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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36)마지막 회] 연재를 마치며 | 사막 순례의 깨달음 

삶이 곧 예술, 출발선에 다시 서다 

인간 삶의 가치 왜곡하는 도시 문명에 환멸 느껴 찾은 사막
태양이 지배하는 대자연, 예술가의 길 걷게 된 초심 일깨워


▎사막은 탐욕이 뒤엉킨 도시 문명에 찌든 영혼을 원초의 무아로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 사하라 사막에서 촬영한 ‘낙타 지도’.
사막 생활은 내가 예술 창조의 꿈을 이루어간 기나긴 여정의 한 정착지였다. 사막 생활이 나에게 무엇을 선사했을까? 다양한 체험의 양상이 이 글 속에서 이미 토로되었지만 최대의 수확이란 역시 삶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다는 원초적 융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예술이고, 예술을 하는 것 자체가 살아가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나의 관심이 어떻게 불을 지폈는지 명확한 시점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는 유별나게 자연의 경이로움에 민감했다. 비록 서울 장안 한복판에서 자라났지만, 내가 자란 봉원동 안산의 환경은 매우 풍요로운 자연의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신라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천년고찰 봉원사가 있고, 춘향가에도 나오는 안산(鞍山)의 마루가 무악으로부터 뻗어있다. 무악 정상에는 조선조의 연락망이었던 봉수대가 남산을 마주 보고 있다. 무악의 기암절벽과 봉원사 뒤편의 아름다운 수풀 속으로 조용한 오솔길들이 뻗어있다. 내 집은 거의 산동네 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에, 문 열고 나가면 곧바로 대자연의 경이와 연결되어 있었다.

나의 예술적 낭만은 이 봉원동 안산에서 그 기반을 마련한 것 같다. 나는 할머니가 키우시는 개나 고양이나 물고기의 모양이나 생태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고, 안산에서 마주치는 야생의 동물들을 끊임없이 경이롭게 관찰하곤 했다. 내가 열 살 때쯤 이미, 모든 동물의 움직이는 모습을 정확히 묘사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집안의 어른들이나 학교 선생님, 그리고 학우들이 나의 그림을 보고 환호하는 것을 보면 괜히 자신을 갖게 되고, 그 방면으로 특별한 열정을 발휘하게 된다.

예술적 낭만 싹틔운 어린 시절 서울 안산(鞍山)


▎뉴욕은 도시 문명의 결정체다. 버려진 공간에서 도시의 속살을 파헤치는 작품을 만들었다. 뉴욕 크로톤의 버려진 민물공급 수로.
내가 열 살 때 큰 화면에 백조 떼가 날아가는 모습을 가득 그렸는데, 그 모습이 하나도 겹치는 것이 없이 다양한 동작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늘로 치솟는 새, 땅으로 수직 강하하는 새, 수평으로 날아가는 새들이 화면에 가득 배치되면서 초현실주의적 전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 그림만 보고 있으면 할머니 자신이 하늘을 날아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보는 사람마다 이 그림을 극찬했는데, 할머니 장례 후에 이 그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열네 살 때부터 나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예술교육환경이라고 자부할 만큼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 매사추세츠 앤도버에 있는 필립스 아카데미(Phillips Academy)에 입학의 영예를 얻었다. 그 학교에는 예술창조를 위한 다양한 테크닉을 가르쳐주는 매우 선진적인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캠퍼스 내에 미국 예술사의 주요작품이 소장된 애디슨 갤러리(Addison Gallery of American Art)가 있었다. 이 미술관은 세계적인 박물관으로서 클래식으로부터 컨템퍼러리에 이르는 걸작들이 걸려있다. 윈슬러 호머(Winslow Homer),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잭슨 폴락(Jackson Pollack),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등 수 없는 대가들의 작품을 수시로 쳐다볼 수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봉원동 뒷산에서 본 형태와 동작과 색감이 예술사의 맥락에서 승화되면서, 대가들이 왜 대가로서 취급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비주얼 이론과 실천을 배우면서 전 지구적으로 펼쳐져 있는 예술세계를 직접 내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의대 포기하고 미술대학 선택하다


▎햇살이 들어오는 뉴욕 프리덤 터널.
1999년, 나는 컬럼비아대학을 다니기 위해 맨해튼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는 아버지의 소망에 따라 프리메드(premed) 학생이 되었지만, 컬럼비아대학은 나에게 비주얼 아트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줬다. 컬럼비아대학은 비록 과학 전공자라 할지라도 인문학의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게 하는 것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대학으로 악명이 높다. 나는 주말마다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을 했고, 그때마다 숨을 고르기 위해 반드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오브 아트에 두 시간가량 머물렀다. 컬럼비아대학생은 ID만 있으면 입장이 공짜였다.

