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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김승중 토론토대 교수의 동서양 고대 문명 잇기 프로젝트 

“고대 그리스가 페르시아 제국 물리친 힘은 민주주의 자부심” 

천체물리학 엘리트에서 고고미술사로 전향, 동양인 유일 연구자로서 테뉴어까지
“실크로드 동서양 문명 교류가 한국의 석굴암까지 미치는 현상 연구할 터”


▎김승중 토론토대 교수는 고대 그리스 문명을 매개로 인문학과 과학, 동양과 서양을 잇는 연구를 꿈꾼다. / 사진:Peter Domorak
그녀의 이름은 승중(承中)이다. ‘중간을 잇는다’는 뜻이다. 김승중(47)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부모님께서 하늘과 땅을 잇는 역할을 하라는 뜻으로 지어주셨다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정말 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한 것 같다”고 고백했다. 하늘을 쳐다보며 천문학을 공부하던 한국인 유학생은 어느덧 땅을 파면서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됐다. 김 교수는 서양 학문의 원류에 해당할 고대 그리스 예술사고고학 분야에서 거의 유일한 동양인 연구자다. 서양과 동양의 고대 문명을 잇는 작업은 김 교수의 라이프워크이기도 하다.

김승중 캐나다 토론토대 그리스예술고고학 교수의 커리어 패스는 압도적이다. 서울대 천문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프린스턴대 천체물리학과에서 우주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존스홉킨스대에서 포스트닥 과정을 밟았다. 그러다 돌연 예술사 분야로 경로를 바꿔 버지니아대에서 다시 석사 공부를 했다. 컬럼비아대에서 예술사고고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고대 그리스 비주얼 세계에 있어서의 시간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두 곳에서 전혀 다른 전공으로 박사가 된 것이다. 이후 뉴욕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연구원을 거쳐 토톤토대 교수로 임용됐다. 김 교수가 2017년 쓴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은 그해 세종도서 교양 부문에 선정됐다. 그리고 2020년 6월 테뉴어(Tenure, 종신 재직권)를 받았다. 실질적 종신교수 코스에 들어선 것이다. 이 분야 최고 권위자들로부터 김 교수의 연구 성과가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김 교수는 안식년을 맞아 뉴욕에 일시 체류 중이었다. e메일 인터뷰를 진행했고 7월 10일(한국시각) 전화 인터뷰를 추가했다. 그녀는 “(나에 대한) 학생들의 강의 평가에 열정(passion)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으면 됐구나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 과정에서 진리를 향한 김 교수의 열정은 직업적 책임의식을 초월한 삶의 태도 그 자체라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영어와 고대 그리스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가 유창하고, 중국어와 독일어도 가능한 수준이라고 들었다. 이에 관해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도전하도록 격려해준 부모님 덕분”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항상 책 읽고 집필하는 부모님(아버지 도올 김용옥, 어머니 최영애 중문학자) 모습을 보며 자랐기 때문에 ‘공부’는 나에게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밤낮으로 공부하라고 백날 얘기해봤자 없던 의욕이 생겨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부심을 심어주고, 책망보다는 격려를 해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 내가 중학교 시절 창피할 정도로 낮은 성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실망할까 봐 성적표를 보여드리지도 못하다가 이틀 뒤에야 울면서 자백했다. 그때 어머니는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웃으시면서 오히려 나를 달래주셨던 기억이 난다. 힘들고, 뭔가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지금도 떠올린다.”

인생 궤적을 바꾼 프랑스 파리에서의 1년


▎2016년 그리스 테베 근처 포세이돈 생츄어리에서 토론토대 학생들이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 사진:통나무
이국에서의 학문이라는 외로운 여정에서 번민이 찾아올 때마다 어떻게 내면의 평정을 유지했나?

