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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7)] 제자리 잃고 떠도는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 

경복궁 후원 전각 일제가 헐어 빼돌려 

문무 과거시험 치르던 곳, 지금의 상춘재·녹지원 일원에 소재
용산에 있던 일본인 사찰에 넘겨졌다 1946년 원불교에서 인수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들의 청와대 방문 기념사진. 이들의 사이로 ‘청와대’라는 각자 바위가 보인다. / 사진:국가기록원
우리가 거의 매일 접하다시피 한 명칭인 청와대(靑瓦臺). 지금의 명칭과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공식적으로 언제부터였을까.

그 시작은 윤보선 대통령 당시인 1961년 1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전까지의 청와대는 ‘경무대(景武臺)’라는 명칭으로 불려왔다. 윤 당시 대통령은 1960년 12월, 특별담화를 통해 경무대라는 명칭에 대한 국민적 감정도 좋지 않고, 관저 지붕의 기와도 청색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백악관(White House) 명칭과 비견될 수 있다는 등등의 이유를 들어 경무대를 청와대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청와대에는 큼지막하게 ‘靑瓦臺’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큰 글자 왼편으로는 일종의 관지(款識)인 ‘1961년 4월 해위(海葦)’라는 글자도 각자(刻字)돼 있었다. ‘해위’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호다. 이를 통해 이 각자가 윤 전 대통령의 글씨였음을 알 수 있다.

‘해위’란 순천만 갈대처럼 염분 많은 바닷가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바다갈대를 뜻한다. 바다갈대는 민물갈대보다 자라기 더 가혹한 상황에 놓여 있다. 따라서 ‘해위’에는 더 강인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던 해인 1897년 생 윤 전 대통령은 성장 과정에서 대한제국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35년간의 대일 항쟁기, 일본 패망 이후 정부 수립 전까지의 이념 분쟁으로 극심하게 분열된 사회, 이승만 정부의 실정(失政)과 6·25 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에 이르기까지의 혼란하고 암울했던 사회 상황을 몸소 느끼며 봐왔다. 그런 윤 전 대통령이 4·19 의거의 결과로 붕괴한 이승만 정부의 뒤를 이어 집권한 후 경무대를 청와대로 개칭하면서 4·19의거 1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각자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청와대’라는 각자 바위가 존재했던 사실이 사진으로만 확인될 뿐 지금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사진으로 보이는 각자 주변의 당시 지형·지세를 볼 때 구 본관 터 뒤쪽 산기슭과 지금의 대통령 관저를 연(連)하는 근처 어디쯤 있지 않았을까 추정만 해볼 뿐이다.

경무대는 조선시대부터 사용됐던 명칭


▎‘수선전도’와 ‘북궐후원도형’에 보이는 경무대와 융문당·융무당. 대통령경호실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2007년, 38면, 60면~61면 재편집. / 사진:이성우
그렇다면 청와대 이전의 명칭이었던 경무대는 언제부터 경무대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을까.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전 대통령의 관저였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사실 경무대는 조선시대부터 사용됐던 명칭이다. 고종 당시 경복궁을 중건할 때 후원 구역까지 빽빽이 들어차게 된 건물들로 인해 경복궁은 과거의 후원이었던 공간마저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비좁아졌다. 그러자 경복궁 후원의 기능을 현재의 청와대 지역으로 옮겨 새롭게 대신하면서부터 얻게 된 명칭이 경무대다.

왕이 경무대에 나가서 경과 정시(慶科廷試)를 행했다. 문과에서는 도석훈 등 15명, 무과에서는 원세욱 등을 뽑았다([고종실록] 6(1869)년 3월 20일).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폐허가 된 이후 조선의 임금들은 주로 창덕궁에 거주했다. 임금이 참석한 상태에서 문무 관원을 채용하는 과거 시험은 창덕궁 후원에서 치러졌는데 이때의 장소를 춘당대(春塘臺)라 불렀다.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한 뒤 창덕궁으로부터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했다. 이후 후원에서 치른 과거 시험 장소는 위 [고종실록] 기록과 같이 경무대라고 불렀다. 고종은 재위 기간 중 200여 회 이상 경무대에 거둥(擧動)했음을 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창덕궁 춘당대의 역할이 경무대로 거의 완전히 이관됐음을 알 수 있다.

