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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7)] 무력국가에서 재정국가로, 중원의 문민화 

힘보다 꾀의 시대, 당·송(唐·宋), 돈으로 평화를 사다 

측천무후, 공신 대신 관료 통해 제국 관리… 송 태조, 개국 초부터 무력 억제
시장경제 바탕 화려한 문화 꽃피었지만, 오랑캐와의 관계는 300년간 굴욕


▎송 태조 조광윤 좌상(宋太祖坐像). / 사진: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관
7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당송(唐宋)시대는 중국문명이 가장 크고 화려한 꽃을 피운 시대로 널리 인식된다. 이 시대의 뛰어난 문학작품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흠모 때문에 문학사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관점이지만, 다른 방면에서도 이 시대 중국의 찬란한 모습이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당나라 초기의 거대한 제국 건설과 송나라 시대의 화려한 문화와 기술 발전이 찬탄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앞쪽과 뒤쪽 사이에는 중국인의 사는 방식에도 국가의 운영 방식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대다수 인민이 폐쇄적인 부병제(府兵制) 아래 생활한 반면 송나라 후기의 사람들은 고도로 발달한 시장경제 속에서 살았다. 국가의 역할에도 그에 상응한 차이가 있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는 1940년대부터 이 국가 성격의 변화를 무력(武力)국가에서 재정(財政)국가로의 전환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시대의 윤곽을 그려놓은 미야자키의 관점은 후진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재정국가라 함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뜻이 있다. 하나는 국가 내 경제활동이 커져서 그로부터의 조세 수입이 국가체제 운영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국가 경영에서 명쾌한 폭력보다 치밀한 관리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후자의 의미를 먼저 한 번 살펴본다.

사회 운영에는 ‘힘’이 필요한 측면과 ‘꾀’가 필요한 측면이 있다. 중국에서는 이 두 측면을 ‘무(武)’와 ‘문(文)’으로 인식해 왔다. 존 킹 페어뱅크와 멀 골드먼은 [China: A New History(신중국사)]에서 무를 경시한 송나라의 풍조를 그리면서 유가사상이 원래 무를 천시했기 때문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4민(四民)에도 넣지 않았다고 한다.(108쪽) 이것은 심각한 오해다. 제2·3·4 계급인 농·공·상은 현대 용어로 하자면 1차·2차·3차 산업을 가리킨 것이고, 제1계급인 ‘사’는 사회 운영의 담당자였다. 4민 개념이 출현하던 춘추시대의 ‘사’는 원래 무사(武士)였다. 전국시대에 문사(文士)의 측면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제국시대 들어 문사의 비중이 점점 커져 무사의 위상을 압도하게 된 것이었다.

과거제, 관료 등용 주된 통로로 자리 잡아


▎승상 조보를 방문하는 송 태조. / 사진:고궁박물원
정치조직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 운영에서 힘보다 꾀의 중요성이 커진다. 조그만 나라들이 각축하던 춘추시대에서 7웅(七雄)으로 세력이 모이던 전국시대를 지나 하나의 제국으로 합쳐지는 과정에서 무사보다 문사의 역할이 커진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한나라 쇠퇴 후의 혼란 속에서 무의 중요성이 다시 살아났지만, 남북조를 거쳐 수·당 제국의 재통일에 이르는 동안 문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나라가 안정을 얻게 되자 바로 문민(文民)화의 길을 걸은 것은 “말등 위에서 천하를 얻을지언정 말등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다”는 이치대로였다.

문의 수요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는 글만 읽는 선비가 이례적 존재였다. 무력이 선비의 기본이었고, 개인의 전투능력보다 무리를 이끄는 힘이 무력의 더 중요한 측면이었다. 위(魏)나라 이후 오랫동안 관리 등용에 쓰인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는 향촌의 동원력을 가진 호족(豪族) 계층을 국가체제에 편입시키는 데 큰 효용이 있었다.

