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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7)] 4大 인사 철칙이 만들어낸 ‘화수분 인재’ 

추천받고 육성해 공정하게 검증하라 

모든 관리 자격 심사는 물론 문무 관료 상벌 평가 정례화
우수 지방관 육성 차원 60개월 장기 임기제와 관등 승진도 병행


▎서울 경희궁 숭정전 앞에서 열린 조선 시대 과거제 재현행사.
'인사가 만사’라 한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세종은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인재를 발굴하는 데 정성을 쏟았고 그 결과도 눈부셨다.

장영실의 성공 신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요, 아버지도 무명의 외국인이었다. 그런데도 왕은 장영실에게 서슴없이 중요한 일을 맡겼다. 자격루가 완성되었을 때 왕은 이렇게 단언했다. “장영실이 아니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왕은 그를 호군(정4품) 벼슬에 임명했다(세종 15년 9월 16일).

세종 치세는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인재가 나타난 시절의 하나였다. 물론 우연이 아니었다. 왕이 인재를 관리하는 면모를 검토해보면 적어도 4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인재를 철저히 관리하고 검증했다. 둘째, 추천을 통해 다양한 인재를 발탁했다. 셋째, 훌륭한 지방관이 있어야만 백성의 삶이 개선된다는 점을 특히 중시했다. 넷째, 과거시험을 본래의 취지에 맞게 개혁했다. 그런데 세종의 인재관리에 관한 이야기도 그 출발점은 어두웠다.

왕위에 오른 세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능한 관리들이 곳곳에 널려 퍼져있었다. 고심 끝에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불러들였다. 조정의 분위기를 근본적으로 쇄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 왕은 지난 30년 동안 모든 관리의 근무 성적표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런 다음 근무성적이 특히 나쁜 수 명의 관리를 쫓아냈다(세종 1년 3월 5일).

이어 왕의 시선은 탐관오리로 향했다. 세종 6년(1424) 8월 15일, 전직 관리 최세온의 목이 떨어졌다. 평안도 덕천현의 지방관이었던 그는 관가의 물건을 함부로 가로챘다. 특히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줄 진제미 57관(약 214㎏)을 횡령해 임금을 실망시켰다. 사헌부가 최세온의 비리를 보고하자, “진제미를 도둑질해 백성들을 굶겨 죽였다”고 한탄하며 그를 처형했다.

세종은 재위 말년까지도 관리들이 백성을 약탈하는 일만큼은 막고자 했다. 관리가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왕은 경차관(특별 조사관)을 파견하거나 행대(사헌부 감찰)를 보냈다(가령 세종 29년 2월 1일). 행대란 ‘이동하는 대간’으로, 특명을 띠고 지방에 내려가서 비위 사실을 광범위하게 감찰했다.

인사 정보 사전 누설 중징계


▎장영실은 세종의 대표적인 인재 등용 사례로 꼽힌다. 사진은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 세종대왕(한석규)과 장영실(최민식)이 천문 관측기구인 혼천의 앞에서 대화하는 모습. /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사람을 쓰려면 처음에 옥석을 철저히 가리는 것이 옳다. 즉위 초부터 세종은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때마침 사헌부에서 좋은 제안을 했다. 고려 전성기에는 정1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리가 간관의 자격심사(서경)를 거쳤다면서, 서경 제도의 확대시행을 주장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태조 이래 4품 이하 관리만 서경의 대상으로 삼았다. 사헌부는 과감하게도 구습을 뜯어고치자고 말했다(세종 5년 5월 17일).

세종은 사헌부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얼마 뒤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임명 절차에 서경이 뒤따랐다. 왕의 판단이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그 시절에는 대간도 강직했다. 그런 결과 다음과 같은 해프닝도 벌어졌다.

세종 8년(1426) 3월 26일이었다. 좌의정 유정현이 사직할 뜻을 밝히며 그 사유를 언급했다. “전하께서 늙은 저를 좌의정에 임명하셨으나, 제가 평소 재물을 많이 모았다는 이유로 대간이 서경해주지 않습니다.” 세종은 그의 사직을 한마디로 물리쳤다. “곡식을 꺼내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풍습이다. 사헌부에서 그대를 문제 삼은 것은, 그대의 성격이 강해 이자를 받을 때 독촉이 심하였다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사직하지 말라.”

