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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52}] 기호학파 토대 구축한 사계(沙溪) 김장생 

임금에게도 뜻 굽히지 않은 예학의 종장(宗匠) 

이이·송익필 학문 이어받아 김집·송시열·송준길 등 후학 길러 기호학단 형성
임진왜란 직후 [가례집람] 완성… 예(禮) 재정립해 흐트러진 윤리 질서 재건


▎김선원 종손이 사계종가 재실인 염수재 앞에 섰다.
"제왕(帝王)의 법통(法統)은 비록 형이 아우의 뒤를 잇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이었다 하더라도, 모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 지금 성상께서는 선조(宣祖)의 대통을 이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성상의 사친(私親, 생부)을 끼워 넣어 위로 조묘(祖廟)를 잇게 한다면, 이것이 이른바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에다 합친다고 하는 것으로, 윤리를 어지럽히고 예를 어그러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친을 고(考, 죽은 아버지)라고 칭한다면 상복도 반드시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어찌 대통을 이어받고도 사친을 위해 삼년복을 입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1624년 4월 인조(仁朝)가 예법을 고증해 달라고 하자 한 선비가 쓴 상소문이다. 임금은 제사 축문에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어떻게 호칭할지 혼란스러웠다. 선조를 이은 광해군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쫓겨난 뒤다. 인조가 정원군을 ‘고’로 칭하기로 하자 조정은 논의가 분분해졌다. 상소문의 요지는 임금이 된 이상 생부를 ‘고’가 아닌 ‘숙(叔)’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이가 납득하지 못했다. 인조는 끝내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한다. 상소문은 기호학파가 조선 예학(禮學)의 으뜸으로 치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선생이 지었다. 그의 예학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일화다. 조선은 명분과 예의 나라였다. 임금이 주장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논란거리를 자문할 만큼 사계는 ‘예학의 종장(宗匠)’으로 불렸다.

5월 21일 사계의 흔적을 찾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사계종가를 찾았다. 주변은 개구리 소리가 들리는 농촌이었다. 사계의 14대 종손 김선원(75)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재실인 염수재(念修齋)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종가는 식혜·대추차 등 찻집을 겸하고 있었다. 연산면장 등 40년 공직 생활을 한 종손은 종가의 내력을 먼저 설명했다. 종가는 본래 서울에 있었는데 병인양요(1866년) 무렵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바로 사계의 묘역 아래다. 봉제사는 종가의 첫째 임무일 것이다. 사계종가의 오늘날 의례가 궁금했다. 종손은 특별한 게 없다면서 “제사는 조금 다를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옛날 그대로 인시(寅時, 새벽 3시)에 진설을 시작해 제사를 올립니다. 1박 2일이 필요하지요. 참사자는 아침을 먹고 헤어집니다. 요즘 이렇게 제사 지내는 곳은 잘 없겠지요?” 그는 요즘도 사계 불천위 제사에는 전국에서 후손 20여 명이 모인다고 덧붙였다.

묘소 아래 자리 잡은 사계종가


사계는 예학과 관련해 여러 저술을 남겼다. 사계는 아버지 상(喪) 중인 36세에 첫 예서인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내놓는다. 사계는 34세에 주청사(奏請使)인 아버지(김계휘)를 따라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함께 돌아왔다. 직후 아버지가 경연 중 갑자기 별세한다. 그리고 1년 뒤 스승인 율곡(栗谷) 이이(李珥)마저 세상을 떠난다. 사계는 아버지 상을 당해 철저히 [주자가례]를 따르고 여묘를 살았다. 그리고 복중(服中)에 율곡의 죽음 또한 애도하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따로 스승에 대한 복(服)을 입고 곡을 했다. [상례비요]는 본래 친구 신의경이 썼으나 사계는 빠진 것을 보완하고 교정했다.

사계는 또 52세에는 필생의 역작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한다. 1599년(선조 32) 임진왜란 직후다. 전란으로 기강이 무너져 예의가 바로 서는 도덕 국가 건설은 조선 사회의 최우선 과제였다. 예서 보급은 절실했다. 그 무렵 조선에 건너온 [주자가례]는 송나라 초창기에 나와 망실이 된 상태로 그 뜻을 훤히 알 수 없는 폐단이 있었다. 사계는 [주자가례]를 미완성으로 간주하고 여러 설을 모아 조목별로 해석을 붙이는 등 보완했다. 또 도설(圖說)을 넣어 쉽게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국역 사계전서] 해제를 쓴 고 배상현 동국대 명예교수는 그래서 “사계의 내면에는 주자의 학문을 완수하겠다는 도통의식이 잠재돼 있었다”고 표현했다.

