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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5)] 명성황후 비운 서린 오운각·옥련정 터 

황제의 휴식 공간에서 자객 칼날이 춤추던 장소로 

경술국치 1년 전인 1909년 통감 부임식 등 열리기도
이후 언제 누구 지시로 없어졌는지 전혀 확인되지 않아


▎명성황후 살해 현장이었던 건청궁 곤녕합 권역. 오른쪽 누마루 부분이 옥호루이며, 그 왼쪽 부분이 곤녕합이다.
'북궐후원도형’의 오운각(五雲閣) 권역은 지금의 대통령 관저 부근이었다. 방·대청·누마루 등으로 구성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오운각과 정면·측면 각 1칸씩인 정자 옥련정(玉蓮亭), 부엌·방·창고 등으로 구성돼 있는 9칸 규모의 벽화실(碧華室) 그리고 샘물인 천하제일복지천이 오운각 권역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고종 5(1868)년 9월부터 이듬해 7월에 걸쳐 지어졌으나, 대일 항쟁기를 거치면서 건물들은 모두 없어지고 천하제일복지천만 남아 있다.

오운각 권역의 건물들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1909년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통감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 후임으로 부임하는 것에 대한 환영 및 송별식을 경무대에서 원유회(園遊會) 형식으로 열었다는 [대한민보(大韓民報)]1909년 7월 9일 자 기사 내용을 통해서 당시에 있었던 건물의 종류와 상황을 어렴풋하게나마 접해 볼 수 있다.

기사 내용에 따라 당시의 상황을 대략 그려보자. 미리 온 사람들은 경복궁 후원 구역의 서측 문인 추성문으로 들어와서 경무대 광장을 지나 휴게소로 사용했던 융문당 앞에서 주빈인 이토 전 통감과 소네 신임 통감을 기다리고 있다. 4시에 축포와 군악이 울리고 영접자 대표인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주빈을 영접한다. 인사가 끝난 후 취타를 울리면서 깃발이 선도해 산기슭을 돌아 정상에 있는 사모정자에 도착한다. 잠시 쉬다가 내려오면서 오운각에 이른다. 학부대신이 서행각 뒤로 향하며(…).

1909년까지 경무대의 각 건물은 휴게소로 잠시 쉴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관리가 잘돼 온 것으로 보인다. 위 기사 내용의 사우정은 당시 옥련정 정자로 추정되며, 서행각은 벽화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옥련정까지 산길은 오르막길이고 오운각은 그보다 약간 낮은 곳일 것이다. 오운각을 나와서 벽화실 뒤쪽으로 돌아서 지금의 영빈관 근처인 경농재 방향으로 이동했다. 관가문·대유각 등은 모두 경농재에 있던 시설들이다.

[동아일보] 1929년 11월 28일 자 기사에는 경성 시내의 유명한 고건물 37개 중 오운각이 포함돼 있다. 1931년 6월 9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금강산·부여·경주·평양 등 전국의 많은 건물·보물이 ‘보물고적등보존령(寶物古蹟等保存令)’에 의거해 보존해야 할 건물과 보물로 지정된다’고 기술돼 있다. 이에 따르면 광화문·근정전·건춘문 등 기사 내용의 건물들과 대등한 수준의, 상당히 격이 높았던 건물로 추정된다.

히젠토(肥前刀), 조선의 심장을 베다


▎1. ‘북궐후원도형’ 중 오운각일곽 배치도. 대통령경호실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2007년, 60면~61면 재편집. / 2. [주연선집] 중 오운각과 옥련정이 수록된 부분. / 사진:이성우
[동아일보] 1933년 6월 6일 자 ‘신무대원을 모집’ 제하의 기사에는 ‘신무대(神武隊)에서는 대원을 늘리고저 한다는데 희망하는 이는 경복궁 뒤 오운각 약수터로 매조(每朝) 오 시 삼십 분까지 등산하기를 바란다 한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그 당시까지도 오운각은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련정과 벽화실의 경우는 물론이고 오운각 역시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전혀 확인되지 않으며, 남아 있는 사진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

고종은 1869년 오운각에 올라 아래의 시를 남겼다. 당시 이 오운각 일대는 계곡이 깊고 수풀도 우거져서 신무문 밖 후원 중에서도 임금의 휴식과 소요(逍遙)를 위한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봉배(奉培) 자성(慈聖) 등오운각유음(登五雲閣有吟): 자성을 받들어 모시고 오운각에 올라 노래하다.

