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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30)] 역사 바꾼 ‘비선 실세’ 신덕왕후 강씨의 이력 

몰락한 귀족의 딸, 역성혁명 막후 조율 

친원파 강씨 가문은 고려 말 反개혁 선봉… 공민왕 때 일족 3형제 처형당해
아버지 잃은 강씨 경남 진주 외가서 성장, 왜구 토벌하러 간 이성계 만난 듯


▎경남 진주시 청곡사에 부처님의 자비를 바라는 연등이 달려 있다. 청곡사는 이성계와 강씨의 인연이 시작된 장소로 알려져 있다. / 사진:뉴시스
충혜왕 시대에 일어나기 시작한 강비의 가문은 충목왕 시대에 번성했다. 충정왕 시대와 공민왕 시대 초반까지 큰 탈 없이 유지됐다. 그러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단행하면서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강씨 일족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힌 듯하다. 특히 강윤충이 표적이 됐다. 그렇게 된 이유는 강윤충이 충목왕 때 정치도감의 전제개혁을 가로막은 원흉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정치도감의 개혁을 주도한 것은 왕후와 이제현 등 개혁적인 문신세력이었다. 이들은 공민왕과 인연이 깊다. 공민왕이 강릉대군으로 원의 수도에 있을 때, 그를 즉위시키기 위해 애쓴 인물들이었다. 특히 왕후가 그렇다.

왕후(王煦)의 본명은 권재로서, 아버지는 권보이고 형은 권준이다. 권보는 안동 권씨를 명문세족으로 만든 가문의 창시자였다. 고려 말 개혁적 문신세력의 중심인물인 이제현이 권보의 사위로서, 왕후의 처남인 셈이다. 왕후의 형 권준은 충선왕의 지우를 받았다. 그런 인연으로 왕후도 충선왕의 총애를 받았다. 너무 총애한 나머지 권재에게 왕후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왕실의 일원으로 삼았다. 고려에 있을 때 충선왕은 왕후를 자신의 수레에 늘 태우고 다녔다. 원의 수도 대도에 돌아가서는 황태자를 시위하는 시구르치(速古赤)로 삼고, 계림군공의 봉작을 내리도록 했다, 대도 안에 저택과 토지도 줬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왕후를 충선왕의 동생(王弟)이라고 불렀다. 충선왕은 원나라 중앙정치에 깊숙이 연루돼 정치적 풍상을 겪었다. 1321년 티베트에 유배된 충선왕이 죽은 뒤 시신을 모시고 귀국했으며, 평생 매월 1일과 15일에 왕릉에 제사를 지냈다. 평생 충선왕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이다.

티베트에서 죽은 충선왕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왕생극락을 기원하기 위해 1397년 제작된 향완. / 사진:국립진주박물관
1345년 충혜왕의 폭정에 이어 충목왕이 즉위하자, 왕후는 첨의우정승이 되었다. 그는 즉시 인사권을 정방에서 전리사, 군부사로 귀속시켰다. 정방을 폐지하고 인사정책을 정상화하는 것은 무신정권 이래 개혁적 문신세력의 비원이었다. 왕후는 또한 권문세족이 불법 점탈한 경기 일대의 녹과전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줬다. 이 또한 중요한 개혁과제 중 하나였다. 녹과전은 고려의 전시과 제도가 붕괴한 뒤, 문신 관료에게 지급한 땅이었다. 별도의 경제적 기반이 없는 하급 관인들에게 녹과전은 생명줄이었다. 이마저 대부분 권문세족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왕후는 곧 파직됐다. 그의 개혁조치들이 기득권의 핵심인 관직과 토지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346년 왕후는 황제의 명령으로 원에 갔다. 원 순제는 그에게 충혜왕의 실정에 관해 물었다. 왕후는 소인배가 그렇게 인도했고, “그 무리가 아직도 남아있고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또한 지금의 임금도 망치려고 한다”고 답했다. 충목왕과 그 지지 세력에게는 위험천만한 발언이었다. 왕후가 임금을 망친 핵심 인물로 지목한 것은 강윤충이었다. 왕후가 원나라에 갈 때, 조득구와 전제개혁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자 조득구는 “강윤충이 어린 국왕의 옆에 있으면서 임금을 나쁜 데로 몰고 있으니, 정말로 정치(整治)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그를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조득구는 원래 충혜왕의 폐행으로서, 왕에게 오직 재물 모으는 계책을 올린 인물이었다. 이른바 악소, 즉 무뢰배였다. 이런 조득구였지만 강윤충에 대해서도 그만큼 잘 아는 인물이었다. 왕후도 “전대의 일은 강윤충이 기실 재앙의 근원이니, 먼저 그를 퇴출시켜야만 폐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러자 원 순제는 “너는 가서 그들을 다스리라”고 전권을 부여했다.

