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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3부)] 근·현대 서구화와 기독교 수용의 주역들(3) ‘식자공(植字工)’ 김청송 

떠돌이 조선 청년 한글 복음을 뿌리다 

영신환 팔러 심양에 갔다 한글 성경 인쇄 돕고 세례받아
서간도 한인 수백 명 개종 유도, 개신교 한국 전파 이끌어


▎1885년 고종 황제의 어가 행렬이 종로 거리를 지나는 모습.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가 촬영한 것으로 행렬 가운데 4괘 중 ‘감’이 선명한 태극기가 보인다. / 사진:광복회
1846년(헌종 12) 9월, 김대건 신부와 몇몇 신도가 순교했지만 천주교 신앙공동체 전체가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순교자들은 모든 허물을 자신들이 뒤집어쓰고 죽음으로써 신앙공동체 지도자들을 보호했다.

그 결과 프랑스 신부들을 비롯해 최양업 신부 등 지도부가 건재할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 최양업 신부와 프랑스 신부들은 전도 활동에 더 박차를 가했고 공동체는 계속 확장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할 즈음, 천주교 신앙 공동체는 신도 1만을 헤아릴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성장은 조선 권력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특히 섭정(攝政)으로 있던 최고 권력자 흥선대원군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고종 3) 봄에 이른바 병인사옥을 일으켜 프랑스 신부 10여 명과 함께 조선 신도 수천 명을 죽이고 투옥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를 침략하는 병인양요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강화됐다. 이에 따라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근대화 과정에서 천주교의 역할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1863년 고종 즉위 전후로 조선 팔도에서는 대기근이 연이어 발생했고, 생활난민이 속출했다. 여기저기에서 민란이 벌떼처럼 일어났지만 정부는 별다른 해결이 없었다. 결국 혼란과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 의해 간도와 연해주에 수많은 한인촌이 개척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간도 지역은 백두산을 경계로 서쪽은 서간도, 동쪽은 동간도 또는 북간도라고 불렸다. 한반도에서 서간도와 북간도로 넘어가는 노선은 고대로부터 형성돼 있었다. 서간도로 넘어가는 핵심 노선은 강계에서 압록강을 넘어 국내성·집안 지역으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이 길을 통해 북으로 가면 통화(通化)를 거쳐 심양이나 길림으로 갈 수 있었고, 남으로 가면 개마고원을 거쳐 함흥이나 원산으로 갈 수 있었다.

이 노선을 따라 고대로부터 수많은 영웅호걸이 역사를 만들었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만주 여진족을 공격할 때 이용한 길도 이 길이었고, 세종 때 최윤덕 장군이 만주 여진족을 공격할 때 이용한 길 역시 이 길이었다. 반대로 북쪽의 여진족이나 몽고족이 함흥이나 원산을 쳐들어올 때 이용하는 길 역시 이 길이었다.

또한 북간도로 넘어가는 핵심 노선은 회령에서 두만강을 넘어 용정, 연길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이 길을 통해 북으로 가면 길림이나 하얼빈으로 갈 수 있었고, 남으로 가면 부령, 길주를 거쳐 함흥으로 갈 수 있었다. 이 노선 역시 서간도의 강계-국내성 노선과 마찬가지로 고대로부터 수많은 영웅호걸이 역사를 만든 길이었다.

말주변도, 장사수완도 없었는데…


▎리델 신부가 그린 병인양요 기록화(1866). 프랑스 함대가 갑관진 앞에 나타나서 우리 군과 포격을 벌이고 있다.
1863년 고종 즉위 전후에 서간도로 넘어가는 핵심 노선 역시 강계에서 압록강을 넘어 국내성·집안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에 따라 당시 서간도로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평안북도의 강계 그리고 그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넌 후 국내성·집안 지역의 동가강(佟佳江) 유역에 정착했는데, 그곳은 고구려 건국 시조 주몽이 나라를 세웠던 비류수 지역이었다. 그 지역은 조선시대에 파저강이라 불렸다.