울창한 녹음 사이로(蔥鬱綠陰裏) 맑은 물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데(玉流處處聲), 어가를 받들어 오운각에 올라(奉駕五雲閣) 이날을 진심으로 감축하네(祝岡此日誠). _[주연선집(珠淵選集: 고종의 문집)] 권1


이 시의 제목에 등장하는 자성(慈聖)은 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높여 부른 이름으로 고종의 양어머니이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 조씨(1808~1890)다. 흔히 조대비로 잘 알려져 있는 신정왕후는 왕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으며,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이재황을 추존왕 익종(翼宗)의 양아들로 삼아 고종으로 즉위하게 했다.

아래의 시 ‘등옥련정’은 [주연선집]에 ‘봉배 자성 등오운각유음’ 에 이어서 나오고 있다. 이로 봐서 두 한시는 1869년 같이 지었다는 뜻이다. 두 시의 내용에서 녹음·옥류·하일·푸른 나무 등등 여름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보이니 어쩌면 같은 날 지었을 수도 있다.

특히 당시 17세의 고종이 새로 조성된 오운각 권역을 보여 드리기도 할 겸, 61세였던 신정왕후 조씨를 모시고 갔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오운각에 간 김에 옆에 있던 옥련정에도 가서도 시 한 수 짓고.

등옥련정(登玉蓮亭): 옥련정에 오르다

화려한 산 저절로 우뚝 솟았고(華山天作屹) 그 아래 옥련정이 놓여 있구나(下有玉蓮亭) 여름날엔 맑은 기운 매우 많았고(夏日多佳氣) 긴 계곡엔 푸른 나무 그득하네(溪長萬木靑). _[주연선집] 권1


이렇듯 임금의 휴식을 위해 조성한 장소인 오운각 권역도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1895년 8월(양력 10월) 어느 날,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관련해 역사 속 비운(悲運)의 장소로 변한 적이 있다.

후쿠오카의 구시다(櫛田) 신사(神社) 내에는 하카타(博多)라는 역사관이 있다. 일본인 ‘도 가쓰아키(藤勝顯)’라는 낭인 자객이 사용했던 칼, 히젠토가 보관돼 있는 역사관이다. 이 칼은 16세기 에도 시대(1603~1867)에 제작됐다.

후쿠오카 히젠 지역의 유명한 장인인 다다요시(忠吉)가 오로지 사람을 베기 위해 제작했다는 명검이다. 칼날 길이 90㎝, 전체 길이 120㎝짜리 칼로, 나무칼집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즉, ‘단숨에 번개같이 늙은 여우를 베다’라는 의미다.

낭인들의 칼날에 스러진 조선의 국모


▎일본 자객이 명성황후를 시해할 때 사용된 히젠토.
1895년 을미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의 북쪽 깊숙한 곳에 있던 건청궁(乾淸宮)까지 난입한 속칭 일본의 낭인(浪人)이라는 자객들에 의해서 조선의 국모는 목숨을 잃었다. 명성황후, 당시 44세였다.

일본은 한양도성의 중심이자 조선 통치의 상징인 경복궁에서 조선의 국모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을미왜변’, 흔히 말하는 을미사변이다. 도 가쓰아키는 황후의 침전 권역에 난입해 황후를 직접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객 3명 중한 명이다. 그는 그날 범행에 사용했던 히젠토의 나무칼집에 ‘일순전광자노호’라고 새겨 넣었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1908년 ‘이 칼로 왕비를 베었다’는 기록과 함께 이 칼을 구시다 신사에 보관했다.

