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4)] 결혼동맹 끝판왕! 태조 왕건과 29명의 부인 

호족들에 국구(國舅) ‘명함’을 주다 

결혼 담보로 유력 세력들과 연합 꾀해
태조 사후 왕위 다툼 등 심각한 부작용도


▎태조 왕건(최수종 분, 왼쪽)과 장화왕후 오씨(염정아 분), KBS 사극 [태조 왕건]의 한 장면.
"대왕이 만일 조선·숙신·변한의 왕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제 맏아들을 성주로 삼는 게 좋을 것입니다.”([고려사] 세가 ‘태조’)

궁예 대왕을 찾아간 사찬 왕륭은 송악(개성)을 바치면서 한껏 추켜세웠다. 조선·숙신·변한의 왕이라 함은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라는 뜻이다. 궁예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금성태수로 임명했다. 왕륭은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성을 쌓을 테니 맏아들 건을 성주로 삼아달라는 것이었다. 송악산 기슭에 곧 발어참성이 지어졌고, 왕륭의 아들은 성주에 임명됐다. 20세 청년 왕건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896년).

신라는 진성여왕 3년(889년) 원종과 애노의 난을 필두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세금을 독촉했지만 지방의 관리와 토호들은 외면했다. 백성들은 떠돌았고 이른바 도적 떼가 들끓었다. 모이면 도적이요, 흩어지면 백성이니 바야흐로 민란의 시대였다.

초야의 야심가들에게는 이런 난세가 절호의 기회였다. 영월 세달사의 승려 궁예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북원(원주)의 도적 우두머리 양길에게 의탁해 약간의 군사를 얻은 그는 치악산 석남사에서 깃발을 올리고 동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궁예는 담대하고 파격적인 행보를 펼쳤다. 말세가 왔다면서 이제 곧 미륵이 하생(下生)해 이상국가가 도래한다고 외쳤다. 명주(강릉)를 중심으로 신라 동북부에 널리 퍼진 미륵 신앙에 불을 붙인 것이다.

태백산맥을 넘나들며 불제자로 살아왔기에 그는 지역 민심을 잘 알고 있었다. 먹고살기 힘든 농민들이 떼로 몰려들어 군사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미륵신앙의 본거지인 명주에 들어갔을 때는 그 수가 3500여 명에 이르렀다(894년). 이곳에서 농민병들을 훈련하고 지휘체계를 확립한 궁예는 장군에 추대됐다. 이듬해 그는 충성스러운 군대를 이끌고 다시 서쪽으로 출정해 철원까지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궁예가 신라의 동북부를 장악하고 철원에서 대왕을 칭하자 패서(浿西, 황해도) 호족들이 움직였다. 패서는 신라에 속했지만 ‘고구려색(色)’이 뚜렷한 지역이었다. 평주(평산)의 대호족 박직윤은 스스로 ‘대모달(大毛達)’이라 칭했는데, 그것은 원래 고구려 최고위 장군직 ‘대모달(大模達)’이었다. 패강진(浿江鎭)이 설치돼 정예부대가 주둔했던 곳인 만큼 군사 기반도 탄탄했다.

하지만 평주를 비롯한 패서 호족들은 궁예와의 무력 충돌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신라를 타도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그의 포부에 매력을 느끼고 손잡으려 했다. 그들 또한 고구려를 계승하는 새 나라를 열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패서와 궁예의 가교로 나선 것이 송악의 왕건 일가였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은 전설적인 일화의 주인공이었다. 당나라 상선을 탔다가 풍랑을 만나 홀로 섬에 내렸는데, 서해 용왕을 괴롭히는 여우를 활로 쏘아 죽이고 아내 용녀와 갖가지 보물을 얻어 돌아왔다고 한다. 은유와 상징 속에 패수(浿水, 예성강)를 끼고 서해를 오가면서 해상무역에 종사해 부를 쌓는 선조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아버지 용건은 야심이 큰 인물이었다. 풍수 대가 도선의 가르침에 따라 말머리 모양의 명당에 36구(區)의 집을 지었는데, 그리하면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을 낳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용건은 왕(王)씨를 집안의 성으로 삼고 자신은 륭(隆), 아들은 건(建)이라 했다([고려사] ‘고려세계’).

