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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8)] 경복궁 동쪽 문 춘생문에 어린 망국의 한 

아군의 배신, 실패한 황제의 반격 

고종, 을미왜변 후 친일세력 장악한 경복궁 탈출 시도
거사 병력, 친위대 내부 밀고로 일본군에 막혀 좌절


▎조선총독부가 들어서기 전의 모습을 담은 경복궁 모형도. 사적 제117호인 경복궁은 조선 태조 4년(1395)에 건립돼 임진왜란 때 소실됐으나, 고종 4년(1867)에 흥선대원군이 재건했다.
'춘생문 사건’은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의 동쪽 출입문이었던 춘생문(春生門)이 배경이 돼 유래한 이름이다. 고종 32(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을미왜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반동으로 서울 중구 정동(대한제국기에 외국 공사관이 주로 이곳에 있었다)의 외국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친미·친러파들이 고조된 반일 분위기를 이용해 10월 12일(양력 11월 28일) 새벽, 고종 임금을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킨 후 친일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정권으로 교체하고자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비록 내부자의 밀고로 실패하게 됐으나 결국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게 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중국과 일본은 조선 지배권을 놓고도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1894년 3월 26일(양력 5월 1일), 관료들의 학정에 견디다 못해 무장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 조선 왕조의 부정부패 척결,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지킨다는 기치 아래 관군을 패퇴시키는 등 파죽지세로 진격해 이씨 왕조의 정신적 요람인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관군이 패퇴하자 위협을 느낀 조선 정부는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그랬듯이 이번에도 청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했고, 청나라는 3000여 명의 병력을 지원했다.

1894년 5월 6일(양력 6월 9일) 청나라군이 아산 백석포에 도착했다. 지금의 백석포는 아산방조제가 완성된 후 포구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당시에는 배가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깊은 포구였다. 반면에 일본도 이미 그 이전인 5월 2일(양력 6월 5일) 동아시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 전쟁지도 본부인 대본영을 구성했으며, 한반도 침략을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한 상태에서 청나라의 동향 또한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병력 투입 첩보를 접하자 일본 역시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즉시 일본군의 조선 출병을 명령했다. 청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한 날인 5월 6일(양력 6월 9일) 일본 제9혼성여단 병력도 인천에 상륙했다. 물론 조선의 요청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동학군은 봉기 의도와 다르게 외국 병력이 들어오자 그들을 철군시키기 위해 5월 8일(양력 6월 11일) 관군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른바 전주화약(全州和約)이다. 전투의 명분은 없어졌음에도 일본은 철군 대신 오히려 8000여 명의 병력을 증파했다. 청일전쟁의 서막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청나라 패전… 동아시아 패권 일본으로


▎‘북궐도형’ 중 건청궁 일곽 배치도. 대통령경호실,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2007년, 60~61면 재편집. / 사진:이성우
1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이 영추문(迎秋門)을 부수고 경복궁을 기습 공격했다. 격렬히 저항하던 시위대(侍衛隊: 임금의 호위부대)가 제압당한 후 고종은 인질로 잡혔다. 일제는 조선 정부에 청나라가 철군하기를 원한다는 공식문서를 일본에 보내도록 강요했다. 청군의 철수 거부 시 개전(開戰) 명분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청나라와 일본 간의 본격적인 전투는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일본 해군이 아산만 앞바다 풍도 해역에서 중국 함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됐다. 이 해전에서 청나라 함정이 격침되면서 1200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이후 일본은 성환·평양 등의 육상전투와 압록강 하구의 해상전투에서 속속 승리하면서 전장(戰場)을 압록강 건너 만주 지역까지 확장했다.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점령하고 청국의 최강 북양 함대를 격파한 여세를 몰아 북경·천진을 위협하며 청국 전체를 공략할 기세였다.

