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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20)] ‘세계의 공장’ 엔진이 된 대만의 기적 

“타이상(臺商, 대만 상인) 없이는 아이폰도 없다” 

1949년 국·공 내전 패배한 장개석이 건너와 독자 정부 세우고 철권통치
고도성장과 분배, 정치 민주화 함께 이뤘지만 중국 압박 거세지며 시련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은 중국 역사의 보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일본은 서구 주도의 자본주의 역사에 처음으로 균열을 일으켰다. 유럽도 아니고 유럽인들이 새로운 땅을 개척해 세운 나라도 아니면서 그들의 기술과 지식, 제도와 정책을 학습하고 모방해 자본주의 열강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일본은 비(非)서구 지역의 발전 가능성을 제시한 셈이다. 일본의 독특한 경험은 재생 가능한 것인가.

20세기 후반부가 되자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는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Four Asian Tigers)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일본에 이어 경제 발전의 궤도에 올라섰다. 일본의 기적이 예외가 아니라 어느 나라라도 조건이 충족되면,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풍요로운 삶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점을 동아시아 4개국이 증명한 것이다. 네 호랑이의 부상은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식민지 경험을 극복하고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대만은 수십 년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홍콩과 싱가포르 또한 대영제국 시절 아시아 전진 기지 역할을 담당한 곳이었다.

미국이 식민지 경험을 극복하고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으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아시아 네 마리 호랑이와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미국은 제국의 중심인 영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만든 나라이며 거대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 확산을 기반으로 성장한 강대국이다. 게다가 이미 18세기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산업혁명이라는 대변화를 맞아 유럽과 거의 동시에 발전의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아시아의 네 호랑이는 20세기 중반까지 식민지 노릇을 한 작은 규모의 나라들이다. 무릇 식민지란 제국의 변방이다.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서 주변부에 불과하며 그 때문에 발전에는 장벽이 많다. 또 약소국이다 보니 국제 분업체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의 사다리를 타고 선진국으로 올라선 이들에게는 어떤 비결이 있는 것일까. 대만은 이런 점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사례다. 역사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대만은 50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1895~1945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에는 중국령으로 복속(復屬)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특히 대만은 냉전을 거치면서 세계 경제 3대 세력인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연결해 주는 정치·경제의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혈통을 중시하는 동아시아의 시각에서 대만은 중국인들의 땅이다. 대만에 사는 주민 대부분이 중국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세계를 돌아보면 다른 상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례로 영국인을 조상으로 두고 있는 현대 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을 영국인의 땅으로 보지는 않는다. 종족적이고 문화적으로 강한 연대가 존재한다고 반드시 하나의 민족이나 국가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만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왜 대만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적 성향이 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양한 식민 경험과 다문화 대만의 형성

대만이 중국 대륙의 왕조에 정식으로 편입되는 것은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늦은 1684년 청나라 때다. 황하와 장강 사이 중원을 무대로 전개된 중국의 역사에서 장강 이남은 주변부였고, 거기서도 바다 건너에 있는 대만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대륙인 중국보다 일찍 대만에 관심을 드러내며 지배한 나라는 놀랍게도 먼 유럽의 네덜란드였다. 17세기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상업 네트워크를 형성한 네덜란드 제국은 중국의 중심으로 진입하기 어렵다 보니 주변에 위치한 대만에 똬리를 틀었다. 1604년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에 진출한 네덜란드 동인도주식회사(VOC)는 1624년에는 대만까지 세력을 확장해 질란디아(Zeelandia)라는 군사기지를 만들고 사탕수수 농업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500여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중국 푸젠성에서 이주해 온 농민들을 활용하여 논과 밭을 일구도록 했고, 당시 초기 세계 자본주의 고가 상품의 원재료인 사탕수수 재배에 힘썼다. 아열대 기후인 대만은 네덜란드뿐 아니라 스페인과 영국도 눈독을 들여 각각 기지를 만들 정도로 서세동점의 발판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역동적인 17세기 대만의 역사는 1662년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이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 동인도주식회사의 질란디아 기지를 공격한 끝에 함락시킴으로써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정성공은 중국 대륙의 동북지역에서 발원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공격해 내려오던 여진족의 청조에 저항하는 명나라 잔존 세력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실제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두고 일본 큐슈에서 태어난 다문화 출신이다. 정성공의 세력은 대만과 남중국 해안을 중심으로 한동안 지배체제를 굳히지만, 결국 1683년에는 패배해 청나라가 대만까지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대만이 중국의 영토에 편입된 것은 17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2세기 정도다. 1684년 대만은 청나라 푸젠성의 부(府)로 편입되면서 중국의 영토가 되고, 1790년 이후, 대륙으로부터의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된다. 특히 중국 남부의 푸젠성과 광둥성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만의 지역 사회가 형성된다. 이들은 오스트로네시아 계열 대만 원주민들의 영토를 탈취·개간하여 농지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아시아 식민주의를 실천한 셈이다.