나는 뉴욕에서 대학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아버지의 엄명을 어기고 의학도의 길을 포기했다. 아버지는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를 가라는 것이 아니라, 의학이야말로 인문학의 정수이므로 의학을 공부해도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지론을 폈지만, 나는 의학 공부를 하는 과정이 너무도 적성에 맞지 않아 괴로웠다. 괴로움의 과정 끝에 달성된 결과보다는, 즐거움 속에서 달성된 예술적 성과야말로 보다 더 많은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치료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나는 응급환자실에서 복무하면서 그 난장판 같은 생활이 내 평생을 지배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 아찔했다. 나의 아버지는 너무도 이상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나는 대학원을 미술대학으로 선택했다.

그렇게 해서 어렵게 미대를 선택했지만, 막상 미대의 생활은 공허했다. 우선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제자들의 장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한 학생이 현대적 예술 환경 속에서 예술가로서 성공하리라는 기대는 전혀 배제하고, 시니컬한 얘기만 내뱉었다. 학생들도 인문학의 소양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서로의 작품에 대하여 수준 이하의 잡설만 늘어놓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의 꿈이란 유명한 첼시 갤러리 주인의 눈에 띄어 작품이 걸리고, 스타덤에 입문하여, 화려한 뉴욕의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는 것, 그런 허황한 꿈이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나 하면 좋으련만 근원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나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나는 나의 미대 생활을 통하여 먼저 나의 현실을 직시했다. 뉴욕의 미술대학원에서 매년 수천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지만, 그중에 자기 작품을 유명한 상업갤러리에 걸 기회를 얻는 사람은 한두 명도 어렵다.

예술을 하는 것과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공존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학우는 갤러리에서 거의 몇 푼도 못 받고 잡일을 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하곤 한다. 나도 대학원을 졸업한 후, 아주 낮은 월급에 어느 미디어 회사에 풀타임으로 취직했지만, 생계보충을 위해서 밤에는 파트타임 웨이트리스 노릇을 해야만 했다.

페인팅에 내가 아무리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재능을 발휘하여 현대예술세계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꿈이라는 것을 점점 자각하게 되었지만, 그 낙심의 과정에 나를 격려하는 하나의 주제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포토그래피! 사진 예술은 작품의 결과가 단시간에 출현한다. 그 결과의 탄생 자체가 스튜디오에서 웅크리고 앉아 긴 시간을 고생하는 물리적 과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최후 생산물보다는 그 생산물을 만들기 위한 과정, 그 과정의 창조성에만 주력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삶의 과정에서 동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환경 자체가 사진작품을 위한 영감의 근원이었다. 그것은 바로 뉴욕 시티 그 자체였다. 뉴욕의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나는 아버지가 옛날에 사준 낡은 6메가픽셀의 DSLR 카메라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도시 역사 캐내는 포토그래퍼로 변신