백성들이 부모처럼 여긴 왕후

1347년 왕후는 황제의 밀지를 받들고 고려로 귀국했다. 그 밀지의 내용은 첫째, “왕후를 복직시켜 정승으로 삼으라”는 것, 둘째, “정치도감을 설치해 문란한 전제를 개혁하라”는 것이었다. 왕후는 정치도감 판사로서 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다. 황제의 명령이니 거칠 게 없었다. 개혁 문신들이 대거 속관에 임명돼 전국에 파견됐다. 그들은 토지를 측량하고, 부정하게 점탈된 토지를 반환하고, 관련자를 처벌했다. 공전을 정승 채하중에게 뇌물로 바친 이천현의 아전은 귀를 잘렸다. 황제는 사신을 파견해 왕후를 격려하고 개혁을 독려했다. 그런데 기황후의 집안 동생 기삼만이 토지를 불법 점탈한 죄로 곤장을 맞고 순군옥에 하옥됐는데, 갑자기 사망했다. 황족의 인척이 관련된 사안이었으므로 정동행성 이문소가 정치도감 속관 서호와 전녹생을 심문했다. 원나라에서도 직접 사신을 파견해 정치도감 속관 모두를 심문하고 장형에 처했다. 그 뒤 황제는 다시 개혁을 독려했지만, 결국 개혁은 물거품이 되었다.([왕후전])

왕후의 개혁을 배후에서 방해한 게 강윤충이었다. 조득구의 발언을 전해 듣고 강윤충은 위협감을 느꼈다. 그래서 왕후를 견제하고자 했다. 그는 왕후와 함께 정치도감 판사를 맡은 김영돈을 이용했다. 김영돈은 충혜왕의 충신이었다. 그는 김방경의 손자로서,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했다. 1339년 충혜왕을 제거하고 심왕 왕고를 옹립하려는 조적의 난 때 왕을 지켰다. 그 공으로 1342년 1등공신이 되었다. 이제현과 강윤충도 함께 1등공신에 봉해졌다. 왕고 무리의 음해로 충혜왕이 원에 붙잡혀 가자 그는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법”라고 말하며, 구원에 진력했다.([김영돈전])

김영돈은 1346년 왕후가 원에 갈 때 같이 갔다. 그리고 1347년 황제의 명을 받들고 고려로 귀국해, 왕후와 함께 정치도감 판사가 되어 전제개혁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는 강윤충에게 설득당해 정치도감 운영을 둘러싸고 왕후와 대립했다. 1348년(충목왕 4) 1월, 이제현, 김륜, 박충좌 등 문신 원로들이 올린 상소에 따르면, “겁을 낸 강윤충이 음흉한 꾀를 몰래 꾸민 후, 김영돈을 속여 왕후를 견제하게 함으로써 폐정 개혁을 망쳐버렸다”고 한다.([강윤충전]) 강윤충은 정치적 권모술수의 달인으로서 우왕 대의 이인임을 방불케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인임처럼 세련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치도감의 개혁이 기삼만 사건으로 중단되자, 황제는 개혁을 재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당시 정방제조로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강윤충은 자기와 친밀하고 대민업무에 어두운 자들을 정치도감 속관에 임명했다. 도감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것이다. 또한 왕후를 최고위직인 영도첨의로 승진시켜, 정치도감의 실권을 빼앗았다. “왕후가 일을 하나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은 기실 강윤충의 훼방 때문이었다”는 이제현의 주장은 사실이었다.([강윤충전])