종가를 나와 종손의 안내로 사계 묘소를 답사했다.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두른 언덕 아래로 묘 여러 기가 보였다. 사계의 7대 조모로 광산 김씨 중흥을 이룬 양천 허씨와 아들 김철산 등 모두 6기가 모여 있다. 사계의 묘소는 여기서 맨 위쪽이다. 종손은 “가끔 위아래가 바뀐 역장(逆葬)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며 “기호지방에는 ‘역장’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고 했다. 봉분이 일반 분묘에 비해 아주 컸다. 종가의 재실 뒤쪽에 사당이 있다. 수령 170년 배롱나무 2그루가 사당 앞을 지키고 있었다. 종손은 종가 앞 논을 가리키며 저기 다섯 마지기에 모두 사계가 정산현감 시절 좋아한 연꽃을 최근 심었다고 소개했다. 종가를 나왔다. 종가 가까운 길 입구에 세워진 신도비를 둘러보고 사계의 학덕을 기리는 인근 돈암서원으로 향했다.

사계는 예학에 큰 자취를 남기면서 동시에 기호학파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이어 영남학파의 기반을 닦았다면 기호학파는 바로 사계가 율곡을 이어 그 역할을 했다. 사계는 다시 신독재(慎獨齋) 김집(金集)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 영향력 있는 제자들을 다수 배출한다.

2000년대 새로 지은 동·서재와 산앙루


▎사계고택(은농재) 영당의 내부 모습. 시호(諡號) 교지 앞에 사계 초상화가 있다. / 사진:충남역사문화연구원
김장생의 첫 스승은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이었다. 그는 13세에 아버지 친구인 구봉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등을 배우고 20세에 율곡의 문하로 나아갔다. 율곡 역시 사계의 아버지와 돈독한 사이였다. 김장생은 해주 석담에 머무르고 있는 율곡을 찾아가 함께 기거하며 공부했다. 충청도 논산에서 황해도 해주까지 천 리 길을 찾아간 김장생은 그곳에서 20여 일을 머물렀다. 사계는 이렇게 율곡과 구봉의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 말고도 그는 보령으로 토정 이지함을 찾아가고 우계 성혼을 방문하며 청년기를 보냈다. 배상현 교수는 “사계는 구봉에게서 학문적 바탕과 예학을, 율곡으로부터 이학(理學)과 경세(經世)를 배웠다”고 정리한다. 김장생은 이들 덕분에 일찍이 학문을 했지만 과거시험은 보지 않았다. 그는 출세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스승에게서 이어받은 도학과 예학에 전념했다.

사계는 율곡의 제자로서 퇴계 학설에는 비판적이었다. 우암이 쓴 행장에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계의 주장은 이렇다. “이(理)와 기(氣)는 둥글둥글 뭉쳐 있어 본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퇴계 이황 선생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호발(互發)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이와 기를 두 갈래로 갈라놓은 잘못을 범한 것이다. 율곡 선생이 ‘발한 것은 기고, 발하게 하는 것은 이다. 이라는 것은 태극이고 기라는 것은 음양이다. 이제 태극과 음양이 서로 동한다고 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태극과 음양은 서로 간에 동하게 할 수 없는 것인즉, 이와 기가 서로 간에 발한다고 한 것이 어찌 틀린 말이 아니겠는가’ 했는데, 이 말은 비록 성인이 다시 나온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말이다.” 이후 조선 성리학은 퇴계의 주리론(主理論)과 율곡의 주기론(主氣論)으로 나눠진다.

사계종가에서 4.5㎞ 떨어진 돈암서원으로 들어갔다. ‘예학의 산실’이란 문구가 보였다. 입구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9곳 중 한 곳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서원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경내를 관람했다.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 12) 창건될 때 본래는 현 위치에서 1.5㎞ 떨어진 사계천이 지나는 연산면 하임리 숲말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숲말은 지대가 낮아 사계천이 자주 범람하고 서원은 수해를 입었다. 1880년(고종 17) 서원은 지금의 자리로 이건한다. 그러나 서원 강당인 응도당(凝道堂)은 당시 기술로 이건이 어려워 옛터에 그대로 두었다. 대신 강당 자리엔 사계가 낙향해 강학하던 양성당(養性堂)이 들어섰다. 1971년 뒤늦게 응도당이 옮겨지지만 응도당은 강당 자리 대신 출입문인 입덕문 왼쪽으로 빗겨나 배치된다. 지금의 모습이다. 2000년 논산시 등은 서원을 정비하면서 양성당 앞 원정비(院庭碑) 기록에 따라 없어진 동·서재를 새로 짓는다. 산앙루라는 누각도 새로 세웠다.