“내가 고집이 센 편이긴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무슨 수로 혼자 이 길을 걸을 수 있었겠나? 내가 토론토대 교수 자리에 지원하기 전, 무척 사랑하는 컬럼비아대 지도교수님이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때 모든 희망을 잃고 지원을 포기하려 했다. 그런데 그분의 동료 교수님께서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대신 추천서를 써주시며 격려해줬다. 또 다른 지도교수님은 내가 토론토대 교수로 뽑혔다는 소식을 전하자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커뮤니티의 진심 어린 지원을 받으면서 내가 어떻게 학문 추구를 포기할 수 있겠나?”

처음에 천체물리학을 공부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금란여고 다닐 때 과학 과목 중 생물과 화학을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가르쳤다. 여학생은 암기 위주 과목이 유리할 것이란 편견 때문이었다. 나는 물리학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과외 선생님을 구해 달라고 해서 따로 배웠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천체 현상을 연구한다는 낭만적 생각으로 천문학을 선택했다. 그러다가 점점 우주의 시초와 구조가 무척 신기해졌다. 프린스턴 박사 과정에 입학하며 우주론을 공부했다. 데이터를 가지고,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큰 구조물인 은하단의 분포에 관한 논문을 썼다. 이때 수많은 은하단을 찾는 (사람의 눈으로 300년이 걸릴 일을 컴퓨터로 3일 안에 해낼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그 분야에서 포스트닥까지 공부했다. 그런데 연구원으로 1년간 프랑스 파리를 다녀온 뒤, 미술사고고학으로 전향해 석사부터 다시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무모한 용기가 나온 것인가?

“당시 나는 무척 지쳐 있었다. 하루 12시간씩 컴퓨터 앞에서 프로그래밍하는 생활은 낭만성에서 멀어져갔다. 우주라는 거대하고 근본적인 현상을 보면서 오히려 인간적인 차원을 그리워하게 됐다. 평생 미술을 공부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미술사고고학을 공부한 건 자기 확신보다는 필요에 의해서였다. 아버지께 처음 말했을 때 ‘잘 결정했다. 너는 인문계 두뇌가 뛰어났다’며 좋아하셨다. 철학계를 뒤흔든 아버지는 뒤늦게 의학 공부를 하셨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아버지는 원광대 한의학과에 다녔다. 그런 아버지를 둔 내가 뭐 무서웠겠나?(웃음)”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버지니아대 석사 입학은 어떻게 가능했나?

“존스홉킨스대 포스트닥으로 있을 때 (고대 그리스 문명 공부를 위해) 다섯 군데 아이비 스쿨 박사 과정에서 모조리 거절당했다.(웃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중에 버지니아대가 눈에 들어왔는데 이미 마감일이 지나 있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에 사정을 설명하고, ‘내 지원서를 봐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보내라’고 하더라. 천체물리학 박사를 끝마친 사람이라 궁금했을 것이다. 큰 기회였고, 중요한 시작점이었다. 거기서 처음으로 고고학에 대한 열정이 생겨났고, 고대 그리스어로 호메로스 등을 접했다.”

버지니아대, 컬럼비아대, 토론토대 등을 거치며 지중해 발굴 현장에 참가했을 때 기분이 어땠나?

“학생 시절에는 주로 시칠리아에서 발굴 작업을 했다. 토론토대학 교수로선 학생들을 데리고 그리스 테베 근방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버지니아대학 때 처음 발굴을 해보고 고고학으로 전공을 굳혔다. 내가 처음 발견한 테라코타 조각상 안쪽에 찍힌 고대 그리스 장인의 지문을 목격했을 때 온몸이 찌릿한 느낌이었다. 250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물건을 내가 처음 발견했다는 사실, 지문을 남긴 한 인간과 나와의 교류가 꼭 무슨 ‘웜홀(worm hole)’을 타고 시공간을 넘어선 현상이라고 느껴졌다. 새벽 5시 반부터 매일 땡볕에서 막노동하는 셈이지만 그마저도 카타르시스처럼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동양인이 그리스 문명을 연구하면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관점이 가능할 텐데.

“전통적으로 백인의 아성이었던 학문을 어떻게 하면 다양한 사회적·인종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만드느냐, 이런 것이 내 문제의식 중 하나다. ‘당연한 것’은 그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일 수 있다.”