왕륭은 맏아들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897년). 이듬해 궁예가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왕건 일가의 경제력과 패서 호족들의 군사력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양길을 치고자 했다. 한때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신라 북부의 맹주가 되려면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궁예군은 양길 세력을 제압하고 한강 하류와 중부 내륙으로 쳐들어갔다. 선봉장 왕건은 광주·당성(화성)·충주·청주·괴양(괴산) 등지를 평정했다. 궁예왕은 드디어 건국을 선포하고 국호를 ‘고려(高麗, 이하 후고구려)’라고 했다(901년). 고구려를 계승하는 나라라는 의미였다. 여기에는 송악의 경제력과 패서의 군사력을 무시할 수 없는 궁예의 사정이 담겨 있었다. 이로써 후고구려·후백제·신라의 후삼국 시대가 도래했다.

동상이몽, ‘적과 동침’의 시작

왕건과 궁예의 동상이몽, 적과 동침은 그렇게 시작됐다. 미륵의 나라를 외치며 농민병들의 충성을 얻어 일어선 궁예였다. 그들의 염원을 왕은 외면할 수 없었다. 반면 왕건은 호족들의 힘을 등에 업고 앞날을 도모해야 했다. 그는 결혼을 담보로 삼한의 호족들과 연합하는 길을 택했다. 사위의 대업을 돕지 않을 장인은 없다. 결혼은 난세에 협력과 보답을 약속하는 보증수표였다. 건국과 통일을 완수하고 새 시대를 열기까지 그가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 도합 29명의 아내를 얻게 된 이유다.

왕건은 궁예왕의 신하로 공을 세우면서 명사로 발돋움했다. 나주 공략은 그의 유능함과 장래성을 삼한에 각인시켜준 일대 사건이었다. 서해로부터 수군을 거느리고 광주(光州) 접경에 이른 왕건은 금성(錦城) 등 10여 개 군·현을 급습해 빼앗았다. 이 지역을 ‘나주(羅州)’라 명명하고 군사를 나눠 지키게 한 후 당당하게 개선했다(903년).

그것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후백제의 배후에 기지를 구축함으로써 후고구려는 최대의 적을 남북으로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 후백제왕 견훤이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을 묶은 것이다. 그 일을 27세의 젊은 장수가 이뤄냈다. 좌우의 신하가 모두 왕건을 눈여겨보게 됐고 궁예도 기특하게 여겨 알찬(閼粲)으로 진급시켰다([고려사] 세가 ‘태조’).

궁예왕의 명을 수행했다지만 이 작전은 사실상 왕건의 작품이었다. 내륙에서 힘을 키운 궁예와 달리 그의 집안은 송악의 해상세력이었다. 수운과 무역에 종사하려면 믿을 만한 거래처들이 필수다.

정주(개풍)의 호족 유천궁은 왕건 일가와 두터운 신뢰를 쌓은 인물이었다. 패수의 포구인 정주는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유천궁은 손꼽히는 대부호였다. 나주 상륙전을 구상하면서 왕건은 그를 찾아가 의논했다. 뱃길을 이용해 후백제의 배후를 치겠다는 젊은 영웅의 대담한 작전에 유천궁은 탄복했다. 그는 군선 건조(建造)와 수군 모집을 책임지고 돕기로 했다. 단, 한 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자기 딸을 아내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하지만 담보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유천궁·다련군 딸과 잇달아 부부의 연


▎태조 왕건이 남동풍을 이용해 화공으로 견훤 군대를 대파하는 진격도
왕건은 결국 유천궁의 딸과 동침했다. 선남선녀의 사랑 이야기는 각색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왕건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다가 오래된 버드나무 밑에서 쉬었다. 마침 한 여인이 길옆 시냇가에 서 있었는데, 그 덕성스러운 모습을 본 왕건이 어느 집 딸이냐고 물었다. 고을 부잣집 여식이라고 하자 젊은 장수는 부러 그 집을 찾아가 유숙했다. 부잣집에서는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딸을 장수의 숙소에 들여보내 동침하게 했다. 이 이야기에서 ‘오래된 버드나무’는 정주 유씨(柳氏)를 가리키는데 군대를 먹이고 재울 만큼 재력이 컸다. 이 집안이 왕건의 최대 후원자임을 암시한 것이다. 덕분에 유천궁의 딸은 왕건의 적처(嫡妻)가 됐으니 고려 태조의 제1비 신혜왕후다([고려사] 열전 ‘신혜왕후 유씨’).

