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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3)] 김유신 여동생 문희가 들려주는 삼국통일 비사(秘史) 

“신라 뒤흔든 사랑의 도피극, 큰오빠 김유신은 그 결실이었다” 

통일론 퍼뜨리려 천관녀 이용… ‘말목 자른 화랑’으로 와전
문무왕 된 아들 법민, 웃는 낯으로 칼 휘둘러 당나라 격퇴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는 삼국통일의 문을 열어젖힌 인물로 평가된다.
김유신·김춘추·문무왕. ‘삼국통일’ 하면 떠오르는 남자들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 모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여인이 있다. 김유신의 누이동생이자 김춘추의 아내이며 문무왕의 어머니인 ‘문희(文姬)’가 그렇다. 이름에 ‘문(文)’을 쓴 여성은 한국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죽고 나서 받은 시호 ‘문명왕후(文明王后)’도 마찬가지다. 학식 있고 총명한 여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 기록에선 비중 없이 다루지만 알고 보면 문희는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대업에 힘을 모으게 하고, 그 임무를 완성할 문무왕을 낳아서 키운 게 문명왕후였다. 삼국통일에 상당한 지분을 가진 셈이다.

그럼 문희라면 이 통일 대업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남자들이 아닌 여인의 ‘목소리’로 그 결정적 장면들을 역사 자료에 근거해 다음과 같이 다시 이야기해본다.

“세상을 지배하는 표면적인 힘은 두려움과 욕망이지만, 역사를 움직이는 진정한 원동력은 오직 사랑이다.” 남자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내 이름은 문희, 진골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금지옥엽 둘째 딸이다. 우리 집안은 본래 가야 왕족이었다. 증조부인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나라를 신라에 바치고 귀순해 진골이 됐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피를 잇는 유서 깊은 집안이지만 신라에서는 은근히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무늬만 진골’이요, 서라벌 귀족들의 텃세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집안이 자리 잡은 것은 할아버지 덕분이다. 각간 김무력은 새로 차지한 한강의 신주(新州)를 잘 다스렸을 뿐 아니라 매복전을 펼쳐 백제 성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진흥왕의 딸 아양공주와 결혼하고 신라 성골 왕실의 어엿한 사위가 된 것이다.

왕실을 등에 업고 잘나가던 집안에 비바람을 몰고 온 사람은 내 아버지였다. 화랑 김서현이 금지된 사랑에 빠진 것이다. 상대는 숙흘종과 만호태후의 딸 만명, 내 어머니였다. 숙흘종은 진흥왕의 동생으로 성골 왕족이었다. 만명이 ‘무늬만 진골’인 서현과 정을 통한 것을 알자 그는 딸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만호태후는 한술 더 떴다. 이 여인은 진흥왕의 며느리이자 진평왕의 어머니였다. 남편 동륜태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숙흘종과 재혼했는데 시누이였던 아양공주와는 앙숙이었다. 자신의 딸이 공주의 아들과 사귀는 것을 태후는 반대했다. 임금의 어머니라 힘도 셌다. 서현은 화랑도에서 쫓겨나 만노군(진천)으로 내쳐졌다. (이종욱 역주, [화랑세기] ‘보리공’)

하지만 사랑은 억지로 막을수록 뜨겁게 달아오르는 법이다. 어느 날 만명이 갇혀 있는 별채의 문에 벼락이 쳤다. 지키던 사람들은 놀라서 흩어졌고 만명은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벼락 운운했지만 사실은 화랑 김서현이 낭도들을 보내 사랑하는 여인을 구출한 것이다. 소행을 숨기기 위해 벼락이 쳤다는 소문을 냈다. 두 사람은 만노군으로 가서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신라를 뒤흔든 사랑의 도피극이었다.

