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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3부)] 근·현대 서구화와 기독교 수용의 주역들(4) 개화파 양반 이수정 

선교를 통한 조선 개화, 그의 편지 한 통으로 시작 

임오군란 때 왕비 구하고, 사신단 수행해 일본 갔다 기독교 세례
미국에 선교사 파견 요청, 언더우드·아펜젤러 등 조선行 이끌어


▎1900년 3월 사문진 나루터를 통해 국내 최초로 들어온 피아노. 이는 선교를 위해 조선에 입국한 미국인 사이드보탐 부부가 가져온 것이다. / 사진:손태룡
김청송이 로스 목사의 한글 성경을 서간도 한인촌에 뿌리고 다니던 1882년과 1883년, 일본에서도 한글 성경이 준비되고 있었다. 주인공은 일본 도쿄에 체류 중이던 이수정(李樹廷)이라는 조선 양반이었다. 그는 성경을 한글로 직접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언더우드 등 미국 선교사의 조선 파송을 요청해 성사시킨 주인공이었다. 그러므로 이수정은 19세기 조선의 개신교 수용과 근대화 문제를 거론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 조선의 공식기록에서는 그에 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이수정은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갑신정변에 연루된 대역 죄인으로 낙인 찍혔기에 아예 공식기록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현재 이수정에 관한 기록은 그의 일본 체류 중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중에서도 미국성서공회(美國聖書公會)의 일본 주재 총무로 있던 헨리 루미스(1839~1920) 목사의 보고 서한과 일본 기독교 단체에서 발행한 [칠일잡보(七一雜報)] 등의 잡지가 대표적이다. 예컨대 1883년 5월 30일 자의 루미스 보고 서한에 의하면 이수정은 임오군란 후 친구 안종수의 권유로 일본의 대표적인 근대 농학자이자 기독교 지도자인 쓰다센(津田仙)을 찾아 공부하게 됐다고 한다.

안종수는 1881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가서 쓰다에게 근대 농학을 공부했던 개화파 인물이다. 그는 귀국 후 1882년 진사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으며, [농정신편(農政新編)]을 편찬해 서양 근대 농법을 조선에 최초로 소개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안종수나 그의 친구인 이수정 역시 양반 출신의 개화파 인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이수정은 과거 방목 등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조선 후기에는 한양과 지방의 최고 유학자들이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 과거시험 자체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수정은 도쿄 체류 시 일본 최고의 지식인들과 비견되는 조선 최고의 유학자로 인정받았다. 이런 사실로 본다면 이수정은 과거시험에서 낙방했다기보다는 과거시험 자체를 하찮게 여기던 유학자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안종수는 어떤 인연으로 이수정에게 쓰다를 추천하게 됐을까?

1881년 11월 25일 발간된 [칠일잡보]에는 안종수가 쓰다를 만났을 때의 상황이 기록돼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쓰다는 손님 안종수를 응대한 후 마태복음 5장이 쓰인 족자를 선물했다. 그러자 안종수는 족자를 읽어본 후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진실로 예수교는 덕이 있는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귀국하면 국왕에게 반드시 종교의 자유를 청원할 결심이나 이번 제가 출국할 때 예수교를 가지고 오지 않기로 서약했으므로 잠시 선생 집에 그대로 두시면 훗날 가지러 올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런 사실에서 안종수는 근대 농학을 배우기 위해 쓰다를 방문했고, 그런 안종수에게 근대 농학을 소개한 쓰다는 아울러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해 기독교 교리를 소개하고 마태복음 5장을 쓴 족자를 선물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1883년 5월 30일 자의 루미스 보고 서한에는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온 이수정의 친구는 쓰다를 만났고, 그는 성경과 쓰다에게서 들은 바를 매우 기쁘게 여겨서, 이수정에게 일본에 가면 쓰다를 찾아가 기독교에 대해 더 많이 배우라고 말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당시 쓰다가 안종수에게 선물하려 했던 족자에는 산상수훈 다시 말해 마태복음 5장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를 한문으로 번역한 “허심자복의(虛心者福矣)/ 천국내기국야(天國乃其國也)…”가 씌어 있었다. 당시 안종수가 쓰다의 기독교 전도를 진정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인사 차원에서 받아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귀국 후 안종수가 친구 이수정에게 “일본에 가면 쓰다를 찾아가 기독교에 대해 더 많이 배우라”고 추천했다는 사실에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민영익 계열 개화파, 고종과도 개인적 친분