1348년 다시 정승이 된 왕후는 선정을 베풀었다. 개경과 양광도, 서해도에 큰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구휼했다. 덕분에 많은 백성이 생명을 건졌다. 1349년 충목왕이 죽자 왕후 등은 이제현을 원에 파견해 표문을 올려 새 왕의 임명을 요청했다. 그들의 희망은 충혜왕의 동생이자 뒤에 공민왕이 된 강릉대군이었다. 이제현이 가지고 간 표문은 단지 황제의 처분을 청했을 뿐 특정인을 지목하지는 않았다. 다만 공민왕과 충정왕을 후보로 거명하면서, 공민왕을 충혜왕의 아들인 충정왕 앞에 놓았을 뿐이다. 또한 선택의 주체로서 황제의 마음(帝心)과 함께 백성의 바람(民望)도 언급했다. “지금 왕기(王祺)는 보탑 실리왕의 친동생이며 진작 상국 조정에 입시해 있으며 나이는 19세입니다. 왕저(王㫝)는 보탑실리왕의 서자이며 현재 본국에 있는데 나이는 11세입니다. 폐하께 엎드려 바라건대, 선택하는 것은 폐하의 마음에 달려 있으니 백성의 바람에 따라 특별히 왕위 계승의 분부를 내리시면 황제의 명을 받들어 변방이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고려사] 충정왕 즉위년 12월)

백성의 바람은 압도적으로 공민왕이었다. 그러나 충정왕이 즉위했다. 그해 왕후는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원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그리고 귀국 도중 창의현에 이르러 5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창의현은 오늘날 랴오닝성 선양(沈陽) 부근이다. 그는 “두 번 재상이 되었는데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에게 해로운 것을 제거하는 것(興利除害)을 마음으로 여겼다”는 역사의 평가를 받았다. 1347년 두 딸을 황제에게 바친 친원파의 거두 노책은 그런 왕후에게 원한이 있었다. 정치도감 때 자기 일을 조사해서 치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후의 시신이 요동에서 운구 되는 도중, 노책은 연변의 여러 역에 명령해 시신을 정청(正廳)에 두는 것을 금지했다. 관청에서 장사를 치르는 것도 금지했다. 그러나 “역리들은 영구를 바라보고는 부르짖으며 울며 맞아들여 부모처럼 제사를 지냈다.” 백성들은 왕후에 대한 깊은 고마움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공민왕의 강윤충을 향한 원한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의 오빠 강순룡에게 내린 왕지.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공민왕도 왕후를 잊지 않았다. 1352년 즉위교서에서 공민왕은 왕후의 공을 치하했다. “내가 10년 동안 원에 입조해 있을 때 호종한 신하 가운데 시종일관 한 마음으로 나를 섬겨서 공적이 특히 현저한 사람에게는 이미 관직을 내리고 포상하였지만, 관계기관은 옛 규범에 의거하여 녹권(錄券)을 시행하도록 하라. 광산군 김인연과 밀직사 박인간, 정승 왕후는 불행히 먼저 세상을 떠나 내가 이를 몹시 애도한다. 마땅히 시호를 추증하고 그 자손을 녹용하도록 하라.”([고려사] 공민왕 원년 2월) 공민왕 사후 왕후는 이제현 등과 함께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됐다. 저 세상에서도 공민왕의 영원한 신하로 남게 된 것이다.