자기 세력기반을 갖지 않은 전문적 문사를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가 과거(科擧)였다. 과거제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직도 이설이 분분한데, 그 여러 특성이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형성되어 온 것으로 볼 때 어느 시점으로 확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측천무후(則天武后) 시기에 과거제의 역할이 크게 자라난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과거제를 통한 관료 충원 비율은 아직 높지 않았지만 과거 출신자들이 고위직에 진출하는 비율이 크게 높아진 것이다. 그리고 송대(宋代)에 이르면 관료 등용의 주된 통로로서 과거제의 역할이 확립된다.

하나의 왕조가 경쟁세력을 물리치고 자리 잡는 과정에서는 “마상득지(馬上得之)”의 표현대로 무력에 우선 의지한다. 많은 무장 세력을 규합하는 지도자가 창업에 성공한다. 그러나 왕조가 수립되고 나면 방대한 제국의 운영을 위해 조세 수취율을 높여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에만 충성하는 관료집단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 무장 출신으로 송 왕조를 연 조광윤(趙匡胤)이 자신을 추대했던 옛 동료 장군들을 모아놓고 조기 퇴직을 권한 것은 그런 필요 때문이었다. “떡 하나씩 드릴 테니 자네들만 드시고, 주변에 떡고물 바라고 꼬여 드는 세력은 흩어 버리시게.”

송 태조가 옛 동료들의 병권 반납을 권한 “술 한 잔에 군대 내놓기(杯酒釋兵權)” 술자리가 961년 7월에 있었으니 즉위 후 1년 반 만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후주(後周)의 잔여 세력을 평정해서 국내의 안정을 겨우 취해 놓았지만 중원은 아직 여러 할거세력으로 쪼개져 있어서, 재통일까지 아직도 십여 년의 정벌 사업을 앞두고 있었다. 군사력의 필요가 많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병권의 집중을 서두른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 후기 이래 ‘절도사(節度使)’로 대표되는 지방 병권이 국가체제에 어떤 부담을 지우는지, 절도사의 위치에서 실력을 키워 온 태조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사실 태조의 즉위 시점에서 중원 재통일 사업은 후주 왕조에 의해 고비를 넘긴 상황이었다. 조만간 이뤄질 재통일 자체보다 왕조의 지속성 담보를 태조는 더 중요한 과제로 여겼을 수 있다. 당나라가 문을 닫은 후 불과 50여 년 사이에 다섯 개 왕조가 주마등처럼 명멸한 끝에 자신의 송나라가 문을 열게 된 것 아닌가.

송나라는 이렇게 개국 초부터 무력을 억제하는 경향을 보였다. 중국문명의 가장 찬란한 꽃을 피운 송나라를 자랑스러워하는 중국인들이 오랑캐와의 관계를 놓고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정이다. 5대10국(五代十國)의 혼란은 수습했지만 주변 오랑캐와의 관계에서는 근 300년간 굴욕적인 입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세폐(歲幣)’의 이름으로 막대한 재물을 보내줘야 했고, 중원의 일부를 떼어줘야 했고, 결국 몽골의 침공으로 멸망에 이르렀다.