다급해진 청나라는 미국의 중재 하에 강화조약을 서둘러 체결하려 했고, 일본 역시 전쟁의 추이를 눈여겨보고 있던 서구 열강을 의식해 강화조약에 합의했다. 이 조약이 1895년 4월에 맺은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다. 청일전쟁의 결과는 동아시아의 패권이 일본으로 넘어갔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요동반도를 차지하면서 대륙 진출의 기회를 확보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갖게 됐다. 그러나 이를 경계한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압력을 넣은 이른바 3국 간섭의 결과 어렵사리 얻은 요동반도를 결국 청나라에 반환하게 됐다.

중국과 일본만 생각하고 있다가 조선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역학관계를 파악하게 된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국을 활용해 일본과 친일세력을 철저히 견제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일본은 결국 명성황후를 제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고자 했다.

‘여우사냥.’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에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일본의 작전암호명이다. 4시 30분쯤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의 서쪽 출입문인 추성문(秋成門)을 확보한 일본군 장교 등 엘리트 집단으로 구성된 낭인 자객 무리는 신무문 동쪽 궁장의 월문(月門: 벽돌을 쌓아 둥근 아치형을 이루도록 만든 문) 형태인 계무문(癸武門)으로 진입한 후 건청궁의 북행각과 연결된 출입문 중 하나인 무청문(武淸門)을 통해 고종과 명성황후의 처소로 난입한다.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장안당을 지나 황후의 침전이었던 곤녕합(坤寧閤) 권역을 뒤지던 그들은 황후의 초상화와 비슷하게 생긴 여러 여인을 살해했다. 살해된 여인 중에는 명성황후도 포함돼 있었다. 날이 밝자 시신들은 증거 인멸을 위해 건청궁 동쪽의 자그마한 언덕인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우리는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배워왔다. 그렇지만 정확하게는 일본에 의해 저질러진 인접 국가의 국모 시해사건으로 을미왜변이 더 정확한 용어라고 본다.

명성황후 시해 당일 이완용·이범진·이윤용 등 친미·친러계 대신들이 파면되고, 조희연·서광범·정병하·유길준 등 친일계 대신들이 내각에 임명됐다. 이틀 후인 8월 22일(양력 10월 10일) 일제와 친일 내각은 명성황후를 폐해 서인(庶人)으로 삼도록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의 호위부대였던 시위대마저도 일본의 훈련대로 편입시켰다. 시위대가 훈련대와 충돌하고 그들과 교전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친일 내각에 둘러싸인 고종은 명목상 임금이었을 뿐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처지였다.

끝내 열리지 않은 문


▎춘생문(春生門)으로 추정되는 문으로 1930년쯤 사진이다. 문화재청 [궁·능 관련 유리원판 도록], 1997년, 144면(上) 전재(轉載). / 사진:이성우
사실상 연금 상태로, 일본의 감시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고종은 경복궁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위 정동파로 불리는 명성황후계의 친(親)구미파 관료들을 활용했다. 시종(侍從) 임최수와 참령(參領) 이도철 등이 중심이 돼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시종원경(侍從院卿) 이재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안경수 등과 정동파 관료 이범진·이윤용·이완용·윤웅렬·윤치호 등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친위대 제1대 소속 중대장 남만리, 제2대 소속 중대장 이규홍 등 구 시위대 장교들까지 가담했다. 선교사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다이 장군 등 미국인들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도 돕겠다고 나섰다.

춘생문 사건은 정확하게는 1895년 10월 11일(양력 11월 27일) 저녁부터 10월 12일(양력 11월 28일) 새벽까지 진행된 사건이다. [고종실록] 32(1895)년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 ‘이재순 등에 대한 판결 선고서(判決宣告書)’를 살펴보면 당시 사건의 표면상 전개 상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이해할 수 있다.

임최수·이도철·홍병진·이충구·이민굉 등은 10월 11일 저녁, 뜻을 같이하는 무리 30여 명을 훈련원에 모아 놓고 “중궁(中宮) 폐하를 동소문(東小門: 혜화문) 밖에서 맞이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도철과 이민굉이 동별영(東別營)으로 먼저 달려가 칙령을 전하고 친위대 제1대 중대장 남만리와 제2대 중대장 이규홍에게 군사를 동원하도록 한다.

