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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29)] 반역과 혁명 사이, 깊어진 부자 갈등 

천명(天命)에 따라 결정한 이성계, 천명에도 불구하고 결단한 이방원 

이성계, 정몽주 죽인 아들에 격노, 이방원 “진정한 효도” 항변
허물 감당한 젊은 리더에게 지지 쏠려 ‘왕이 될 자격’ 인증


▎전북 진안에 위치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위패를 모신 이산묘.
정몽주를 죽인 조영무는 이성계의 집으로 돌아가 이방원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고려가 공식적으로 망한 날짜는 7월 12일(양력 7월 31일)이다. 그러나 4월 4일, 정몽주가 죽자 고려왕조를 지키려는 모든 저항도 끝났다. 이성계가 낙마한 3월 17일부터 17일 만이었다.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가서 정몽주의 죽음을 알렸다. 분기탱천한 이성계가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이방원에게 고함을 쳤다.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이다. 그런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는 이성계다. 그러나 건국을 결정한 이는 이방원이었다. 이성계는 최후까지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정치가가 아니다. 정치가의 본질은 ‘결정’에 있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결정을 ‘명’(命)으로 돌리고 사태를 방관했다. 인간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한 것이다. 정치 세계에서 역성혁명만큼 극적인 사건은 없으므로 이성계를 비판할 수만은 없다. 이성계의 태도야말로 천명에 가장 합당한 것이었다. 이성계가 어찌하든 결국 하늘의 뜻대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도 그렇게 진행됐다.

정치가의 소임은 천명‘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천명‘에도 불구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천명을 모르지만 어쨌든 결정해야 하는 것, 그것이 정치가의 소임이자 곤경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의 초기에는 무당이 왕이었다. 제정일치 사회에서 그랬고, 이란은 오늘날도 신정국가다. 티베트도 그랬다. 그리고 많은 정치가가 무당에게 깊이 의존한다. 공민왕도 그랬다. 공민왕은 안보(安輔, 1302~1357)의 역량을 인정해 밀직제학 겸 감찰대부, 제조전선사(提調典選事)에 임명했다. 왕의 비서실과 감찰기관, 인사행정을 모두 맡긴 것이다. 그런데 안보를 불려 임명장을 주려다가 그날이 창귀일(猖鬼日)임을 알고 중단했다. 창귀란 물에 빠져 죽거나 호랑이에 물려 죽은 귀신이다. 창귀일은 그 귀신이 창궐하는 날이다. 그러자 안보는 “왕께서 천시(天時)를 받든다는 것은 이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곧 행할 수 있는 것인데, 창귀가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인사를 다한 뒤 천명을 기다릴 뿐, 괴력난신을 믿지 않는 전형적인 성리학자의 태도다.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는 현실주의적 정의론을 주장했다. / 사진: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그러나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모든 정치가는 운명에 대한 불안, 그리고 결정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일정은 낸시 여사가 정했는데, 그녀는 전적으로 점성술가 조앤 퀴글리(J. Quigley)의 말에 따랐다.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도 무당 방올(方兀)에 의존했다. 이성계가 1392년 3월 10일에서 17일 사이 세자를 영접하러 황주로 출발할 때, 방올은 “공의 이번 행차는 비유하건대, 사람이 백 척의 높은 다락[樓]에 오르다가 실족하여 떨어져서 거의 땅에 이르매, 만인이 모여서 받드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예언했다. 이 말을 듣고 강비는 매우 근심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방올의 예언은 적중했다. 제정일치 시대의 수장은 가뭄, 홍수 등에서 비롯된 재앙에도 책임을 지고 살해됐다. 그런 의미에서 왕이란 인간의 한계를 참회하는 일종의 희생양인 셈이다. 왕은 이런 일조차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성계는 마지막 순간에 이 소임을 포기했다.

이방원에 대한 이성계의 질책을 보면, 이성계가 주저한 것은 역사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가문의 정체성을 충효로 인식한 이성계의 가치관이 걸림돌이었다. 이성계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두 가지 가치를 동시에 파괴했다고 인식했다. 사람들은 그것이 결국 이성계의 책임이라고 볼 것이다. 그렇다면 4월 4일은 이성계의 가치체계가 붕괴한 날이다. 그 날로 인간 이성계는 죽은 것이다. 그래서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비통해했다.