나주 공략은 왕건과 또 다른 여인을 맺어줬다. 후백제왕 견훤이 나주를 압박하고 해적 두령 능창이 서남해 뱃길을 막자 궁예왕은 왕건을 해군 대장군으로 임명해 다시 출전시켰다(909년). 그 사이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치고 철원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마진은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로 ‘대동방국(大東方國)’이라는 뜻이었다.

또 새 도읍 철원에는 청주인 1000호를 이주시켰다. 고구려 계승 의식이 강한 패서 호족들과의 연합을 깨고 독자적인 권력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호족들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궁예는 패서 지역에 13진을 설치하고 통제를 강화했다. 내정이 살벌해지자 왕건은 전장으로 나가길 원했고 때마침 기회가 왔다. 바로 나주 서남해 평정이었다.

송악의 해상세력 출신답게 왕건은 바다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먼저 염해현(영광)으로 가서 후백제가 중국 오월국에 보내는 배를 나포했다. 중국과 교류해 힘을 키우려는 후백제의 전략에 타격을 입힌 것이다. 이어서 서남해의 섬들을 공략했다.

왕건이 진도와 고이도를 손에 넣자 압해도(신안)의 능창이 봉기했다. 수전에 능해 ‘수달’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해적 두령은 왕건 수군의 앞뒤를 끊는 계책을 강구했다. 하지만 해군 대장군은 미리 첩자를 풀어 동태를 파악하고 지원군을 모으러 나간 능창을 사로잡았다. 해상로를 장악한 왕건은 전함을 수리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며 후백제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이 싸움은 군사력만으론 이길 수 없었다. 현지 호족들의 협력이 절실했다.

그 무렵 목포 오씨 다련군의 딸이 기묘한 꿈을 꿨다. 포구의 용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깬 것이다. 이 집안은 대대로 목포에 살았으며 대호족은 아니었지만 해상 활동으로 부를 쌓았다. 세간의 이야기에 따르면 얼마 후 왕건이 호족들의 협력을 얻으러 찾아왔다고 한다. 그가 포구에서 멀리 시냇가 쪽을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떠 있었다. 구름이 머무는 곳에는 다련군의 딸이 빨래하고 있었다. 기이하게 여긴 왕건은 여인을 불러 잠자리를 같이했다. 이윽고 오씨가 왕건의 장남 무(武)를 낳았다(912년). 고려 태조의 제2비 장화왕후다([고려사] 열전 ‘장화왕후 오씨’).

호족들을 등에 업고 왕건은 후백제왕 견훤과 결전을 치렀다. 후백제군은 이미 육로로 나주를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왕건과 호족들이 합심해 물리친 바 있었다. 견훤왕은 집요했다. 이번에는 수군을 육성해 서남해로 쳐들어온 것이다(912년). 왕건과 호족들의 연합 수군은 영산강 안쪽 나주 포구에서 후백제군을 맞이했다. 견훤은 전함들을 이끌며 밀물을 타고 영산강으로 들어왔다. 목포부터 덕진포(영암)까지 강과 땅을 뒤덮는 대군이었다. 적의 군세에 장수들이 동요하자 왕건은 태연하게 다독였다. “걱정하지 말라. 승리는 화합에서 나오는 것이지 머릿수에 달린 게 아니다.”([고려사]세가 ‘태조’)

왕건은 적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틈을 노렸다. 이윽고 밀물이 빠지고 썰물이 시작됐을 때 연합 수군은 일제히 후백제 함대 한가운데로 돌격했다. 적선들이 물러나면서 전열이 흐트러지자 왕건은 아군에게 바람을 등지게 하고 화공(火攻)을 펼쳤다. 후백제 진영은 아수라장이 됐다. 맞바람에 불화살이 쏟아지니 순식간에 화염이 번졌다.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충성스러운 후원자들을 장인으로


