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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19)] ‘파리의 현충원’ 팡테옹이 혁명을 기억하는 법 

‘단죄’ 외쳤던 자의 무덤엔 꽃도 편지도 없어! 

‘혁명 뒤 관용’ 호소했던 빅토르 위고 무덤은 순례객으로 북적거려
오늘날 한국은 단죄 일변도… 혁명을 사유화하려는 시도 경계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립묘지 ‘팡테옹(Pantheon)’.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1789년에 완성됐다. 지하에 볼테르·루소·빅토르 위고 등의 무덤이 있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페스트(La Peste)].

전염병 창궐과 함께 70여 년 만에 다시 뜬 글로벌 베스트셀러다. 잘 알려진 대로,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작품이다. 바이러스 시대에 걸맞은 소재란 점에서 다시 화제가 된 듯하다.

그런데 [페스트]의 인기가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 작가 카뮈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이 배경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관적 판단이지만, 실존주의 소설가의 독특한 캐릭터가 받쳐주지 않았다면 [페스트]의 ‘폭발적 부활’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카뮈라는 인간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기초한 소설이기에 전염병 비상사태에 맞춰 되살아난 것이다. 방점이 [페스트]만이 아닌, 카뮈에게도 내려질 수 있다는 의미다.

[페스트]는 프랑스령 알제리의 도시 ‘오란(Oran)’을 배경으로 한 역병 극복기다. 오란에 전염병이 퍼지자, 정부는 도시 전체를 외부로부터 격리한다. 폐쇄된 도시 속에서 하루에 수십 명씩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일이 1년간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나는 백인백색 심리와 자세, 나아가 세계관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캐릭터 모두 나름의 역할이 있지만, 크게 보면 의사 리유(Bernard Rieux)와 여행객 타루(Jean Tarrou)가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소설 속 타루는 스페인 파시즘 정권에 맞서 스페인 내전(1936~1939)에 참전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멕시코 남서부에 위치한 게레로 주(州) 정부가 코로나19 희생자들을 매장할 묘역을 조성하고 있다. / 사진:EPA/연합뉴스
카뮈의 다른 작품 속에 나온 말을 빌려 [페스트]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Je me révolte, donc nous sommes).’ 카뮈의 1951년 작품 [반항하는 인간(L’Homme Révolté)]에 나온 말이다. 소설가 카뮈가 어떤 인생관을 지녔는지 알려주는 ‘촌철살인’ 명구이기도 하다. [페스트] 줄거리에 견줘보면 ‘나는 역병에 반항한다, 따라서 반항하며 맞선 역병을 통해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로 풀이해 볼 법하다.

전체 문장에서 서술어 ‘반항한다’보다 주어인 ‘나’와 ‘우리’에 눈길이 간다. 반항의 주체가 ‘나’이고 반항의 결과가 ‘우리’라는 것이다. 나에게서 출발해 우리로 성장하는 부분이 명언의 포인트다. 다시 [페스트]로 돌아가 보자. 부조리의 대명사 격인 전염병에 싸우는 주체는 개인이다. 그러나 방역은 반드시 집단적 차원에서의 대응이 필요하다. 결국 개인들이 전염병에 맞서 함께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연대의식(solidarité)을 갖게 되고, 결국 집단으로서 전염병을 이겨내게 된다.

혹자는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2020년 한국은 카뮈의 세계관과 정반대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카뮈가 ‘개인의 반항과 집단의 생존’을 말했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선 ‘집단의 반항과 개인의 생존’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반일·촛불혁명·적폐청산 같은 미명 하에 함께 싸운 뒤, 승리의 과실은 진영에 속한 집단이 독식하는 식이다.

물론 집단행동은 한국 민주화를 이뤄낸 힘이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집단’만 부각된다는 게 문제다. ‘나의 개인적’ 차원에서의 반항이 극히 드물다. 떼로 움직이면서, 세(勢)를 통한 논리가 대세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편으로 끼어들면서 목소리를 높일 뿐, 개인적 판단과 반항에는 무관심하다. ‘반일·민족·흙수저·적폐청산·통일세력’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함께 반항하는 댓글 속의 우리’가 21세기 한국의 현실이다.