유정현의 사례에서 보듯, 왕은 대간의 주장에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았다. 물론 대체로 사헌부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세종 9년(1427) 2월 19일, 사헌부는 사복시 주부(정6품)에 임명된 고전성의 비리를 지적했다. 어머니가 작고했는데 상중에 고기도 먹고 장가도 들었다는 비판이었다. 왕은 즉각 그의 발령을 취소했다. 사헌부의 철저한 인사 검증 덕분에 무자격자가 관직에 등용될 가능성은 점점 사라졌다.

왕의 기대에 부응해 이조도 인사 방식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청탁금지법(분경금지)이 너무 엄격하게 적용돼 도리어 임용후보자의 자격 검증에 장애가 생긴다며 개선을 요구한 것. 임용 후보자를 사전에 면접할 수가 없어서 깜깜이 인사가 되고 만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시절의 관리들은 이처럼 국가의 법규를 준수했다. 임금은 이 문제를 ‘상정소’의 대신들과 상의해, 이조는 3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하기 전에 청사로 불러서 면접하게 했다(세종 15년 10월 28일).

세종의 눈이 아무리 밝다 해도 그늘진 곳은 있었다. 왕의 신임이 깊었던 도승지(지신사)가 권력을 남용해 여론이 나빠졌다. 세종 16년(1434) 8월 7일, 도승지 안숭선의 처신이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그 시절에는 규정상 2명의 대신이 임용권을 행사했다. 현직 이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겸하는 한 명의 정승이었다. 그런데 이조판서를 겸한 좌의정 맹사성은 결단력이 부족해 미적거린다는 여론이 높았다. 이조판서 신개는 도승지의 눈치를 보느라 제 구실을 못 했다는 비판도 많았다. 조정 여론은 도승지가 관리의 임명권을 독점했다며 격앙됐다. 안숭선은 도승지로서 이미 여러 해 동안 왕명을 출납했고, 관리 인선에도 깊이 개입해 권세가 지나쳤다는 여론이었다.

왕은 이 문제를 숙고한 끝에 안숭선 개인의 탐욕이 사안의 본질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보다 제도적 결함이 문제라고 판단, 의정부 대신들에게 보완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그에 따라 승정원의 권력 분립 방안이 만들어졌다. 6명의 승지가 교대로 인사 전형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세종 19년 8월 8일, 임금은 이를 법으로 제정했고, 이후 도승지의 권력 남용은 사라졌다.

그래도 남은 문제가 있었다. 인사 기밀이 자주 새는 것이었다. 근무평정 결과가 미리 알려지기도 했고, 임명 절차가 아직 진행 중인데도 소문이 퍼져서 근무 기강이 흔들렸다. 세종은 이런 악습을 뜯어고치려고 했다. 그리하여 인사 관련 정보를 누설한 사람은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중징계하겠다고 엄중히 경고했다(세종 24년 12월 5일).

백성들이 어깨를 펴고 사는 좋은 나라를 만들려면 인재가 많아야 했다. 재위 초부터 세종은 항상 인재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인재를 천거하라는 명령도 되풀이해서 내렸다. 세종 5년 11월 25일에도 왕은 이조에 명하여, 동반 6품 이상, 서반은 4품 이상인 현직과 전직의 모든 관리는 다음의 3항에 해당하는 3명의 인재를 추천하라고 권고했다. ▷변방을 지킬 만한 인재 ▷수령이 될 만한 인재 ▷번잡한 행정사무를 맡길만한 인재였다. 그런데 세종의 이런 지시는 의례적으로 되풀이되는 진부한 통치 방식이 아니었다. 왕은 자신과 함께 국정을 떠맡을 인재를 공들여 찾았다.

“사시사철 인재 천거하라”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자동 물시계 자격루 복원품. 세종의 명령으로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백성에게 밤낮으로 시간을 알렸다.
왕은 중국 역사상 호평을 받는 제왕들은 어떤 방법으로 인재를 등용하였는지를 연구하기도 했다. 집현전에 특명을 내려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라고도 했다. 아울러 경험과 식견이 많은 의정부 대신들에게도 인재 선발 대책을 주문했다. 결국 왕은 다음의 4개 항목에 해당하는 인재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기로 결정했다(세종 18년 2월 30일).