이런 일 때문에 공민왕이 강윤충을 잊을 리 없다. 공민왕의 즉위교서를 본 강윤충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왕위 계승전에서 두 차례나 패한 공민왕의 마음에 원한이 쌓이지 않았을 리 없다. 더구나 그는 국가를 일신하려는 개혁 의지로 충만했다. 이런 점만 생각하면, 강윤충은 공민왕의 제1호 처형 대상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즉위 초 즉각 정치보복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 반대로 여러 정치세력을 망라해 서연의 구성원으로 임명하고, “경전, 역사서와 법언(法言)에 대해 강론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보복 대신 협력을 요청한 것이다. 강윤충도 처벌되지 않았다. 오히려 1354년 다시 찬성사가 되었고, 판삼사사에 임명됐다. 그 사이 그는 홍건적인 장사성의 난을 토벌하기 위한 고려 원정군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됐다가 무사히 생환했다. 하지만 그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1356년 5월 18일, 공민왕은 전격적으로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기철·권겸·노책 등 친원파를 모두 처형하고 반원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한 달 뒤인 1356년 6월 20일 충혜왕의 서자 석기(釋器)를 옹립하려는 역모 사건이 일어나 주모자인 재상 손수경은 참수되고, 이에 연루된 강윤충이 동래현령으로 폄출됐다. 결정적인 몰락의 시작이었다. 이 역모 사건은 진상이 의심스럽다. 석기의 어머니는 은천옹주 임씨로서, 외조부는 사기그릇을 파는 상인 임신이다. 은천옹주는 충혜왕이 원에 잡혀갈 때 고용보에 의해 궁궐에서 쫓겨났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고 귀국하기 전 이제현이 임시 정승으로서 국정을 서리할 때, 석기는 머리가 깎여 만덕사에 안치됐다. 출가시킴으로써 왕위를 위협할 위험을 제거하고, 동시에 석기의 생명을 보호한 것이다. 공민왕은 훌륭한 자질을 갖춘 왕이다. 그러나 권력에 매우 민감해, 왕권을 위협하는 어떤 것도 관용하지 않았다. 즉위하자마자 그는 폐위된 조카 충정왕을 강화도에 유배시키고 독살했다. 석기도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원나라가 석기를 원에 소환하고자 하였다. 석기가 원에 간다면 공민왕을 위협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석기는 “용모가 매우 훌륭하고 언변이 범상치 않아 보는 이들이 모두 ‘이 사람이 진짜 왕자다’라고 하였다”고 한다.([고려사] 충혜왕 왕자 석기) 그것이 오히려 석기의 명을 재촉했다. 공민왕은 역모죄로 석기를 제주도에 안치시켰다. 실제로는 압송관 이안과 정보에게 도중에 바다에 빠트리게 했다. 그러나 석기는 도망쳐 승려로 숨어 살았다. 압송관이 차마 죽이지 못한 것이다. 그는 공민왕이 죽은 이듬해인 1375년 안협(강원도 이천)에서 체포됐다. 목인길 등이 처형에 반대했지만, 우환을 우려한 집권자 이인임은 최영 등과 협의해 처형을 결정했다.

동래현에 폄출된 강윤충은 결국 1359년(공민왕 8)에 처형됐다. 그가 처형된 것은 채하중 역모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채하중은 본래 충선왕과 심왕 왕고의 측근이었다. 채하중의 부친은 찬성사 채홍철이고, 어머니는 김방경의 딸이다. 채홍철도 충선왕의 핵심 측근이었다. 충선왕은 재위 기간 대부분을 원나라 수도 대도에 머물렀다. 자신을 고려인보다는 몽골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라는 자부심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쿠빌라이는 어린 외손자를 침실에 불러 이야기를 나눌 정도 귀여워했고, 충선왕의 총명함을 인정했다. 충선왕은 또한 원 무종과 인종의 즉위에 직접 기여했기 때문에 원 중앙정치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고려왕과 요동을 지배하는 심왕(瀋王)이라는 두 개의 왕위를 가졌다. 그에 따른 정치활동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채홍철은 문무관에게 베를 거두고 부자의 재물을 강제 추렴하여 그 비용을 감당했다. 그는 충선왕의 고려내 재정 담당자였던 셈이다.

채하중은 충숙왕 때 호군이 됐고, 원나라 5품 관직에도 임명됐다. 몽고 이름은 카라테무르(哈刺帖木兒)였다. 그는 충선왕 뿐 아니라 심왕 왕고에게도 충성했다. 왕고의 아버지는 충렬왕의 장남 강양공 왕자이다. 충렬왕의 왕비 안비가 그를 낳았으나,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면서 왕위 계승권을 상실했다. 정상적이었다면, 충선왕의 왕위는 원래 왕자의 것이고, 충숙왕의 왕위는 왕고의 것이었다. 그런데 충선왕은 조카 왕고를 총애하여 1313년 그를 충숙왕의 세자로 삼았다. 1316년에는 심왕 자리도 물려졌다. 왕고의 꿈은 고려 국왕이었다. 그래서 충숙왕, 충혜왕과 길고 치열한 왕위 다툼을 벌였다.