▎KBS 사극 [태조 왕건]에서 궁예(김영철 분, 오른쪽)의 최후, 왼쪽은 궁예의 의제(義弟) 왕건(최수종 분).
견훤왕은 어쩔 수 없이 작은 배를 타고 달아났다. 육지에서는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승승장구한 견훤이었지만 물에서는 왕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왕건은 조류와 바람을 읽으면서 순간적인 결단으로 대군을 격파했다. 10년에 걸친 나주 서남해 공략의 대미를 역사적인 승리로 장식한 것이다.

삼한의 판도를 바꾼 이 전략적 성취는 견훤으로 대표되는 내륙 세력에 맞서 송악·정주·나주 등지의 해상세력이 힘을 모아 일궈낸 것이다. 남북 해상세력이 똘똘 뭉친 데는 결혼이라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있었다.

결혼을 담보로 송악 출신 왕건은 정주 대부호와 나주 호족들의 전폭적인 협력을 얻었고, 그들은 젊은 주군으로부터 미래의 보상을 약속받은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왕건이 유씨와 오씨, 두 아내를 시냇가에서 처음 만난 것은 의미심장하다. 냇가의 여인들은 해상세력을 이어주는 결속의 고리가 아닐는지….

왕건이 큰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궁예왕은 파진찬 관등을 내리고 시중으로서 내정을 총괄하게 했다(913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였지만 그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궁예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또 바꾸고 스스로 미륵불이라 일컬었다. 승려 석총이 요사스럽다고 비판하자 왕이 노해 쇠몽둥이로 쳐 죽였다. 궁예의 광란은 해가 갈수록 심해졌다. 의심이 많아져 무고한 참소에 관리와 장수들을 도륙했다. 급작스레 분노할 때면 누구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왕비 강씨도 “신통력으로 간통하는 것을 봤다”며 쇠몽둥이를 불에 달궈 치욕스럽게 죽였고, 두 아들마저 살해하고 말았다. 이런 참극들을 수습하면서 왕건은 국정을 이끌어야 했다([삼국사기] 열전 ‘궁예’).

왕 시중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궁예왕이 갑자기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반역을 모의했다고 힐문한 것이다. 왕건이 극구 부인하자 왕은 역정을 냈다.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으로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으니 속이지 말라.” 그러고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하늘을 우러러봤다. 이때 궁예왕의 상소문을 담당하던 최응이 짐짓 붓을 떨어뜨렸다. 그는 뜰에 내려와 줍는 척하다가 시중의 곁을 빠르게 지나치며 귀띔했다. “복종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왕건은 엎드려서 없는 죄를 자백했다. “신이 모반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궁예는 눈을 번쩍 뜨더니 크게 웃고 용서해줬다([고려사] 세가 ‘태조’).

기지를 발휘해 왕건을 구한 최응은 황주 토산 사람이었다. 황주는 패서 최대의 고을로 대호족 황보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집안의 가주 황보제공은 패서 호족들의 지도자였다. 그는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승려 이엄(진철대사)을 후원하는 종교 모임을 조직했는데, 실상은 패서인들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한 비밀결사였다.

그들은 궁궐 안팎에 관리들을 심고 문제가 생기면 은밀하게 손을 썼다. 최응이 붓을 떨어뜨린 척하며 왕건에게 귀띔한 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당나라 상인 왕창근의 고경(古鏡)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낡은 거울의 경문(鏡文)을 풀이해보니 송악에 몸을 감춘 용, 왕건이 삼한을 통합한다는 도참이었다. 누군가 모함한 것인데 학자들이 다르게 해석해 왕 시중을 지켜냈다(918년).

왕건은 치열한 정치공작과 궁중암투 끝에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918년 6월). ‘고려’ 국호는 고구려 계승이라는 패서의 열망이 반영된 것이다. 왕건은 집권의 발판이 돼준 패서 호족들과 동맹을 맺었다. 결혼은 동맹의 확실한 징표였다.