큰오라버니 김유신은 그 뜨거운 사랑의 결실이었다. 몇 년 후 유신이 만노군에서 태어나 자란다는 소식을 듣자 숙흘종과 만호태후는 서라벌로 불러들였다. 애지중지하던 딸자식의 아이다. ‘태양의 위용’을 지닌 손자의 모습에 그들은 감격했고,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를 용서했다. 부모님은 성골 왕실의 축복 속에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둘째 오라버니 흠순, 언니 보희, 그리고 나 문희를 낳았다. 우리 집안은 유력한 ‘신흥 진골’로 떠올랐다.

유녀(遊女) 천관녀의 진짜 정체는?

집안의 기둥인 유신 오라버니는 15세의 나이로 화랑이 됐다(609년). 오라비를 따르는 낭도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했다. 신라 화랑도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수련했다.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길러졌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사들이 배출됐다.

오라버니는 어리지만 포부가 컸다. 17세에 외적을 평정하겠다는 뜻을 품고 하늘에 기도한다며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갔다. 이듬해엔 인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에서 삼국통일의 맹세를 천지신명에게 고했다.

나라에 전운이 짙게 깔려 있었다. 백제 무왕은 허구한 날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침범했고,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위세를 부렸다. 신라가 살길은 저들을 꺾고 삼국을 병합하는(幷三國) 수밖에 없다고 유신은 생각했다. 오라비는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곧장 첫걸음을 내디뎠다. 천관(天官)이 빛을 드리워 자신의 보검에 영(靈)이 서렸다는 얘기를 퍼뜨린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천관은 중국 도교에서 숭배하는 신이다. 오라버니는 천관신을 들먹이며 삼국통일의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설파했다. 낭도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였다. 동지들을 규합한다고, 부하들을 격려한다고, 날마다 술판이 벌어졌다. 내가 보기에는 삼국통일을 안주 삼아 술 마시려고 모이는 것 같았다. ‘음주승마’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서라벌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말목 자른 화랑’ 김유신의 이야기였다.

‘유신이 술 파는 여인의 집에 드나들었다. 천관이라는 유녀에게 흠뻑 빠진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의 행실을 알고 눈물 흘리며 꾸짖었다. 그는 깊이 뉘우치고 발길을 끊겠노라, 맹세했다. 며칠 후 유신은 술 마시고 밤늦게 귀가했다. 주인이 꾸벅꾸벅 조는 사이에 말이 천관녀의 집에 멈춰 섰다. 말 울음소리에 깬 유신은 깜짝 놀랐다. 어머니께 한 맹세를 어기다니! 그는 화가 나서 애마의 목을 베고 집으로 돌아갔다.’(이인로, [파한집])

소문은 그렇게 났지만 동생인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천관은 술 파는 여인이 아니었다. 유녀, 노는 계집이 아니라 화랑도에 딸린 유화(遊花)였다. 유화는 화랑의 시중을 들며 연회를 마련하는 여성들이다. 주로 서민 출신이었는데 낭도들과 정분 나는 일이 많았다. 천관도 유화였고 오라버니의 측근이었으니 염문이 나돌아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유신이 맡긴 특수임무가 따로 있었다.

오라버니는 낭도들과 함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나라를 지키는 호국선(護國仙)으로서 삼국통일을 맹세하는 의식이었다. 천관은 제사의식의 신녀 노릇을 한 유화였다. 유신에게 신령한 기운을 내려줬다는 천관신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육화(肉化)시킨 것이다. 말목을 잘랐다는 얘기도 와전됐다. 전쟁에 앞서 말의 피를 바르며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제사에 차용했을 뿐이다.

내가 아는 한 오라버니는 유화에게 정을 주는 헤픈 남자가 아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도자로 키워졌다. 늘 정치적으로 계산하며 신중하게 처신했다. 유화에게 천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신녀로 활용한 것도 삼국통일의 대의를 설파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명부인은 석가모니의 화신을 자처하는 성골 왕실에서 나고 자랐다. 맏아들이 도교 의식에 심취할까 봐 간혹 꾸짖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신은 천관녀를 앞세워 삼국통일을 효과적으로 알렸다. 낭도들은 눈에 안 보이는 천관신보다 눈에 보이는 천관녀에게 더욱 끌렸다. 살아 있는 신인데다 아름다운 여인이니 주목받는 것은 당연했다. 삼국통일은 낭도들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화제의 인물이 된 오라버니는 18세의 나이로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風月主)에 올랐다(612년). 자질도 출중했지만 무엇보다 삼국통일이라는 시대정신을 부각한 덕분이었다.