몽고풍에 젖은 충혜왕

첫 싸움은 1320년 벌어졌다. 1320년 황제에 오른 원 영종은 왕고를 총애했다. 이를 기화로 고려내 충선왕의 측근 채홍철·권한공·채하중·조적 등 이른바 심왕당의 심왕옹립운동이 추진됐다. 이 운동은 거의 성공할 뻔 했다. 1321년 충숙왕은 원에 소환돼 황제의 모진 질책을 받은 뒤 옥새를 빼앗기고 5년간 억류당했다. 심왕당의 계책은 99% 달성됐다. 그래서 채하중은 원나라 사신 김가노와 함께 귀국해, 황제가 왕고를 고려 국왕에 임명했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심왕당의 기도는 허무하게 무산됐다. 1323년 영종이 피살되고 태정제가 즉위했다. 충숙왕은 복위돼 1325년 귀국했다. 채하중과 조적 등은 포기하지 않고, 대도에 거주하던 2000명의 고려인과 함께 원 중서성에 연명장을 올려 충숙왕을 고발했다. 근친 간 권력투쟁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은 1330년 장남 충혜왕에게 양위했다.

그런데 1332년 아스트족 친위군사령관 바얀(伯顔, Bayan, ?~1340)이 킵차크 친위대사령관으로서 원 문종대와 혜종(순제) 초기의 집권자인 엘테무르(燕帖木兒, El-Temür, 1285~1333)를 제거하고 집권했다. 바얀은 충혜왕을 발피(潑皮, 망나니)로 부르며 미워했다. 그 이유는 정적인 엘테무르와 충혜왕의 관계 때문이었다. 엘테무르는 충혜왕이 세자로서 대도에 입조할 때 보고, 크게 기뻐하며 친자식처럼 사랑했다. 고려인 어머니를 둔 충혜왕이 1330년 왕위에 오른 것도 그 덕분이었다. 1332년 왕고는 바얀의 도움으로 충혜왕을 탄핵했다. 1330년 즉위 후 벌인 충혜왕의 행악은 상상을 넘었다. 그는 왕이라기보다 그냥 무뢰배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 원에 압송됐다. 그런데 왕고는 이번에도 고려왕이 되지 못했다. 충숙왕이 복위한 것이다.

1339년 충숙왕이 죽었다. 충숙왕은 행실이 문란하고 몽고풍에 젖은 장남 충혜왕을 발피로 부르며 싫어했다. 하지만 죽음에 앞서 충혜왕에게 왕위를 잇도록 유언했다. 충혜왕은 원 정부에 왕위 계승을 요청했지만 태사(太師) 바얀이 거부했다. 그는 “발피는 비록 적장자이지만, 반드시 왕으로 복위시킬 필요는 없다. 왕으로서는 오직 왕고(王暠)만이 가하다”고 공언했다. 그 사이 충혜왕은 부왕 충숙왕의 셋째 부인이자 몽고여인인 경화공주를 강간했다. 분노한 경화공주는 왕고의 측근이자 전 좌정승 조적에게 이 만행을 알리며 호소했다. 조적은 왕고에게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내가 정승으로서 왕의 황음무도한 행동을 보고도 상국 조정에 알리지 않으면 그 죄가 내게 돌아오게 된다. 왕이 나를 죽이려 할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군사 1000명을 모아 새벽 3~5시경 왕궁을 습격했다.

충혜왕은 직접 선두에 나서 공격을 막아냈다. 조적은 살해됐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원은 사신을 보내 경화공주 사건을 조사하고, 충혜왕을 원에 압송했다. 이것이 두 번째였다. 당시 바얀은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자였으므로, 충혜왕에게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그런데 1340년 바얀이 조카 톡토(脫脫, Toγto)에 의해 축출됐다. 운 좋은 충혜왕은 다시 고려로 돌아왔다. 그리고 왕고는 1344년 고려에 귀국해 이듬해 세상을 하직했다.

“옥사를 성립시켰으니 내게는 자손이 없을 것”


▎조선왕실의 족보를 담고 있는 선원계보기략. /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심왕 왕고의 야심은 불발로 끝났다. 그런데 채하중은 살아남았다. 조적의 난 때 입장을 바꾸어 충혜왕 편에 섰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일등공신이 됐다. 그는 충혜왕에게도 충성했다. 하지만 1343년 기철 등의 고발로 충혜왕이 세 번째 원에 잡혀갔을 때, 그는 적극적인 구원 활동을 펼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충혜왕의 생모 명덕태후는 채하중을 비난했다. “경은 수상이 되어 임금의 잘못을 보고도 어찌하여 바로잡아 구하지 않고 이에 이르게 하였는가? 그저 아첨을 떨고 임금의 뜻만 따라 한 번도 간언하지 않은 것은 다만 그 녹봉과 자리만 굳게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 왕이 잡혀 가게 되었는데도 경은 일찍이 한 사람도 보내어 기거의 편안함을 묻지 않으면서 뻔뻔하게 부끄러움도 없다. 지금 비록 술과 음식을 갖추어 준들 내가 어찌 차마 목구멍으로 넘기랴?”([고려사] 충숙왕 후비 명덕태후 홍씨)