황주 대호족 황보제공의 딸이 왕비가 되니 고려 태조의 제4비 신정왕태후다. 평주 출신 유금필·박수문·박수경 등도 여식들을 태조에게 시집 보냈다. 1명의 왕후와 8명의 부인이 패서에서 나왔다. 왕건은 결혼을 통해 패서 호족들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더욱 높여주려고 했다. 충성스러운 후원자들을 국구로 삼아 권력을 나눠준 것이다.

뭉개거나 혹은 달래거나


▎KBS 사극 [태조 왕건]에서 만년의 견훤(서인석 분), 왼쪽은 견훤의 막내아들인 금강 태자(전현 분). 금강 태자는 이복형들에게 살해되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새로운 나라 고려는 출발부터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먼저 웅주(공주)의 마군대장군 이흔암이 태조 즉위 직후 철원으로 와서 반역을 꾀하다가 저자에서 처단됐다. 이 때문에 웅주·운주(홍성) 등 금강 유역의 10여 개 주현(州縣)이 후백제로 넘어갔다(918년 8월). 중부 내륙의 요충지 청주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청주는 궁예왕이 지역민을 철원으로 이주시키는 등 공을 들인 곳으로 왕건이 즉위하자 반란 조짐이 나타났다.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태조는 맹장 유금필과 홍유를 보냈다. 장수들은 청주와 인접한 진천을 전초기지 삼아 반란세력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청주 사람 임춘길이 철원에서 꾸민 거사도 사전에 발각돼 엎어졌다. 청주가 진정된 것은 왕건이 직접 찾아가 민심을 달래고 성을 쌓은 뒤였다(919년 8월). 동쪽으로는 태백산맥 너머 명주가 골칫거리였다. 애초 궁예가 일어난 곳인 데다 그의 측근 순식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은 늘 그랬듯이 호족들과 손잡고 난관을 극복했다. 그는 지역별로 과제를 제시하고 결혼동맹을 적극 활용했다. 충주는 중부내륙과 영동을 아우르는 주요 거점이었다. 군사적으로는 고개 너머 신라를 향해 진군하는 길목이요, 문화적으로는 불교를 매개로 명주와 교감하는 사이였다. 왕건은 일찍이 충주를 평정하면서 유씨(劉氏) 집안과 인연을 맺었다.

상주 일대 30여 개 성을 점령하고 후백제군을 격퇴할 때도 배후 지원을 받았다(906년). 태조는 ‘금석지약(金石之約)’을 맺고 즉위를 전후해 유긍달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고려 태조의 제3비 신명순성왕태후다. 그녀에게서 5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얻었으니, 왕건은 밤에도 정열적으로 신의를 지킨 셈이다. 충주 유씨 또한 태조에게 충성을 다했다. 명주 장군 순식이 복종한 것도 시랑 유권열과 이 집안의 노력 덕분이었다(<고려사절요> ‘태조 5년’).

금강 유역에서의 손실은 ‘왕건다운’ 방식으로 해결했다. 고려 태조는 아산만 공략이라는 승부수를 띄웠다. 나주에 이어 해상 세력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뱃길을 이용해 아산만으로 들어가면 금강 유역의 배후에 군사 지원과 보급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

태조는 시중 김행도, 개국공신 홍유 등 거물급 인사들을 각각 아주(아산)와 예산에 보내 인근 호족들을 포섭했으며, 천안도독부를 설치해 거점으로 삼았다. 아산만 일대가 안정되자 왕건은 직접 금강 유역 정벌에 나섰는데 운주에서 견훤군을 대파하고 웅주 등 30여 개 성의 항복을 받았다(934년).

여기서도 결혼동맹이 위력을 발휘했다. 제10비 숙목부인(진천, 임명필의 딸), 제11비 천안부원부인(천안, 임언의 딸), 제12비 흥복원부인(운주, 홍규의 딸) 등이 태조의 비가 됐다. 물론 모반에 대비해 ‘인질납비(人質納妃)’, 볼모로 딸을 바치게 하기도 했다.