정작 집단 반항의 결과물은 집단 구성원이 고루 향유하지 못한다. 신문·방송에 거의 매일 등장하는 적자생존·약육강식 승리자를 보면 예외 없이 ‘우리의 반항’ 덕분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반항 덕분에 우리가 승리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승리가 아닌 ‘나만의 승리’에 불과하다. 1인 독식을 가능하게 만든 ‘떼·끼리끼리·민족·통일세력·시민단체’는 그 같은 립 서비스에 간단히 넘어간다. 개인적 차원의 반항을 모르기 때문에, 1인 독식 생존자에게 거짓말이라며 비난하고 개별적으로 나서기도 어렵다. 결국 ‘너희들은 반항해라, 고로 나만 존재한다’는 것이 2020년 한국의 현주소다.

‘저항은 함께, 생존은 각자 알아서’


▎파리 샤를드골 광장에 세워진 ‘자유 프랑스 지도자’ 샤를 드골의 동상. 드골은 나치 독일 협력자들을 처벌했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앞서 카뮈가 아니라면 [페스트]의 부활은 없었다고 말했다. 카뮈 세계관이 오늘날까지 어필하는 매력은 뭘까?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페스트]가 발간된 1947년 상황을 보면 작가 카뮈가 가진 특별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1947년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혼란상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전쟁은 끝났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눈앞에 닥쳤다. 인간의 본능이지만, 육체·정신적으로 불안할수록 공격적으로 변한다. 최근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는 폭동이 단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공감할 테마로, ‘역사와 민족’ 이데올로기가 급부상한다. 추축국과 그 나라들에 부역했던 자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세계 각국에서 나왔다. 4년여간 나치독일의 위성국가(비시 프랑스) 신세를 면치 못했던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전후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와 대(對)독일 화해론자 사이의 대립이 벌어진다. 레지스탕스는 독일에 협력한 사람들을 전부 처단하자고 말한다. 레지스탕스는 비시 정권 관계자들을 반역자로 규정한다. 반면 화해론자는 현실논리를 들어 항변한다. 히틀러에게 정면으로 대들었을 경우, 파리 전체가 불타고 대량살상이 이어졌을 것이라는 말이다.

카뮈의 [페스트]는 바로 이런 시점에서 출간된 책이다.

[페스트]의 명장면은 소설 끝부분에 나온다. 의사 리유와 여행자 타루가 해풍이 불어오는 테라스에서 대화하는 장면이다. 필자가 보기에 소설 속 타루는 전후 프랑스의 카뮈, 그 자신으로 비친다. 당시 프랑스 상황에 대한 카뮈의 심정이 어땠는지, 타루의 독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선의에서 비롯됐다 하더라도 나 역시 살인자 측에 끼어들었다는 것이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알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들조차도, 오늘날의 모든 논리 자체가 잘못돼 있기 때문에, 사람을 죽게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서 몸 한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죽임을 당하는) 희생자들 편에 서서 그 피해를 줄이고자 합니다.” (이휘영 역, 264~268쪽)

타루는 사형 폐지론자다. 그 어떤 이유에서도 인간이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남을 죽이기보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는 것이 타루의, 아니 카뮈의 생각이다. 타루는 페스트에서 벗어나 정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교회의 성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페스트가 끝난 뒤 타루는 저세상으로 간다. 삶이 아닌, 죽음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성자다. 전후 프랑스에서는 성자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 카뮈의 메시지일 듯하다.

‘타루=카뮈’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타루의 과거 행적은 가장 중요한 이유다.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카뮈의 전쟁 중 행적과 비슷하다. 카뮈의 출생지는 알제리다. 프랑스에서 ‘피에 누와(Pieds-Noirs)’라 불리는,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이다. 말이 프랑스인이지, 식민지 알제리인과 별 차이 없는 2류 국민으로 처리됐다. 프랑스 보르도 출신 아버지는 어릴 때 전쟁에서 숨졌고, 거의 벙어리에 가까운 스페인계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가난에 찌든 생활이었다. 어렵게 알제리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가족 모두 파리로 간다.

그러나 프랑스로 이사한 순간, 점령군 독일이 들어온다. 프랑스 밖으로 도망갈 생각도 했지만, 당시 20대 청년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나치에 항전하는 레지스탕스가 된다. 지하신문 [컴배트(Combat)]의 주필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활동한다. 페스트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기 직전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대부분의 초안은 전쟁 직전 이미 끝냈다.

카뮈는 총과 거리가 먼, 펜으로 나치와 싸운 레지스탕스다. 전쟁 중 레지스탕스는 나치 협력자 프랑스인을 비밀리에 처단했다. 카뮈는 그 같은 레지스탕스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무리 프랑스 자유와 독립을 위한 전쟁이라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카뮈의 생각이다. 전후 카뮈는 레지스탕스 지식인의 상징이자 영웅으로 추대된다. 레지스탕스 출신 지식인은 프랑스식 적폐청산과 좌파운동을 통해 문학 예술계를 장악한다. 정작 레지스탕스 지식인의 상징인 카뮈는 그 같은 세력들과 멀어진다.