송나라 ‘전투력보다 경제력’으로 문화창달


▎8세기 위구르 가한의 초상. / 사진:Tilivay
송 태조를 보좌한 승상 조보(趙普)가 역사상 손꼽히는 명재상이었는데, 그가 “남쪽을 먼저, 북쪽을 나중에, 쉬운 것을 먼저, 어려운 것을 나중에(先南後北, 先易後難)”라는 방침을 권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방침이 현실에 얽매이는 소극적 전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투력보다 경제력을 앞세운 원대한 전략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눈에 보이는 군사적 성공을 서두르지 않고 남방의 경제력을 먼저 확보해서 유리한 조건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농업생산력이 크게 자라나고 있었다. 마크 엘빈은 [The Pattern of the Chinese Past(중국사의 패턴)](1973)에서 11세기를 전후한 중국의 ‘농업혁명(green revolution)’을 이야기한다. 선사시대의 농업 발생 이후 가장 큰 농업생산력의 향상이 송나라 때의 중국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농업기술의 획기적 발전은 남방의 벼농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것인데, 이것은 송나라 이전부터 시작된 변화였다. 송나라의 치안 안정 덕분에 발전의 성과가 널리 보급되고 큰 경제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황하 유역 중심의 북중국과 장강 유역 중심의 남중국을 통상 회수(淮水)를 기준으로 구분한다. 남중국은 전체적으로 북중국에 비해 기온이 5도 이상 높고 강우량이 3배가량 많다. 초기 농업 발전에는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기술이 어느 수준에 도달한 후에는 생산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한나라 때는 남중국 인구가 북중국의 절반이 안 되었는데, 송나라 때는 비중이 뒤집어져 있었다. 수나라 통일 후 첫 번째 사업이 남중국의 식량을 북중국으로 옮겨가기 위한 운하 건설이었다는 사실이 이 변화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바둑에 “부자 몸조심”이란 말이 있다. 형세가 유리할 때 방어적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예리한 도발이 들어오면 조금씩 양보하며 적당히 처리해서 유리한 형세를 지킨다. 문무(文武)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제압해 봤자 이득도 별로 없는 오랑캐를 몽땅 제압하겠다고 군사력을 극대화하려 들면 군사비가 많이 들 뿐 아니라 내부의 강한 군사력이 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송나라가 요(遼)나라와 금(金)나라에 매년 세폐로 보낸 수십만 량 은과 수십만 필 비단이 큰 손실 같지만, 평화의 값으로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북중국을 금나라에 내어주고 남송으로 쪼그라든 것도 가장 생산성 높은 지역을 지킨 ‘강소국(强小國)’ 전략이었기에 몽골의 침략을 금나라보다 50년 가까이 더 버텨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오랑캐에 대한 중화제국의 굴욕적인 자세는 송나라에 와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한나라도 초기에 흉노에게 눌려 지냈고 당나라도 초기에 돌궐의 눈치를 살폈다. 당 태종이 돌궐을 복속시키고 ‘천가한’으로 천하를 호령했지만 오랑캐에 대한 중국 황제의 위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돌궐 등 오랑캐를 중국 군사력에 편입시키고 유지하는 데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비용은 두 가지였다. 눈에 보이는 비용은 군대 경비로 지출한 막대한 양의 비단이었고, 보이지 않는 비용은 제국 체제에 대한 위협이었다. 후자의 비용이 755년 안록산(安祿山)의 난으로 터져 나오면서 당 제국은 파산 상태에 빠졌다. 난국 수습을 위해 위구르(回纥)의 도움을 받은 데서 이 파산 상태가 드러난다. 그때까지 기미(羈縻) 정책을 통해 활용해 온 오랑캐의 군사력을 동원할 비용이 없어서 제국의 통제밖에 있던 위구르를 끌어들인 것이었고, 그에 대한 보상은 757년과 762년 낙양에 대한 약탈을 며칠 동안 허용하는 식으로 이뤄진 것이다.

경제 능률이 다는 아니다… 정신·윤리도 중요


▎안녹산의 난을 피해 수도 장안을 떠나는 현종 (프리어&새클러 박물관). / 사진:PericlesofAthens
780년부터 시행된 양세법(兩稅法)을 놓고 재정국가로의 전환이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여름(6월)과 가을(11월) 두 차례 걷는다 하여 ‘양세’라 부른 이 제도는 종래의 조·용·조(租庸調)를 대신해 납세를 간결하게 한 것이다. 안록산의 난으로 인구 이동이 많고 문서가 산실된 상황에서 효율적 징수를 위해 채택된 제도였다.