결혼동맹과 호족 연합으로 왕건은 ‘삼한의 사위 왕서방’이 돼갔다. 고려 태조는 신라의 항복을 받아 삼한통합의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천년 고도 경주를 약탈했을 때 신라는 사실상 끝장났다(927년). 견훤왕은 박씨 경애왕과 왕비를 자진케 하고 보위를 헌강왕의 외손자 김씨 경순왕에게 넘겼다.

신라를 구원하러 간 고려는 (대구) 공산전투에서 후백제에 참패를 당했으나, (안동) 고창전투에서는 지방세력의 도움을 받아 설욕했다(930년). 호족들은 큰 전투의 승패에 따라 고려냐 후백제냐, 왔다 갔다 했다. 왕건은 신라의 항복이 대세를 판가름할 것이라고 봤다. 망해가는 나라지만 천년왕국의 정통성은 강력한 명분이자 힘이었다. 견훤이 신라를 깔아뭉갰다면, 왕건은 어르고 달래며 노련하게 옥죄었다.

문어발식 동맹의 후유증

신라 경순왕은 망국의 군주지만 똑똑한 출구전략을 펼쳤다. 그는 신라의 몸값이 정점을 찍을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후 후백제에서 후계 다툼이 일어나 늙은 견훤이 맏아들에게 쫓겨났다(935년). 고려와 후백제의 팽팽하던 힘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경순왕은 항복을 결정했다.

신라왕의 행렬이 경주에서 출발해 개경으로 향했다. 천년 왕국의 정통성을 고려에 넘기는 장엄한 의식이었다. 관망하던 호족들도 앞다퉈 고려에 충성을 맹세했다. 개경에서 경순왕은 왕건의 맏딸 낙랑공주와 결혼하고 낙랑왕에 봉해졌다. 왕건은 경순왕의 사촌누이를 아내로 맞이했다. 고려 태조의 제5비 신성왕태후다. 그것은 결혼동맹의 결정판이었다. 이제 신라와 고려는 한 가족이 됐다.

경순왕의 ‘항복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멸망 직전의 신라를 인수한 그는 후백제 멸망 직전 고려에 팔았고, 덕분에 신라 지배층은 개경에 안착해 미래를 보장받았다. 나라를 다스려본 그들은 고려의 관료로 자리 잡았다.

태조 왕건은 마침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했다(936년).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호족과 공신들의 힘을 모으려고 맺은 문어발식 결혼동맹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 29명의 부인에게서 34명의 자식들(왕자 25명, 공주 9명)을 얻었으니 태조 사후에 어지러운 왕위 다툼이 불가피했다.

그 중심에는 정식 부인인 6명의 왕후와 국구 집안들이 있었다. 신혜왕후 유씨(柳氏)는 적처로서 고려 건국에 공이 컸다. 배현경·홍유·신숭겸·복지겸 등 4대 공신이 찾아와 의거를 촉구했으나 왕건이 완강하게 거부하자 손수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 건국의 길에 나서도록 만들었다([고려사] 열전 ‘신혜왕후 유씨’).

정주 유씨 세력도 자금줄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 공을 높이 평가한 고려 태조는 신혜왕후가 자식을 보지 못하자 이 집안에서 제6비 정덕왕후를 들이기도 했다. 왕의 핏줄을 얻으라고 배려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보위는 둘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 소생인 맏아들 무에게 돌아갔다. 고려 2대왕 혜종이다. 문제는 장화왕후의 집안이 군사력, 경제력, 신분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었다는 것이다. 대호족이 아니라서 왕건이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돗자리에 사정했는데 왕후가 그것을 취해 무를 가졌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고려사] 열전 ‘장화왕후 오씨’).

맏아들을 아낀 고려 태조가 자황포(황제의 도포)를 하사하고 대광 박술희가 돕지 않았다면 즉위하지도 못했을 터. 결국 혜종은 재위 2년 만에 의혹 가득한 죽음을 맞았다. 고려 왕위는 제3비 신명순성왕태후 소생인 정종과 광종을 거쳐, 제4비 신정왕태후와 제5비 신성왕태후의 혈육들에게 넘어갔다. 외척 간에 합종연횡하면서 피를 섞었지만, 패서의 고구려 세력과 경주에서 온 신라계가 중심이 돼 고려의 왕통을 이루고 정체성을 형성한 것이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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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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