2020년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가 왜 고대 그리스 문명을 읽어야 하나?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모든 문명은 교류의 산물이다. 2020년 대한민국이 걸어가야 하는 길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고, 법률 아래 정당한 권리를 향유하는 사회, 바로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등장한 이소노미아(isonomia)의 정신이다. 서양 문명의 시초라고 보는 민주주의를 창설한 클라이스테네스는 어떻게 보면 우리의 조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정당성을 귀히 여기며, 신들을 숭배하고, 심신을 단련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 도시 국가들이 정치적 강대국이 된 밑바탕에는 파워풀한 자부심이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칠 수 있었던 힘도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의 행간에는 한국이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보는 김 교수의 생각이 묻어난다.

“2020년 대한민국은 내가 유학을 떠났던 1990년대와 다른 나라다. 얼마 전 코로나19에 관해서 [뉴요커] 매거진에서 읽은 기사가 떠오른다. ‘한국을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건 아직도 식민지 멘탈리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심리’라는 글이었다. 하루빨리 한국인들은 자기를 비하하는 감각에서 해방돼야 한다.”

죽음이 매개체가 돼 우리에게 다가오는 영웅


▎파르테논 신전의 동쪽 입구. 아테네 여신의 탄생, 올림포스 신들과 기간테스의 전쟁 등 신화적 이야기를 표현한 조각상이 보인다. / 사진:통나무
평등·공정·개방으로 무장한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정점을 유지하지 못하다 소수 독재정부인 스파르타에 패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은 처음부터 아테네가 불리했다. 전쟁 첫해 아테네 시민의 1/3을 몰살시킨 전염병이 돌았다. 페리클레스도 이때 죽었다. 이후 클레온 같은 데마고그(선동가)들이 아테네 대중의 마음을 휩쓸었다. 민주주의 수호 국가라는 미국에서 트럼프 같은 이가 대통령에 당선될 만큼 민중의 믿음을 샀다는 것, 그건 참 무서운 일이다. 변화 없는 사회는 퇴보하기 마련이지만,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오려면 그 변화가 지향하는 이상의 정당성이 있어야 할 터다.”

고대 그리스는 알렉산더 대왕 이전까지 역사적 개인을 부각하지 않았다. 개인이 추구할 덕성을 신화적 상징이나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 가치로 드러내려고 했다. 이에 비해 정치가를 비판과 감시의 대상이 아니라 숭배의 대상처럼 받드는 현대의 정치의식은 오히려 퇴행적으로 비친다.

“현대 민주주의는 사회 구조상 대표를 뽑는 간접민주주의 형식을 택했다. 그 결과 올리가르키(소수 독재정부)에 상응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핵심 사상인 이소노미아는 하나의 시민(demos)이 법(nomos) 아래 평등하다는 의미다. 여기서 시민은 30세 이상의 남자를 말한다. 여자·미성년자·이방인·노예는 속하지 않았다. 거의 80% 이상이 제외됐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현대 정치는 고대 그리스보다 월등하다.”

김 교수는 카이로스(주관적 시간관념)를 고대 그리스 문명의 중심사상이라고 평가했다. 카이로스는 민주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나? 그리고 카이로스는 후행적인 진단 아닌가?