조·용·조는 북위(北魏) 이래 균전제(均田制)의 일환으로 시행되어 온 것인데, 농지세인 전조(田租)와 인두세인 요역(徭役), 그리고 지역 특산물인 조(調)를 부과한 것이다. 내용이 여러 갈래인 데다 현물로 납부했기 때문에 관리가 꽤 복잡했고, 인구 이동이 많은 전란 상황에서는 제대로 시행하기 어려웠다. 농지세 하나로 묶어 돈으로 납부하게 한 양세법이 능률적인 개혁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국가제도에서 능률이 모든 것이 아니다. 조세제도는 국가와 인민의 관계 중 경제적 측면을 담은 것이다. 중국의 농업사회 발달에 따라 농지를 주된 조세 근거로 삼는 경향은 일찍부터 나타났지만 그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춘추(春秋)] 선공 15년(기원전 594)조 “초세무(初稅畝)” 기사에 대한 [좌전(左傳)]의 비평에 나타난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임금이) 재산을 늘리더라도 곡식을 내가는 것이 힘 빌리는 것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非禮也 穀出不過藉 以豐財也)”

원래 주(周)나라 봉건제도는 백성이 영주의 보호를 노동력으로 갚는 것이었는데, 이제 재물로 갚는 제도가 시작됨으로써 그 관계가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00년 후 노(魯)나라에서 이 제도를 시행하려 할 때(기원전 483) 요직에 있던 제자 염구(冉求)가 의견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의 행동은 예법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다. 베풀 때는 두텁게 하고, 섬길 때는 치우치지 않게 하고, 거둘 때는 가볍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나도 만족할 것이다. 그런데 예법의 원리를 등지고 한없이 욕심만 차리려 한다면 설령 전부(田賦)를 행한다 하더라도 끝내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계손씨가 일을 올바르게 하려 한다면 주공의 전범을 따르면 될 것인데, 만약 자기네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내 의견은 청해서 무얼 하겠는가?”

공자는 임금과 백성 사이가 물질적 거래 아닌 서로 돕는 정신으로 맺어지는 것을 이상적 제도로 생각했다. 도덕적 의미를 앞세운 관념이었지만, 실제적 효과도 가진 제도였다. 임금과 백성이 서로 돕는 사이라면 임금의 힘은 백성의 충성에만 근거를 둔다. 그러나 이 관계가 물질적 거래가 되면 임금의 힘은 쌓아놓은 재물에 근거를 두게 된다. 임금이 백성보다 재물에만 관심을 쏟게 되면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기 힘들 것이라고 공자는 생각한 것이다.

당나라의 균전제에도 나름의 윤리적 원리가 담겨 있었다. 많은 농민이 적정 규모의 경작지를 갖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양세법은 누가 얼마나 많은 농지를 어떻게 가졌는지 따지지 않고 면적에 따라 세금을 거둘 뿐이었다. 인민을 바라보지 않고 재물만 바라보는 변화였으니, 이것도 ‘재정국가’의 한 면모라 할 것이다. 11세기 후반 송나라 신종(神宗, 재위 1067~85)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 운동에도, 조선 후기의 대동법(大同法)에도, 같은 성격의 문제가 있었다.

오랑캐가 중원을 점령해 통치체제 운영하는 것을 ‘정복국가’라 한다면 초기의 당나라는 정복국가의 성격을 다분히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황실을 비롯한 초기 당나라의 지배집단은 ‘관롱(關隴) 집단’ 출신인데, 북위에서 형성된 관롱 집단은 호·한(胡漢) 2중성을 가진 집단이었다. 고조와 태종에게는 정복국가의 성격이 분명했으나 고종 이후의 문민화로 그 성격이 사라졌다. 앞 회에 언급한 태자 승건(承乾)이 태종의 뒤를 이었다면 아마 좀 더 오래갔을 것이다.

당나라 조정은 측천무후의 장악 아래 관료조직으로 성격을 바꿨다. 고종을 보좌하도록 태종에게 탁고(託孤)의 명을 받은 장손무기(長孫無忌, ?~659)와 저수량(褚遂良, 596~659)의 행적에서 그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서열1위 공신이 동료 공신집단 제거 앞장


▎장손무기 전신화(全身畫). / 사진:월터스미술관
장손무기는 태종의 처남이고 고종의 외삼촌이었다. 앞에서 [당률소의(唐律疏議)] 편찬을 맡은 일을 언급한 바 있거니와 태종 후기의 조정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공신이었다. 그런데 조카인 고종의 성공에 너무 집착한 탓일까? 그의 평생 경력에 최대의 오점으로 남은 일이 고종 즉위 몇 해 후인 653년에 있었다.

