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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31)] 멸족 위기 딛고 최고 권력 품은 친원(親元)파 강씨 집안 

이성계와 혼인, 역적 가문의 부활 

공민왕의 친원파 숙청 때 몰락… 홍건적의 난 평정에 공 세워 재기 발판
신돈 섭정, 공민왕 시해… 환난기 숨죽였던 강씨 가문 우왕 때 완전 복권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의 석상이 주한 미국 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 영내에 남아있는 것으로 1997년 확인됐다.
1359년 강윤충을 비롯한 강윤성, 강윤휘 3형제가 한꺼번에 처형됨으로써 강비의 가문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강비가 두 살 때 아버지 강윤성은 채하중 사건으로 체포됐고, 네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비참하고 슬픈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장성한 오빠들이 있었다. 큰오빠는 강득룡, 둘째오빠는 강순룡이었다. 강득룡은 1350년(충정왕 2) 정3품 삼사좌사, 강순룡은 1354년(공민왕 3) 종2품에 임명됐다. 강순룡은 1354년 6월, 고려의 원군 동원을 지시하는 원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됐다. 그때 관직이 원의 숭문감소감(崇文監少監)이고, 몽골 이름은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였다. 강비의 집안이 뿌리 깊은 친원파였고, 오빠들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고려와 원의 정계에서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강비의 집안은 곧 복권됐다. 1363년(공민왕 12) 호군 강영(康永)이 개경수복 1등공신에 책록됐다. 호군은 정4품 무관직으로서 장군이다. 강영은 강윤휘의 큰아들이자, 강비의 사촌오빠였다. 고려 말 홍건적은 두 차례 고려를 침입했다. 중국 강남에서 북진을 개시한 홍건적이 원나라 군대의 반격에 밀려 요동을 넘어 고려로 밀려온 것이다. 1차는 1359년(공민왕 8) 12월, 4만의 홍건적이 침입해 서경까지 함락했다. 그러나 고려군의 반격으로 궤멸당해 300여 명만이 압록강을 건너 도주했다. 2차는 1361년(공민왕 10) 10월, 20만의 홍건적이 몰려왔다. 고려는 개경을 함락당하고,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난 갔다. 그러나 1362년 1월, 고려군은 총공세를 취해 다시 홍건적을 격파했다. 이 개경 수복전에서 강비 가문의 강영이 크게 활약한 것이다. 이로써 강비 가문은 명예를 회복하고, 고려 정계에 복귀할 발판을 마련했다. 비극적인 전쟁이 오히려 강비 집안의 재기를 도운 것이다. 장차 강비의 남편이 될 이성계 역시 이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동북면 출신 친병 2000명을 거느린 이성계는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가 적의 총사령관 사유, 관선생 등을 참살했다. 그 공으로 이성계 역시 1등공신에 책록됐다.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도 2등공신에 올랐다.

친원파 공세 딛고 왕위 오른 공민왕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국사당에 있는 무신도 중 강씨 부인.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는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난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하지만 고려의 심장부인 개경과 서경은 폐허가 됐다. 전쟁이 끝난 후 개경 이북 지역은 해골이 산처럼 쌓이고 황무지로 변했다고 한다. 고려의 국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원나라 기황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숙원을 풀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일족이 몰살된 1356년의 참사를 잊지 않았다. 원은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임명했다. 공민왕을 파멸시키고자 한 것이다. 덕흥군은 충선왕의 3남으로서, 이름 없는 궁인 소생이었다. 그는 처음에 승려가 됐다. 고려 시대에 권력을 나누어 받을 수 없는 왕자는 통상 출가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그런데 1351년 공민왕이 왕위에 임명되자, 덕흥군은 원나라로 도망쳤다.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실제로 고려에 남은 잠재적 왕권 경쟁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기황후는 도망자인 덕흥군을 강력히 후원했다. 그 덕분은 덕흥군은 1363년 대도에 거주하는 고려인과 요양성 군대 1만명을 동원해 고려를 침입했다. 이미 몰락의 길에 들어선 원으로서는 무리한 일이었다.