이방원에 대한 이성계의 분노를 보면, 마치 역성혁명이 이방원의 책임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였기 때문에 역성혁명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침표일 뿐이다. 역성혁명은 1388년 이후 진행된 정치사의 최종적 결과였다. 위화도회군 없이 역성혁명이 가능했는가? 반이성계파에 따르면, 왕명 없는 회군부터 이미 쿠데타였다. 토지 문서를 개성의 큰 거리에서 불태우며 전제 개혁을 강행한 것은 어떤가? 전근대 사회에서 토지를 빼앗는 것은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이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혁명인 것이다. 우왕과 창왕의 목을 자르지 않았는가? 그리고 최영, 조민수, 변안렬, 정지 등 숱한 장군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전공과 애국심도 이성계 못지않았다. 이성계가 진정한 정치가라면 이런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계는 궁극적으로 그 책임을 이방원에게 돌렸다.

힘에 의한 결정이 현실의 정의

이방원이 이성계의 질책에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 이방원의 항의는 두 가지다. 첫째, 정몽주를 죽인 것이 옳다는 것이다. 정몽주가 행동에 나선 이상, 이성계가 주장하는 수동적인 충의 논리가 허구라는 뜻이다. 정몽주도 충의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의 충이 진정한 충인가? 이성계의 주장대로라면 천명이 그것을 결정할 것이다. 그런데 설사 천명이 존재한다 해도, 정치와 역사의 세계에서 정의는 결국 힘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에 반발한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의 주장이다.

이성계는 젊은 시절 두 살 아래인 정몽주를 만나 크고 작은 전투에 함께 다녔다. 저 유명한 황산 전투에도 함께 갔다. 정몽주에 대한 이성계의 애정과 신뢰는 크고 깊었다. 정도전도 정몽주의 소개로 만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몽주의 온정을 기대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성계는 일찍이 이방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혹 무고를 당한다면 몽주는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를 변명해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국가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알 수 없다.”([연려실기술]) 이성계는 정몽주가 어떤 경우라도 우정을 지킬 사람이라는 것을 믿었다. 하지만 그 우정이 국가사의 경계를 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도 알았다. 몽주가 공적인 판단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을 인물이라고 본 것이다. 이 평가에 따르면, 이성계가 정몽주를 얼마나 훌륭한 인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사인(私人)으로서는 목숨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겠지만, 공인(公人)으로서는 친구도 용서하지 않는 충신이었던 것이다. 정몽주가 공격에 나서자 이성계는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런 주저에는 정몽주에 대한 깊은 미련도 깔려있었을 것이다.

정몽주는 선제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무력이 결여된 그는 정부의 제도적 힘을 동원했다. 어쨌든 정몽주와의 대결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죽는 것이 아니라 정몽주의 견해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즉, 이성계파가 왕조의 반역자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반역자로서 죽는 것이 이성계의 바람인가? 그렇지 않다면 왜 칼을 뽑지 않는가? 이것이 이방원의 생각이었다. 1388년 이후의 역사, 그리고 공양왕조차 공포에 떠는 이 현실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다만 이성계만이 충효의 관념에 사로잡혀, 혹은 결정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인정하지 않는 현실이었을 따름이다.

둘째,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인 자신의 결정이 진정한 효도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아버지가 할 소임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我當任其咎)”는 이방원의 결심이야말로 역성혁명을 가능하게 한 키였다. 문제는 그 일이 역사와 정치에 의해 더렵혀지는 소임이라는 것이다. 군주제의 절대 가치인 충을 파괴해야 했고, 또 한국 성리학의 비조인 정몽주를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자신이 섬기던 왕조를 배반하고 조선정신의 원조도 격살했다.

이성계는 1391년 초부터 정치를 떠나 귀향하고 싶어 했다. 1388년 이후 진행된 정쟁의 소용돌이에 지친 것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고뇌는 자신의 권력이 이미 왕권을 넘어섰다는 사실이었다. 왕조의 운명이 이성계의 뜻에 달리게 된 것이다. 그러자 정몽주조차 입장을 바꿨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순 없다는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이제 결단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충효의 정체성과 역성혁명 사이의 괴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낙마는 그런 심리적 분열의 현실적 결과였다. 일생을 마상(馬上)에서 보낸 무장이 겨우 새 사냥을 하다가 낙마했다. 그 결과 이성계는 이제 어떤 결정을 하지 않아도 좋게 됐다. 풀 수 없는 딜레마에서 간단히 탈출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고뇌의 짐은 이방원의 어깨 위로 옮겨졌다.