[한성주보(漢城周報)]는 고종 23(1886)년 박문국(博文局)에서 창간한 책자 형식의 최초 주간신문이다. [한성주보]의 같은 해 5월 3일 자 ‘임헌책사(臨軒策士: 왕이 과거시험 보는 것을 친히 보시다)’ 제하의 기사에는 ‘3월 초 7일 경과와 문과 정시를 경무대에서 치르는데 왕께서 시험 장소에 친히 임하시어 (…) 심원익 등에게 아울러 급제를 내렸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처럼 경술국치(1910년)까지 30건 가까이 경무대 관련 기사가 언론에 나오고 있음이 확인된다.

또한 고종 29(1892)년경에 그린 ‘수선전도(首善全圖)’에도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지역에 ‘경무대’라는 지명이 표기돼 있다.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에는 이미 경무대가 일반에게도 잘 알려진 명칭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 자 ‘헐려가는 융무당과 융문당’ 제하의 기사 내용 중에서 보이는 ‘또다시 시내 총독부 뒤 춘당대에 있는 융무당과 융문당을 지난 11일부터 시내 입정정(笠井町)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경무대가 과거의 춘당대 기능과 같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궁궐 떠나면서 보존 대상 건물에서 제외


▎융문당과 융무당 원경(1910년쯤). 문화재청 [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2006년, 272면 전재. / 사진:이성우
융문당과 융무당은 고종 5(1868)년 9월부터 이듬해 7월 사이에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중 지금의 상춘재와 녹지원 일원에 지은 건물이다. 경무대는 융문당과 융무당을 함께 아우르는 곳, 특히 융문당과 그 앞 넓은 마당까지 아우른 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융문당의 후문 이름이 경무문(景武門)인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융문당은 왕 또는 문관들이 모여 글을 지으며 연회를 하던 곳으로 조선 전기 경복궁 후원의 서현정(序賢亭)과 용도가 같다. 또 고종 때 경무대에서 실시한 과거 시험의 중심 건물이었다. 융무당은 과거 시험의 무과와 활쏘기 시합, 군사들의 교체 훈련 및 사열 등에 사용했으며, 조선 전기 경복궁 후원의 충순당(忠順堂)과 같은 기능을 했다.

이 융문당과 융무당의 끝 글자인 당(堂)은 건물(집)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특히 궁궐 건물들은 그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의 지위나 신분에 따라 해당 건물의 이름·지위·서열·외형·용도 등이 종합적으로 정해졌다.

물론 아주 엄격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규모가 큰 것부터 작은 것으로, 공식 행사용에서 일상 주거용으로, 또는 비공식용으로 아니면 휴식공간으로 등등에 따라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의 여덟 글자 가운데 하나를 사용하면서 그 끝 자를 통해 각 건물의 격과 크기, 즉 위계(位階)를 대략 가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다면 이 20칸(間) 규모의 융문당이나 15칸 규모의 융무당은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사정전·창덕궁의 인정전 같은 정전(正殿)보다는 그 위계가 높지 않지만, 당이라는 명칭으로만 본다면 10칸 규모의 오운각이나 명성황후의 침전인 곤녕합보다도 더 규모가 크고 위계도 높은 건물인 셈이다.

오운각의 경우 [동아일보] 1929년 11월 28일 자 기사를 보면 경성 시내의 유명한 고건물 37개 가운데 포함돼 있다. 또 1931년 6월 9일 자 [동아일보] 기사의 내용처럼 ‘보물고적등보존령(寶物古蹟等保存令)’에 의거해 광화문·근정전·건춘문 등과 함께 보존해야 할 건물 대상에도 포함돼 있다. 이런 점으로 미뤄 오운각도 상당히 격이 높은 건물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위 [동아일보]의 두 기사 내용은 융문당과 융무당이 이미 궁궐을 떠났으므로 고건물이나 ‘보물고적등보존령’에 포함될 수 없었던 것이 이유이기는 하겠지만, 만일 1929년까지도 경무대 지역에 두 건물이 존재하고 있었다면 보존 대상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경무대와 관련해 ‘북궐후원도형’을 참고하면서 옛 사진 자료들을 살펴보면 광장 같은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융문당이 남향으로, 동쪽에는 융무당이 서향으로 넓은 월대(月臺) 위에 배치돼 있었다. [조선고적도보]나 [궁·능 관련 유리원판 도록] 등에 나오는 여러 사진을 토대로 경무대의 규모를 추정해보면 지금의 녹지원보다 훨씬 큰 규모인 상춘재·녹지원·경호처·비서실을 아우르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활발히 사용됐던 신무문 밖 후원의 건물들도 고종 33(1896)년 소위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경복궁을 비우게 된 이후 경복궁과 함께 주인 잃은 신세로 전락하면서 점점 훼철(毁撤)돼 가기 시작했다. 1912년 경복궁과 후원 구역은 공식적으로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됐으나 ‘궁내부 관리들의 운동회를 경복궁 대궐 안 경무대에서 한다’는 1908년 5월13일 자[대한매일신보] 등의 기사 내용을 보면 경술국치(1910년) 이전인 대한제국 당시부터도 경무대가 기본적인 관리는 되고 있었으나, 궁궐의 후원 구역의 기능은 이미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1928년 8월쯤 해체해 무상대여