덕흥군이 고려 국왕에 임명된 소식을 공민왕은 1362년(공민왕 11) 11월에 들었다. 10여 년 전이었다면 공민왕은 그냥 죽은 목숨이었다. 공민왕은 크게 두려워했다. 역사 기록만 놓고 보면, 23년에 걸친 재위 기간 중 공민왕이 이때만큼 나약하게 행동한 적이 없었다. 공민왕의 가장 큰 근심은 신하들의 배신이었다. 100여 년에 걸친 몽골의 고려 지배기에 고려의 신료들은 대체로 원 조정의 결정에 순종했다.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이 잡혀가도 항의조차 못 했다. 충혜왕은 완전히 버림받았다. 더욱이 공민왕 즉위 후 많은 사람이 피살됐다. 1356년 반원정책을 단행할 때는 친원파의 거두와 그 일족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그 격랑에 강씨 일족도 휩쓸렸다. 모두 고려의 유력한 가문들이었다. 분명히 공민왕을 원망하고 복수를 다짐했을 것이다. 공민왕이 두려워한 것은 당연했다.

공민왕 최측근의 반역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국사당에 있는 무신도 중 이성계.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민왕은 왕권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을 회유해야 했다. 그래서 1363년 3월 15일 흥왕사의 난 때 왕을 구한 사람들, 그리고 2차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운 사람들을 대거 공신에 책봉했다. 무려 347명에 달하는데, 중복된 자를 빼면 280명이다. 공신 명단을 거의 뿌린 셈이다. 1363년 공신에게 하사된 토지도 2만7000결에 달했다. 1389년 이성계파가 전제개혁을 위해 전국 토지를 측량한 결과, 1391년 5월 현재 실제 경작 토지는 49만1342결, 황원전(荒遠田, 미경작지)은 16만6643결, 총 65만7985결을 얻었다.([고려사] 전제 녹과전) 이와 비교하면, 1363년 하사된 공신전은 전 토지의 4.1%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였다. 그리고 1359년 1차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운 사람 65명을 1363년 11월 기해격주공신에 봉했다. 강영은 개성수복1등, 기해격주2등 공신에 잇달아 봉해졌다.

공신에게 주어지는 특혜는 막대하다. 1등공신은 공신각의 벽 위에 그 초상화를 걸고,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뛰어 봉작한다. 아들 1인에게는 7품 관직을 준다. 만약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사위 중 1인을 8품 관원으로 임명했다. 관직이 없는 공신에게는 초입사(初入仕, 처음 벼슬길에 나감)를 허용하고, 자손은 음직(蔭職)으로 서용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 100결과 노비 10구를 하사했다. 결(結)은 면적이 아니라 수확량으로서, 100짐(負)에 해당한다. 100짐을 생산하는 토지 면적을 관습적으로 1결로 부른다. 1결의 면적은 토지 비옥도에 따라 다르다. 조선토지제도사 전공자인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1275~1444년 사이 상등전은 1결이 1999평, 하등전은 4529평이었다. 100결이면 199만9000~452만9000평인 셈이다. 1390년 과전법 시행 당시 1결 생산량은 조 750두이었다.(이영훈, <한국경제사>1, 344쪽) 100결이면 7만5000두로서, 7500섬 또는 1875가마다. 1076년 문종 30년에 경정된 전시과에서, 문반의 경우 최고위직인 중서령, 상서령, 문하시중이 제1과로서 전지 100결, 시지 50결을 받았다. 1등 공신에게도 그 정도의 경제적 보상을 한 것이다. 더욱이 공신전은 세습이 인정됐다. 2등 공신의 경우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뛰어 봉작하며, 아들 1인에게는 7품의 관직을 준다. 만약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사위 중 1인을 8품 관원으로 임명했다. 구사는 3인, 진배파령은 5인, 초입사를 허용하고 자손은 음직으로 서용하며, 토지 50결과 노비 5구를 하사했다.

강영은 1, 2등 공신에 잇달아 책록됨으로써, 토지 150결에 노비 15구를 하사받았다. 자손들이 관직에 나갈 기회도 생겼다. 그런데 홍건적의 1차 침입은 강씨 3형제가 처형된 1359년 12월 15일(갑술)과 겹친다. 홍건적 3000명이 11월 29일 압록강을 건너 노략질을 하고 돌아갔고, 12월 9일에는 4만 명이 침입해 의주를 함락시켰다. 아버지 강윤휘가 처형되는 와중에도 강영은 홍건적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강영의 이런 분투에 힘입어 강비 가문은 재기에 성공했다.