▎가동을 멈춘 뉴욕 글렌우드 발전소.
카메라는 내가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도록 나의 시선을 훈련시켰다. 도시의 숨어있는 인프라 스트럭쳐를 보게 하였다. 메릴린 먼로가 서 있던 지하철 통풍구, 다양한 지하터널로 통하는 맨홀 구멍, 서스펜션 브리지의 기둥 노릇을 하는 타워에 올라가는 사다리 등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시에 사는 동물의 현황과 그 생태를 주목했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도시의 배면에 운집해 사는 쥐새끼들! 그들은 어두운 뒷골목, 버려진 공터, 지하철 터널, 그리고 하수구 어디든지 만재해 있었다. 나는 이 동물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인간세의 귀퉁이에 살지만, 너무도 지적이고, 또 그렇게 큰 해를 가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쥐를 페스트로서만 인식하고 혐오하지만, 쥐는 과학자들이 우리의 삶을 개선하기 위하여 실험하는 방편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나는 쥐를 따라다니다가, 지하세계나 버려진 도시 공간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보통 도회지 사람들이 무시해버린 도시의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14년 전 내가 이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였을 때만 해도 나는 도시환경 밖에서 산 적이 없었다. 나에게 도시라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와도 같은 것이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또 증오하듯이, 나와 도시라는 유기체의 관계 또한 동일했다. 뉴욕은 나에게 여러모로 넘버원이었고, 또 그에 따라 사랑과 미움의 관계도 강렬했다. 맨해튼 섬 하나만 해도 지상 500m와 지하 250m 밑바닥에 이르는 인공 구조물의 거미줄 같은 중층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 뉴욕의 다섯 개 버러(독립구)는 35개의 다리와 터널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러한 연결구조는 뉴욕으로 하여금 공학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디자인학적으로 유니크한 맛과 멋을 과시하게 한다. 나는 뉴욕시의 사람만큼이나 복잡한 해부학적 구조와 그 혼을 탐구했다. 그 창자와 혈관 속으로 침투해갔다.

과거의 유물로서 폐기된 지하철역, 터널, 하수도, 카타콤, 공장, 병원, 조선소 등등의 황량한 공간들은 나에게는 뉴욕의 무의식 세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거기에는 집단적 기억과 꿈이 아직도 과거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이 공간들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암트랙 기차 터널과 그랜드 센트럴 기차 터널에서 수백 명의 홈리스가 어떻게 살았으며, 1939년 컬럼비아대학의 랩에서 우라늄 핵을 어떻게 최초로 쪼갰는지, 그리고 또 1987년에 컬럼비아대학의 몇몇 학생들이 대학 지하실에 저장된 핵물질을 비밀 지하통로를 통해 반출하려 했던 이야기, 그리고 1837년부터 5년 동안 뉴욕에 민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벽돌로 만든 품격 있는 터널이 조성된 것 등의 역사를 캐내는 즐거움은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서 인간의 삶을 말해준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버려진 공간과 함께 시각화하는 강렬한 작품을 만들고 싶어 했는데 그냥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인간의 내음을 살려낼 길이 없었다. 그래서 버려진 공간에 사는 동물을 활용하고자 했지만, 그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 버려진 무의식세계로 작가인 나 자신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나는 문화와 시간의 외투를 벗기고, 그 공간의 물체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를 완전히 발가벗은 몸으로 만들었다. 나의 나신(裸身)은 작품의 감상자가 곧바로 버려진 공간의 인간의 내음으로 융합하게 되는 매우 직접적인 매개역할을 한다.