‘방유애(房遺愛) 모반’사건이라고 하지만, 방현령(房玄齡)의 아들 방유애의 문제라기보다 그 아내 고양(高陽) 공주의 문제였다. 태종의 17녀 고양공주는 이런저런 문제로 태종의 미움을 받아 궁궐에 출입도 못하는 신세였는데(태종이 죽을 때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종 즉위 후 황제가 똑똑지 못하다는 소문이 돌 때 황제 바꿨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주변에 꺼내다가 걸려든 일 같다. 이 사건의 조사를 장손무기가 맡았다.

이 사건에 중요한 공신과 종실 여럿이 연루되어 처벌받았는데, 역할이 줄어든 공신들이 뒷방에서 쑥덕댄 정도 일을 갖고 새 황제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지나치게 부풀렸던 것 같다. 조사를 맡은 장손 무기가 이제 외척의 위치에서 동료 공신과 그 자제들을 가혹하게 처분함으로써 많은 지탄을 받았다. 특히 태종이 태자를 새로 정할 때 고종 대신 거론되던 셋째 아들 각(恪)은(장손무기의 외조카, 즉 황후 소생이 아니었다) 연루된 정황이 확실하지 않은데도 서둘러 죽인 것 때문에 장손무기의 사심 때문이라는 의심이 짙었다. 이각의 억울함은 장손무기의 실각 후 인정되었다.

2년 후인 655년 황후 바꾸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고종이 원로대신 몇 사람을 불러 의견을 청했다. 저수량은 결연히 반대했고, 장손무기는 직언을 삼갔지만 은근히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그에 앞서 고종이 무측천(武則天)과 함께 선물을 싸 들고 장손무기의 집에 찾아가 회유하려 애쓴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실망이 컸을 것이다.

무측천이 황후가 된 후 저수량은 지방관으로 쫓겨났다. 처음에는 담주(潭州, 지금의 후난성) 도독으로 나갔다가 2년 후에는 멀리 계주(桂州, 지금의 광시성)로 쫓겨가고 얼마 후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지금 베트남 땅인 애주(愛州)에 귀양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저수량이 죽던 해에 장손무기 역시 모반으로 몰려 귀양 갔다가 자살을 강요당했다.

정관 17년(643)에 태종이 세운 능연각(凌烟閣)은 아름다운 군신관계의 표상으로 일컬어진다. 황제가 늘 가까이하고 싶은 24명 공신의 초상을 진열해 놓은 곳이었고, 첫 번째 자리가 장손무기였다. 16년 후 장손무기의 몰락은 공신 집단의 전멸을 고한 사건이었다.

653년 방유애 사건을 그 과정의 한 고비로 볼 수 있다. 태종이 주재할 때였다면 고양공주 한 사람만 처벌하고 방유애에게 부인을 새로 얻어줬을 것 같다. 그런데 능연각 24공신 중 여러 집안이 파탄을 맞음으로써 당 조정에서 공신 집단의 위상이 무너지고 말았다. 서열 1위 공신인 장손무기는 이 사태에 편승해 종실의 명망 있는 인물을 해쳤다는 혐의까지 받고 6년 후 스스로 억울한 죽음에 몰렸으니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이치를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공신 아닌 외척으로서 새로운 입지를 모색한 것일까?

공신 집단의 몰락을 주도한 인물 허경종(許敬宗, 592~672)의 모습을 대비시켜 보면 그 몰락의 의미가 잘 드러나는 측면이 있다. 허경종은 수나라에서 과거를 통해 관직에 들어섰다가 개인의 글재주와 계략을 통해 서서히 지위를 높인 사람이었다. 655년 무측천의 황후 책봉을 앞장서서 지지함으로써 그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권력을 쥐게 되었다.