오라버니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움직이는 데 능했다. 하지만 삼국통일이 애들 장난인가? 화랑도에서는 관심을 끌었지만 거국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국력을 일으킬 인재들을 모으고 나라에 충성할 세력을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구심점이 돼줄 주군이 필요하다. 장차 삼국통일을 실현할 임금과 손잡아야 한다. 오라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나, 문희가 나설 차례가 됐다.

진지왕 혈육과 가야 출신 신흥 진골 ‘결혼동맹’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 중앙부 바위 밑에 유골함이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온다.
그이를 처음 만난 것은 오라버니가 풍월주에 오른 그해였다. 어느 날 용수공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집에 찾아 왔다. 백옥처럼 하얀 얼굴에 말을 아끼던 소년. 10세짜리 꼬마였지만 춘추에게는 고요한 위엄이 있었다. 내 마음에 새겨진 낭군의 첫인상이었다.

춘추는 진지왕의 아들 용수공과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가 부부의 연을 맺고 낳은 신라 최고의 귀공자였다. 법흥왕 때 율령을 반포한 후 진골(眞骨) 위에 성골(聖骨)이 생겼다. 성골은 왕과 그의 친형제, 그들의 자녀로 이뤄진 좁은 범위의 혈족 집단이다. 임금이 바뀌면 성골도 국왕 중심으로 재편된다. 진평왕이 즉위하면서 쫓겨난 선왕의 아들인 용수공은 진골로 떨어졌다. 그럼 진평왕은 왜 맏딸 천명공주를 용수공과 혼인시켰을까?

신라의 왕위 계승권은 임금의 다음 대 아들이 갖는다. 진평왕에게는 딸들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그의 형제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른 것이다. 고심 끝에 왕은 가까운 혈족인 용수공을 맏딸 천명공주과 혼인시켜 보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둘째 덕만공주가 임금 자질을 보이자 생각이 달라졌다. 여인의 몸이지만 성골이다. 너그럽고 총명해 나라 사람들이 따른다. 발상의 전환이 이뤄졌다. 여자 임금, 못할 것도 없다. 진평왕은 덕만을 후계자로 삼고 용수공 일가를 궁에서 내보냈다. “공의 아들은 삼한(三韓)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이종욱 역주, [화랑세기] ‘유신공’)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이다. 오라버니는 집에 찾아온 춘추를 보고 장담했다. 어린 그이를 삼국통일의 주군으로 받들겠다는 뜻이었다. 용수공은 반색하며 아들을 맡기겠다고 했다. 궁지에 몰린 진지왕의 혈육들이 가야에서 온 신흥 진골과 손잡는 순간이었다.

미래의 낭군이 문득 나에게 눈길을 던졌다. 온화하지만 또렷한 눈빛,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그 연애 사건은 내 아들 법민이 태어난 해에 벌어졌다(626년). 정월 보름날, 서라벌 거리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어울려 놀았다. 우리 집 앞에선 두 청년이 축국(蹴鞠)을 즐기고 있었다. 오라버니와 춘추공이었다.

유신은 달아나는 공을 쫓다가 일부러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찢어지게 했다. 오라비는 옷고름을 꿰매주겠다며 공을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 먼저 보희 언니에게 바느질을 시키자 쑥스러운지 거절했다. 나는 냉큼 반짇고리를 들고 손님방에 갔다. 유신이 슬쩍 자리를 비켜주니 방에는 청춘남녀만 남게 됐다. 향긋한 처녀의 체취에 그이의 볼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 가슴도 두근두근 뛰었다. 우리의 첫날이었다.