강비의 조력


▎정몽주는 사적 의리보다 공익을 추구하다 죽임을 당했다.
이방원은 단지 아버지의 일을 대신했을 뿐이다. 위화도회군의 주역으로서 이성계는 역성혁명에 따르는 정치적 책임은 물론 윤리적, 도덕적 책임도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허물’(咎)을 피하고 싶었던 이성계는 오히려 이방원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이 직면한 곤경을 은폐했다. 이제 그 책임은 이방원이 지게 됐다. 자신의 행위야말로 진정한 효도라는 이방원의 주장은 그런 진실을 밝힌 것이다. 물론 젊은 이방원이 역사의 평가까지 의식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위가 이성계를 대신한 것이며, 이성계와 가족, 그리고 이성계파 전체를 구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옹호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성계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 개국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충효를 더럽힌 이방원을 배제하고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역성혁명의 현실을 부정한 것이다. 그 결정은 조선왕조의 초입부를 형제 살해의 피로 물들였다. 이성계 자신도 왕좌에서 쫓겨나 뼈저린 회한 속에서 여생을 보냈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성계의 측근 다수가 이방원을 지지했다. 심지어 조준마저 이방원 편에 섰다. 이는 1392년 4월 4일 이방원의 결정에 대한 지지로 볼 수 있다. 이방원은 왕이 될 자격이 있다는 표시였다. 그래서 압도적 열세 속에서 시작된 이방원의 쿠데타가 순식간에 정세를 뒤집은 것이다. 현실은 무시할 수 있지만, 피할 순 없는 것이다.

이성계는 위대한 장군이었고, 인간적으로도 포용력이 큰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자기 자신과 정면으로 대면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심리학적으로 이방원은 숨겨진 이성계라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지만, 대면하고 싶지 않은 또 하나의 자신인 것이다. 이성계는 그런 이방원에게 애증을 느꼈다. 이성계가 그 사실을 현실로서 솔직히 인정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계의 윤리적 정체성은 그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질책을 당할 때, 둘째 부인 강비가 옆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한 마디도 거들지 못했다. 견디다 못한 이방원은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라고 호소했다. 그제야 강비가 나섰다. 그녀는 같이 화를 내며, “공(公)은 항상 대장군으로서 자처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라고 이성계를 비난했다. 대장부를 자처해 온 사람이 웬 호들갑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속뜻은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이제 그만하라는 것이다. 이성계가 질책을 멈출 자락을 깔아 준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성계도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방원은 사전에 강비와 협의해 허락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의 부하들에게 책임지겠다고 호언한 이방원으로서도 걱정이 컸을 것이다. 그래서 안전판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성계가 천둥같이 분노하자 강비도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강비만이 이성계에게 맞서 설득한 것이다. 이성계의 의형제로서 침식을 같이할 정도로 가까웠던 이지란도 이성계를 어려워했다. 정몽주를 죽이자는 이방원의 청에 그는 “우리 공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라며 거절했다. 강비는 이성계를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변방의 무장인 이성계가 개성의 살벌한 정치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강비의 조력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왕건과 이성계의 설화


▎이성계의 조력자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묘 정릉.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비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찬성사 강윤성의 딸이다. 이성계의 첫 부인은 한씨로서, 정종 이방과와 태종 이방원의 생모이다. 이성계보다 두 달 아래로서 1351년 15세에 결혼했다. 공민왕이 즉위한 해이다. 한씨의 부친은 안변 한씨 한경(韓卿)이다. 이성계 신도비에는 안변 세족으로서 영문하부사에 추증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안변은 이성계 가문의 세거지였던 영흥과 연접한 지역이다. 이성계는 공민왕 5년(1356) 22세 때 아버지 이자춘을 따라 처음 개경에 왔다. 이자춘은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협력해 쌍성총관부의 실지 회복을 도왔다. 그 공으로 이자춘은 종3품 상 대중대부(大中大夫) 사복경(司僕卿)에 제수됐다. 공민왕은 또한 서울에 집 한 채를 주고 개경에 거주하도록 했다. 그해 단오절 때 공민왕이 관람하는 격구 대회에서 이성계는 뛰어난 기마술을 과시했다. 공민왕 10년(1361) 이자춘이 46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이성계는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해 9월 독로강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눈부신 전공을 쌓기 시작했다.