▎1.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사람인 김옥균. / 2. 한국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이수정.
한편 이수정이 일본에 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루미스 목사의 보고 서한과 일본 잡지에 구체적인 내용이 전한다. 1883년 5월 11일에 발간된 [칠일잡보]에는 이수정이 임오군란 때 천신만고를 겪으며 왕비를 시골로 숨겼다. 이수정은 난이 진압된 뒤 상공(賞功)을 받기로 됐는데 민영익 등과 함께 청나라 이홍장의 허가를 받아 일본에 오게 됐다.

이수정은 전년까지 선략장군(宣略將軍)이었으나, 지금은 그 관직을 사직하고 일본에 있으면서 오직 농학 및 법률 두 분야에 종사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로 봐서 그가 임오군란 때 왕비를 피난시킨 공으로 일본에 오게 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883년 5월 30일 자 루미스 목사의 보고 서한에서는 이수정이 고종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개화파 인물로서 1882년 임오군란 때 왕비의 목숨을 구하자 고종은 원하는 어떤 벼슬이나 명예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저는 오직 다른 나라의 문명을 배우고 보기 위해 일본에 가기 원하오니 윤허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록함으로써, 이수정의 도일(渡日) 배경이 임오군란 때의 공로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두 기록 공히 이수정이 임오군란 때 왕비를 보호한 공로로 일본에 오게 됐음을 밝힌 것으로 봐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로 판단되며, 특히 민영익을 ‘붕우(朋友) 민영익’으로 명시한 사실에서, 이수정은 개화파 중에서도 민영익 계열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만약 이수정이 평범한 보수 양반이었다면 그는 임오군란 진압 후 국내 벼슬아치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수정은 그런 보수 양반이 아니었으므로 국내 벼슬을 사양하고 일본 유학을 택했을 것이다. 이수정에게 그런 판단을 하게 만든 인물은 아마도 안종수였을 것이다. 안종수는 임오군란에서 이수정이 큰 공로를 세움으로써 고종과 왕비 그리고 민영익의 신임을 받게 되자 이수정이 국내 벼슬아치로 남기보다는 일본으로 가서 세계를 배워 보다 큰일을 했으면 하고 바랐을 듯하다.

당시 안종수는 쓰다에게서 근대 농법을 배워 귀국한 후, 조선에서 근대 농법을 심도 있게 연구하던 중 조선의 근대화란 단순한 근대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근대사상과 근대종교의 문제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서 기독교 수용을 고민했을 듯하다.

그러나 보수 유학자들이 횡횡하는 조선에서 기독교 수용이란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과 박영효는 불교에 경도돼 기독교를 배척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수용을 가능하게 하려면 고종과 왕비 그리고 민영익 같은 최고 권력자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日 목사 쓰다에게 한문성경으로 교리 배워


▎100여 년 전 창립 당시의 서울 정동 새문안 교회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랑채에서 시작했다.
마침 임오군란에서 이수정이 왕비를 구함으로써 고종과 왕비 그리고 민영익의 신임을 얻게 됐다. 이것을 천재일우의 기회라 생각했기에 안종수는 이수정에게 일본 유학을 권유하면서 “쓰다를 찾아가 기독교에 대해 더 많이 배우라”고 추천했을 것이다.

당시 조선정부는 ‘제물포 조약’에 따라 임오군란에서 피해를 본 일본정부에 사과하기 위한 사신을 파견해야 했다. 그 때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이 자원했다. 고종은 박영효를 정사, 서광범을 종사관에 임명하고 김옥균과 민영익을 수행원으로 임명했다.

바로 그때 이수정 역시 사신단의 수행원으로 참여해 일본으로 가게 됐던 것이다. 이 사신 일행은 모두 개화파 인물이었는데, 일본 기록에서 이수정을 그들의 수령이라 표시한 이유는 당시 이수정이 40세가량으로 최고 연장자였기 때문이었다.