800여 명의 구 시위대 성향의 친위대 병력은 이도철의 지휘하에 동별영을 출발해 건춘문 앞을 거쳐 태화궁에 진을 치고 춘생문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춘생문은 열리지 않았다. 친위대 대대장 이범래와 함께 사전에 안에서 열어주기로 했던 대대장 이진호가 배신했기 때문이다. 이진호는 군부대신 서리(署理) 어윤중에게 이 사실을 밀고했으며, 사전에 첩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이도철·남만리·이규홍 등과 구 시위대 일부 병사가 춘생문 담을 넘어 돌격했으나 내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친위대와 일본 수비병에 생포되고 말았다. 이때 이규홍 등은 이도철의 애초 약속과 달리 성문이 닫혀 있고 일본 수비병에게 공격도 받았다며 이도철을 생포한 후 자진 항복했다.

선봉대가 무력화된 이후 군부대신 서리 어윤중의 원대복귀 설득에 따라 구 시위대 성향의 병력도 병영으로 철수하면서 춘생문 사건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됐다. 그 후 체포된 사건 가담자와 관련자들은 모반 사건 혐의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뒤 특별법원에 넘겨져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 친일 내각 재판관들로부터 형을 언도받았다. 죄의 경중에 따라 임최수와 이도철은 교형(絞刑), 이민굉·이충구·전우기·노홍규는 종신유형(終身流刑), 이재순·안경수·김재풍·남만리는 태형(笞刑) 100대에 징역 3년, 이규홍 등 나머지는 방면됐다.

일본은 이 사건에 서양인이 직간접으로 관련돼 있음을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를 빌미로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 중이던 을미왜변 관련 일본인 주모자 전원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했다. 이후 이범진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 친미파 이완용·이윤용 등은 고종에게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정동의 외국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고종은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고 마침내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세자는 가마를 타고 극비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게 되는데 이를 통상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부른다.

아관파천은 친일세력의 일시적 몰락을 가져왔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 도착 당일 교수형을 당한 임최수와 이도철을 제외한 이재순·이민굉·이충구 등등 춘생문 사건 관련자들로 형을 받은 전원을 특별히 방면하라고 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고종은 을미왜변 이후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강등시킨 8월 22일(양력 10월 10일)과 10월 10일(양력 11월 26일)의 조칙(詔勅)을 모두 취소하고 유길준·우범선 등등 을미왜변의 주모자들과 춘생문 사건 당시 배신한 대대장 이범래와 이진호를 체포하도록 하는 등 국권과 군주권 회복을 위한 빠른 행보를 취했다.

아관파천 이어져 친일파 일시적 몰락


▎아관파천 직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포를 끌고 가서 고종의 알현을 강요하는 일본군들.
아관파천 당일인 2월 11일 친일 내각의 총리대신이었던 김홍집과 전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가 백성들에게 피살됐으며, 전 군부대신 서리 어윤중도 귀향하다가 아관파천 6일 후인 2월 17일 용인에서 백성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고종은 춘생문 사건으로 인해 희생된 임최수와 이도철에 대해서는 1896년 2월 20일 모두 그 관작(官爵)을 회복해줬다. 그로부터 약 2달 후인 4월 17일 임최수는 정2품 내부협판(內部協辦: 내무차관)으로, 이도철은 정2품 군부협판(軍部協辦: 국방차관)으로 각각 추증하면서 충민공(忠愍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1901년 두 사람 모두 장충단(獎忠壇)에 배향되도록 했다. 약 1년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던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고종은 청일전쟁 이후 3국 간섭과 을미왜변·아관파천을 거쳐 경운궁으로 환궁하기까지 나름 국권과 군주권 확보를 위해 외국과 외국 공사관을 통한 청원 활동, 의병에 대한 후원 활동 및 정치세력 간의 상호 견제, 군사력 증대 등 일본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패와 열강의 이권 전략에 대한 판단 부족으로 결국 일제에 국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면 춘생문이란 대체 어디쯤 있던 문이며, 조선 후기 경복궁의 북쪽 궁장과 신무문 밖 후원의 궁장에는 어떤 문들이 있었을까.