그러나 돈암서원의 동·서재 건립 등은 이후 걸림돌이 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다. 등재 대상으로 기호학파의 구심점인 돈암서원 등 성리학의 중심 역할을 한 9곳이 정해졌다. 문화재청은 2015년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서를 낸다. 그러나 이듬해 갑자기 자진 철회한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등이 현장을 사전에 둘러보고 돈암서원은 원형 보존이라는 기준을 크게 벗어났다고 지적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이후 돈암서원 등을 원형에 가깝게 재정비한 뒤 재신청을 통해 2019년에야 비로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었다.

돈암서원 배향 4인은 ‘작은 문묘'


▎사계의 교지 중 하나. / 사진:충남역사문화연구원
왕과 신하의 예법이 적용됐다는 우람한 강당 응도당을 거쳐 장판각을 돌자 돈암서원 사당인 숭례사(崇禮祀)가 보였다. 들어가 주향(主享)인 사계 선생을 알묘했다. 흰색 작은 위패에는 ‘文元公沙溪金先生’(문원공사계김선생)이라 쓰여 있었다. 그 왼쪽으로 송준길, 오른쪽에는 김집, 송시열이 나란히 종향돼 있다. 이들 사제(師弟)는 모두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 공통점이 있다. 사계는 어떻게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을까.

1613년 66세 사계에게 불운이 닥친다. 그의 서제(庶弟) 경손과 평손이 계축옥사(癸丑獄事)에 깊이 연루된 것이다. 광해군 시기 계축옥사는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등 명가의 서자 7인이 반역을 꾀하고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이 관련되었다며 이들을 주살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킨 사건이다. 대북파 정권은 처음 이 사건에 서인(西人) 김장생을 연루시키려 했다. 그러나 피의자들이 고문으로 죽어가면서도 관련설을 부인하고 대신들이 면죄를 건의하면서 사계는 위기를 모면한다.

계축옥사로 사계는 철원부사 직에서 축출돼 고향 연산으로 돌아왔다. 사계와 둘째 부인 순천 김씨를 연구한 한기범 한남대 명예교수는 “이때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머문 곳이 지금의 사계고택인 은농재(隱農齋) 자리가 아니었나 한다”고 추정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랄까. 낙향한 사계는 후학 양성에 매진한다. 그는 인조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나갈 때까지 10년을 두문불출하며 오로지 제자를 가르치고 경서를 연구했다. 김장생의 아들 김집과 송시열·송준길·이유태 등 사계를 적통으로 계승한 학자들이 모두 이 시기 예학과 경학을 배웠다.

은농재를 찾아갔다. 돈암서원에서 동북쪽으로 16㎞ 떨어진 곳이다. 행정구역이 바뀌어 지금은 논산 아닌 계룡시 두마면이 됐다. 고택에는 사계의 13대손인 김기중(74)씨가 있었다. 사계는 55세 되던 1602년(선조 35) 이 집을 지어 부인 순천 김씨와 함께 만년을 보내고 여기서 삶을 마감했다. 사계는 19세에 창녕 조씨와 혼인했으나 39세에 사별하고 41세에 순천 김씨를 다시 부인으로 맞이했다. 고택 가운데 영당(影堂)이란 곳이 있었다. 문을 여니 낯익은 사계의 초상화와 그 뒤로 시호 교지 병풍이 보였다. 여름인 음력 8월 선생이 돌아가시고 출상하기까지 78일간 시신을 모신 공간이다. 그게 당시 사대부 상례였다. 후원을 지나니 구로정(九老亭)이라는 정자가 나왔다. 후손은 “구로가 사계 문하에서 배출된 3정승 6판서를 뜻한다”고 설명했다.

사계는 ‘금수저’ 집안 출신이다. 5대조가 좌의정(김국광)을 지냈고 고조는 사간원 대사간에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사계는 그러한 배경에서 후진을 길러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사계전서] 문인록에는 아들 김집을 시작으로 제자 284명의 이름이 나온다. 이들은 조선 후기 사회를 이끈 한 축이 됐다. 그러나 종손은 “이제는 사계 제자의 후손 모임 같은 것은 없다”고 아쉬워했다. 사계의 일생에는 불명예스러운 일도 있다. 그는 1605년(선조 38) 익산군수에서 파직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익산군수 김장생은 학식이 있는데 중앙에 보낼 모든 공물에 월리(月利)를 붙여 징수해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다”는 사헌부의 파직 요청 상소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기호학파의 산실로 추정되는 은농재 고택