그날 이후 춘추공은 은밀히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 봄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자 내 배가 불러왔다. 이제 책임질 시간이다. 하루는 오라버니가 배부른 누이를 불태워 죽이겠다며 마당에 장작을 쌓고 연기를 피웠다. 처녀가 임신했으니 집안 망신이라는 것이었다. “문디 가시나, 니 오늘 제삿날이데이!”

뭉게뭉게 피어오른 연기는 서라벌 하늘로 치솟았다. 마치 누가 봐달라는 듯이…. 공교롭게도 덕만공주가 제사 지내기 위해 남산에 오르는 날이었다. 그것은 오라버니와 내가 짜고 벌인 연극이었다.

사실 춘추공은 보라궁주와 혼인한 유부남이었다. 두 사람은 금슬이 좋아 장안에 잉꼬부부로 소문났다. 게다가 궁주가 낳은 딸 고타소를 공이 몹시 사랑했다. 사랑을 나누고 임신했지만 그이와 결혼할 수 없었다. 첩이 되기도 싫었다. 방법은 성골 왕실로부터 중혼(重婚, 배우자를 여러 명 두는 일)을 허락받는 것뿐이었다.

진평왕이 오랫동안 재위하며 덕만공주 또한 나이가 지긋해졌다. 남산으로 행차한 공주는 우리 집에서 나는 연기에 관심을 보였다. 유신이 결혼도 하지 않고 임신한 누이동생을 태워 죽인다는 말을 듣자 덕만은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마침 곁에 있던 춘추공이 안절부절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현명한 덕만공주는 대번에 사태를 파악했다. “네 소행이구나. 속히 가서 여인을 구하라.” ([삼국유사] 기이 ‘태종 춘추공’)

성골이자 후계자인 덕만공주의 명으로 나는 무사히 혼례를 치를 수 있었다. 얼마 후 법민(문무왕)이 태어났다. 삼국 통일의 포부가 빚은 사랑의 결실이요, 하늘에서 내려준 축복이었다.

가족만큼 확실한 동맹은 없다. 대업의 밑거름이 된 낭군과 오라버니의 결혼동맹은 그렇게 성사됐다. 두 사람은 각각 명재상과 대장군으로서 신라의 국익을 위해 호흡을 맞췄다. 한 손은 외교술을 펼치고, 다른 손은 칼을 휘두르며 일심동체가 돼 나아갔다.

일례로 선덕여왕 때 백제 의자왕이 대군을 일으켜 신라의 서남쪽 40여 개 성을 빼앗고 전략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켰다(642년). 그 바람에 대야성주의 아내인 고타소가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고타소는 춘추공의 맏딸이다. 첫째 부인 보라궁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공은 홀로 남은 이 여식을 애틋하게 키웠다. 대야성에서 전해진 비보에 그이는 충격을 받았다. 온종일 기둥에 기대 멍하니 서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 “슬프다! 대장부로서 어찌 백제를 응징하지 못하랴!” _[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 11년’

마음을 추스른 낭군은 복수를 다짐하며 고구려에 구원병을 청하러 갔다. 전쟁은 싸움만 잘한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판을 잘 짜서 적을 고립시키면 승리의 길이 열린다. 춘추공은 외교관으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호랑이굴이었다. 그해에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하고 권력을 틀어쥐었다. 이 살기등등한 자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공은 떠나기 전에 오라버니를 만났다.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나눠 마시고 맹세했다.

손가락 깨물어 피를 나눠 마신 처남과 매부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김유신의 묘.
“나와 처남은 고굉지신(股肱之臣)이오. 이번에 내가 고구려에 들어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대가 어찌 무심할 수 있겠소?”

“만약 공께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 백제의 궁정을 짓밟을 것입니다. 안 그러면 무슨 면목으로 나라 사람들을 보겠소?”