충목왕이 즉위하자 채하중은 우정승에 중용됐다. 충혜왕의 악행과 폐정을 조장한 폐행들을 처벌했고, 충목왕의 서연시강이 되어 왕의 교육도 담당했다. 그는 공민왕 대에도 재상에 임명됐다. 공민왕 3년 우정승, 영도첨의에 올랐다. 채하중은 1342년 13세의 강릉대군 왕기(공민왕)가 원에 입조할 때 수행한 공이 있었다. 1353년 10월, 채하중은 황태자의 생일인 천추절을 축하하기 위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당시 중국은 홍건적의 난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채하중은 귀국해 고려의 군사를 동원하겠다고 원 정부에 건의했다. 원에 공을 세워 다시 재상이 되려는 의도였다. 귀국해 원군을 요청하는 집권자 톡토의 말을 왕에게 전했다. 또한 채하중을 재상에 임용하라는 황제의 지시도 전해, 다시 시중이 됐다.

그러나 1356년 반원정책이 단행된 지 3개월 뒤 채하중은 순천에 유배됐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의 원군을 자청한 죄였을 것이다. 이 와중에 채하중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1357년 승려 달선이 채하중의 유배지로부터 만호 전찬(全贊)을 찾아와, “채재상께서 공과 함께 큰일을 도모하고자 합니다”라는 말을 전했다. 이게 누설돼 달선과 전찬은 순군에 수감돼 문초를 당했다. 수십 일간 고문을 당하자 채하중은 거짓 자백하고 목을 매 자살했다. 고려정부는 큰 거리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심문관인 이인복은, “채하중이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 올바르게 처리하지 못하고 옥사를 성립시켰으니, 내게는 자손이 없을 것이다”라며 탄식했다. 이인복은 이조년의 손자이자 이인임의 친형이었다. 원 과거시험인 제과에도 합격한 인재이자 공정한 인물로서, 공민왕 대의 대표적 명신이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면, 채하중은 공민왕의 의도에 따라 제거된 것이다.

친원파 채하중의 정치적 자살


▎진주 청곡사 전경. 879년 창건됐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602년 중건됐다.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채하중 사건에 연루돼 강윤충의 형인 판삼사사 강윤성(康允成), 동생 판관 강윤휘(康允暉), 그리고 이성계의 동서이자 강윤성의 맏사위인 신귀(辛貴)도 체포돼 국문을 당했다. 그런데 강윤성과 강윤휘에 대한 처벌 기록은 없다. [신천강씨족보]에 따르면, 강윤성은 공민왕 7년 무술 12월 갑술에 “화를 입었다”(被禍)고 한다. 공민왕 7년은 공민왕 8년의 오기일 것이다. 화를 입은 날짜가 강윤충이 처형된 날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강윤성, 강윤휘는 1359년(공민왕 8) 강윤성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신귀는 유배됐다가 신돈 집권기에 복권돼 판서에 올랐다. 신돈과 같은 영산 신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돈이 축출되면서 처형됐다.

1359년 강윤충과 함께 처형된 홍개도 역시 이때 채하중 사건에 연루돼 유배됐다. 그는 1356년 기철이 주살된 뒤 그 일파로 지목되어 유배됐다가, 1357년 채하중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유배되고, 1359년 마침내 강윤충과 함께 처형된 것이다. 1356년 강윤충이 동래현감에 폄출된 것은 석기사건 때문이었지만, 그가 처형된 것은 채하중 사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강서(康庶) 이후 욱일승천으로 가세가 뻗어나가던 곡산 강씨 일족의 강윤충 3형제는 일시에 죽음을 당했다. 강비의 집안에 폭풍이 몰아닥친 것이다. 이들의 죽음은 결국 채하중처럼 공민왕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친원파이자 고려 정치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강윤충의 처형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억울한 죽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고려사] 공민왕 8) 악행과 무관한 강윤성, 강윤휘는 형제인 강윤충에 휩쓸려 피해를 입었다.