‘여우사냥’이 시작됐다. 8월 20일 새벽 5시 30분쯤, 광화문 앞에 일단(一團)의 일본인 자객들이 일본군 수비대, 일본군 지도하에 구성된 조선 훈련대와 함께 도착했다. 이들은 이미 새벽 3시쯤 대원군을 공덕리(孔德里)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에서 강제로 끌어내다시피 한 후 함께 경복궁으로 향했다.

광화문 주변을 사전에 확보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는 자객 일행이 도착하자 광화문 담벼락을 넘어 문을 지키던 임금의 호위부대인 시위대(侍衛隊)를 제압하고 광화문을 열었다. 궁을 지키던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시위대 병력은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지만 열세한 화력으로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시위대를 제압한 일본군은 함성을 지르며 북쪽의 건청궁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인 4시 30분쯤 자객들을 포함한 일단의 무리가 경복궁 후원의 서쪽 출입문인 추성문(秋成門)을 확보했다. 조선 훈련대의 다른 일부 병력도 경복궁 후원의 동쪽 출입문인 춘생문(春生門)을 확보하고 경복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 지역까지 경계를 담당하고 있었다.

5시 15분쯤 신무문 동쪽의 암문인 계무문(癸武門)을 통과한 후 건청궁으로 진입해 들어간 자객들은 궁을 뒤지기 시작했다. 사전에 황후의 초상화를 여러 장 가지고 있었던 그들이었지만, 해 뜨기 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본 적도 없었기에 누가 황후인지 정확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황후의 침전이었던 곤녕합(坤寧閤) 권역에서 궁녀들을 포함해 여러 여인을 살해했다. 살해된 여인들의 시신은 옥호루(玉壺樓)로 모였다. 그중에는 황후의 시신도 있었다. 그리고 황후의 사망이 최종 확인됐다.

그날 아침 7시쯤 궁에 들어온 미우라(三浦) 공사는 시신을 재확인한 후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들을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시신들은 건청궁 동쪽의 자그마한 언덕인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그 시각을 고종실록 32(1895)년 8월 20일 자에는 ‘왕후가 묘시(卯時)에 곤녕합에서 붕서(崩逝)했다’고 기록돼 있다. 대략 새벽 6시쯤이지만 정황상 그보다는 약간 더 이른 시각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듯 조선은 제대로 된 무력 한번 사용하지 못하고 눈앞에서 국모를 잃는 수모를 당했다. 그로부터 15년 후인 1910년, 조선은 국가마저 잃고 일본의 속국이 됐다.

을미왜변의 행동대원들이라고 알려진 낭인 자객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떠돌이 칼잡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조선을 병합하기 위해 치밀하게 짜놓은 각본 속의 구성원들이었다. 동경제대·하버드대 출신의 학력 소유자와 현직 차관이 포함돼 있었다. 그 후 국회의원과 장관 등을 역임했던 그들의 행보를 보면 당시 일본의 최고 지성이고 사회지도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인 을미왜변으로부터 125년이 지났다. 그러나 당시 상황과 관련된 사실관계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있다. 명성황후는 과연 ‘건청궁의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누구에 의해 살해됐는가’와 같은 여러 의문점이다.

일본에 영국은 롤모델이었다?


▎경복궁 평면도. [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2006년, 101면 재편집. / 사진:이성우
그와 더불어 또 한가지 호기심 어린 궁금한 사항은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작전명을 왜 여우사냥이라고 했을까’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에 당시 정세를 비춰 나름대로 추정해 보게 됐다.

일본은 1854년 3월 가나가와(神奈川, 지금의 요코하마)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최초로 개항하게 됐다. 그 상대국이었던 미국은 교역 최혜국이라는 지위를 얻게 됐으며, 곧 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비슷한 조약이 체결됐다.