아니나 다를까 고구려에 사신으로 간 춘추공은 억류되고 말았다. 연개소문은 낭군의 목숨을 위협하며 옛 땅인 마목현(충주와 문경을 잇는 고개)과 죽령(단양과 영주를 잇는 고개)을 돌려달라고 겁박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압량주(경산)의 군주가 된 오라버니는 공이 60일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정예병 3000명을 이끌고 구출 작전에 들어갔다. 고구려 첩자가 급보를 띄웠고 그이는 비로소 풀려났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낭군은 냉정하고 현실적인 외교관이었다. 국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힘의 균형이다. 공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한의 팽팽한 균형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외교관의 입장에선 그것이 삼국통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다.

진덕여왕이 즉위하자 춘추공은 후계자 자격으로 당태종 이세민을 만나러 갔다(648년). 신라의 위급한 사정을 읍소하며 힘을 합쳐 백제를 치자고 청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당연합(羅唐聯合)’이 이뤄졌다.

당태종은 몇 해 전 고구려를 정벌하려다 안시성에서 분루를 삼킨 터라 솔깃했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 군대를 주둔시킨다면 남북 합공으로 고구려를 도모할 수 있다. 반면 신라는 위험 부담이 컸다. 삼한 땅에 세계 최강의 외적을 끌어들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춘추공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해야 신라가 살 수 있다고 봤다. 공은 중국 제도와 문물을 적극 수용했다. 독자 연호와 의관도 버리고 당나라를 따랐다. 낭군이 왕위에 오르니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이다(654년). 덕분에 나는 왕비가 됐다.

오라버니는 지혜롭고 용맹한 장수였다. 유신의 전매특허는 ‘인신공양(人身供養)’ 전법이었다. 희생양이 단기필마로 돌격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목숨을 바치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을 격앙시켜 사기를 끌어올린 것이다. 백제와의 무산성 싸움에서는 비령자와 아들 거진, 종 합절이 희생양 역할을 해 승리를 거뒀다(647년).

황산벌에서는 화랑 관창과 조카 반굴에게 각각 ‘나 홀로 돌격’을 명해 계백의 5000결사대를 궤멸시켰다(660년). 독한 심리전으로 백제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다. 단, 당나라에 대한 처신은 낭군과 달랐다. 황산벌을 넘어 당나라군 진영에 이르렀을 때 나당연합군 총관 소정방이 별안간 신라 장군 김문영의 목을 치려고 했다. 계백의 저항에 막혀 약속일보다 늦게 도착한 죄를 묻겠다는 것이었다. 당나라군의 위엄을 세우고 신라군의 기를 꺾으려는 수작이었다.

가야 핏줄 신라 임금 탄생… 가락국 김씨들 주류가 되다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태종무열왕 비(碑). 신라 석조미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신라 대장군인 오라버니는 소정방에게 일갈했다. “황산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죄를 묻는구나. 이런 치욕은 당할 수 없으니 당나라와 결전을 치른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

유신은 커다란 도끼를 집어 들고 군문에 섰다. 노장의 성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 살벌한 기세에 소정방도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당연합군은 힘을 합쳐 백제 사비성 공략에 들어갔다. 의자왕은 도성에서 도망치다가 당나라군에 붙잡혔고, 700년 백제 역사는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온 오라버니는 공을 인정받아 대각간이 됐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당나라의 야심을 꿰뚫어봤기 때문이다. 저들은 고구려를 넘어 신라까지 노릴 것이다. 애초 유신에게 삼국통일은 외적을 평정해 나라의 환란을 없애는 일이었다. 그런데 삼한 땅에 세계 최강의 외적이 치고 들어왔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이듬해 태종 무열왕이 세상을 떠나고 내 아들 법민이 왕위에 올랐다(661년). 신라 제30대 문무왕이다. 오라버니와 나는 벅찬 감회에 젖었다. 가야 핏줄의 신라 임금이 탄생한 것이다. 가락국에서 온 새로운 김씨들이 주류가 됐다. 결혼동맹의 빛나는 성과였다. 외가를 우러러보는 법민의 마음은 조서에 고스란히 담겼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은 나에게 15대 조가 된다. 그 나라는 망했지만 묘는 남아 있으니 이제부터 신라 종묘에 합해 계속 제사 지내도록 하라.” ([삼국유사] 기이 ‘가락국기’)