또 하나 좋은 일이 있었다. 개경에 귀환한 공민왕이 강득룡의 집을 임시거처로 삼은 것이다. 1363년 3월 1일, 김용이 공민왕을 암살하고자 흥왕사의 난을 일으켰다. 김용은 연저수종공신으로서, 공민왕이 가장 신임하는 측근이었다. 공민왕 즉위 후 그는 응양군상호군에 임명됐다. 이 직위는 무관 최고위직이자 병부상서를 겸했다. 병권을 장악한 것이다. 2차 홍건적의 난 때, 김용은 전군을 지휘하는 총병관에 임명됐으나 개성의 함락을 막지 못했다. 새로 총병관에 임명된 측근 정세운은 개성을 수복하고 홍건적을 격멸하는 대전공을 세웠다. 두 사람은 라이벌이었는데, 경쟁에서 김용이 밀린 것이다. 더욱이 언젠가는 개성의 함락에 책임을 져야 했다.

역모가 불러온 행운


▎1398년 1차 왕자의 난 당시 전라감사였던 강영이 화를 피해 제주도 조천읍으로 피신해 지은 가옥.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대전
김용에게는 또 다른 약점이 있었다. 홍건적과의 전쟁이 끝나자, 김용은 음모를 꾸며 전쟁 영웅인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를 모두 죽였다. 물론 이 음모는 공민왕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홍건적이 궤멸되었을 때 고려군 20만 명의 지휘권은 이들 장군들에게 장악돼 있었다. 민심도 이들에게 쏠려 있었다. 그 반면 개경과 백성을 버리고 달아난 공민왕의 위신은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장군들이 마음만 먹으면 반란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공민왕은 음모를 꾸몄다. 밀지를 보내 먼저 안우 등에게 정세운을 죽이게 했다. 그리고 안우 등에게는 왕명 없이 총병관을 죽였다는 누명을 씌워 죽였다. 이 밀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김용이 맡았다. 공민왕은 정세운의 전공을 질투하는 김용의 욕망을 꿰뚫어 본 것이다. 모든 일은 공민왕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문제는 백성들이 전쟁 영웅들의 죽음에 분노하고 슬퍼했다는 것이다. 가장 애통해한 것은 청년 정몽주였다. 당장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를 언제까지나 덮어둘 수는 없었다. 전쟁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수습되면, 공민왕은 아마도 김용을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해 처형할 것이다. 그렇게 민심을 달래려는 것이다. 공민왕을 오랫동안 옆에서 시종한 김용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김용의 목숨은 시한부였다. 그런 김용의 불안을 기황후가 읽고, 김용의 반란을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1363년 2월 12일, 공민왕은 안동과 청주를 거쳐 상경해 개성 부근의 흥왕사에 도착했다. 왕은 강안전의 수리를 마칠 때까지, 이곳을 행궁으로 삼았다. 흥왕사는 왕실과 인연이 깊었다. 문종대에 조성된 고려 최대의 사찰이었고, 첫 주지는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공민왕은 2월 22일, 김용을 순군제조로 삼았다. 순군은 일종의 경찰 조직으로, 도둑을 막고 야간 순찰을 담당했다. 고려 말에는 왕궁을 경호하는 금군의 역할도 맡았다. 병력 동원이 즉각 가능한 조직이었던 것이다. 공민왕은 개경 입성 전에 치안과 안전의 확보를 김용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나 3월 1일, 김용은 암살자 50여 명을 흥왕사에 보냈다. 숙직 중인 시위 김한룡, 첨의평리 왕재 등과 호위 군사 7~8명이 참살됐다. 암살자들이 침전으로 향하자 환관 이강달이 왕을 태후의 밀실에 숨기고, 노국공주가 문 앞에 앉아 지켰다. 한편 침전에는 공민왕과 용모가 비슷한 환관 안도치가 대신 누워 있었다. 암살자들은 안도치를 죽였다. 주목할 점은 암살자들이 ‘황제의 분부’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수상 홍언박을 죽이러 간 암살자들도 “나와서 황제의 명을 맞이하라”고 외쳤다. 당시 원은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임명한 상태였다. 흥왕사의 난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김용과 기황후 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공민왕은 김용을 즉각 죽이지 않고 밀성(밀양)으로 유배시킨 뒤 4월 20일에야 처형시켰다.