▎융문당(왼쪽 위 사진)과 융무당(왼쪽 아래 사진)의 어제와 오늘. 전남 영광의 원불교 영산성지에 이축된 융문당 (오른쪽 위 사진)과 융무당(오른쪽 아래 사진). 조선총독부 [조선고적도보] 전재. / 사진:이성우
[매일신보] 1927년 6월 18일 자 ‘융문당 천장에 의문의 두개골’이라는 기사를 보면 ‘아이들이 융문당 천장에 올라가서 놀려고 하다가 백골이 된 시체를 발견해 경찰서에 신고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기사에 따르면 경무대 지역도 몇몇 건물은 남아 있되 아이들이 쉽게 접근해서 놀 수 있는 놀이터로 전락했을 정도로 방치되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경무대 관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조선지방행정학회서 발행한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81쪽 ‘경복궁의 정리’ 항목 중에는 ‘한강통 11번지 고야산용광사(高野山 龍光寺)는 소화 4년 5월 신무문 밖의 융무당(용광사 본당)과 융문당(이 절 동북쪽의 객전)을 이축(移築)했던 것이며(…)’라고 기록돼 있다.

책은 또 융문당과 융무당이 이축돼 1929년 5월, 당시 한강통 11번지인 현재의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 40가길 24(한강로 2가 55번지)에 있던 일본 사찰인 고야산 용광사의 본당(本堂)과 객전(客殿)으로 만들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글에 언급돼 있는 용광사 본당은 융무당이 아닌 융문당으로 본당과 객전을 서로 바꿔 기술했다.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 자 ‘헐려가는 융무당과 융문당’ 제하의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 제목을 보면 ‘유서 깊은 옛 과거 터 융무·융문 양당이 철훼돼 진언종에 무상대여 된다’고 적혀 있다. 위의 [경기지방의 명승사적]에는 1929년 이축한 것으로 돼 있으나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 자에 실제 해체하고 있는 장면의 사진이 실린 것으로 봐 융문당과 융무당의 해체 시기는 1928년 8월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해체 이후 이축이 완료된 시점이 1929년 5월일 수는 있겠다.

기사 제목에 등장하는 진언종(眞言宗)은 일본 불교의 한 종파다. 용광사라는 절은 일본 밀교인 고야산 진언종 고야파에 속하는 일본인 사찰이다. 위 1928년 [동아일보]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선남선녀들이 출입해 명복을 빌게 될 것’이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조선신문] 1931년 8월 31일 자에는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전 수상 사망에 따른 추도회를 신용산 용광사에서 집행했다’는 기사도 등장한다. 하마구치 전 수상은 제27대 일본 내각 총리대신이었으나, 1930년 11월 도쿄역에서 일본 우파 청년에 의한 총기 저격 부상의 후유증으로 1년 가까이 병상에 있다가 1931년 8월 26일 사망했다. 일본에서는 8월29일 장례를 지내고 조선에서는 용광사에서 추도회를 연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 자 ‘전몰장병추도제, 6일 부민회장에서’라는 제하의 기사 내용을 보면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숨진 ‘전몰황군장병(戰歿皇軍將兵)’의 유골을 봉안하는 장소로 활용됐던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 용광사가 당시의 다른 여러 사찰과 함께 죽은 일본 군인들의 영혼을 달래고 그들의 유골을 보관하는 주요한 공간으로서도 이용돼왔음을 추정케 한다.

융문당과 융무당은 원래 궁궐의 건물이었음에도 일본인 사찰로 사용됐다고 해서 일제 패망 후 아이러니하게 귀속재산(Vested Property)으로 분류된 뒤 1946년 원불교에서 인수했다.

중일전쟁 전사자 유골 보관 장소로 이용


▎상춘재의 변천 과정. / 사진:국가기록원,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2006년 11월까지 원불교 서울 교당의 법당과 생활관으로 사용됐으나 ‘용산 재개발사업’으로 해체된 후 2007년 복원됐다. 이어 융문당은 전남 영광군에 소재하고 있는 원불교 영산성지(靈山聖地)에 ‘원불교창립관’이라는 이름으로, 융무당은 원불교 ‘우리삶문화옥당박물관’의 한 전각으로 각각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대일 항쟁기에도 청와대 명칭은 ‘경무대’였다. 1926년 경복궁 내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신축·이전됨에 따라 왜성대에 있었던 총독관저도 옮기게 됐다. 제7대 미나미 지로(南次郎) 총독 시절인 1939년, 지금의 청와대 권역인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지역에 관저를 신축했다.