조선 후기 파저강 유역은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 사이에 자리한 중립지대였다. 여진족이 청나라를 건국하고 중원을 정복하면서 만주를 비우게 됐는데, 그들은 고향 만주를 보호하기 위해 장책(長柵)으로 둘러싸고 출입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장책과 압록강이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이 됐고, 그 중간지점은 중립지대로 간주했다.

이런 배경에서 1863년 고종 즉위 전후에 강계 지역 사람들이 압록강을 넘어 국내성 등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 결과 1870년대에는 국내성 등 서간도 지역에 개척된 한인 마을이 28개에 이르렀으며, 인구수는 거의 4만 명에 근접했다. 고대시대였다면 충분히 나라를 세울 만한 인구였다. 고대에 우리 조상들이 북에서 내려와 비류수 지역에 정착함으로써 찬란한 고대사를 만들었는데, 근대 격변기에 우리 조상들이 남에서 올라가 비류수 지역에 수십 개의 개척촌을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오묘한 역사의 섭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압록강 너머는 원천적으로 여진족 땅으로 간주했고, 그래서 서간도 28개 한인촌의 지주는 청나라 사람들이었다. 살길을 찾아 파저강 유역으로 가서 마을을 개척한 한 인들이 농사를 지으려면 청나라 지주들에게 지대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입에 풀질을 하는 것이 고국 조선보다는 좋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간도 28개 한인촌의 대다수 주민은 농사꾼이었지만, 간혹 장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의 산삼이나 인삼 또는 영신환(靈神丸)을 중국인들이 특효약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서간도의 국내성 지역 한인촌에 거주하던 김청송(金淸松) 역시 장사를 업으로 하던 상인이었다. 1881년(고종 18) 7월쯤, 김청송은 영신환을 팔기 위해 심양으로 갔다가 존 로스(1842~1915)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김청송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계기로 세례를 받게 되는지는 존 로스 목사의 [한국 기독교의 새벽](The Christian Dawn in korea,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4, 1890년, 4월)에 구체적으로 보고돼 있다.

[한국 기독교의 새벽]에 의하면 당시 조선 출신 상인에게 어느 정도 말주변과 장사수완만 있으면 돈 벌기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청송은 말주변도 없었고 장사수완도 없었다. 말은 어눌했고 거짓말도 잘하지 못했으며 행동까지 느릿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청송은 고향 국내성에서도 제대로 장사를 못했을 듯하다. 이런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김청송은 모든 재산을 털어 영신환을 구입해 심양으로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말주변도 없고 장사수완도 없는 그는 심양에서도 이익을 남기지 못했다. [한국 기독교의 새벽]에 의하면 그는 하루에 겨우 하루 비용을 치를 만큼의 영신환만 팔았다고 한다. 즉 하루 동안 영신환을 팔아서 하루치 여관비를 벌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많이 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비싸게 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싸게 팔기 위해서는 만병통치약인 듯 과대선전을 해야 했고, 또 재료도 엄청 좋은 것을 썼다고 허풍도 떨어야 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기가 확신하는 약효만 이야기하고, 또 자기가 쓴 원가에 약간의 이익만 덧붙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김청송은 큰 이익을 남길 수 없었다. 이런 면에서 김청송은 엄청 고지식한 사람이었을 듯하다.

이렇게 하루 벌어 하루에 다 써버리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사이 그나마 가져온 영신환도 다 팔고 말았다. 영신환이 떨어지자 돈도 떨어졌다. 고향 국내성에서 머나먼 심양까지 와서 갑자기 알거지가 된 김청송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시 심양에서 국내성까지 가려면 대략 보름 정도가 걸렸고, 그만큼의 여행 경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김청송은 그럴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여관에 머물 수도 없었다.

조선 전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인간 도구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3∼427년) 국내성의 2007년 1월 현재 모습. 성터는 주변 아파트의 담장으로 이용되는 등 크게 훼손됐다.
결국 여관에서 나온 김청송은 걸인이 돼 심양을 떠돌았다. 그때가 1881년(고종 19) 8월쯤이었다. 그렇게 심양 거리를 떠돌며 구걸하던 김청송은 어느 날인가 선교사의 집에 들렀고, 그곳에서 존 로스 목사를 만났다.