첫째, 몸가짐이 방정하고 절조와 염치가 있는 자, 둘째, 마음이 곧아서 바른말을 하는 자, 셋째, 선비로서 행실이 올발라 명성이 있는 자, 넷째, 재주가 뛰어나 타인의 신뢰를 얻은 자.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이런 인재가 발견되면 서울에서는 한성부가, 지방에서는 감사와 수령이 그 명단을 작성하게 했다. 인재를 추천하는 일은 사시사철 가능하며, 당사자가 품계를 가졌는지는 묻지 않겠다고 했다. 인재의 수는 아무리 많아도 좋으니 그들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해 조정에 보고하라는 거였다. “내 마땅히 그 명단을 인사담당관에게 주어 능력에 알맞게 등용하겠다!” 이 한 마디에서 왕의 강력한 의지가 느껴진다.

추천하라는 인재는 갈수록 구체적으로 정의됐고, 그 범위도 넓어졌다. 세종 25년(1443) 7월 26일의 왕명에서도 확인되듯, 종래의 3과(세종 5년 11월)가 이미 ‘9과’로 확대된 지도 오래였다. 9과란 무엇일까. 송나라의 사마광이 제안한 10과를 대부분 수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즉, 스승이 될 만한 자, 경전에 해박한 자, 대간이 될 만한 자, 문장력이 우수한 자, 재판을 잘하는 자, 재물을 잘 관리할 자, 감사가 될 만한 자, 수령이 될 만한 자, 장수가 될 만한 자, 전례를 잘 아는 자 등이었다.

시종일관 세종이 가장 촉각을 세운 것은, 어떻게 하면 우수한 지방관을 확보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왕은 이 문제를 적잖이 고심했고 집현전에 지시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했다(세종 13년 10월 17일). 학사들은 중국의 옛 문헌인 [문헌통고]와 [두씨통전]을 분석한 결과, 2~3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한나라 선제는 자사와 수상을 임명할 때마다 직접 면담을 하는 등 정성을 다했다. 덕분에 그 시절에는 탁월한 관리(양리)가 쏟아져 나왔다. 둘째, 당나라 태종은 지방에 파견할 도독과 군수의 이름을 병풍 한 모서리에 적어두고, 그들이 업적보고서가 올라올 때마다 각자의 이름 아래 깨알같이 기재했다. 황제가 이처럼 주의를 기울이자 지방 통치가 차츰 개선됐다. 실패 사례도 있었는데 송나라가 대표적이었다. 그 시절에는 모두들 중앙 관직만 차지하려 해 결국은 지방관을 차출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세종은 이러한 연구 결과를 깊이 마음에 새겨 국정운영에 큰 효과를 봤다.

“관리로 성공하고 싶은 자, 지방관으로 능력 증명하라”


▎조선 시대 과거시험 답안지. / 사진:문화체육관광부 e뮤지엄
왕은 자신의 역사적 지식을 토대로 지방관의 임기가 짧으면 통치 효과가 거의 없다고 확신했다. 정승 유정현과 허조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재위 초반에 지방관의 임기를 60개월로 하는 이른바 ‘구임법(장기임기법)’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제도의 효과를 둘러싸고 조정에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정연·정초·조계생·권진·맹사성 등 여러 대신은 본래대로 지방관의 임기는 30개월로 단축해야 옳다고 했다. 그러나 허조와 황희 등은 새 제도가 정착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세종의 구임법을 옹호했다.

유능한 지방관을 어디서 어떻게 구할 것인가. 조정 대신들은 공신 및 2품 이상인 고위 관리의 자제와 사위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고위층 자제를 기용함으로써 왕이 지방관을 우대한다는 점을 널리 알릴 수도 있고, 훗날 나라의 기둥이 될 인재를 미리미리 양성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는 것이 대신들의 변이었다. 실제로 세종 때 지방관으로 부임한 사람 중에는 고위층 자제가 상당수였다. 이것은 관직 세습이라는 한계를 지닌 것이었으나, 그들이야말로 지방의 세력가를 제압해 조정의 정책을 쉽게 집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도 있었다.