이성계가 개경에 있는 동안 부인 한씨는 이성계의 함흥 본가에서 살다가 우왕 대에 포천 제벽동 전장으로 옮겨왔다. 그 사이 이성계는 강씨를 후처로 맞았다. 두 사람이 만난 사연에 대한 매우 낭만적인 민담이 전한다. “태조대왕이 영흥(永興)에서 송경(松京, 개성)에 왕래할 때 이 시내에 이르러 매우 갈증을 느꼈는데, 그 때 후(后)가 마침 시냇가에서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태조가 물을 청하니 후가 물을 떠서 버들잎을 띄워 드리자, 태조가 이를 노여워하였다. 후가 ‘급히 마시면 물에 체할까 염려해서입니다’ 하니 태조가 그 말을 가상히 여겨 드디어 예를 갖추어 아내로 맞이했다.”([다산 시문집]) 그 시내란 곡산의 용연(龍淵)이다. 이것은 정약용이 곡산의 노인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이 민담은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설화와 같다. 오씨는 나주인이다. 왕건이 전투로 인해 나주에 간 것은 27세인 903년, 33세인 909년, 38세인 914년이었다. 903년, 27세의 청년 장군 왕건은 궁예왕의 명령에 따라 금성군(나주)을 공략했다. 금성군은 태봉과는 멀리 떨어진 후백제의 배후지였다. 왕건이 수행해야 할 전투는 사실상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투였다. 하지만 왕건은 작전을 성공시켜 10개 현을 장악했다. 특히 909년에는 압도적인 군세의 견훤의 수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 작전들을 도운 이 지역의 해상세력이 존재했다. 바로 나주 호족인 장화왕후 오씨의 부친 오다련이다. 그러니 왕건이 오씨 처녀에게 정략적으로 접근했을 가능성이 높다. 왕건의 정략결혼은 명성이 높다. 왕건은 그 방법으로 지방호족들과 연합해 후삼국을 통일했다. 하지만 [고려사]의 기록은 신비스럽다. “태조가 수군장군으로 나주에 출진(出鎭)하여 목포에 정박하였다. 강가를 바라보았더니 오색구름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르니 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불러 사랑하였다.” 둘 사이에 912년 태어난 아이가 왕무(王武), 고려 제2대 왕 혜종이다. 이것은 [고려사]의 공식 역사기록이다.

설화는 더 아름답다. 왕건이 더운 여름날 행군하다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물을 청하니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건넸다. 왕건이 그 이유를 묻자, “갈증이 심한 장군께서 급히 마시다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랬습니다”라고 답했다. 물을 마시기 전에 왕건의 마음은 이미 시원해졌을 것이다. 같은 물이라도 얼마나 운치가 있고, 같은 말이라도 얼마나 따뜻한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전전하며 더위에 지친 왕건은 이 순박한 시골 처녀의 말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 우물터가 나주시 송월동의 완사천이다. 지금도 우물이 남아있고, 말 탄 왕건에게 물을 건네는 오씨의 동상이 서 있다. 1000년 전 두 사람의 모습이 엊그제의 일처럼 낯설지 않다. 고려와 조선의 건국자 두 사람 모두 둘째 부인과 같은 스토리의 설화를 가지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고려 귀족으로 출세한 강씨 가문