당시 로스 목사는 한글 성경을 출판하기 위해 한글을 잘 아는 조선인을 물색 중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김청송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었다. 이 만남을 로스 목사는 ‘섭리적 사건(Providential Accident)’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 조선 전도를 위해 미리 예비해 놓은 필연적 사건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청송은 조선 전도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인간 도구(Human Instrument)라 할 수 있었다.

존 로스 목사는 북(北)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1842년 7월 6일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70년(고종 7) 에딘버러에 있는 연합장로교회의 신학부를 졸업한 로스는 1872년(고종 10) 3월 중국 선교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후 4월 초 스코틀랜드를 떠난 로스는 4월 초 중국 산동 반도의 지부(芝不)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로스는 선배 선교사들을 만났는데, 만주에는 아직 선교사가 없으며, 조선의 경우 지난 1866년(고종 3) 토마스 목사가 선교하기 위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했다가 평양에서 순교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로스는 아직 선교 미개척지인 만주와 조선에서 선교할 결심을 하고 1872년(고종 9) 10월 요하(遼河) 하구의 영구(營口)로 가서 정착했다. 이것이 영국 개신교 장로교에 의한 만주 선교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영구 지역에서 개신교를 선교하던 로스는 조선 선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정보도 수집하고 한국어 선생님도 구하기 위해 1874년(고종 12)과 1876년(고종 14) 두 차례 봉황성의 책문(冊文)으로 갔다. 그곳에서 로스 목사는 평안도 의주 출신의 국제상인들을 만났다.

결국 로스 목사는 1876년(고종 13) 이응찬을 만나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를 로스 목사는 1877년(고종 14) [한국어 입문서](Corean Primer) 간행으로 드러냈다. [한국어 입문서]는 로스 목사와 이응찬 사이에 있었던 한국어 대화를 한글 문장과 영어 발음, 영어 번역문과 함께 실어 한국어 기초를 배울 수 있게 한 한국어 회화 교재였다. 예컨대 ‘한국어 입문서’ 앞부분은 이런 내용이었다.

“로스: 내 조선말 배우고자 한다(밑에 영어 발음 및 영어 번역문).

이응찬: 네 나를 선생 대접 하갓너니? (상동)

로스: 내 대접 하오리(상동).

이응찬: 얼마나 주갓슴마?(상동)

로스: 한 달에 넉 냥. 좋은 선생은 마땅히 중국말 안다(상동).

이응찬: 조선말 배우기 쉽다. 중국말 배우기 어렵다. 조선에서는 여인까지 언문 안다(상동-하략).”


대안 부재… 고용할 수밖에 없었던 그 남자


▎예수 탄생 후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신약전서].
위의 내용으로 보면 의주 출신인 이응찬은 평안도 사투리로 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로스 목사가 배운 한국어는 평안도 사투리였다. 이렇게 이응찬에게 한글을 배운 로스 목사는 조선에 개신교를 선교하기 위해서는 한글 성경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로스 목사는 [한국어 입문서]를 간행한 이후 이응찬 등 의주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먼저 한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인 [예수성교문답] [예수성교요령]을 한국어로 번역했고, 뒤이어 [예수성교누가복음서]와 [예수성교요한복음서]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한글 번역이 끝난 [예수성교문답] [예수성교요령] 그리고 [예수성교누가복음서]와 [예수성교요한복음서]를 인쇄하기 위해 로스 목사는 1881년(고종 18) 7월 인쇄기까지 마련하고 중국인 인쇄공을 고용했다. 중국인 인쇄공은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해고당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필요한 사람이 바로 한글을 식자(植字)할 수 있는 조선 사람이었는데, 기적적으로 1881년 8월에 김청송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김청송에 대한 로스 목사의 첫인상은 아주 부정적이었다. 우선 김청송의 눈은 졸린 듯했고, 손가락은 서툴렀으며, 걸음걸이는 느릿했다. 설상가상 생각은 굼떴고, 이해력은 형편없었다. 무엇인가를 가르쳐 이해시키려면 보통 사람의 4배나 되는 설명을 해야만 했다. 식자공으로서는 최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기에 로스 목사는 김청송을 식자공(植字工)으로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로스 목사는 한글 성경을 인쇄하기 전에 먼저 시험 삼아[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을 인쇄했다. [예수성교 문답]은 세례 신청자를 위한 요리(要理) 문답서로서, 스코틀랜드연합교회가 사용하던 장로교 교리서를 한국인에게 맞게 수정한 것이었다. 첫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문: 천지 만물이 어떻게 있느뇨?