일본과 중국의 철권통치

19세기 말 불붙은 제국주의 경쟁의 파도는 중국을 강타했고 그 과정에서 대만의 운명도 풍전등화가 됐다. 청불전쟁 이후 1885년 청나라는 대만을 성(省)으로 승격시킴으로써 독자적 행정 단위로 인정했다. 그러나 청국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을 일본의 식민지로 내줄 수밖에 없었다. 대만은 200여 년의 중국 지배에 이어 반세기에 걸쳐 일본 지배에 들어가게 됐다. 이처럼 대만은 네덜란드·스페인·영국 등 유럽세력의 아시아 진출의 기지로 중요성이 드러난 뒤, 중국과 일본에 차례로 식민 지배를 당하는 운명이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처음으로 대만이라는 식민지를 얻게 됐다. 이후 50년 동안 지배하면서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됐다. 50년이면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하는 기간이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대만에 살고 있는 중국계 주민들에게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대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5만 명의 주민이 청나라를 선택해 대만을 떠났지만 결국 3만 명이 돌아왔다고 한다. 베이징과 도쿄의 제국주의 사이에 충돌과 흥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대만에 사는 사람들이 겪었던 혼란을 드러내 주는 일면이다. 문화와 언어는 베이징 쪽에 가깝지만 따지고 보면 청나라 또한 오랑캐 여진족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무엇보다 대만 주민의 삶은 이 작은 섬에 이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대만에 정착한 중국계 주민들은 청나라 시기에도 과거에 붙으면 중앙의 관계(官界)에서 몇 년간 일하다 다시 대만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소규모지만 대만이라는 독립적인 사회가 이미 형성됐다.

청나라가 물건을 건네듯 대만을 일본에 이양하자 대만 현지 사회는 반발했다. 잠시밖에 지속되지 못했지만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 반발해 대만 공화국을 선포하여 일본에 병합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당시 공화국의 총통은 청나라 관료 탕징숭(唐景崧, 1841~1903)이 맡아 상징적 저항에 나섰다. 이 사건은 실패로 귀결된 13일의 짤막한 에피소드로 남았지만 동아시아에 처음으로 등장한 공화정이자 대만을 하나의 정치 단위로 선언한 최초의 시도였다. 식민제국 일본은 대만 사회에서 중국의 영향력과 봉건적 유산을 제거하는데 적극 나섰다. 우선 아편의 소비와 남성의 변발(辮髮), 그리고 여성의 전족(纏足)을 3대 악습으로 규정하고 없앴다. 대만을 인수한 지 불과 3년 뒤인 1898년에는 근대적 초등학교 제도를 시행해 식민지 교육 정책을 폈다. 물론 모든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일본인과 대만인의 차별은 존재했다. 같은 식민 관료로 근무해도 일본인의 봉급은 대만인보다 50~60% 더 높았다. 공식 관료의 차별이 이 정도라면 일반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착취가 어떠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대만은 중국으로 복속됐다. 대만이라는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독립을 얻은 것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커다란 대륙 세력의 영토로 편입되었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2·28 사건은 대만 역사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947년 2월부터 대륙의 중국 군대가 현지 대만인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1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 충돌로 중국 외성(外省)인과 대만 본성(本省)인의 대립적 관계가 형성됐다. 특히 1949년 장개석(蔣介石, 1887~1975)이 이끄는 국민당 세력이 대륙에서 공산당에게 패한 뒤 대만으로 이동해 옴으로써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국민당의 점령지로 돌변했다. 권력의 중심이 베이징이나 난징, 도쿄 등 먼 곳에 있을 때 상징적 지배를 받는 것과 실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해 와 억압하는 것은 다르다. 대만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국민당 정부의 계엄령 아래 또 다른 강압 정치의 지배 아래 놓였다.