▎전남 나주에 위치한 장화왕후 오씨와 왕건의 동상. / 사진:나주시
강씨의 고향은 황해도 북동부의 곡산이다. 곡산은 개경과 평양의 사이에 있다. 그런데 이색에 따르면 “서해도의 궁벽한 곳”이다. 산이 깊고 길이 험했다. 그런데 이성계가 왜 이곳에 갔는가? 곡산은 동쪽 함길도 안변과 26㎞ 떨어져 있다. 이성계의 세거지인 함흥으로 통하는 길인 것이다. 정약용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함흥·영흥에서 송도에 가려 하면 곡산이 실로 직통길이요, 지름길입니다. 대개 고원에서 서쪽으로 양덕을 거치고 남쪽으로 곡산을 거치면 도정이 매우 가까우니, 노인들의 말이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정조 때 신덕왕후의 생가를 찾기 위해 곡산 지역을 조사했다. 그 결과 용봉(龍峯), 용연(龍淵)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에 상당한 규모의 집 터를 찾았다. “곡산부(谷山府) 관아에서 동쪽으로 5리쯤 떨어진 운중방(雲中坊)에는 ‘용연’이라 부르는 못이 있으니, 신덕왕후가 한미할 적에 버들잎을 띄운 곳이다. 일명 ‘대구계(大㪺溪)’라고 한다.” 강씨가 이 못에서 이성계를 만났기 때문에 용의 못, 즉 용연이 된 것이다. 곡산에는 이성계의 설화가 남아있는 치마곡도 있다. “곡산에서 북쪽으로 80리쯤에 있는 가람산의 남쪽에 치도(馳道)가 몇 리에 걸쳐 산꼭대기에 뻗쳐 있는데, 주민들이 ‘치마곡(馳馬谷)’이라고 합니다. 그 북쪽에는 ‘태조성(太祖城)’이 있는데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태조가 일찍이 이 산에서 말을 달리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다고 합니다.” 모두 정조에게 올린 정약용의 보고다.

강비의 가문도 누대의 명문 세족은 아니다. 개성에 세거했던 것도 아니다. 강씨의 본관은 신천(信川)인데, 4대조 강득함 때 곡산으로 이주했다. 3대조 강숙재는 동북면에서 활동했다. 강비의 아버지 강윤성의 무덤은 덕원에, 어머니 무덤은 안변에 있는 것([숙종실록])으로 봐, 강비 일족의 생활권은 곡산과 덕원, 안변 등 황해도 북부에서 동북면 일대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 가문과 생활권이 겹친다. 그러니 시골 무장과 개성 처녀가 만난 것은 아니다. 강비의 가문이 처음 관직에 나간 것은 조부 강서(康庶) 때였다. 그는 충혜왕의 폐행으로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폐행이란 왕의 사인들로서, 잡다한 신분으로 이뤄져 있었다. 상인과 천민도 있었다. 이들은 과거나 문음으로 진출한 정통 문신과는 다른 집단이다. 이른바 ‘악소’(惡少) 즉, 불량배가 이들이다. 충혜왕의 충신 이조년은 일찍이 간언을 올리며, 충혜왕이 어릴 때부터 무뢰배들과 자랐고, “악소들이 임금의 위세를 등지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강탈하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살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이조년전]) 충혜왕의 악행은 고려 역사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폐행이란 이런 악행을 조장하고 부추기며, 왕권을 등에 업고 난행을 일삼은 악소들이었다. 강서가 그런 부류의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셋째 아들 강윤충도 충혜왕 밑에서 함께 악소 노릇을 한 것이다.

악당이자 정략가 강윤충

그런데도 강서의 아들들은 크게 현달했다. 아들은 강윤귀, 강윤성, 강윤충, 강윤의, 강윤휘, 강윤부 6명이다. 이중 강윤성, 강윤충, 강윤휘는 모두 정2품의 재상 찬성사에 올랐다. 또 강윤성의 아들, 즉 강비의 오빠들인 강득룡은 정3품 삼사우사, 강순룡은 찬성사에 올랐다. 강비의 아버지 대에 곡산 강씨는 그야말로 명문의 반열에 올라섰다. 강윤성은 충혜왕대에 과거에 급제해 한림학사를 거쳐 판삼사사, 문하찬성사가 되었다. 이는 고려 문신 귀족의 정통 출세 코스로 강씨 가문은 이제 품위와 명예도 갖추게 됐다.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은 강비의 숙부 강윤충이었다. 그는 충목왕과 충정왕 2대 8년여 동안 고려 정계를 쥐고 흔든 문제적 인물이었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그는 본래 천예(賤隸), 또는 감전노(監傳奴)였다고 한다. 감전의 노비란 토지와 노비 문서를 보관하던 방고감전별감(房庫監傳別監)에 속한 노비로 보인다. 그의 부친 강서가 이미 충혜왕의 측근이었고, 형 강윤성은 과거에 급제한 문신인데 강윤충이 천예 출신이라는 기록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버지 강서 때까지 이름 없는 가문이었고, 아마도 강윤충이 아버지 연줄로 감전노부터 시작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궁궐 가까이 있다 보면 왕의 폐행이 될 기회를 훨씬 쉽게 잡을 것이었다. 실제로 강윤충은 충숙왕의 폐행이 되는 데 성공해 정4품 호군에 올랐다. 그리고 충혜왕의 깊은 신임을 받아 종3품 첨의평리까지 올랐다. 충목왕 대에는 찬성사이자, 친원파만이 제수되는 정동행성좌우사원외랑에 임명됐다. 충목왕 때가 강윤충의 황금기였다. 충목왕은 8세에 즉위해, 모후인 충혜왕의 몽고 왕비 덕녕공주가 섭정을 했다. “당시 덕녕공주가 한창때의 나이에 궁궐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강윤충과 배전이 그 거처에 드나들며 총애를 얻어 정권을 잡고 권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강윤충이 “국왕의 모친과 연결되어 음란한 짓을 자행하고 내전에서 총애를 받고 있다.”는 익명서까지 내걸렸다.