1882년 8월 31일 한양을 출발한 사신 일행은 양력으로 10월 10일 고베에 도착해 외무경 이노우와 회담했고 이어서 10월 19일에는 메이지 천황을 예방했다. 그즈음 이수정은 사신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별도로 도쿄의 쓰다를 찾아갔다. 이수정을 만난 쓰다는 서로 간 인사를 끝낸 후 “공자의 빛은 부분적이므로 일본의 어두운 곳까지 비치지 못하나 예수의 빛은 해와 같아서 일본의 방방곡곡과 전 세계 지구의 이 끝부터 저 끝까지 비춥니다”는 말로 기독교를 소개했다.

이어 이수정에게 마태복음 5장이 씌인 족자를 보여줬는데, 그것은 1년 전 안종수에게 선물하려던 바로 그 족자였다. 이수정이 족자의 내용을 다 읽자 쓰다는 한문성경을 가지고 와서 마태복음 5장의 뜻을 설명해 주고는 그 성경책을 선물로 줬다. 이후 쓰다는 이수정에게 근대 농학을 가르치는 틈틈이 한문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마침내 쓰다는 188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때 이수정을 도쿄 축지교회(築地敎會)로 데려가 예배에 참석하게 했다. 한문성경을 이용한 기독교 전도에서 더 나아가 본격적인 전도를 위해 교회 예배로 데려갔던 것이다. 그 예배에서 이수정은 크게 느낀 바 있어 한문성경을 더욱 열심히 연구하게 됐다고 한다. 또한 축지교회를 통해 야스카와 도루(安川亨) 목사와 루미스 목사 등 일본 기독교계의 지도적 인사들과도 안면을 익히게 됐다.

이와 관련해 1883년 5월 30일 자의 루미스 보고 서한에는 “얼마 후 그는 꿈을 꿨는데 키 큰 자와 작은 자 두 사람이 책으로 가득 찬 보따리를 가지고 그에게 왔고, 그는 그들에게 그 책들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 책은 당시 나라를 위해서 그 어느 책보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무슨 책입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성경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이상한 끔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그 꿈을 하늘이 준 계시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새겼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 꿈에 등장하는 키 큰 자와 작은 자는 훗날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를 계시하는 것으로 이해됐다. 이수정이 이 꿈을 언제 꿨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882년 크리스마스 예배 후 본격적으로 한문성경을 연구할 때 꿨을 것이며, 그 시점은 1883년 봄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꿈을 꾼 이수정은 사명감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한문성경을 탐독했다.

당시 이수정은 기독교 교리에 궁금증이 생기면 도쿄 노월정교회(露月町敎會)의 겸임목사이던 야스카와를 찾아 묻곤 했다. 야스카와 목사는 기독교와 불교의 같은 점과 다른 점 등 이수정이 궁금해 하는 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이렇게 한문성경 탐독과 야스카와 목사 가르침을 통해 이수정은 기독교 교리를 이해해 나갔으며 결국에는 신앙심이 솟아나 1883년 4월 29일 노월정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됐다.

세례문답은 미국 장로교 선교회의 녹스 목사가 집전했고, 야스카와 목사가 보조했다. 루미스의 보고 서한에 의하면 이수정의 세례문답은 아주 철저했고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한다. 즉 녹스 목사의 깊이 있는 질문에 막힘 없이 대답했다는 것인데, 그동안 한문성경과 야스카와 목사를 통해 열성적으로 공부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수정의 세례는 일본에서 한국인이 받은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고 열흘쯤 지난 1883년 5월 8일부터 일본 전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도쿄에 모여 나흘간 대부흥회를 개최했다. 그때 이수정도 참여해 기도와 간증을 하게 됐다. 5월 11일 금요일 아침 시작된 기도회는 한국어로 진행됐다. 통역도 없는 한국어 기도였지만,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감개무량한 기도였다. 그들이 전도해 세례까지 받게 된 조선 양반 이수정의 기도는 일본 기독교계의 성취를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간증은 5월 12일 토요일 순(純)한문으로 작성된 간증문을 발표한 것이었다.