유능한 지방관을 선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조판서 허성은 업무상의 고충을 솔직히 털어놓으며, 왕에게 인사에 필요한 지혜를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세종은 자신이 추구하는 인사 방침 가운데 하나를 말했다. 지방관의 임무가 힘들다고 해서 임기도 끝나기도 전에 사직하는 사람이 있다면,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은 사퇴한 후 6년 동안 재임용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말했다(세종 21년 1월 13일). “관리로 크게 성공하고 싶으면 지방관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라.” 관리사회를 향한 세종의 메시지였다.

왕은 지방관의 근무 평가 방식을 개선하는 데도 힘썼다. 인구를 늘리고 학교를 진흥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방관의 업적을 평가했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안다. 세종 29년(1447) 2월 12일, 왕은 이조에 특별지시를 내렸다. 만약 10회의 근무평가에서 연달아 ‘상’ 등급을 얻은 관리가 있다면 그의 관등을 한 단계 올려주라고 했다. 그리하여 다수의 우수한 지방관이 특진의 기회를 잡았다.

세종 때는 모범적인 지방관도 많았고, 근무 기강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정도전의 손자로서 성종 때 대신이 된 정문형은 어전에서 세종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지방관을 역임하지 않으면 누구도 4품 이상 관리가 되지 못하는 법, 이것은 세종 때 시작됐습니다. 그때는 어진 관리(양리)가 백성을 다스린 덕분에 백성이 혜택을 많이 누렸고, 나라의 인재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사무를 직접 익혔습니다. 훌륭한 법에 담긴 아름다운 뜻이 거기에 있었습니다.”(성종 21년 1월 12일)

최고의 인재는 과거시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기를 누구나 기대했다. 그러나 세종 초년에는 과거제도 또한 소기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었다. 세종 즉위년(1418) 10월 7일, 대제학 변계량은 그 시대가 직면한 어려움을 두어 줄로 요약했다. “문과 1차 시험(초장)에서 강경(경서마다 한 장씩 지목하여 외우고 풀이하게 함)을 하도록 법을 바꾼 결과, 쓸 만한 인재는 모두 무과 시험장으로 달아났습니다.” 선비들은 경전 공부를 무척 싫어했던 모양이다.

문과 응시자가 계속 줄어들자 좌의정 박은이 대책을 세웠다. “앞으로는 무과도 [사서]를 통달한 사람만 응시하게 규정을 바꿔야 합니다.” 궁여지책이었으나 왕은 수용했다(세종 1년 2월 16일).

문과 기피 세태 속 성균관 키우려고 전폭 지원


▎세종은 성균관을 학문의 요람으로 만들고자 했다. 사진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성균관의 명륜당.
그런데 사태는 훨씬 심각했다. 세종은 성균관의 운영 실태를 점검하고는 깜짝 놀랐다. 성균관에 나와서 착실히 문과 시험을 준비하는 유생은 정원의 반도 못 됐다. 왕은 의정부, 육조와 상의해 대책 마련에 나섰다(세종 즉위년 11월 3일). 우선 성균관의 재정 상태부터 개선하기로 결심하고, 왕은 노비 100명을 하사했다(세종 1년 8월 8일).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왕은 기회가 될 때마다 성균관의 학관과 유생에게 술과 어육도 듬뿍 선물했다(세종 9년 11월 13일 등). [사서] [오경] 등 학습에 필요한 서적을 성균관과 오부 학당에 나눠준 것도 같은 취지다(세종 5년 3월 15일 등).

그러나 거듭된 노력에도 성균관 운영의 정상화는 쉽지 않았다. 세종의 번민이 깊어졌다. 그때 우사간 박관이 개선책을 제시했다. “40세 미만의 생원들에게는 학당과 향교에서 가르치는 직임을 절대 허락하지 마소서. 그들이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쉽게 벼슬길에 나가는 길을 막으소서!” 왕은 그의 제안을 기꺼이 수용했다(세종 5년 11월 9일). 그러자 성균관에 기숙하는 유생이 차츰 늘어났다.