강윤충은 개혁의 공적이기도 했다. 충목왕 대에는 원순제와 기황후의 명령에 따라 전제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도감이 설치됐다. 하지만 정방제조로서 인사권을 장악한 강윤충은 정치도감의 정상적 운영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개혁이 좌초되자 분노한 당대의 대표적 유교 지식인이자 원로인 김륜, 이제현, 박충좌가 상소를 올려 강윤충을 탄핵했다. 그들은 강윤충이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그물질 하면서 천하의 공론(公論)을 꺼리지 않고 천하의 대법(大法)을 두려워하지 않은 자”이며 “한 시대를 대표하는 흉인”이므로, 궐문 앞에서 목을 베는 양관(兩觀)의 형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상소문에서 서술하고 있는 강윤충의 정치적 술수는 실로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능수능란했다. 그는 악당이었지만, 뛰어난 정략가였다.

여성 편력도 상상을 뛰어넘는데, 김남보의 처를 강간하고 백유의 처와 간통했다. 아내가 셋인데, 다시 전 밀직(密直) 조석견의 상중에 있는 처 장씨를 아내로 맞아 그 가산을 모두 차지했다. 그런데 장씨가 먼저 강윤충을 유혹했다. 강윤충이 조석견을 방문하여 함께 이야기할 때 장씨가 엿보고 반하였다. 조석견이 죽자 여종을 시켜 강윤충을 청하였는데, 강윤충이 응하지 않아서 여종이 세 번이나 그냥 되돌아왔다. 그러자 장씨가 직접 찾아가서 정을 통하였다. 심지어 일국의 왕모인 덕녕공주까지 강윤충에게 미혹돼 그에게 권력을 모두 줬다.

곡산 강씨 가문의 원나라 네트워크

이처럼 강비의 집안 내력은 아름답지 않다. 강윤충은 개혁열에 불타던 공민왕대 초에도 살아남았다. 공민왕 원년 조일신의 난으로 공민왕이 더 이상 반원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강윤충은 공민왕 3년(1354) 찬성사가 되고, 다시 판삼사사에 제수됐다. 강윤성도 공민왕 초 판삼사사였고, 장남 강득룡은 삼사우사, 둘째 아들 강순룡은 지밀직사사와 찬성사를 역임했다. 그런데 강순룡은 공민왕 3년(1354) 원나라 숭문감소감(崇文監少監)으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돼, 홍건적 장사성 토벌에 고려군을 동원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그의 몽골식 이름은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였다. 원나라 관제에서 숭문감은 번역, 도서 교정 작업을 관장했고, 소감은 종5품직이다. 곡산 강씨 가문은 원나라에도 네트워크를 가졌던 것이다. 공양왕 3년(1391) 12월, 명사신으로 고려에 온 혹은 강욀제이튀(康完者篤, Öljeytü)의 본명은 강독(康篤)으로 강득룡의 아들이며 강비의 친조카이다. 1368년 원나라가 몽골 초원으로 축출된 뒤, 그는 명나라 조정에 포섭됐을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초에 명 사신으로 온 자들은 대개 고려인 출신 환관들이었다. 강비의 가문은 격변기에도 잘 살아남았지만, 곧 커다란 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2006호 (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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