간증문의 핵심은 요한복음 14장 10절의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我在父),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父在我)”에 대한 이수정의 이해를 중심으로 그에게 신앙이 무엇인지를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이수정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에 대한 신앙을 등잔불로 비유해 간증했다. 즉 이수정은 ‘등잔’을 인간의 전반적인 마음, ‘심지’는 도를 향하는 인간의 마음, ‘심지 연료’는 믿음, ‘심지의 불’은 성령의 감응으로 이해했다.

일본에서 기독교 세례받은 첫 한국인


▎조선에 복음의 씨를 뿌린 아펜젤러 선교사.
요컨대 이수정에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믿음과 성령의 감응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신앙고백은 전통적인 유학 또는 불교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유학 또는 불교 관점에서 등잔불이란 인간 내면의 지혜를 통한 스스로 깨우침을 상징하는데, 이수정은 그것을 성령의 감응이라는 신의 은혜로 재해석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런 신앙고백은 유학에 대한 이수정의 깊은 식견에 더해 야스카와 목사의 설명을 토대로 한 것일 듯하다.

이 간증문은 당시 신앙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현실 차원에서도 조선의 개신교 선교를 위해서는 이수정만 한 인물이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이나 같았다. 이수정은 복잡다단한 기독교 교리를 ‘등잔불’이라는 간단명료한 비유로 이해할 만큼 명석한 인물인 동시에 고종과 왕비 그리고 민영익의 측근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이수정을 매개로 조선에 개신교를 선교하려는 인물들이 등장했는데, 미국 성서공회의 일본 주재 총무인 루미스 목사 또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루미스 총무는 1883년 5월 11일 자의 보고 서한에서 “한국 사절단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최근 동경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 그를 통해 복음이 은자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해 이수정을 통해 조선에 기독교를 전도할 작정임을 드러냈다. 본래 루미스 목사는 일본인 신자를 통한 조선 선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이수정이라는 조선 양반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었다.

5월 중순쯤 루미스 목사는 이수정을 찾아 조선 선교를 논의했는데, 이수정은 일본인 신자를 통한 조선 선교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일본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반감이 크기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이수정은 미국인 선교사를 통한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서울양반 표준어 기준으로 성경 번역


▎이수정의 편지에 감복해 조선행 배에 기꺼이 몸을 실었던 언더우드 선교사.
이에 따라 루미스 목사는 일본인을 통한 조선 선교를 포기하고, 그 대신 미국 선교사를 통한 조선 선교를 실행하기로 하면서, 그 성공을 위한 세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첫째 한문성경에 토를 다는 한한성경(漢韓聖經)을 번역하고, 둘째 이를 토대로 한글성경을 번역하며, 마지막으로 미국 선교사 파송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본래 미국성서공회의 중요 사명 중 하나가 선교 현장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 선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루미스 총무의 세 가지 대안이란 이수정에게 조선 선교를 위해 가장 시급한 한글성경 번역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나 같았다. 이 제안에 따라 이수정은 우선 한한성경 번역에 착수해 6월 21에는 ‘한한신약전서(漢韓新約全書)’ 번역을 완성했다. 그때 이수정에게 세례를 준 녹스 목사와 야스카와 목사가 많은 도움을 줬다.

이를 토대로 이수정은 6월 말부터 한글 성경번역에 착수했는데, 루미스 총무는 마가복음부터 번역할 것을 제안했다. 마가복음은 4복음 중 최초의 복음서란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루미스 총무는 만주의 존 로스 목사가 4복음 중 누가복음부터 번역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와 차별을 두기 위해 마가복음부터 번역하려 했을 수도 있다.

당시 루미스 총무는 만주의 존 로스 목사가 한글로 번역한 신약성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한글성경을 이수정에게 보여줬는데, 이를 본 이수정은 크게 실망하면서 그것은 가치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한다.

이수정은 자신이 조선 최초로 한글성경을 번역한다는 사명감에 충만해 있었는데, 벌써 한글성경이 나왔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또한 양반 출신인 이수정의 눈에 평안도 사투리로 번역된 로스 목사의 한글성경은 천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이에 따라 이수정의 마가복음은 서울양반의 표준어를 기준으로 번역됐는데, 번역 후 1884년 8월 인쇄되기에 이르렀다.