▎1947년 2월 28일 국민당 정부의 대만인 학살 사건의 그림. / 사진:위키피디아
한국전쟁 덕분에 생존한 대만


▎대만 총통부로 사용되는 일제 총독부 건물. / 사진:위키피디아
역사는 아이러니로 가득 찼다. 대만의 경우 대륙에서 건너온 소수의 국민당 세력이 철권통치를 하는 시기에 고속 경제 성장의 궤도에 올라 부국굴기에 성공했다. 일반적으로 제국주의나 식민주의는 중앙이 주변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구조다. 주변의 피를 빨아먹는 중앙은 살찔 수 있지만 주변은 피폐해지는 것이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의 상식이다. 반면 대만은 국민당 세력이라는 중앙이 주변부 대만에 직접 와서 정착한 뒤 수탈하고 착취함으로써 부(富)의 지리적 이전보다는 현지 축적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부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고 반드시 해당 지역의 경제발전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불평등한 경제구조로 인해 부익부 빈익빈이 반복되는 사회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국가의 역할은 중요하다. 국가가 기득권층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공익, 즉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짜고 미래를 계획해야 부가 골고루 분배되는 경제 성장과 발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에서 국가가 발전을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싶어도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구조적 힘을 이용해 방해하면 곤란하다.

동아시아의 발전국가론은 일본을 비롯해 한국·대만 등에서 국가가 기득권층의 단기적 이익에 부합하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장기 발전의 궤도로 인도했다고 분석한다. 농경 사회에서 기득권층이란 항상 지주계층이다. 대륙에서 대만으로 넘어온 국민당 세력은 1949년부터 평등을 지향하는 혁신적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지주와 같은 보수 세력이 자본주의 발전을 가로막을 수도 있지만, 노동이나 반체제 세력이 너무 강해도 발전은 어려워진다. 미국 오리건대의 부(Tuong Vu) 교수는 [아시아의 발전 경로]에서 중국, 한국 등의 사례를 들며 근대 국가 건설 과정에서 분단이 친(親) 자본과 친(親) 노동 세력을 갈라놓았다고 설명한다. 그로 인해 상당히 균질적인 국가(Cohesive State)가 형성된 한국, 대만 등의 발전전략은 날개를 달게 됐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군사정권이나 대만의 계엄령 체제에서 노동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국가가 원하는 발전전략의 추진에 걸림돌이 적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동아시아 지정학에서 대만의 생존은 김일성 덕분이라고 이야기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중국 공산당 세력은 내전을 지속해 대만까지 차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대만은 1952년부터 적극적으로 수입품을 자국에서 생산하는 수입대체산업화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1960년대 말부터는 이를 수출로 방향 조정하는 전략을 폈다. 대만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이미 6~12% 수준의 높은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기록한다. 대만의 고속 경제 성장은 1980년대 연평균 8%, 1990년대 6.5% 등으로 지속되며 그에 따라 1인당 국민소득도 1990년이 되면 1만 달러를 넘어선다. 특히 대만의 경제성장은 1980년대까지 균등한 분배가 특징이다. 지니 계수와 같은 평등 지수에서 대만은 선두를 달려 성장과 분배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모습을 보였다. 소득 분배뿐 아니라 기업의 구조에 있어서도 대기업 재벌 중심의 한국이나 일본과 비교했을 때 대만은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대만은 이웃 중국의 성장과 함께 국가의 존폐를 항상 위협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타이상이 견인한 거대 중국의 발전