오라버니는 조카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완성해주길 바랐다. 그것은 삼한 땅에서 당나라를 몰아내야 가능한 일이었다.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두고 신라를 계림도 독부라 칭했다. 그리고 고구려를 멸하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직할 통치에 들어갔다(668년). 그들은 삼한을 넘봤다. 이에 맞서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착실히 준비했다.

외교관의 미소 속에 대장군의 칼을 감추고


▎김유신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재매정택에 세워진 비각.
내 아들 법민은 오라버니와 선왕의 장점을 골고루 물려받았다. 그는 외교관의 미소 속에 대장군의 칼을 감췄다. 당나라에 정성껏 조공을 바치다가 갑자기 백제의 옛 도읍 사비를 기습해 웅진도독부를 신라 소부리주로 편입했다. 고구려 유민을 이끌며 부흥운동을 펼치는 안승을 고구려왕에 봉하고 당나라가 질책하면 또 사죄의 사절을 보냈다. 왕의 정신적 지주였던 유신은 마지막까지 자문하다가 79세에 세상을 떠났다(673년).

웃는 낯으로 칼을 휘두르는 문무왕에게 질렸는지, 당나라는 20만 대군을 편성해 신라를 쳤다. 그러나 신라군은 매소성에서 쇠뇌(기계식 활)를 활용해 말갈 기병대를 전멸시키고 당나라군을 크게 격파했다(675년). 이듬해에는 기벌포로 들어온 적의 수군까지 박살 내 당나라의 전의를 꺾어버렸다.

측천무후는 이 실익 없는 전쟁을 그만뒀다. 대동강 이남 지역을 신라 영토로 인정하고 발을 뺀 것이다. 오라버니와 낭군의 숙원, 삼국통일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676년). 영토만 놓고 보면 아쉽게 됐지만 부분적이나마 삼한을 통합한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신라·백제·고구려, 그리고 가야가 함께하는 ‘우리나라’가 탄생한 것이다.

나는 오라버니와 낭군, 그리고 아들의 곁에서 삼국통일의 대업에 참여했다. 왕비이자 태후로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돌이켜 보면 그이의 옷고름을 꿰매는 순간 운명이 바뀌었다. 보희 언니에게는 미안한 마음이다.

그해 연초에 언니는 기묘한 꿈을 꿨다. 서악에 올라 오줌을 눴는데 서라벌이 온통 물에 잠기는 꿈이었다. 보희는 무슨 징조인지 몰라 걱정했다. 나는 비단 치마를 주고 그 꿈을 샀다. 돌이켜보니 대업을 품는 길몽이었다. ([삼국유사] 기이 ‘태종 춘추공’)

보희 언니는 치마 한 벌에 꿈을 판 것을 후회한 나머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나는 낭군에게 권유해 언니를 첩으로 들이게 했다. (이종욱 역주, [화랑세기])

‘춘추공’ 그 후 우리 자매는 함께 살았다. 둘이서 아들딸을 많이 낳아 집에 먹을거리가 남아나지 않았다. 식솔들을 건사하다 보니 춘추공이 하루에 쌀 여섯 말,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는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언니는 내가 손이 커서 그렇단다.

여기까지 결혼동맹의 당사자로서, 또 여성의 입장에서 삼국통일 비사(祕史)를 돌아봤다. 사사로운 이야기지만 기록으로 남기고 ‘문명황후사기(文明皇后私記)’라는 제목을 붙인다. 후세에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나 문희가, 여자들이, 역사의 큰손이었다는 것을 후손들이 헤아려주기 바란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006호 (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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