카뮈가 나치 부역자 처형을 반대한 이유


▎프랑스 문학의 최고봉이 모인 팡테옹 내 지하 무덤. 입구를 중심으로 오른쪽이 에밀 졸라, 가운데가 알렉산드르 뒤마, 그리고 왼쪽이 빅토르 위고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1954년부터 본격화된 알제리 독립운동은 ‘타루=카뮈’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다. 카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사실상 알제리인이라고 봐도 될 정도의 인물이다.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알제리 독립운동이 시작된 지 3년 뒤인 1957년이다. 노벨상 수상이란 세계적 지명도를 가진 인물이란 점에서 카뮈의 한마디가 국제사회에 미칠 영향도 심대했다.

그러나 카뮈는 알제리 독립 지지에 나서지 않는다. 식민지 유지에도 찬성하지 않는,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당시 좌파 지식인들은 ‘알제리 독립=인류의 양심’이라 평가했다. 그러나 카뮈는 무력 독립운동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결코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지 않았다. 카뮈는 노벨상을 받은 지 3년 뒤인 1960년 1월 세상을 뜬다. 향년 47세. 사인은 교통사고다. 알제리 독립 2년 전이다.

카뮈의 인생과 소설 [페스트]를 되돌아보면 한국적 상식과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보다도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고,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으로 2류 인생이 뭔지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통해 누구보다도 위험한 삶을 보낸 인물이 카뮈다. 신과 역사를 부정하는 실존주의 작가로서,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다는 점에서, ‘풀뿌리 권위’를 한 손에 쥔 사람이 바로 카뮈다. 약자를 위해, 피해자의 편에서 싸울 수 있는 최적의 모델이 카뮈다.

그러나 카뮈는 말을 아낀다. 목숨을 걸고 행했던 레지스탕스의 상징이자, 알제리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2류 국민이었지만, 반대파를 응징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는 식의 논리에 끼어들지 않는다. 카뮈의 생각은 우리의 반항이 아닌 나 스스로의 반항에서 출발한다. 개인의 철저한 반항을 통해 우리의 존재가 확보된다. 파워로서, 이데올로기로서 우리가 반항할 경우 또 다른 ‘우리의 반항’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카뮈는 한국인의 평균 상식이나 세계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나의 반항이 아닌, 우리의 반항으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데 익숙한 세계관으로 보면 비겁하고도 기회주의적인 약자로 비칠 듯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전쟁의 신은 두 명으로 나눠진다. 남신 아레스(Ares, 로마명 마르스)와 여신 아테나(Athena, 로마명 미네르바)다. 적을 누르고 승리에 이르도록 도와준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혀 다른 캐릭터들이다. 아레스는 무조건 적을 초토화하는 식이다. 아레스가 가는 곳은 시신과 불바다뿐이다.

독립운동이라도 무력이 필요하다면…


▎프랑스가 사랑하는 철학자·작가들은 단죄보다 관용을 강조했다. 왼쪽부터 볼테르, 빅토르 위고, 알베르 카뮈.
반면 아테네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선택하는 신이다. 불가피하게 무력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가능하면 사상자의 수를 줄이면서 이기는 신이다. 카뮈는 아레스가 아닌, 아테나에 어울리는 작가다. 카뮈의 생각이 프랑스 일반인과 유리된 생각이라 말할지 모르겠다. 전혀 반대다. 프랑스 나아가 구미 전체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일상적 세계관이 바로 카뮈의 인생과 소설에 녹아있다.

파리 팡테옹(Pantheon)은 카뮈가 프랑스, 나아가 유럽 지성의 전형적인 모델이란 사실을 증명해주는 현장이다. 팡테옹은 소르본대를 비롯해 10여 개 대학이 몰린, 파리 제5구와 6구 ‘라틴 쿼터(Latin Quarter)’의 중심에 들어선 유서 깊은 건물이다. 팡테옹은 이름에서 보듯, 고대 로마 판테온을 본뜬 프랑스판 성전이다. 그리스어로 판테온은 ‘모든 신을 모신 사원’이란 의미다. 로마 판테온이 고대 그리스 신들을 모신 성(聖)의 사원인 데 반해, 파리 팡테옹은 프랑스 혁명 열사와 영웅들을 안치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사를 공부한다면 팡테옹이 순례 1번지다.