역적을 위해 눈물 흘린 왕

공민왕은 김용을 끝내 잊지 못했다. “늘 옛일을 생각하며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누구를 믿겠는가?’ 하고 재삼 탄식했다.” 권력 앞에서는 일말의 연민도 없던 공민왕이 왜 이처럼 슬퍼했을까. 자신의 분신에 가까운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에게는 ‘앞의 왕’(the front king)과 ‘뒤의 왕’(the rear king)이 있다. ‘앞의 왕’은 국가의 상징이자 가치의 총화이다. ‘뒤의 왕’은 국가의 소유자이자 권력의 화신이다. 정치적으로 어두운 영역이며, 왕이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곳이다. 전쟁 영웅들을 제거한 행위가 그런 영역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제도적으로는 환관이 그런 존재다. 중국은 환관 제도를 고도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고려의 환관 조직은 취약했다. 그래서 이른바 폐행(嬖幸)이나 악소(惡少)들이 그 자리를 메운 것이다.

흥왕사의 난 때 공민왕은 환관 이강달의 기지, 안도치의 희생, 밀직사 최영의 신속한 대응, 그리고 노국공주의 헌신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반란이 평정된 후 공민왕은 흥왕사를 떠나 강득룡의 집으로 이거했다. 이곳에서 백관에게 명령해 숙위하고 순찰을 돌게 했다. 강득룡의 집이 행궁이 된 것이다. 홍건적의 난으로 개성은 폐허가 됐지만, 강득룡의 집은 무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궁으로 삼을 정도면 규모도 상당했을 것이다. 강윤성의 처형에도 불구하고, 강비 가문은 경제적으로는 몰락하지 않았던 듯하다. 왕이 머문다는 것은 강득룡에 대한 신임을 뜻한다. 이렇게 강비 가문은 고려 정계와 귀족사회에 완전히 복귀했다. 강비가 여덟 살 때였다.

이 환난의 시절에 강비의 가문에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 손위 언니가 간통을 한 것이다. 강윤성의 큰딸이자 강비의 손위 언니는 판밀직 신귀(辛貴)와 혼인했다. 신귀는 영산(靈山, 창녕의 옛이름) 사람으로서, 형이 신예(辛裔)이다. 또한 원순제의 총애를 받은 환관 고용보가 그의 매부다. 고용보는 기황후의 심복으로서, 기황후의 재물을 관장한 기관인 자정원(資政院)의 책임자였다. 과거 급제자인 신예가 철저한 친원파가 된 것은 고용보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예는 충혜왕이 원에 체포돼 압송될 때 고용보를 도왔다. 그 덕분에 충목왕 대에 인사권을 장악해 신왕(辛王)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신예는 1355년(공민왕 4)에 죽었다. 신귀도 장인 강윤성과 함께 1357년 채하중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됐다. 이 시기에 부인 강씨는 “홀로 지내면서 거리낌 없이 음행을 저질러 대신들 가운데 그 여자와 간통한 자가 많았다.”([김용전])고 한다. 김용도 그중 한 사람이다. 시어머니인 신귀의 모친이 어사대에 고소했는데, 간통자 명단에 판추밀원사 황상과 판각문사 양백연이 들어 있었다. 모두 유명한 무장들이었다. 어사대가 탄핵하자, 인품이 고매한 경복흥이 강씨를 변호했다. “강씨가 절개를 잃은 것은 남편이 유배되어 무료함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병신년(丙申年, 1356) 이래로 유배된 자가 참으로 많아 그 아내들 가운데 공허함을 원망하여 절개를 잃은 자가 많으니, 청컨대 모두 석방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바랍니다.” 공민왕은 그의 충고를 따랐다. 경복흥의 외할머니는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의 친언니로서, 공민왕은 경복흥의 외당숙이었다.

그 후 강비 가문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다만 강비의 형부 신귀에게 행운이 따랐다. 신돈이 집권하면서 발탁된 것이다. 신돈 역시 영산(靈山, 지금의 창녕) 신씨였다. 그의 어머니는 계성현(창녕군 계성면) 옥천사 여종이었다. 그의 아버지 묘가 영산에 있었다. 무덤 지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유력자였을 것이다. 신돈은 어려서 승려가 됐다. 하지만 어머니가 천출이라는 이유로 승려들 사이에서도 소외됐다.