그러나 미국은 노예제와 관련해 누적돼온 국내의 불화 요인으로 결국 4년간의 남북전쟁(1861~1865년)을 치르게 됐다. 그러는 동안 영국은 미국을 대신해 일본의 주요 무역 상대국이 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됐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260여 년간 지속했던 에도막부는 무너지고 천황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의 통일된 국가가 형성됐다. 일본 자본주의 발전의 기점이었고 변혁의 시작이었다.

메이지유신을 이룩한 주도적 인물들은 대부분이 1830년 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가진 것 없고 가난한 하급 사무라이 출신의 청년들이었던 그들은 출신 지역을 떠나 에도와 교토로 속속 모여들었다.

초대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생으로 메이지 유신 당시 27세, 명성황후 살해사건 직전까지 주한 일본 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1836년생으로 32세,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주범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주한 일본 공사는 1847년생으로 21세였다. 특히 친구이자 동지였던 이토와 이노우에 이 두 사람은 모두 20대 초·중반에 영국으로 유학하면서 서양의 군사적·경제적 발전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영국은 다른 나라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제해권을 구가하던 나라였다. 1815년 프랑스와의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의 연합군에 의해 드디어 23년간의 프랑스와 대유럽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14년까지 약 100년간 유럽은 평화의 시대였으며, 그 중심에는 산업혁명과 함께 팍스브리타니카(Pax Britannica)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는 영국, 그리고 영국의 제국주의가 있었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후 서구 열강처럼 식민지를 거느리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된 섬나라 일본에, 국왕이 통치하는 나라 그리고 산업혁명을 통해 발전된 문물과 제도를 보유한, 같은 섬나라 영국은 롤 모델이었다. 이토와 이노우에처럼 영국 등 유럽의 발전된 문물을 경험하게 된 일본의 수많은 메이지유신 전후 시대 신지식인들이 유사한 조건의 영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은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 끌어들여 일본 견제해 나갔던 황후


▎명성황후 숭모제전 준비위원회에서 복원한 ‘명성황후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우는 긍정적인 이미지보다 부정적 이미지가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중세 프랑스의 ‘여우 이야기’에서는 닭들을 함부로 잡아먹고, 동물왕국에서 온갖 말썽을 피우며 간사한 꾀로 위기를 넘기는 등 교활한 동물의 상징으로 여우를 묘사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북아프리카 주둔 영국군을 괴롭혔던 독일의 전쟁영웅 ‘에르빈 롬멜’ 장군에게는 ‘사막의 여우’라는 별칭이 붙었다.

또한 50만 마리 정도 서식한다고 알려진 여우로 인해 양계장 등 농가에 피해가 속출하자 영국은 대대적으로 여우 퇴치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여우사냥은 17세기 찰스 2세 시대에 스포츠로 정착했으며, 귀족스포츠의 한 분야로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 내려오고 있다.

동아시아권에도 그다지 좋지 않은 이미지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늑대는 음흉함에 비유하고 여우는 교활함에 비유하곤 한다. 여우는 방언으로 여시라고도 하며 한자어로는 ‘호(狐)’라고 표기한다. 여우가 오래 살면 요술을 부리고 사람을 홀린다며 경계했다.

주로 구미호(九尾狐)를 의미하는 여우는 신통력을 가진 꼬리 아홉의 여우를 뜻하며 남자를 잘 홀리는 매혹적인 여성으로 변신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다 보니 여우는 개와 같은 과의 포유류에 속하는데도 개는 귀신을 쫓는 동물로 대접받지만 여우는 요물 취급을 받는다.

여우의 울음소리는 주로 죽음과 같은 흉사(凶事)를 몰고 오는 상징적 의미로 보기도 했다. “북쪽에서 여우가 울면 그 동네에 초상이 난다”고 했으며 “밤에 여우가 울면 불길하다”고도 했다. 북쪽이나 밤은 음(陰)과 암(暗)을 상징하며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북쪽에서 여우 울음은 곧 죽음을 알리는 소리나 저승사자의 출현으로 인식했다. [전설의 고향] 같은 납량특집 드라마에서 여우는 음산하고 불길한 단골 배역으로 등장한다.