팡테옹의 전신은 주네비에브(St. Genevieve) 교회다. 루이 15세(1710~1774)가 병에서 회복한 뒤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증·개축에 나선다. 초대형 교회로 재탄생한 것은 1792년, 프랑스혁명 발발 3년 뒤다. 단두대 공포정치가 맹위를 떨칠 때 이미 저세상에 간 왕의 교회가 등장한 것이다. 프랑스 국민회의는 이를 혁명 열사를 위한 성전으로 개칭한다. 1789년 혁명 당시 숨진 열사의 시신을 보관하고 기리는 성전이 팡테옹의 출발점이었다. 이후 애국자의 묘로 변해가면서 수가 늘어난다. 2019년 기준으로 전부 85명의 열사가 팡테옹 안에 묻혀 있다.

팡테옹은 1층과 지하로 나뉘어 있다. 1층에는 혁명과 관련된 조각과 그림이 들어서 있다. 자유의 여신을 찬미하면서 충성을 맹세하는 혁명가와 군인들의 입상이 1층 중심이다. 자유의 신은 남신이 아닌 여신이다. 혁명 애국열사 무덤은 지하 1층에 있다. 대리석이나 석회암으로 된 기념비나 관이 무덤을 대신한다. 2년 전 여름철에 들렀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표류한다. 당시 주된 관심사는 알렉상드르 뒤마와 빅토르 위고다. 학창시절 밤을 새우며 읽었던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레미제라블]의 저자다. 두 소설 모두 프랑스혁명 이후 발표된 작품들로, 당시 ‘혁명 시민(Citoyen)’들을 감동하게 한 작품들이다. 영화로도 수차례 제작된 소설이기에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작가들이다. 뒤마·위고의 무덤은 지하 1층 맨 끝에 있다. 인상파 화가들과의 교류로도 유명한 평론가 에밀 졸라의 무덤도 같은 방에 들어서 있다. 입구 오른쪽이 졸라, 왼쪽이 위고, 가운데가 뒤마다.

관용의 위고 vs 단죄의 뒤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6월 1일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을 방문해 활동가들과 인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두 작가의 무덤을 살피는 동안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꽃과 편지다. 졸라도 없지만, 뒤마 무덤 앞에 꽃과 편지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위고의 무덤 앞에는 넘친다. 서방 문화의 특징이지만, 존경하고 그리운 사람의 무덤 앞에 꽃과 편지를 바친다. 위고에 바치는 꽃과 편지는 하나둘이 아니라, 무더기로 쌓여있다. 바깥쪽 다른 무덤을 봐도 위고에 비교될만한 곳이 없다. 특별한 행사가 있었는지 팡테옹 직원에게 물어봤다.

“빅토리 위고는 팡테옹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성지다. 순례객들이 바치는 꽃과 편지가 항상 넘친다.”

한국인 입장에서 볼 때, 뒤마와 위고의 위상은 거의 대동소이하게 느껴진다. 두 사람은 출생연도가 1802년으로 동갑이다. 이후 20대 중반, 신문 연재소설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레미제라블]이 전부 프랑스 혁명 이후를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이란 부분도 공통점이다. 문학에서 라이벌 관계라지만, 두 사람이 나눈 특별한 우정은 프랑스인 모두가 자랑하는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꽃으로 표현된 두 사람에 대한 프랑스인의 평가를 보면, 뒤마는 위고의 비교 대상이 되기 어렵다. 프랑스인들을 만날 때마다 뒤마와 위고에 대한 평가를 재확인했지만, 위고는 그 어떤 프랑스 작가와도 비교될 수 없는, 최고의 독보적인 인물이란 것을 알게 됐다. 왜일까? 왜 비슷한 배경 시기 주제를 다른 동갑 작가에 대한 평가가 다르게 매겨질까?

지난해 말 베니스에서 나름 납득할 만한 답을 얻었다. 필자가 머무르는 민박집에 프랑스 리옹(Lyon) 출신 40대 초반 고등학교 교사가 찾아왔다. 겨울의 베니스는 오후 4시부터 어두워진다. 일찍 민박집에 머무는 동안 자연히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됐다. “왜 빅토리 위고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프랑스인의 생각을 전해줬다.