뉴욕의 속살을 파헤친 첫 작품


▎뉴욕을 배경으로 한 연작 프로젝트 ‘나도의 우수’ 중 윌리엄스버그 다리 위에서.
이렇게 해서 시작된 나의 첫 연작이 나를 도시 무의식세계의 한 ‘전설’로 만든 [나도(裸都)의 우수(憂愁), Naked City Spleen]라는 작품이다. 네이키드 시티, 즉 나도는 뉴욕의 별명이다. ‘스플린’(비장)이라는 단어는 보들레르의 시집 [파리의 우수, Paris Spleen]에서 따왔다. 비장에서 분비되는 쓸개즙은 우수를 자아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뉴욕에서 모든 삶은 감시 속에 있다. 내가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은 소외감과 막연한 불안을 자아낸다. 그런데 정상적인 제도권의 공간을 벗어나 도시의 무의식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와 갱생의 신선함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 버려진 망각의 공간들이야말로 닭장과도 같이 폐쇄된 뉴욕의 생활공간을 탈피하여, 감시가 없는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돈 많은 사람은 아파트 닭장을 벗어나 대자연의 별장 같은 곳으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겠지만, 나같이 가난한 예술인에게는 유령이 나올 법한 이 황량한 공간들, 옛 수로나 버려진 공장지대를 둘러보면서 작품을 만드는 것은 도시의 불안이나 소요로부터 나를 해방하는 멋진 자유의 도약이었다. 어떤 도시 공간도 버려지면 자연이 다시 클레임한다. 아름다운 자연의 정적이 깃들고 폐허 위에 생물이 서식한다. 나의 몸과 이 공간들 사이에 장벽이 사라지면, 이 폐허들은 소외에서 친숙으로, 위험에서 놀이로, 황폐에서 안식으로 그 느낌이 달라진다. 나는 나체로 이 폐허들을 구속 없이 춤추며 다녔다. 그리고 나는 행위예술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예술창작의 과정이야말로, 최후의 결과물인 사진작품보다, 더 의미 있는 영감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나의 몸을 활용한 새로운 포토그래피 연작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몸은 사진이 묘사하는 공간으로 보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감각 창구 같은 역할을 한다. 바라보는 사람이 작품의 공간을 더 직접 느끼게 하는데, 그것은 나의 나체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감각을 대신해 느끼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작품의 초점을 촉각, 즉 터치, 그리고 스킨십으로 옮겼다. 그리고 터치의 감각이 인간과 동물을 융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서구의 심신 이원론은 인간의 동물에 대한 모든 우월감을 보장한다. 동물은 진정한 영혼을 결여하고 있으며 마음을 갖고 있질 못하다고 깎아내린다. 나는 어려서부터 동물과 인간의 하이어라키(서열화)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동물의 눈만 쳐다보고 있어도 만물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나라는 인간의 존재가, 고양이나 개나 닭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그들에게는 인간의 허세나 거짓이 없다. 나에게 영혼이란 몸의 접촉을 통해서 전달되는 영기(靈氣)일 뿐이다.

이러한 나의 관념을 표출하기 위해서는 돼지보다 더 좋은 주제가 없었다. 돼지의 피부는 인간의 피부와 오묘하게 비슷하며, 그 해부학적 특성도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높은 지능, 인지능력은 잘 알려진 것이다. 나는 살아있는 돼지와 교감하는 생활을 해본 적은 없다. 식탁에 올라오기 전 상품화된 고깃덩어리로써만 해후했을 뿐이다. 대학원에 있을 때 이미 나는 대규모 공장형 양돈산업의 충격적 현실에 관해 주목한 바 있다.

슈퍼마켓에 진열된 돼지고기 한 팩에 숨어있는 많은 문제점, 우리 문명의 현실에 관해 반추할 기회가 있었다. 이러한 얘기가 지금은 많이 노출되었지만 내가 이 문제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제기할 시점인 15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미국의 식품 생산과정과 그 제국주의적 횡포에 관해 모르고 있었다. 모든 것은 비밀리에 비인간화되었고, 문제를 제기하는 동물애호 시민단체의 소리도 묵살되었다.

동물은 미개하다는 인간의 편견


▎필자가 중학교 2학년 때 그린 소묘.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면 할수록 더욱 이 주제로 깊게 빨려 들어갔고, 단순히 예술적 이미지를 창조한다는 목적을 넘어 관련된 다양한 주제에 관해 학구적 연구를 깊게 했다. 이러한 사상투쟁의 과정이 나의 사진작품에 배어있었다. 2011년 말, 나는 드디어 이 시리즈를 완성했다. 그 시리즈는 데리다의 언어를 일부 차용하여, “돼지가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The Pig That Therefore I am)”이라고 제목 붙였다. 나는 이 작품들을 아이오와주나 미주리주에 있는 대규모 양돈공장에 들어가 찍었는데, 일부는 허가를 얻는 데 성공했지만, 일부는 몰래 들어가 찍었다. 몰래 들어가 찍는 일은 목숨 걸고 하는 일이었다. 경비원들은 총을 들고 있었고 산업 마피아조직의 일원들이었다.

나는 돼지와 같이 나체로 우리에서 생활했다. 인간과 동물이 혼연한 일기(一氣)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예술적으로 과시했다. 그리고 돼지가 사육되고 도살되는 전 과정을 드러냈다. 이 사진들이 충분히 모인 후 2011년 12월, 나는 마이애미아트 바젤 기간 프라이머리 프로젝트(Primary Projects)라는 갤러리에서 사진 전시와 함께 행위예술을 감행했다. 나흘 동안 유리로 만들어진 우리 속에서 두 마리의 돼지와 함께 생활했다.