중국에는 춘추전국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화집 [산해경(山海經)]이 있다. 책에는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인 구미호는 청구산(靑丘山)에 산다. 생김새가 여우 같은데 울음소리는 마치 어린애 같고 사람을 잘 잡아먹는다’고 나온다.

일본 헤이안 시대(794~1185) 초기의 설화집에는 여우가 인간으로 둔갑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에도 시대에는 여우가 나뭇잎을 머리에 얹고 공중제비를 넘기만 하면 간단하게 변신할 수 있다고 여겼다. 1955년부터 간행된 뒤로 일본의 가정마다 ‘상비약’처럼 보유하고 있다는 백과사전이 있다. 바로 이와나미(岩波) 서점의 백과사전 [코지엔(広辭苑)]이다. [코지엔]에도 여우는 사람을 속이거나 교활함의 상징, 또는 남자를 홀리는 의미로 설명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일본에서도 여우는 여러 가지로 둔갑한다거나 사람을 홀리는 동물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맺으며 요동반도를 차지하게 됐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 진출을 경계한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결국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3국 간섭이다. 명성황후는 이런 힘의 역학관계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일본과 달리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한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 및 친일세력을 철저히 견제해 나갔다.

단재 “역사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명성황후 시해를 지휘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말년 모습.
국제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주변국의 힘의 역학관계를 적절히 활용한 명성황후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일본은 명성황후를 교활하고 노련한 여우, 즉 노호(老狐)로 비하해 불렀다고 한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던 명성황후, 이것이 바로 일본이 명성황후를 제거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은 일본인들 사이에 전래해 오는 여우에 대한 부정적 인식, 그리고 명성황후의 노련한 처세술이 어우러져 영국 생활을 체험하고 영국 근대문명의 영향을 받은 많은 일본의 정치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던 명칭이 아니었을까?

고종실록 32(1895)년 11월 14일자(음력) 기록인 ‘죄인 박선·이주회·윤석우 등의 모반사건에 대한 판결 선고문’에 의하면 동년 음력 8월 20일 새벽 을미왜변 때 일본 낭인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된 후 소각됐던 명성황후의 시신 중 일부가 오운각 인근 서쪽 봉우리에 잠시 묻혀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살해한 후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을 불태우고 왕궁을 떠났다. 날이 밝자 조선 훈련대 참위(參尉: 위관 계급 중 제일 하위) 윤석우는 순찰 중 경복궁 녹산(鹿山) 아래에서 시신 한 구가 불타는 것을 봤다.

다음 날, 전날 자신이 봤던 시신이 궁녀가 아니라 황후일지도 모른다고 여긴 윤석우는 8월 21일 밤 남아 있던 시신을 거둬 오운각 서쪽 봉우리 아래에 몰래 묻어버렸다고 했다. 그렇지만 판결에서는 진상이 여러 가지로 의심스럽고 황후의 시신임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존엄한 시신에 함부로 손을 대고 움직였다는 이유로 죄인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만 40세였다.

하지만 이후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역모사건 단서들이 밝혀지면서 윤석우가 죄 없이 얽혔던 것으로 판명됐다. 고종 33(1896, 건양 1)년 4월 25일 윤석우는 종2품 군부협판(軍部協辦: 현 국방차관)으로 추증됐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과 그 시각에 따라 논쟁의 여지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본 정부의 치밀한 계획과 시나리오에 의해 명성황후는 살해됐고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 됐다. 그 후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 35년간 신음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고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 미래는 없다. 격동하는 작금의 동아시아 정세를 고려해 본다면 125년 전 이 사건이 그다지 먼 과거의 일도 아닐 것이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05호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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