허경종이 역사상 최악의 간신 중에 꼽히게 된 데는 그와 대립했던 공신 집단을 영웅호걸로 흠모하는 후세 사람들의 편견도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러나 전해지는 구체적인 행적을 보면 여색과 사치를 좋아하고 이기심이 강한 소인배였다는 사실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호걸과 소인배의 취향 문제를 넘어 제국 경영의 과제를 놓고 무후(武后)의 관점을 생각해 보자. 무후가 탄압한 공신들은 각자 나름의 신망을 갖고 따르는 무리를 거느린 사람들이었다. 공신들의 발언권이 큰 조정은 권력과 권위, 어느 측면에서나 ‘분권(分權)’ 상태라 할 수 있다. 황제의 권위와 권력이 방대한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그리고 오래도록 침투하기 위해서는 ‘집권(集權)’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허경종 같은 소인배는 문제를 일으켜도 그 한 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제국의 권위·권력 구조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 것으로 무후는 보았을 것 같다. 태종이 호걸들을 이끌고 제국을 일으킨 것이라면 무후는 소인배를 동원해서 제국을 관리하는 길을 찾은 것이라고 하겠다.

측천무후, 자기세력 없는 ‘소인배’ 중용


▎발해 유적지에서 나온 용머리 (국립중앙박물관). / 사진:티머시 프리선
지도자의 개인기가 큰 역할을 맡던 ‘창업(創業)’ 단계에서 조직력에 의지하는 ‘수성(守成)’ 단계로 당나라가 넘어가는 한 고비가 643년 태자의 폐립이었다. 그 무렵 돌궐의 위협 해소가 그 배경이었다. ‘천가한’의 역할을 위해 돌궐 풍속을 몸에 익혔던 태자를 대신해서 태종이 마음에 둔 것은 [괄지지(括地志)]를 편찬한 둘째 아들(정실 소생 중) 태(泰)였으나 태자와의 경쟁 중에 실격되고 말았다. 그래서 힘도 없고 꾀도 없는 셋째 아들이 간택되어 6년 후 고종으로 즉위했고, 제국 경영의 칼자루는 무후의 지도력을 통해 공신 집단으로부터 관료집단으로 넘어갔다.

창업에서 수성으로의 전환 과정은 황제와 공신집단, 그리고 황후와 관료집단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점철되었지만, 그 큰 흐름은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는 속담대로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라 귀추가 결정된 것으로 볼 측면이 있다. 수나라와 당나라에 의해 통일된 중원, 특히 남중국의 농업생산력은 한나라 때에 비해 엄청나게 자라나 있었다. 많은 농민이 폐쇄적이고 자급자족적인 장원에서 풀려나 높은 잉여생산율을 실현하고 있어서 인구 증가에 비해 경제 총량의 증가가 훨씬 더 컸다. 공신집단의 봉지(封地)와 채읍(采邑)을 줄이는 것이 국가 재정에도 유리하고 인민의 취향에도 맞는 변화였다.

공신집단의 무력(武力)에 대한 수요가 계속 있었다면 이 변화가 억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630년대에 돌궐제국이 와해 된 후 많은 돌궐 병력이 당 제국에 편입되어 변경 방어와 정벌 사업에 활용되기 시작했다. 돌궐 외의 다른 오랑캐들도 당나라의 기미정책에 수용되어 싼 값에 무력을 제공하게 되었다. 용병의 성격이 다분했던 이 군대의 급여 등 비용은 주로 비단으로 지불되었다. 서역 방면의 주둔지 유적에서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는 민바탕 비단은 당시 남중국의 경제력과 북중국의 군사력 사이의 관계를 증언해 준다.

