구입하는 한편 북당(北堂)의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다.

당시 북경에는 4개의 성당이 있었는데 방향에 따라 동당·서당·남당·북당으로 불렸다. 이 중에서 조선 사람들이 자주 찾던 성당은 북당이었다. 그곳에 수학과 기하학에 정통한 프랑스 출신의 신부들이 많았고, 조선 유학자들은 천문과 역법을 계산하는 데 필요한 수학과 기하학에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이승훈의 외삼촌 이가환 역시 수학과 기하학에 관심이 많았고, 이승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당을 찾은 이승훈은 그곳의 그라몽 신부와 필담을 통해 수학·기하학·천주교 교리 등을 학습하다가 그라몽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았다. 그때가 정조 8년(1784) 1월 말쯤이었는데, 세례명은 베드로였고, 이승훈의 나이 29세였다. 그라몽 신부가 이승훈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준 이유는 베드로처럼 용맹하게 조선에서 천주교를 전도하라는 뜻에서였을 듯하다.

외교 임무를 마친 동지사 일행은 2월쯤 북경을 떠났다. 그라몽 신부는 북경을 떠나는 이승훈에게 [천주실의] [성세추요(盛世芻蕘)] [기하원본] [수리정온(數理精蘊)] 등의 서적과 십자가·마리아상·성화(聖畵) 등의 성물(聖物)을 선물했다. 3월 말 한양에 도착한 이승훈은 북경에서 가져온 천주교 교리서·십자가·성화 등을 이벽에게 전해줬다. 이승훈에게 서적과 물품을 부탁한 사람이 이벽이었기 때문이다.

이벽은 서울의 외딴 곳에 집을 세내고 이승훈에게서 받은 천주교 교리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교리와 복음 내용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깊이 인식하게 된 이벽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는 한편 전도 활동에도 착수했다. 이벽이 받은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이벽은 최창현·최인길·김범우 등 중인 출신들에게 천주교를 전도했다. 경기도 양평에 거주하던 권철신·권일신 형제에게도 전도했다. 권철신 역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명은 동양의 사도였던 프란치스코 사베리였다.

이승훈은 정약전·정약용 형제에게도 세례를 줬다.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권철신은 제자 이존창·윤유일·유항검 등에게 전도했다. 이에 따라 천주교는 남인 계열의 신서파 인물들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져 1784년 연말에는 약 1000명에 이르렀다. 가히 폭발적인 성장이라 할 수 있었다.

이승훈을 통해 세례를 받고 정식 교인이 된 신자가 늘어나자 그들은 정기적으로 신앙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이승훈 등은 한양 명례동에 거주하던 김범우의 집에서 은밀하게 집회를 가졌다. 이로써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최초로 탄생했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때가 정조 8년(1784) 가을 무렵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한국 천주교회는 몇 가지 점에서 다른 나라의 천주교 교회 창설과는 다른 특수성을 보여줬다. 첫째는 선교사의 입국 활동 없이 유교 지식인들이 스스로 탐구해 천주 신앙에 접근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학문적 검토를 통해 보유론적(補儒論的) 천주 신앙의 깨우침을 얻어 교회를 창설했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신앙과 더불어 신문화수용 의식을 지닌 양반지식인들의 자율적인 구도활동으로 신앙공동체를 이뤘다는 점이다. 넷째는 공인된 성직자도 없고 미사 제례도 없이 신도들이 자체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이다. 한양의 명례동에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생긴 후 지방에서도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다.

하지만 천주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더 이상 비밀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 이승훈이 30세 되던 정조 9년(1785) 봄에 명례동 김범우의 집에서 은밀히 거행 중이던 신앙집회가 적발됐다.

이기경의 [벽위편(闢衛編)]에 의하면 이 집회는 우연히 적발됐다. 당시 한양을 순찰하던 형조의 금리(禁吏)는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이 한 집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혹시 노름하는가 의심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두건을 썼으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해괴했다. 게다가 그들 앞에는 알 수 없는 화상(畫像)과 십자가·서책 등이 있었다.

조선인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1981년 조선 천주교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 김 추기경은 2009년 선종(善終)했다.
금리의 눈에 해괴하게 보인 이런 광경은 바로 십자가와 예수 화상 앞에서 신자들이 성경을 펴놓고 예배하는 모습이었다. 당시 집회를 이끌던 이벽은 방의 아랫목에 앉아 있었고, 그 앞의 좌우로 이승훈·정약용·정약전·권일신·권상문 등이 앉아 있었다.

이런 모습에서 당시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이끌던 최고 지도자는 이승훈이 아니라 이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승훈은 공식적으로 서양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의례를 담당했던 것이다.