답: 하느님이 지어낸 것이라.

문: 하느님이 뉘뇨?

답: 영하고 얼굴 없어 보지 못하니, 처음과 마지막이 없고, 능치 않음이 없으니, 하느님의 총명은 측량 없어 알지 못하니라.

문: 하느님이 어느 곳에 있느뇨?

답: 천하 각처에 없는 곳이 없느니라.

문: 하느님은 무엇을 아느냐?

답: 사람의 심사와 행사와 숨겨 하는 일과 밝혀 하는 일을 다 아느니라.

문: 하느님이 우리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느냐?

답: 우리를 양육해 늘 우리를 돌아보니 응당 공경하고 절 하리라.(…)”


[예수성교요령]은 신약성서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서 개신교의 입문서와 같았다. 첫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신약전서가 이십칠 편인데, 네 편은 예수의 내력이요, 한 편은 예수 친 제자가 만국만민에게 전한 일이요, 십일 편은 믿는 사람에게 가르쳐 전한 말이요, 일편은 장래사를 미리 말한 것이니, 이 책에 문리가 모두 한 가지이니 도무지 예수의 일이라. 이십칠 편 중 네 편은 명 왈 복음이니, 다 네 제자 지은 것이요, 이름을 의논할진대 하나는 마태요, 하나는 마코요, 하나는 노가요, 하나는 요한이니, 저들 말한 것이 모두 한 글 같으니라. (…)”

기독교 교리에 해박하고 신앙 깊어진 식자공


▎서간도 삼원포(구 삼원보) 내 한인촌의 정경. 여전히 소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은 1881년 10월에 인쇄 완료되었다. 뒤이어 신약전서 중 [예수성교누가복음서]가 인쇄되기 시작했다. 총 27편의 신약전서 중에서 ‘누가복음’이 첫 번째로 선정된 이유에 대해 로스 목사는 “고려인들 사이에서 최초로 유통될 하나의 복음을 신중하게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서 ‘누가복음’을 선정했다”고 했다. 아마도 그 의미는 신약전서의 4복음 중에서 ‘누가복음’이 ‘유대인보다는 만국만민의 구원’에 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복음으로서 조선 전도에 유리했기 때문이었을 듯하다.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을 식자하는 과정에서 김청송은 기독교 교리를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됐다. 식자하기 위해서는 글자 하나하나를 자세히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식자에만 신경을 썼을 테지만, 점차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다. 결국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이 인쇄 완료되는 10월쯤에 김청송은 기독교 자체에 큰 흥미를 갖게 됐다.

[예수성교누가복음서]를 인쇄할 때 김청송은 식자하는 틈틈이 ‘누가복음’의 용어와 문장이 무슨 뜻인지 중국 인쇄공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들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누가복음’을 식자하면서, 또 중국인 인쇄공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김청송에게는 신앙심이 솟아났다.

그는 자청해서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간청했다. 김청송을 어리석고 굼뜨며 영성(靈性)도 없다고 무시하던 로스 목사는 세례문답을 진행하면서 매우 놀랐다. 김청송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 너무나 해박했기 때문이었다.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 그리고 [예수성교누가복음서]를 식자(植字) 하면서 김청송은 기독교 교리 자체를 심도 있게 이해했다.