유교 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삼았던 태조 이성계와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한양 천도를 추진하면서 도성을 쌓고 궁궐을 지을 때부터 각종 전각·출입문 등의 이름에 유교 이념을 새겨 넣었다

뜻글자인 한자를 쓰는 유교 문화권에서는 이름 짓는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사람은 물론 웬만한 건물에도 대부분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다. 사람의 경우 성씨의 본관(本貫)이 어디이고 이름이 어떠한지, 가운데 자(字)가 돌림인지 끝자가 돌림인지에 따라 대략 그 가문에서 세대의 상하를 구별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좋은 뜻이 포함된 항렬(行列)자를 정해 놓은 상태에서 후손들이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짓기 때문이다.

건물이나 문에도 유교 이념이 배어 있다. 건물은 격(格)이나 크기, 즉 위계(位階)를 대략 가늠할 수 있도록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의 여덟 글자 가운데 하나를 사용했다. 문도 하나의 건물로 볼 수 있으며 문 자체의 품격이 그 내부 공간의 규모와 용도·등급 등과 연관돼 크기와 이름이 지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건물·문 이름에도 유교 이념 따라 ‘돌림자’


▎신무문 밖 후원 궁장의 출입문. 대통령경호실,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2007년, 60~61면 재편집. / 사진:이성우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양력 8월 5일)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 개국을 알렸다. 그리고 2년 후인 1394년까지 전국을 수차례 답사 끝에 한양을 새 왕조의 수도로 정했다. 태조 3(1394)년 12월 초 하늘과 땅의 신에 먼저 제사를 지냈다. 이어 종묘와 궁궐터의 오방신(五方神)에도 제사를 지냄으로써 천도를 위한 공사가 시작됐으며, 태조 4(1395)년 9월 말 종묘와 궁궐이 완공됐다. 사직단은 그보다 이른 태조 4(1395)년 1월 말 영조(營造)됐으며, 이어서 수도를 방어하는 도성을 쌓는 것으로 최종 마무리됐다.

정도전은 태조의 명을 받들어 새로 지은 궁궐의 명칭과 각 전각의 이름을 짓고 그 뜻을 풀이했다. 궁궐의 명칭은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주요 전각들에도 근정전(勤政殿)·사정전(思政殿)·강녕전(康寧殿)·교태전(交泰殿) 등 등의 이름을 붙였다. 경복궁 궁장의 동문은 건춘문(建春門)이라 했고, 서문은 영추문(迎秋門)이라 했으며,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이 역시 정도전의 작품이다.

다만 경복궁의 북문만은 최초 목책으로 돼 있었기에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후 목책을 없애고 그 자리에 궁장을 쌓았다. 세종은 세종 15(1433)년 7월 21일 대신들과 의논 후 북문을 다시 만들었으나 따로 이름은 없었다. 신무문(神武門)이라는 이름은 성종 당시 대제학이었던 서거정이 성종 6(1475)년 8월 23일 지었다.

그러면 전각의 이름이나 궁궐의 문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언뜻 보면 이름이 무질서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름 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서울에 있는 5대 궁의 정문의 이름을 봐도 알 수 있다.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光化門)이며,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은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은 흥화문(興化門), 그리고 지금은 대한문(大漢門)이 정문인 덕수궁이지만 전신이었던 경운궁의 원래 정문은 인화문(仁化門)이었다. 5대궁의 정문은 모두 화(化)라는 글자가 돌림자인 셈이다. 화(化)는 화(火)와 같은 음으로 방위로는 남쪽, 색(色)으로는 적(赤)이며, 사신(四神) 중 주작(朱雀)이 관장한다.