이 모임을 해괴하다고 생각한 금리는 방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체포했고 십자가·화상·서책 등도 압수해 형조에 바쳤다. 당시 형조판서는 김화진이었다. 그는 집회에 참여한 양반들은 훈방 조치하고, 중인 출신인 김범우만 곤장을 쳐 단양으로 유배 보냈다. 김범우는 유배지에서 장독(杖毒)으로 고생하다가 1년 만에 세상을 떠나 조선인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이 사건은 남인 사이에 일대 파란을 불러왔다. 남인들은 천주교에 빠진 신서파 때문에 남인 전체가 국기문란의 죄를 뒤집어쓸까 우려했다. 특히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과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 그리고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이 매우 놀랐다. 자신들의 아들들이 바로 천주교 핵심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부만은 아들 이벽을 집 안에 가두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했다. 혹시라도 그냥 두면 가문이 몰살되는 화를 입을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집안에 갇히게 되자 이벽은 천주교 신앙과 유교 효사상 사이의 갈등으로 고뇌하다가 1785년 병들어 죽고 말았다.

크게 놀랍고 무섭기는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이나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도 마찬가지였다. 만에 하나 이승훈이나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면 가문 전체가 몰살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과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은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아들들을 엄하게 꾸짖고 천주교를 버리라 명령했다.

당시 유교 효사상이 지배하던 사회 분위기에서 이승훈과 정약용은 아버지들의 명령대로 천주교를 버리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믿음이 가지 않은 이동욱과 정재원은 아들들을 데리고 친지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 아들들이 천주교를 버렸다고 맹세하게 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자신들의 아들들이 확실히 천주교를 버렸다는 사실을 친지들이 믿게 하는 동시에, 아들들이 진정으로 천주교를 버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이승훈과 정약용은 일가친척들의 핍박에 겉으로는 천주교 신앙을 버리겠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2년 후의 이른바 ‘반회사건(泮會事件)’에서 분명해졌다.

이승훈이 33세 되는 정조 12년(1788) 봄에 과거시험이 예정돼 있었다. 당연히 성균관 학생인 이승훈과 정약용 역시 그 과거시험에 응시하고자 했다. 과거 공부를 위해 이승훈과 정약용은 정조 11년(1787) 겨울부터 성균관 주변의 마을에 하숙을 정하고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다.

충효와 천주교 사이에서 갈등 깊어져

조선시대 성균관은 반궁(泮宮)이라 불리기도 했기에 성균관 주변 마을은 반촌(泮村)으로 불렸다. 당시 이승훈과 정약용은 이기경과 친한 사이였다. 정조 11년 겨울 어느 날 이기경은 반촌의 이승훈과 정약용을 찾아갔는데, 그들은 과거 공부는 하지 않고 천주교 공부만 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이기경은 홍낙안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이승훈과 정약용이 여전히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됐는데, 이를 ‘반회사건’이라고 했다.

홍낙안은 상소를 올려 이 사실을 폭로하려다가 과거시험이 다가와 포기하고 과거시험 답안에서 이 문제를 폭로하기로 했다. 홍낙안은 정조 12년(1788) 1월의 과거시험 답안지에 천주교의 문제점과 더불어 이승훈과 정약용이 여전히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과거시험 답안은 왕이 채점하기에 정조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크나큰 정치적 문제로 비화했지만 당시 좌의정 채제공의 무마로 별문제 없이 해결됐다. 이승훈과 정약용은 천주교 신앙을 되찾고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계속했다.

이승훈과 정약용이 진정으로 천주교 신앙을 접은 것은 정조 15(1791)년의 이른바 진산사건 이후였다. 진산사건이란 전라도 진산의 천주교 신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신주를 불태운 사건이었다. 진산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승훈은 36세였다. 그때 이승훈과 정약용은 진정으로 결단해야 했다. 충효를 지키는 유학자로 살지 아니면 충효를 포기하고 천주교 신자로 살지 결단해야 했다.

고뇌하던 이승훈과 정약용은 충효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천주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충효를 포기하기에는 이승훈과 정약용의 유교 가치관이 너무 뿌리 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승훈과 정약용이 빠졌다고 해서 조선의 천주교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미 조선의 천주교는 양반들의 손에서 벗어나 중인·평민·여성들이 주류를 형성한 상황이었다.

이승훈과 정약용 등 양반들이 빠진 자리는 정조 18년(1794)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면서 주문모 신부, 중인 그리고 여성들이 대신하게 됐다. 여성 신도인 강완숙의 집에 은신한 주문모 신부는 순조 1(1801)년 신유사옥 때 체포돼 순교하기까지 6년간 조선 천주교회를 지도하면서 교세를 확장시켰다.

그 결과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던 당시 4000여 명이던 교세가 6년 후에는 1만 명 가까운 숫자로 늘어났다. 그런 면에서 이승훈과 정약용 등 남인 신서파는 중인과 여성들이 주도하는 조선 천주교 성립의 디딤돌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005호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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