고종(649~683)에서 현종(玄宗, 712~756)에 이르는 당나라의 성세(盛世)는 값싼 군사력의 활용과 효율적인 생산력 수취를 발판으로 한 것이었다. 755년 안록산의 난은 이 체제를 파탄시켰다. 중앙정부의 군사력으로 이 난을 진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방의 다른 절도사들에게 각 지역의 실질적 통치권을 넘겨줘야 했고, 위구르와 같은 외부 군사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도시의 약탈을 용인해야 했다. “이게 나라냐!”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안록산의 난 후에도 당나라가 150년간 명맥을 유지한 것은 남중국의 생산력 덕분이었다. 북중국의 대부분 지역을 절도사들이 점거한 상태에서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남중국의 착취 강도를 높이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해 염세(鹽稅)가 활용되었다. 당나라 말기 황소(黃巢)의 난을 비롯한 민란에서 소금 판매조직이 큰 역할을 맡게 되는 배경이었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정책은 송나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당나라 공신세력이 측천무후에 의해 거세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안록산의 난까지 처음 약 100년간은 오랑캐 중심의 절도사 세력에게 급료를 주며 용병으로 썼다. 안록산의 난 후에는 북중국 여러 지역의 통치권을 절도사들에게 떼어 주고 외부의 위구르에게 의지하며 약 100년을 더 버텼다. 이 시기 위구르의 번영은 초원지대 최초의 거대도시 카라발가순(Karabalghasun, Ordu-Baliq 라고도 불린다) 유적에 남아있는데, 그 번영은 당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1889년에 발굴이 시작된 이 도시는 32㎢의 면적이 10m 높이의 2중 성벽으로 둘러싸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장안(長安)의 성곽 내부면적은 78㎢였다.) 애초에는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었다고 한다.

위구르 붕괴 후 초원·중원 모두 무정부 상태


▎11~12세기 요나라에서 제작된 목조 관음상(넬슨앳킨스 미술관). / 사진:리베카 아넷
840년에 위구르제국이 무너진 후에는 보호자를 잃은 당 왕조가 치안 능력조차 상실하고 말았으니 5대10국의 혼란은 907년 공식적인 왕조의 종말보다 훨씬 더 일찍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토머스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에서 중원의 거대제국과 초원의 거대제국 사이의 상관관계를 제기하면서 위구르제국의 붕괴로부터 100여 년간을 중원과 초원이 함께 무정부상태에 빠져 있던 시기로 예시한다.

위구르제국 붕괴 이후 뚜렷한 강자가 나타나지 않던 북방에서 10세기 들어 세력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 동북방의 거란(契丹)이었다. 정북 방면의 오랑캐는 흉노에서 유연·돌궐·위구르에 이르기까지 유목 외의 산업을 거의 가지지 않은 것이 일반적인 특징인데, 동북방 만주 방면의 오랑캐는 유목 외에도 수렵과 농업 등 다양한 산업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5호16국 시대에도 이 방면에서 나온 선비족(모용부)이 호·한 2중체제 형성에 앞장 섰던 것이다.

조너선 스카프는 [Sui-Tang China and Its Turko-Mongol Neighbors: Culture, Power and Connections, 580-800(수당제국과 그 투르크-몽골 이웃들)](2012)에서 중국 북방 지역의 기후와 생태 조건을 살펴 각 지역 인구의 한계를 추정한다. 깊은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강우량이 적은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그에 덧붙여 위도와 고도를 고려하는 점이 특이하다. 몽골고원은 기온이 낮아 증발이 적기 때문에 강우량이 비슷한 다른 지역에 비해 초원의 식생이 풍성하다는 것이다. 몽골 지역의 초원 1㎢에 50두 가축을 키울 수 있는 반면 신장 지역에서는 서너 마리밖에 키울 수 없었다고 말한다.(25~26쪽)

유목민의 큰 세력이 서북방 신장 방면보다 북방 몽골 방면에서 많이 일어난 까닭을 설명해 주는 이야기다. 그런데 동북방은 어땠을까? 만주 방면에는 강우량이 꽤 큰 평지가 많다. 그러나 중세 이전의 기술 수준으로는 농업 발달이 어려운 조건이었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에는 중국의 농업 발달이 남쪽으로만 향했다. 당나라 때까지 만주 지역에는 소규모 밭농사가 여러 형태의 산업과 뒤섞여 있었다.