‘나도의 우수’ 시리즈는 [뉴욕타임스]가 크게 떠들어서 미국 전체에 알려졌지만, 마이애미 퍼포먼스는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중국과 유럽의 예술계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나의 작품은 착상의 기발함과 함께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모든 직장을 포기하고 예술에만 전념하는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나의 행위예술은 미국 최대의 동물윤리조직인 페타(PETA)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인가했다. 그런데 지방의 작은 시민단체들은 내가 행위예술을 하려고 돼지 두 마리를 학대했다고 생트집을 잡았다. 나는 도살장에서 곧 도살될 돼지 두 마리를 사와서 갤러리 내의 좋은 환경에서 나흘 동안 살게 했을 뿐이고, 또 그 후에는 좋은 자연농장으로 가서 살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해놓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돼지 한 마리가 폐렴 기운이 있었다. 그 돼지는 갤러리에 오기 전에 이미 좀 문제가 있었다. 갤러리는 수의사를 불러서 모든 조치를 다 취했으나, 동물권리 활동가들은 학대의 측면만을 부각해 각 신문에 크게 악담을 떠벌려 놓았다. 결국 이 돼지들이 가기로 되어있었던 자연농장에서 병든 돼지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낙타 진화 역사 속에서 ‘평화’를 발견하다


▎필자는 2011년 마이애미 아트 바젤 기간 중 프라이머리 프로젝트 갤러리에서 나흘 동안 유리로 만든 우리 속에서 돼지 두 마리와 함께 생활하는 행위예술을 선보였다.
그러자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자기들이 돼지를 가져갈 것이니 그 돼지 치료를 위해 8000달러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8000달러면 시골 농가 한 식구가 1년을 살 수 있는 돈이다! 어차피 도살되기로 되어있었던 돼지를 내가 예술 행위에 썼다고 8000달러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달래기 위해 1000달러를 내놓았다. 사실 나는 그 전시를 통해 1000달러도 벌지 못했다. 미국의 시민단체는, 이런 방식으로 자기들의 명분을 위해 목숨 걸고 일하는 나 같은 예술가들에게 터무니없는 트집으로 돈을 뜯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나머지 7000달러를 갤러리 보고 내라고 협박했다. 당연히 갤러리에 그런 협박이 통할 리 없다. 때로 미국인의 상식은 전 세계의 균형감 있는 상식과 비교해볼 때, 너무도 터무니없을 때가 많다. 방글라데시 민중의 생계 현실 속에서, 돼지 두 마리의 치료를 위해 8000달러를 내놓으라는 강탈논리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악담을 취재한 미국의 미디어들에 나는 이렇게 인터뷰를 했다.

“매일 수십만의 돼지들이 인간의 과욕을 위해 도살되고 있습니다. 나의 작품은 관중들에게 인간과 돼지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동물의 권리주의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관해 대중을 계몽하고, 공장형 대규모 양돈산업의 과도한 이윤추구를 비판해, 인간의 권리를 무시하고 지구환경을 파괴하는 짓을 방지하게 하는 데 주력해주었으면 합니다. 인간 존재와 동물 존재를 동일한 평면에서 바라보게 하는 좋은 쇼를 기획하는 작은 아트 갤러리를 괴롭히는 바보짓은 하지 마세요.”