신덕왕후 강씨는 1356년 6월 14일 태어났다. 집안에 큰 변고가 발생한 해에 태어난 것이다. 둘째 작은 아버지 강윤충은 그녀가 태어나기 두 달 전쯤 석기 사건에 연루돼 동래 현령으로 좌천됐다. 아버지 강윤성과 셋째 작은 아버지 강윤휘는 1357년 6월 1일 채하중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가 2년 뒤 세상을 하직했다. 그녀가 태어난 지 1년이 안 되어 아버지는 집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지를 잃고 강씨는 어디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그런 기록은 없다. 그 작은 실마리가 1396년 죽은 강씨의 명복을 빌고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진주 청곡사 ‘청동은사입사청곡사명’이다. 이 향완은 청동 재질에 은으로 연화당초문 그림을 그려 넣은 명품 향로이다. 여기에 이런 명문이 새겨져 있다. “대명 홍무 30년 정축(태조 6, 1397) 조선국 개국조(開國祖) 성조(聖朝)의 중궁 신덕왕후의 본향(本鄕)인 진양대도호부 비보선찰 청곡사 보광전 향완을 공경히 만들었다.”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뜬지 1년 뒤, 신덕왕후의 본향인 진주의 비보선찰 청곡사 보광전의 향로로 쓰기 위해 만든 것이다.

‘목마른 말에게 물을 먹인 우물’

비보사찰이란 고려 시대에 도선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전국에 세운 절로서, 전국에 약 3800개가 있었다. 풍수지리설이란 땅에도 몸처럼 기(氣)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몸에 강한 곳과 약한 곳이 있어 침을 놓거나 뜸을 떠서 기를 통하게 하고 기를 고르게 하듯이, 땅에도 절이나 탑을 세워 그런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처의 가호를 빌고, 나라와 백성의 태평을 기원한다. 풍수지리설에 불교 신앙과 도참사상이 복합된 예언론이다. 현대 과학으로 보면 근거 없는 생각이지만 고려 태조 왕건은 진지하게 믿었다. 왕건이 후손에게 남긴 [훈요십조] 제2조가 그 내용을 담고 있다. “신설한 사원은 도선(道詵)이 산수의 순역을 점쳐놓은 데 따라 세운 것이다. 그의 말에, ‘정해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地德)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 하였다. 후세의 국왕·공후·후비·조신 들이 각기 원당(願堂)을 세운다면 큰 걱정이다. 신라 말에 사탑을 다투어 세워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랴.” 신라의 멸망 원인을 지덕의 손상으로 본 것이다. 이 사상은 불교와 더불어 고려왕조를 지탱한 국가이념이었다.

만든 이는 청곡사를 중창한 승려 상총(尙聰)이다. 그는 고려 말의 명승인 보우와 혼수의 문도로서, 1398년 신덕왕후의 묘 정릉에 세운 흥천사의 주석이 됐다. 실제 공역을 담당한 것은 가락부원군 김사행과 찬성사 김주였다. 경복궁 등 조선 개국 초의 국가 건축은 모두 두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 그런데 신덕왕후의 본향은 경남 진주가 아니라 황해도 곡산이다. 진주는 강은(姜誾)의 딸인 어머니의 본향이다. 향완의 명문이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청곡사를 신덕왕후의 원찰로 삼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청곡사는 월아산 계곡에 있고, 그 아래 갈전리(葛田里)가 있다. 신덕왕후가 이성계를 처음 만난 곳이 이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1380년 이성계는 지리산 부근에서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뒀다. 저 유명한 황산대첩이다. 그때 이성계의 군대가 이곳을 지났다고 한다. 갈전의 옛 이름은 ‘목마른 말에게 물을 먹인 우물’이란 갈마정(渴馬井)이다. 그런데 우물이 없어지면서 갈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380년이면 신덕왕후가 25세 때이다. 장남 이방번이 1381년에 태어났으니 앞뒤가 얼추 맞는다. 아버지를 잃은 어린 신덕왕후는 어머니 강씨를 따라 외가에 내려와 성장한 것일까? 아무 인연도 없는 곳에 원찰을 세웠을 리는 없을 것이다. 청곡사 일주문 옆 월영지에도 강씨가 달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비춰봤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2007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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