승려 신돈의 섭정 정치


▎북원의 2대 황제인 기황후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 / 사진:중국 維基百科
신돈은 매우 총명했던 듯하다. 김원명의 소개로 신돈과 처음 만난 공민왕은 신돈의 유창한 법설과 깨끗한 행의에 완전히 매료됐다. 1365년(공민왕 14) 2월, 만삭의 노국공주가 출산 중 세상을 하직했다. 절망에 빠진 공민왕은 5월에 신돈에게 섭정을 맡기고 정치의 전면에서 퇴장했다. 이후 만 6년간 신돈은 사실상 고려의 왕이었다.

불교는 고려의 국가이념이었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 승려의 섭정은 신돈이 유일했다. 고려의 핵심 국정운영 원칙 중 하나는 정신은 불교에 의존하되(修身之本), 정치는 유교를 쓴다(理國之源)는 것이었다. 982년 성종에게 올린 최승로의 ‘시무28조’에서 명백히 천명된 이 원칙은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다. 그런 만큼 신돈의 집권에 대한 고려 지배집단의 반발은 거셌다. 왕실을 대표하던 경복흥은 물론 무신의 대표자 최영, 문신의 대표자 이제현이 일제히 신돈의 집권에 반대했다. 공민왕의 친모 명덕태후도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신돈 정권에 참여한 인물들은 2류급뿐이었다. 신돈 정권을 지탱한 정치세력은 매우 취약했고, 신돈에 대한 쿠데타의 위험성도 상존했다.

신돈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 절실했다. 가족과 혈족의 원리는 정치적 공공성과 대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혈족은 정치에서 항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이성계는 태종 이방원에게 “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돕는 자가 많지만, 일이 낭패할 때에는 돕는 자가 적다. 사생지간(死生之間)에 돕는 자는 친척 같은 것이 없다.”([태종실록] 태종 4년 10월 20일)고 충고한 바 있다. 사병혁파에 반대한 이거이(李居易)를 제거하려고 할 때였다. 이거이는 제1·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최측근이었다. 또한 태조의 장녀 경신공주의 남편 이애,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의 남편 이백강이 그의 아들들이었다.

끝까지 고려를 놓지 않은 기황후


▎개성 인근에 대각국사 의천이 창건한 흥왕사 터 전경. 공민왕대 흥왕사의 난이 일어난 곳이다.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돈의 태생과 일생을 보면, 영산 신씨의 혈족적 정체성을 갖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증오가 앞서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여종의 몸에서 난 그를 버렸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잊지 않았다. 현풍(玄風, 지금의 대구시 달성) 사람인 곽의는 명절 때마다 술과 음식을 갖추어 영산(靈山)을 찾아가 신돈의 아버지 무덤에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무덤 지기에게 이를 신돈에게 아뢰게 하였다. 신돈은 놀라서 기뻐하며 그를 불러서 얼마 후 정언(正言)을 제수했다. 1371년 신돈이 처형될 때 신돈의 당여로 숙청된 인물 중 신씨는 신순(辛純), 신귀, 신올지가 있다. 신귀는 4형제인데, 죽은 신예를 제외하고 형인 신부, 신순(辛珣)은 신돈에게 가담하지 않았다.

신귀는 혈족에 대한 신돈의 애착 덕분에 판서로 등용됐다. 신귀는 혈족의 의리를 지켰고, 그 은혜에 확실히 보답했다. 1367년(공민왕 16) 11월, 신돈을 제거하려는 밀모를 신돈에게 고변한 것이다. 신돈 집권기에 발생한 최대 규모의 반신돈 밀모로서, 당대 고려 정계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망라돼 있다. 전 시중 경천흥(경복흥)과 김원명도 있었다. 경천흥은 청렴결백한 것으로 중망을 받는 인물이었다. 신귀가 이 밀모를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신귀는 신돈을 자택에 초빙해 대접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평소 친분이 깊은 판소부시사 강원보에게 그릇을 빌렸다. 그러자 강원보는 “무엇하러 먹을 것을 대접하느냐? 내가 아무개들과 함께 장차 신돈을 제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귀는 말을 달려 신돈에게 고변했다. 신돈은 즉시 공민왕에게 가서 “이제 나라 사람들이 저를 죽이려 한다고 하니 주상께서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호소했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밀모자들은 일망타진됐다. 신귀는 정치에서 혈족의 중요성을 입증했다. 그러나 1371년 5월, 신돈의 역모가 발각됐다. 신돈은 7월에 처형됐고, 신귀도 일당으로 몰려 유배됐다가 곧 처형됐다. 정치에서 영원한 권력은 없으니, 정치라는 격랑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기란 극히 어렵다. 권력을 추종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면, 그나마 나을 것이다. 그 길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공민왕의 측근 중 유숙이야말로 철저히 그 길을 따랐지만, 그의 명망과 지략을 두려워한 신돈에 의해 처형됐다.