그것은 단순한 인간의 이성에서 결과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영성이 발현된 결과가 아닐까 짐작된다. 결국 로스 목사는 김청송에게 세례를 줬다. 그때가 1882년(고종 19) 2~3월쯤이었다. 김청송은 조선인 세례인 중 다섯 번째였다.

그런데 [예수성교누가복음서]의 어떤 내용이 김청송의 영성을 자극해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세례까지 받게 했을까? 그 부분에 대한 명시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누가복음’ 앞부분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의 찬가’에서 김청송의 영성이 자극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성모 마리아의 찬가’는 누가복음 1장 46절에서 56절의 내용인데,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핵심적인 내용은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보내셨도다. (…)”이다.

압록강 건너 강계 등지로 기독교 급속 전파

이런 내용 중에서도 특히 김청송의 영성을 자극한 부분은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리셨으며’라는 내용일 듯하다. 조선의 상인 출신이자 고지식한 성품의 김청송은 평생을 멸시받으며 굶주렸을 것이다, 그런 김청송을 세상은 박대하고 비웃을 뿐 그 누구도 위로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김청송처럼 비천하고 굶주리는 자들을 ‘높이셨고,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리셨다’고 선포했다. 김청송 입장에서는 바로 자신처럼 비천하고 굶주리는 자들을 높이고,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린다는 기독교 하나님이 구원자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살아생전 늘 두려움과 공포에 떨던 김청송은 그런 자신을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누가복음’의 선포에 크나큰 용기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김청송이 세례를 받은 직후인 1882년(고종 19) 3월 [예수성교누가복음서]가 인쇄됐고, 뒤이어 5월에는 [예수성교요한복음]이 인쇄됐다. 그 즈음 또 한 번의 ‘섭리적 사건’이 일어났다. 식자공이 되고자 하는 조선인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손도 빠르고 머리도 영리했다. 로스는 김청송 대신 그를 식자공으로 고용했다.

대신 김청송에게는 식자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맡겼다. 바로 인쇄가 끝난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 그리고 [예수성교누가복음서]와 [예수성교요한복음]을 서간도의 한인촌에 반포하는 일이었다. 김청송은 본래 행상을 하던 상인이었기에 인쇄한 책들을 서간도에 가져가 팔기도 하고, 기독교 전도도 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개신교에서는 권서(勸書)라고 했는데, 김청송이 최초의 조선인 권서였다.

1882년(고종 19) 5월쯤에 김청송은 수백 부의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 그리고 [예수성교누가복음서]와 [예수성교요한복음]을 짊어지고 서간도로 향했다. 보름 후 서간도에 도착한 김청송은 28개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기독교 서적들을 팔기도 하고, 기독교 교리를 전도하기도 했다.

아마도 28개 한인촌 사람들은 김청송을 보고 매우 놀랐을 듯하다. 과거 어리숙하고 고지식하기만 하던 김청송이 자신만만하고 용기 충천한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김청송이 가져간 수백 부의 기독교 서적은 몇 달 만에 다 팔렸다.

1882년 연말에 다시 심양으로 돌아온 김청송은 1883년(고종 20) 연초 다시 수백 부의 기독교 서적을 가져가 서간도에 뿌렸다. 이 결과 1882년 후반부터 1883년 전반에 서간도의 28개 한인촌에는 대량의 기독교 서적이 뿌려졌고, 수백 명의 조선인들이 개신교 신자로 개종했다. 한글 성경의 위력이었다.

개신교 신자로 개종한 서간도의 조선인 신자들은 로스 목사로부터 세례받기를 원했다. 그 결과 로스 목사는 1884년(고종 21) 겨울 서간도의 4개 한인마을에서 75명의 신자에게 세례를 줬고, 다음 해 5월 또다시 서간도로 가서 14명의 신자에게 세례를 줬다.

이들에 의해 서간도의 28개 한인촌은 물론 압록강 너머의 강계 등지에도 개신교가 급속히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사실에서 서간도에 개신교 한글 복음을 최초로 뿌리고, 그로써 개신교를 한국 사회에 최초로 소개한 주인공은 바로 고지식한 상인 김청송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007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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