“프랑스인에게 ‘위고=레미제라블’이다. 소설의 주제는 넓게 보면 사랑, 조금 좁게 보면 희생과 관용이다. [레미제라블]은 누가 옳고, 누가 나쁘다는 것을 가늠하는 소설이 아니다. 빵 하나 때문에 19년간 감옥생활을 한 억울함을 호소하고, 세상을 단죄해야 한다는 생각과 멀다. 혁명 후의 척박한 상황에서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휴먼 드라마다.”

그러나 장발장을 평생 따라다니는 경감 자베르(Javert)는 악당에 가깝지 않은가. 이에 교사는 “자베르 역시 어릴 때 감옥에서 자라며 세상의 어두운 면을 일찍 경험한, 시대의 피해자일 뿐”이라며 말을 이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한다면 자베르가 ‘차가운 법’에 매달리는 이유에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장발장도 그를 용서한다. 또 고아가 된 코제트(Cosette)를 보살피고, 신부로부터 입은 은혜를 갚으려는 장발장의 모습은 예수의 행적과 다르지 않다. 위고가 프랑스 문학의 최고봉으로 통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랑·희생·관용’이란 메시지를 프랑스 국민 모두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혁명에 지친 프랑스를 따뜻한 휴머니즘으로 채워준 위대한 인물이다.”

관용의 [레미제라블]과 달리,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주인공이 자신을 감옥에 보낸 인물들을 하나씩 처단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리옹 출신의 교사가 왜 위고를 추켜세우는지 짐작할 만했다.

고등학교 교사의 말을 들으며 떠올린 것은 팡테옹 지하 1층 입구다. 85명 열사의 대표 격인 두 명의 무덤이 입구에 들어서 있다. 오른쪽은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된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왼쪽은 자연법에 기초한 종교·사상의 자유를 주장한 볼테르(Voltaire)의 무덤이다. 당시 두 무덤을 보면서 얻은 인상이지만, 루소보다 볼테르가 한층 더 높게 평가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지주는 공화주의자에다 직접민주주의 신봉자, 사회계약론자인 루소다. 루소의 사상을 통해 혁명의 이념이 구체화됐다는 것이 필자가 배운 역사다.

그러나 현장에서 보면 조금 다르다. 관 하나만 들어선 루소에 비해, 입상까지 세워진 볼테르의 무덤이 한층 더 크고 화려하다. 누가 봐도 볼테르가 한층 더 숭배되는 느낌이다. 볼테르는 1694년, 루소는 1712년생이다. 18살 더 많은 볼테르가 루소에게 영향을 입힌 것은 분명하지만, 현장에서 본 위상은 볼테르가 위다. 프랑스인은 두 사람을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물어봤다.

집단주의 경계하는 ‘나의 반항’부터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혁명의 근간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볼테르는 루소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을 제시한 철학가다. 1763년, 볼테르가 51살 때 남긴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이란 책이다. [관용론]은 종교적 차이를 인정하면서 서로를 이해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네가 타인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 역시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는 말이 [관용론]의 핵심이다.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기본 자세가 바로 관용이다.”

카뮈·위고·볼테르를 대하면서 비교되는 것은 척박한 한국적 상황이다. 필자는 ‘국민학교’라 불리는 곳에서 유년기 교육을 받은 세대다. 중·고등학교 대학에 이르는 과정 전부가, 빈틈 하나 없는 고정된 틀 속에서 이뤄졌다. 한국 교육의 비극이지만, 학창시절을 생각해보면 누구를 용서하는 관용론을 공부한 적도, 입에 올린 적도 없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고고학 책에나 등장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관용어쯤으로 처리됐다. 문제가 생길 경우 가혹한 비난과 벌만이 내려진다. 한 번만 미끄러져도 영원한 끝이다. 안 미끄러지려고 발버둥 치는 과장에서 온갖 편법이 동원된다. 현재 586 정치 세대가 보여주는 추잡한 ‘내로남불’은 그 같은 편법의 최고 모델이 아닐까.

카뮈의 [페스트], 위고의 [레미제라블], 볼테르의 [관용론]을 기초로 한 교육과, 반공·반일·반미·반외세를 외치며 자란 세계관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대통령을 두 명이나 감옥에 집어넣은 것도 모자라, 다음 처형 대상자로 누구로 잡을지 혈안이 된, 관용·용서와 무관한 나라가 한국이다. 역지사지로 보면 누가 누구를 단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가르고 비난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최근에는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도 적폐세력으로 몰아가는 세상이다. 카뮈·위고·볼테르가 프랑스만이 아닌, 21세기 한국의 고전으로 필요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듯하다.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용서하고 인정하고 서로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출발점은 우리가 아닌, 나의 반항이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007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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