강영이 공신에 책록되고, 강득룡의 저택에 공민왕이 잠시 머문 뒤 강비의 가문에는 영광도 없었지만 큰 재앙도 없었다. 강비의 형부 신귀가 처형됐지만, 가문 전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시련이 남아 있었다. 1374년(공민왕 23) 강비의 둘째 오빠 강순룡이 역모에 연루될 뻔했다. 이해 9월, 북원에서 온 어떤 호승(胡僧)이 강순룡에게 “원에서 심왕(瀋王)의 손자를 고려 국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말을 전했다. 원나라에서 관직생활을 한 강순룡에게는 그때까지도 몽골인들이 내방했던 듯하다.

톡토부카의 등장

1368년 대도에서 축출된 원은 현재 내몽골 자치주 타알(Taar) 호수에 위치한 응창부(應昌府)로 천도했다. 그러나 국가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원은 북원(北元)으로 불린다. 원순제는 1370년까지 생존했다. 뒤를 이은 것은 기황후 소생인 보르지긴 아유르시리다르(孛兒只斤愛猷識里答臘), 즉 원소종이다. 그는 1378년까지 재위했다. 심왕은 원무종의 옹립에 공을 세운 충선왕이 1307년 무렵 하사받은 작위이다. 첫 이름은 심양왕(瀋陽王)이며, 1310년 심왕으로 개명했다. 봉지는 심양으로 만주와 요동을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고려, 몽골 전쟁기에 포로가 된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친원파의 거두 홍복원(洪福源, 1206~1258) 가문이 동경총관을 세습하며 관할하고 있었다. 제2대 심왕은 충렬왕의 큰아들 왕자(王滋)의 차남 왕고(王暠)였다. 3대, 4대는 충목왕, 충정왕이 계승했고, 5대는 왕고의 손자 톡토부카(脫脫不花, [고려사]에 篤朶不花)이다. 호승이 말한 심왕의 손자란 톡토부카로서, 1354~1376년 사이 20여 년간 심왕으로 재위했다. 1363년 기황후와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르가 일족의 원수를 갚고자 했을 때, 먼저 그에게 고려국왕 자리를 제안했다. 그것은 왕고 가문 누대의 비원이었다. 그러나 톡토부카는 “숙부(叔父)가 아들이 없으니, 100년 후에 나라가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금 숙부에게 허물이 없는데 제가 어찌 숙부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사양했다. 공민왕이 별 잘못이 없는데다, 그에게 아들이 없으니 자기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 본 것이다. 천하가 그를 어질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민왕의 잘못이 없다는 말은 기황후의 속을 긁었을 것이다. 그래서 덕흥군이 대신 선택됐다. 원에 사신으로 갔던 이공수가 돌아와 이런 전후 사정을 알렸다. 이공수는 기황후의 외사촌 오빠이다. 1366년 톡토부카가 사신을 보내자, 공민왕은 직접 만나보고 후한 예우를 베풀었다.

갑자기 톡토부카가 공민왕의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로 등장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공민왕은 강순룡과 호승을 가두고 문초했다. 호승은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자백했다. 그자를 체포해 국문하자 “전 찬성사 우제(禹磾)의 가노(家奴)가 북원에 장사하러 갔을 때 들은 것”이라고 실토했다. 가노는 이미 도망쳤고, 그 대신 우제가 하옥됐다. 어쨌든 의혹이 풀려 강순룡은 석방됐다. 그런데 3일 뒤인 9월 19일, 공민왕이 시해당했다. 그러자 실제로 원은 톡토부카를 고려국왕에 임명했다. 호승이나 우제의 가노가 전한 소문이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강비의 가문에 공민왕대는 가시밭길이었다. 대부분의 친원파 가문이 고초를 겪었다. 개성 귀족사회에서 깊이 뿌리내린 명문 세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왕대에 강비 가문은 완전히 부활했다. 이성계와의 혼인이 결정적이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2008호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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