“카이로스(Kairos)는 ‘적절한 시기’라는 뜻으로 생각하면 된다. 민주주의의 정신이 개인의 행동에 중심을 두는 건 카이로스의 개념과 상통한다. 이런 생각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서 유일하게 생겨났다. 물론 어떤 일이 최악의 결정이었다고 나중에 판단할 수 있다. 그것 또한 후대의 정치·사회적 시점에서의 새로운 카이로스적 판단이 아닐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드라마틱한 죽음으로써 영웅의 반열에 올라섰다. 김 교수는 ‘우리 사회도 불멸의 영웅들이 항시 필요하다’고 썼다. 어떤 맥락인가?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은 반인반신이다. 아킬레우스는 사람인 아버지 페레우스와 물의 여신인 어머니 테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헤라클레스도, 헬레네도 아버지가 제우스 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웅들은 인간의 행동 범위를 넘어설 수 있다. 아킬레우스는 초인적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신의 노여움을 일으켰다. 헤라클레스는 자기 가족을 몰살시키는 범행을 저질렀다. 헬레네는 보통 여인은 꿈도 못 꾸는 사랑을 해서 트로이를 멸망시켰다. 이런 영웅들은 사회의 틀을 지속시키는 본보기라기보다 인간 세계의 한계를 찾고 자아의 지평선을 끝없이 추구하는 숭배의 대상이다. 신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영웅은 항상 죽음이 매개체가 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도, 이순신 장군도, 유관순 열사도 전형적 영웅이다. 이러한 영웅들은 모든 사회가 필요로 한다.”

불교·힌두교와 디오니소스 사상의 교집합


▎아버지 도올 김용옥과 함께했던 김승중 교수의 유년 시절. / 사진:통나무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것이 인도 문명과 연결되는 것인가?

“간다라, 마투라 불상에 나타나는 디오니소스적 측면은 그리스 문명의 영향력이 인도까지 얼마나 미쳤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디오니소스의 어머니는 세멜레라는 테베의 왕비였다. 태어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한 디오니소스를 제우스신이 구해서 허벅지 안에 꿰매어 다시 태어나게 했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를 ‘두 번 태어난 자’라고 한다. 디오니소스는 ‘저세상’과 교류하는 신이 된 것이다. 우리는 디오니소스를 와인과 드라마의 신으로서 쾌락과 감성을 주관하는 심포지엄과 페스티벌의 주인공으로 알고 있지만, 죽음 이후의 삶을 관할하는 구세주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이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해탈과 상통하는 세계관이다. 디오니소스가 힌두 종교의 시바(Shiva)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디오니소스와 밀접히 관련된 고대 그리스의 오르피즘은 윤회론을 믿고 채식주의를 따랐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공간이 지니는 위상과 가치를 설명해달라.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가 핵심이 돼 주택지구가 그리드 플래닝(grid planning)의 원칙에 따라 그 주위에 분포된 구조다. 민주주의 사상에 따라 모든 사람이 같은 크기의 집을 가지고 있었다. 아고라는 ‘마켓플레이스’라고 지칭하지만, 정치와 경제적 센터라고 보면 된다. 아크로폴리스는 종교적 센터다. 아고라와 반대로 항상 높은 곳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에는 주로 그 도시국가의 수호신인 신전을 비롯해 종교적 의례를 수행하기 위한 시설 등이 있다. 그 외 그리스 도시국가는 극장, 운동경기를 진행할 수 있는 시설인 김나지움과 스타디움 등이 있어야 한다. 프닉스는 의회에 해당하는 구조다. 아테네에 특별한 경우로서 모든 투표 결정 때 6000명 이상의 정족수를 만족하기 위해 따로 세운 시설이다.”

김 교수는 책에서 미국의 트럼프 당선을 두고 ‘참담하다’고 표현한 바 있다. 미국인들이 그들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지도자를 뽑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

“트럼프가 당선된 현상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동등성과 개방성을 존중하지 않고, 편협한 이익만을 추구하는 대중 의식에 어필한 결과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나 사상을 존중하지 않는 지도자가 어떻게 민중의 이익을 챙기겠나? 민중은 남녀노소와 인종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트럼프가 규정하는 미국은 ‘더 좁은 의미의 미국’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김 교수가 고대 그리스 문명을 통해 추출할 수 있는 페미니즘 여성상은 어떤 것인가? [오디세이]의 페넬로페를 사례로 들기도 했다.