이 지역에서 비교적 큰 농업사회를 이룬 것은 발해(渤海, 698~926)였다. 고구려의 농업기술을 이어받은 발해는 당나라의 군사력이 닿지 않는 만주 동부 지역에서 독립을 지키다가 713년 이후에는 당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만주 중부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당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발해가 멸망한 것을 보면 당나라와의 관계가 발해의 체제 유지를 위한 중요한 조건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순수 유목사회에 비해 농업을 포함하는 혼합사회는 생산력이 크면서도 군사력에서 뒤졌다. 유목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잘 훈련된 기마병이기 때문이다. 만주 방면의 혼합사회는 남방의 농경사회와 서방의 유목사회 양쪽으로부터 군사적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큰 세력을 키울 수 없었다. 다만 두 방면 모두 제국이 와해되어 정치조직의 확대에 방해가 없을 때는 호·한 2중 체제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 5호16국 시대 선비족의 활동이 그런 예다.

영토 욕심 크지 않던 거란, 고려에 강동 6주 할애

840년 위구르제국이 무너진 후 거란의 흥기 과정에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2~926)의 지도력도 2중 체제를 통해 빚어진 것이었다. 거란은 원래 8부(部)로 갈라져 있었고 각 부의 수령도 3년 임기 선출직이 관례였다. 아보기의 일라(迭剌)부는 중국 방면을 공략, 농민과 농토를 확보함으로써 힘을 키운 결과 제부를 통합하여 요 왕조(907~1125)를 열 수 있었다.

요나라의 2중 체제는 초기부터 남정(南廷)과 북정(北廷)을 함께 둔 데서 나타난다. 남정은 5대10국의 혼란기를 틈타 중국에서 탈취하는 농경지역을 운영하고 북정은 주변 유목 민족을 상대하고 부족사회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경제력과 군사력을 분담한 셈이다.

요나라의 제국체제가 안정 단계에 들어선 것은 제5대 경종(景宗, 969~982) 때였다. 그때까지는 황제가 시해되는 일이 거듭되고 황위 계승방법도 불확실했다. 경종 이후는 장자 계승이 다시 흔들리지 않았다. 5대10국의 혼란이 경종 무렵 송나라의 재통일로 수습되고 있던 상황에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었을 것 같다.

936년 석경당(石敬瑭)이 후당(後唐)을 멸하고 후진(後晋)을 세우는 과정에서 거란의 도움을 청하는 조건으로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떼어준 결과, 요나라가 장성(長城) 이남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나라는 중원 진출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946년에 후진의 수도 개봉(開封)을 점령했으나 바로 퇴각한 것은 황제의 죽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복의 의지가 강하지 않았음을 또한 보여준다.

‘서희(徐熙)의 담판’(993)도 요나라가 영토의 야욕이 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침략군이라면 으레 영토를 뺏으러 오는 줄 알고 당시 고려에서 당황했던 모양인데, 담판을 통해 오히려 강동6주(江東六州)를 확보한 서희가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서희의 업적은 용맹한 기세로 거란 장수를 겁줘서가 아니라 요나라가 원하는 고려의 역할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에 부응함으로써 얻은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당시 강동6주는 발해 멸망 후 여진인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임에 비추어 볼 때, 요나라가 바란 것은 여진의 견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스카프는 [수당 제국과 그 투르크-몽골 이웃들]에서 전통시대 중국사 서술의 ‘계층 편향성’을 지적한다. 기록과 편찬의 담당자들이 모두 중앙의 문사 계층이었기 때문에 변경 지역의 실정에 어둡고 경직된 관념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52~53쪽) 20세기 이래 고고학 연구의 확장과 발전에 의해 이 편향성이 조금씩 보정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도 50년 전 중국사 공부를 시작할 때에 비해 시야가 많이 밝아졌음을 생각하며, 우리 세대까지 얻어 놓은 그림을 남기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7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 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2005호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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