시일이 흐르자 성균관을 학문의 요람으로 만들려는 왕의 결심에 감동한 관리도 나왔다. 성균관 주부 송을개는 새로 학칙 시안을 만들어, 왕의 면학정책에 호응했다. 그의 제안에는 특이한 부분도 있었다. 학교마다 선부(善簿)와 벌부(罸簿)라는 두 개의 장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여씨향약]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는데, 효심 있고, 우애하고, 친척들과 화목하며,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 유생을 비롯해 명망이 있는 사람은 모두 ‘선부’에 기록하자고 제안했다. 반면에 공부에는 힘쓰지 않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행위만 하는 이들은 모두 ‘벌부’에 적자고 말했다. 연말이 되면 학교는 2권의 장부를 각 도의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다시 이조와 예조에도 알리자는 것이었다. 이조는 관리를 임명할 때마다 그 기록을 참조하고, 예조는 과거시험 때마다 행실이 나쁜 사람에게는 응시 기회를 주지 말자는 의도였다.

세종은 송을개의 제안에 깊이 공감한 나머지 의정부에 타당성 검토를 의뢰했다. 얼마 후 왕은 전국의 모든 학교에 명령해 선부와 벌부를 작성하라고 했다(세종 19년 7월 10일).

그러나 뿌리 깊은 문제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경전 공부를 소홀히 한다는 사실이었다. 대신 허조는 그 문제를 거듭해서 거론했다. “유생들이 이미 합격한 동료들의 답안지를 베껴서 시험장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공부하지 않습니다.” 왕의 염려가 더욱 커졌다(세종 14년 3월 12일).

그런데 과거시험을 오래 주관한 양촌 권근과 춘정 변계량 등이 강경(講經) 시험을 끈질기게 반대한 역사가 있었다. 강경은 대면시험이라서 공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반론의 근거였다. 세종은 이 문제를 여러 해 동안 숙고했으나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세종 19년(1437) 9월 3일, 허조가 강경법의 필요성을 또다시 공론화하자, 왕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경서에 익숙한 이가 귀한 인재이다.”

왕이 강경 시험을 시행하기로 결심하자 그동안 소극적이던 의정부도 방향을 바꿨다. 그들은 경학에 뛰어난 학자를 물색하기에 힘썼다(세종 21년 2월 2일). 그리하여 미루어온 제도개혁이 본궤도에 올랐다. 세종 24년(1442) 8월 10일, 강경 시험이 다시 거행됐고 왕세자(문종)가 총책임을 맡았다.

4단계로 세분화된 과거시험 평가표


▎조선 시대 무과(武科)의 과거시험을 재현한 모습.
객관적인 평가가 필수적이었던 만큼 채점방식도 다듬었다. 예조는 거듭 노력한 끝에 합리적인 평가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합격 판정도 이제 4단계로 세분화해, 조통(粗通)·약통(略通)·통(通)·대통(大通)으로 나눴다. 가령 조통은 외우고 해석할 때 큰 실수가 없고, 요점을 풀이할 때도 대의에서 많이 빗나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에 비해 약통은 외우고 해석할 때도 유창하고, 요점 풀이도 본의에 맞으나 자유롭게 전후좌우로 통하지는 못하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 주의를 끄는 점이 있었으니, 응시자의 강경 점수를 다수의 시험관이 함께 논의해서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세종 26년 2월 9일). 평가규칙이 정밀해진 것이다.

수십 년 뒤 성종 때 경연에서 동부승지 홍귀달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세종 시대에는 강경을 위주로 인재를 뽑았습니다. 그 결과 선비들이 모두 경전 공부에 힘썼으며, 이극배 등은 특히 경서에 밝았습니다.”(성종 7년 10월 8일)

그때는 ‘문신들의 천국’이었다고 지레짐작하면 안 된다. 세종은 문무의 균형 있는 발전을 추구했다. 왕의 뜻을 헤아린 무신 이춘생과 변처후는 쓸 만한 제안으로 부응했다. 무관도 자격 연수를 계속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었다. 왕은 그들의 제안에 찬동했고, 그에 따라 무신도 문신과 마찬가지로 계절마다 일정한 과제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평가해서 상벌을 시행하기로 방침이 정해졌다(세종 11년 7월 11일).

어느 조직이든 성공하려면 인재가 풍부해야 한다. 그런데 특출한 인재를 찾아내서 기용하는 것은 지도자의 몫이다. 우리가 위에서 확인한 세종의 용의주도함과 끈질긴 노력, 이것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도 환히 밝힐 역사의 등불이 아닐까.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007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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