“페넬로페는 그리스의 춘향이다. 오디세우스를 20년간 기다리면서도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꾀를 내어가며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구혼자들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반면 헬레네는 파리스에게 반해 자신의 남편을 떠나 트로이로 도망쳤다. 그래서 헬레네는 전형적인 ‘나쁜 여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이 반대되는 두 여성상이 모두 남자에 의한 구성 개념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가장 이상적인 여성형과 가장 불안·불편을 초래하는 여성형이라고 볼 수가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여자는 어떻게 보면 노예만도 못한 존재였다. 노예들은 마음대로 밖에 나다닐 순 있었으니까. 그런 배경을 두고 보면 여러 차례 강간을 당하고 13살 때 나이가 많은 메넬라오스에게 시집온 헬레네가 사랑에 빠져 드디어 자기 감정에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했다는 건 놀라울 정도로 ‘모던’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마냥 착한 춘향이와 달리 페넬로페는 그냥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았다. 남편인 오디세우스처럼 영리하고 꾀가 많았다. 그래서 오디세우스가 처음으로 그녀 앞에 노인으로 나타났을 때 오히려 그를 추궁했다. 남편만이 아는 사실들을 시험해봤고, 마지막에 화살 쏘기도 그녀가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헬레네와 페넬로페는 그 당시의 보편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영웅이자 주체적 여성상의 본보기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간다라 미술에서 석굴암까지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을 읽어보면, 김 교수는 파르테논 신전에 무한한 경외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

“8년 만에 사람의 손으로 그 많은 대리석을 밀리미터의 정확성을 가지고 시공했다는 것, 서양 역사상 최고 경지의 조각상들로 가득 찬, 수리와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건물을 지었다는 것은 진실로 믿기조차 힘든 일이다. 건축 작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문화적 역량의 탁월함을 전제하지 않고선 상상조차 할 수 없다. 20년 동안 진행되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복구 작업은 컴퓨터 3D 스캐닝 등 최첨단 기술을 쓰면서도 아직 완성을 못 했을 정도다.”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에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 서설을 달았다. 여기서 맏딸인 김 교수와의 인연을 꽤 상세하게 적었다. 도올 선생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김용옥의 딸 김승중’이라는 수식어로 세상이 언급하는 게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러나 도올 선생이 김 교수의 ‘사회적 자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김 교수는 대학자인 아버지에 대한 ‘학문적 거리두기’ 혹은 밸런스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나?

“내가 ‘도올의 딸’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만큼 내 인생에서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과 아버지의 학문적 아이덴티티는 별 관련이 없다. 외국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내 고유의 목소리를 찾고 아버지라는 압도적 ‘사회적 자본’이 먹히지 않는 곳에서 독립적으로 성공하는 게 자연적으로 둘 수 있는 거리와 밸런스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앞으로 아버지와 대화도 많이 나누고 같이 작업도 해보고 싶다. 아버지 같은 부모를 둔 학자로서 그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 첫 장은 ‘to my mother’로 시작한다. 김 교수는 어머니 최영애 전 연세대 중문과 교수에 대해 ‘나의 첫 선생님이고, 영웅이고, 진정한 롤 모델’이라고 썼다.

“어머니는 여성으로서, 부모로서 최고의 롤 모델이었다. 어머니는 학생들을 가르치시느라 항상 바쁘게 살았다. 어린 나이에도 ‘우리 엄마는 너무 바빠’라고 생각하면서도 엄마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나는 한 번도 ‘너는 여자니까…’라고 시작되는 문장을 부모님께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고대 그리스 문명을 연구하는 동양인이자 천체물리학과 출신 학자 김승중의 라이프워크가 궁금하다.

“내 이름의 뜻을 따르듯 두 가지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는 고대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미술사학적으로 밝히는 일이다. 간다라 미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실크로드로 퍼져나간 동서양 문명의 교류가 한국의 석굴암까지 미치는 현상을 보다 치밀하게 연구할 계획이다. 둘째는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는 융합자 역할을 할 계획이다. 케임브리지대학 출판사에서 출판 예정인 책 [The Temporal Revolution in Ancient Greek Art]에서 설명한 시간관념은 과학적 사고를 인문학에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신경과학에 관심을 두고, 인간의 비전에 관한 연구가 어떻게 미술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지를 탐색할 계획이다.”

-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202008호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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