나는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 문명에 대한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인류사의 가장 찬란한 과학적 진보와 세계의 리더십을 장악하는 나라, 미국! 그 미국은 인간 삶의 가치를 왜곡하고 있고, 사사건건 부닥치는 역설로 충만해 있다. 내가 뉴욕시에 살면서도 그 도시 삶의 제도적 폐쇄성을 탈피하기 위해 도시 안의 버려진 공간을 새로 발견했듯이, 이제는 미국 사회 전체, 아니 소위 문명화되었다는 세계 전체를 탈피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오락가락하던 즈음에 사막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찍으러 내 인생 최초로 중동권을 방문했다가 만나게 된 낙타는 그 존재 자체가 반문명적이었다. 나는 낙타의 진화 역사 속에서 “평화”라는 단어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동물과 교감하면서 같은 방식의 삶을 변치 않고 유지해온 사막의 베두인들의 예지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났다. 사막이라는 황량한 삶의 조건은 사막의 거주민들에게 낙타라는 동물에 의존치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사막에 적응한 동물 중에서 가장 큰 포유류인 낙타는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산업화한 농업이라든가 대규모 동물사육이 사막 세계에는 침투할 길이 없다. 유목민은 사막에서 살기 위해 전통적 삶의 방식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다. 문명을 거부하고 태양과 모래를 선택해야 한다.

낙타에 대한 매료는 나에게 ‘낙타 지도(駱駝之道, The Camel’s Way)’라는 연작 시리즈에 착수하게 하였다. 전시회의 이름은 대중성을 고려해 ‘낙타가 사막으로 간 까닭은’이라고 붙였다. 그때는 나의 사막생활이 3년이 걸릴 것이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그것은 포토그래피 프로젝트를 뛰어넘는 오묘한 철리(哲理) 탐구의 여행이었다. 존재 근원을 파고드는, 문명과 반문명의 존립 근거를 동시적으로 해체하는 고독한 싸움이었다.

무(無)로부터 다시 시작하다


▎‘낙타 지도’에 수록된 아라비아 사막에서 촬영한 작품.
사막에서 돌아온 후, 나는 예술을 바라보는 방식에 근원적 혁명을 일으켰다. 예술은 더는 한 개인의 자기표현 열정이나 장난이 될 수 없었다. 걸쇠가 있는 전시장 흰 벽에 걸리는 행운, 그리고 사적인 쾌락을 위해 누군가 내 작품을 구매해주기를 바라는 소망 속에서 창작행위를 한다는 것이 더는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다.

벽에다 예술품을 건다는 것 자체가 삶의 군더더기가 되는 그런 곳에서 오래 생활을 하다 보니, 그토록 선명하고 짙은 대자연의 색깔과 아름다운 구도의 시시각각의 변화 속에서 혼연일체가 되다 보니 자연스레 나를 지배하던 예술의 기존 관념들이 허물어져 나갔다. 이러한 원리적 관념의 변화는 예술세계라고 하는 연관구조, 갤러리, 박물관, 컬렉터, 비평가, 예술 생산자 등의 존재 자체를 나에게서 소외시켰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알랑방귀를 뀌어야만 한다는 당위성도 사라졌다.

내 인생을 돌이켜본다면 비교적 어린 나이에 예술가로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내가 과연 왜 예술적 삶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 원초적 충동을 망각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 같다. 사막은 무(無)였다. 사막은 나의 존재의 카타르시스였다. 존재의 모든 쓰레기를 불살라버리는 화염이었다. 나는 그 태양의 잿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나는 결국 아트 메이킹(art making)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새로운 포토그래피 연작을 시작했다. 벌레를 먹고 사는 사람들, 돼지나 소를 죽이지 않고도, 그러한 고기를 먹는 엄청난 낭비를 저지르지 않고도 필요한 영양분을 취하는 사람들의 예지를 체험하기 위하여 중국 내륙, 남미, 중남미, 남아프리카의 유기적 생활권을 탐색했다. 그리고 내 생각을 정리하는 저작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글을 쓰려면 공부를 안 할 수 없다. 글쓰기는 내 생각을 타인과 공유하기 위한 가장 정직한 방법이다. 예술의 허위성이 최소화하는 예술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나의 노동력을 요구하는 작업, 수공이나 페인팅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요즈음 미술수업의 초년병으로 되돌아갔다. 무(無)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제도화된 환경의 연관구조 속에서 어떠한 종국적인 제품을 생산한다는 선입견을 일체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완성된 작품을 내놓는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종말론적 허구이다. 물론 예술의 제도권 전체를 내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공의 교육을 위하여 매우 유효하다. 최근 나는 나의 페인트 브러시가 캔버스 위에서 어떠한 느낌을 나에게 전달하는지 그 교감에 몰두하고 있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2005호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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