▎사계 묘소(맨 위)와 묘소 앞에 자리 잡은 사계종가.
1623년 조선은 일대 변혁이 일어난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대북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반정의 주도 세력은 서인이었고 중심인물은 사계의 동문과 제자들이었다. 반정 정권은 광해군의 패륜을 의식해 윤리 질서 재건과 반금친명(反金親明)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또 유림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학덕이 출중한 산림(山林)을 등용한다. 김장생이 우선 발탁된다. 인조는 사계를 위해 종4품 사업(司業)이란 직책을 만들어 유생 지도를 맡기고 이어 세자 교육과 때때로 자신을 접견케했다. 사계는 이 무렵 인조에게 수차례 상소를 올리고 [소학]을 익힐 것과 예를 솔선수범할 것을 권한다.

이조판서를 지낸 문인 장유(張維)는 사계 신도비(神道碑)에 논란이 된 스승의 인조 사친 문제를 적고 있다. “선생은 국가 전례(典禮)를 논함에는 홀로 뭇사람의 설을 배격하여 위로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고 아래로는 여러 사람과 마찰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나는 짧은 소견으로 여러 차례 의문점을 진달했으나 선생은 처음 견해를 지키면서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예학의 시비(是非)에 대한 사계의 소신은 임금 앞에서도 굽힘이 없었다. 꼿꼿함이다. 사계는 왜란과 호란 이후 그런 자세로 흐트러진 예를 재건하고 율곡을 이은 도학자로 후학을 길러 기호학단을 구축했다.

[박스기사] 43년 해로한 염선재(念先齋) 몰락한 김종서 가문 후손 - 평생 조상 복권 위해 노력… 남편 3년상 치른 뒤 자진(自盡)

은농재가 있는 사계고택의 첫 안주인은 사계 김장생의 둘째 부인 순천 김씨였다. 후손들은 재실 이름을 따 그 할머니를 염선재(念先齋)로 부른다. 그를 둘러싸고 숱한 이야기가 전한다.

사계는 창녕 조씨 부인이 죽고 3년상 기간이 끝난 뒤 41세에 재혼한다. 당시 슬하에는 은과 집, 반 등 세 아들이 있었다. 당시 집은 15세였고 반의 나이는 겨우 9세에 불과했다. 돌봐줄 어머니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사계와 혼인할 때 염선재의 나이는 17세.

염선재는 당시 성도 이름도 호적도 없이 쫓기며 사는 신세였다. 혼례도 치르지 못했다. 거기서 8남매가 났다. 사계는 자신의 이름 그대로 84세까지 장수한다. 그래서 염선재와 산 기간만 43년에 이른다. 지금은 후손들이 염선재를 사계의 ‘계배(繼配)’로 호칭하지만 당시 신분은 ‘측실(側室)’이었다. 측실의 자식은 서자가 돼 과거시험도 볼 수 없다. 문인 장유가 쓴 사계 신도비에는 지금도 염선재가 ‘측실’로 기록돼 있다. 그래서 후손 김기중 씨는 “30~40년 전 후손 몇이 신도비의 ‘측실’ 글자를 지우기 위해 정으로 쪼다가 발각된 적도 있다”고 설명한다. 사계 연보에는 ‘부실(副室)’로 표현돼 있다. 사계가 당시 양반가 출신의 계배 대신 하필이면 염선재를 선택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염선재는 기실 미천한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염선재는 단종 시기 좌의정을 지낸 절재 김종서의 7대 손녀였다. 김종서는 세종의 6진 개척으로 북쪽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했지만, 수양대군의 정치적 야욕으로 단종을 지키려다 반역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이때 그의 직계 3대는 거의 몰살하는데 요행히 일점혈육이 살아남아 혈통을 유지한다. 이후 후손들은 신분을 감추고 근근이 살았다. 염선재의 친정이 바로 그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염선재는 조상 김종서의 원통함을 씻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유력한 사계 가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혼인 2년 뒤 아들이 태어나자 염선재는 이 사실을 사계에게 고백했고 사계는 김종서의 명예회복 당위성에 공감했다.

그러나 사계는 생전에 여건이 성숙하지 못해 끝내 조정에 그 뜻을 상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염선재는 사계가 살아 있는 동안 조상의 신원을 풀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염선재는 그래서 부군 3년상을 마친 뒤 결심한다. 그는 상복을 입고 자손들 앞에서 결연히 자진(自盡)의 뜻을 밝히고 단식을 이어가다 절사(節死)한 것으로 전해진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2007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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