동문인 건춘문의 춘(春)은 기운이 일어나는 봄을 의미하며 청룡(靑龍)이 관장하고, 서문인 영추문의 추(秋)는 결실 또는 수확을 의미하며 백호(白虎)가 관장한다. 북문인 신무문의 무(武)는 어둠·죽음·살상 등을 의미하며 현무(玄武)가 관장한다.

신무문과 연결된 궁장의 동쪽으로 계무문(癸武門)과 광무문(廣武門) 같은 월문(月門)이 있는데 경복궁 궁장 전체로 봤을 때 전부 북쪽에 있는 문들로서 무(武)를 돌림자로 하고 있어 무(武)라는 글자는 북쪽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춘(春)·생(生)은 동쪽, 추(秋)·성(成)은 서쪽 문에 붙여


▎추성문 현판. / 사진:이성우
이 같은 경우를 경복궁 전각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편전인 사정전(思政殿)은 평상시 임금이 업무를 보는 전각인데 사정전의 동쪽 보조 편전을 만춘전(萬春殿)이라 하고, 서쪽 보조 편전을 천추전(千秋殿)이라 한다. 또한 임금의 침천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는데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한다. 춘(春)이나 생(生)은 동쪽을 의미하고 추(秋)나 성(成)은 서쪽을 의미한다. 이렇듯 전각의 명칭이나 출입문의 명칭을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어느 쪽에 있는 건물인지 또는 출입문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경복궁 중건 후 신무문 밖의 후원 구역인 지금의 청와대 권역에도 여러 개의 출입문이 있었다. 을미왜변 당시 일본의 낭인 자객들과 군인들은 추성문을 확보하고 계무문과 무청문(武淸門)을 지나서 건청궁으로 난입했다.

그러면 추성문은 추(秋)나 성(成)이 포함되니 서쪽에 있는 문임을 추측할 수 있고 계무문과 무청문은 북쪽에 있는 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추성문은 후원 구역의 서쪽 궁장 주 출입문이었고, 계무문은 경복궁 북쪽 궁장에 있었던 문 중의 하나였으며, 무청문은 건청궁의 장안당 북쪽 행각과 연결된 문이었다. 그들은 추성문을 확보한 상태에서 계무문과 무청문을 통과해 바로 장안당의 주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필성문(弼成門)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 밖에 후원 구역의 서쪽 궁장에 있었던 문으로는 금화문(金華門)·용강문(用康門)·현무문(玄武門) 등이 있었다. 금화문도 서쪽을 의미하는 금(金)이 포함되므로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할지라도 서쪽에 있었던 문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용강문은 궁장에서 바로 경농재로 들어갈 수 있었던 문으로 보인다.

현무문 또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玄武)가 포함되므로 북쪽 방향에 있는 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서쪽 궁장의 문 중에서 제일 북쪽에 있는 문이 현무문이었다. 문은 남아 있지 않으나 현재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유일한 문이기도 하다.

궁장의 동쪽에 있었던 문으로는 제일 바깥쪽으로 태화궁(太和官)과 연결된 춘생문이 있었다. 춘생문은 춘(春)과 생(生)이 들어가니 동쪽 궁장에 있었던 문임을 알 수 있다. 그 안쪽으로 후원의 실질적 궁장 출입문 역할을 하는 춘화문(春和門)이나, 다시 그 안쪽에는 경비 근무자들이 근무하고 있어 출입 여부가 확인돼야 통과할 수 있는 춘도문(春到門)이 있었는데 모두 춘(春)자 돌림의 동쪽 문이었다.

따라서 춘생문 사건을 되짚어본다면 당시 구 시위대 군사들이 춘생문을 통과한다 하더라도 몇 개의 문을 더 지나야 하기에 내부의 호응 없이 건청궁에서 고종을 모셔온다는 건 거의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08호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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