이수정이 한글 마가복음을 한글로 한창 번역 중이던 1883년 6월 말에 김옥균이 도쿄에 나타났다. 300만 엔 차관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수정과 야스카와 목사는 김옥균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관련해 1883년 9월 20일 자의 루미스 총무 보고 서한에는 “그는 종교를 주제로 한 이수정과 야스카와 목사와의 첫 면담에서 매우 강하고 무례하기까지 한 태도를 보였으며, 어떠한 논증에도 귀를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종일관 기독교는 전적으로 나쁘며,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는 기록이 있다.

언더우드, 2개월간 이수정에게 한국어 배워

이수정과 야스카와 목사가 김옥균과 첫 면담을 가진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7월 초였을 듯하다. 김옥균은 6월 28일 도쿄에 도착해 7월 2일부터 외무경 이오누에와 차관 교섭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즈음 김옥균은 일본정부 그리고 불교신자로 유명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도움으로 300만 엔 차관을 성사시켜 조선을 근대화하려 했다. 게다가 김옥균 자신이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기독교는 오히려 걸림돌로 간주됐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300만 엔 차관을 거부하고 말았다.

이에 김옥균은 8월부터 미국 등 서양열강을 상대로 차관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그즈음 기독교에 대한 인식도 극적으로 바뀌었다. 이와 관련해 1883년 8월 16일 자의 루미스 보고 서한에는 “그는 처음에는 기독교를 매우 반대했으나 이제는 견해를 완전해 바꿨습니다”는 기록이 있다.

김옥균을 기독교에 우호적으로 바꾼 주인공은 야스카와 목사로서 1883년 9월 20일 자의 루미스 보고 서한에는 “지금은 아주 분명하게 변해서 야스카와 목사가 그의 가장 친밀한 친구의 한 명이 됐습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야스카와 목사는 이수정에게 했듯이, 기독교와 불교의 비교를 통해 기독교를 전도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기독교에 우호적으로 변한 김옥균에게 루미스 총무는 한문성경, 로스 목사가 번역한 한글 요한복음 등을 선물했다. 이 같은 기독교 서적을 읽으면서 김옥균은 기독교에 더더욱 우호적이 됐다.

1884년 1월 29일 자의 루미스 총무 보고 서한에는 “김옥균은 녹스 목사와의 면담을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과 기독교를 연구했으며 이제 그것이 진리라고 믿습니다. 기독교를 한국에 도입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그러나 급속하게 이뤄질 수는 없습니다. (…) 그는 곧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며 이어서 미국을 방문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해 서울에 미래 사업의 기초로서 기독교 병원을 개설하려고 합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루미스 총무는 1884년 6월 맥클레이 목사를 조선으로 가게 해 미국 선교회가 한국에서 병원과 학교 사업을 할 수 있게 왕의 허락을 받게 했다. 그때 맥클레이 목사는 김옥균의 주선에 힘입어 고종의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때가 1884년 7월 3일이었다. 이로써 미국 선교사를 통한 조선 선교의 준비 과정 즉, 현토(懸吐)한한성경, 한글성경, 선교 허락 등이 모두 완료됐다. 이제 조선 선교를 자원하는 미국 선교사만 등장하면 될 일이었다. 미국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일 역시 이수정의 사명이었다.

1883년 12월 13일, 이수정은 미국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그중에 “당신들의 나라는 우리에게 기독교 국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 나는 영향력이 미미한 사람이지만 당신들이 파송할 선교사들을 힘껏 돕겠습니다. 곧 누군가를 일본에 보내 여기서 사역하는 사람들의 자문을 받고 한국 선교를 위해 준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이수정의 편지가 미국의 기독교 언론에 공개됐고, 그 내용에 감동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게 됐던 것이다. 1884년 12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2개월간 이수정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이수정이 한국어로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조선으로 출발해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도착했다.

이로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통한 미국 개신교 그리고 그들을 통한 근대 병원과 근대 학교가 공식적으로 조선에 들어오게 됐다. 이런 사실에서 미국 개신교의 조선 선교 그리고 미국 개신교를 통한 조선 근대화의 기초를 닦은 역사적 주인공은 조선 양반 이수정이라 평가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008호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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