‘지난 9월 23일 이사한 경무대 신축 총독관저에서 11월 4일 관민 600명이 참석해 낙성 기념 피로연이 열렸다’는 1939년 11월 5일 자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관저 이사 날짜는 1939년 9월 23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총독관저에는 관저 건물 이외에 약 66㎡(20여 평) 규모의 별관도 있었다. 이는 1938년쯤 그려진 ‘총독관사 별관 기타 급수장치 공사설계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지금의 상춘재 자리에 있었다. 이 별관의 당시 이름은 매화실(梅花室)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입주하며 매화실이라는 이름을 상춘실(常春室)로 고쳤다. 아마 매화가 일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개명한 게 아닐까 추정해본다.

제1·2공화국 때의 청와대에는 구 본관과 상춘실을 제외하고 별다른 의전용 행사 건물이 없었다. 구 본관의 접견실, 식당 등을 행사에 사용했지만 소규모 행사만 치를 수 있었다. 목조 건물인 상춘실의 앞뜰에서는 다과나 만찬 행사를 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78년 3월 상춘실을 헐고 그 자리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약 73㎡(22평) 규모의 목조 건물을 신축하면서 그 이름을 상춘재(常春齋)라 했다. 이어 청와대를 방문하는 외국 손님에게 우리나라 전통가옥을 소개하거나 의전 행사를 위한 목적으로 1982년 11월 기존 건물을 헐었다.

그리고 연면적 417.96㎡(약 126평) 규모의 한옥을 착공해 반년 만인 1983년 4월 5일 지금의 상춘재를 완공했다. 내부는 대청마루로 된 거실과 온돌방 2개가 있다. 이때 수령 200년 이상 된 춘양목(春陽木: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일대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을 건물의 재목으로 사용했다.

‘북궐후원도형’, ‘경복궁평면도’ (1915년쯤), ‘신무문외관사배치도(神武門外官舍配置圖, 1926년)’를 현재의 청와대 위성사진과 비교해보면 상춘재 자리와 융문당 자리가 겹침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상춘재 자리에는 융문당이 있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녹지원(綠地園)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곳으로 120여 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원래 조선 후기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지역의 일부분으로 문무의 과거 시험을 보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던 곳이다. 대일 항쟁기에는 총독관사의 정원이 되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의 부지로 이용됐다. 제1·2공화국 때까지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나 제3공화국 들어 경제 발전을 통해 국력이 신장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기면서 야외 행사장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 됐다. 이에 1968년 이곳에 잔디를 심고 녹지원을 조성했다. 초기의 녹지원은 5289㎡(약 1600평) 규모였으나 야외행사의 빈도가 높아져 1985년에 5620㎡(약 1700평)으로 확장했다.

역사적 가치 높지만 문화재 지정은 안 돼


▎녹지원 전경. 대통령경호처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2019년, 109면 전재. / 사진:이성우
녹지원 정면 중앙에는 수령 175년(2020년 기준) 된 높이 12.2m, 폭 15m의 한국산 반송(盤松)이 있다. 이곳은 야외 행사장으로 이용되며 매년 어린이날, 어버이날, 장애인의 날 등에는 다채로운 행사가 개최된다.

과거 신무문 밖 후원 지역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경무대, 그리고 그 경무대의 주된 건물이었던 융문당과 융무당은 대일 항쟁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아직 남아 있어 그 실재(實在)가 극히 드물게 확인되는 몇 안 되는 건축물이다.

조선 후기 궁궐의 건축양식과 건축 형태를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문화재적 가치도 매우 높다. 하지만 융문당과 융무당 이 두 건물의 경우는 어떤 형태의 문화재로도 지정돼 있지 않은 채 소유권자에게 맡겨 두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서울 세종로 프레스센터 건물에서 바라본 청와대 전경.
경희궁 흥화문의 경우처럼 1932년 옮겨져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博文寺)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다가 이후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돼왔지만,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된 후 1988년 본처(本處) 지역으로 돌아온 사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융문당과 융무당의 경우 설사 문화재로 지정되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기 위해 노력한다 해도 현실적인 여건상 제자리를 찾을 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 차원에서조차 관심이 멀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라도 보다 세심하게 관리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07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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