▎고아한 정취를 자아내는 타이베이 야경. / 사진:위키피디아
약소국의 설움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만이 생존할 수 있었던 동아시아 냉전 구도가 1970년대 들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대만에 대한 위협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1971년 유엔은 중국을 대표하는 권리를 대만의 중화민국에서 빼앗아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겼다. 군사 동맹국 미국마저 1979년 중공과 국교를 정상화함으로써 대만은 국제사회의 고아 신세로 전락했다. 1991년 유엔에 동시 가입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던 남·북한과 달리 중공은 철저하게 ‘하나의 중국’ 외교로 일관하면서 세계에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1992년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기존 대만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던 사례가 비단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대만은 그로 인해 실질적 국가로 존재하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살아있는 유령 국가 신세가 됐다.

1979년 개혁개방의 정책으로 시작된 중국의 경제발전에서 아시아 네 호랑이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식민지의 늪에서도 당당하게 일어나 선진경제로 나아갈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준 데다, 대만의 경우 거대한 중국 대륙을 성장의 궤도로 이끄는 견인차의 역할을 직접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럽 주변부 섬나라였던 영국이 산업혁명을 통해 유럽 대륙을 발전의 길로 이끌었던 경험과 유사하다. 중국이 초기 경제발전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개방했던 선전, 샤먼, 산토우, 주하이 등의 경제특구는 홍콩과 마카오, 그리고 대만을 염두에 둔 지리적 선택이었다. 특히 샤먼과 산토우는 대만과 좁은 해협을 두고 마주 보는 모양새다. 실제 1987년부터 대만 정부는 중국 대륙에 있는 친척을 만나기 위한 대만인의 방문을 정식 허락했다. 이로써 소위 타이상(臺商) 즉 대만 상인들의 대륙 러시가 시작됐고 성공적 자본주의 노하우의 확산이 빠르게 진행됐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창조적 혁신을 강조하면서 상품의 생산이나 소비, 유통이나 광고 등 어느 하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조합하는 능력이 결정적이라고 설파했다. 기업가가 노동과 자본, 토지와 시장을 적절하게 연결해 다듬고 돌리는 주인공이라고 설명했던 것이다.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하는 공산당 간부나 중국을 전혀 모르는 외국의 자본가가 할 수 없는 일을 도맡아 추진한 것이 바로 타이상들이다. 타이상은 자본을 갖고 있었고 공장을 돌리고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는 실력을 쌓아왔다. 중국의 지방정부는 이런 타이상을 유치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광둥성의 선전, 동관, 후이저우, 포산 등은 타이상 자본가의 직접투자로 활황을 맞게 된다. 대만 자본의 노동집약적 산업은 광둥 성으로 대거 이전해 신발, 우산, 섬유, 플라스틱 등의 부문에서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발전하게 만들었다. 이어 대만 자본은 장쑤성 쿤산을 랩톱과 컴퓨터 등 전자 산업의 기지로 만들기도 했다.

현재 중국에는 100~300만 명 정도의 대만인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종사하면서 공산 중국의 자본주의화를 이끌고 있다. 초기에 자본 투자와 조립 공장을 중심으로 이뤄진 대륙 진출은 이제 서비스업이나 문화, 관광, 연예 등 다양한 분야로 퍼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은 중국에 가서도 대만인촌을 형성해 생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은퇴 후 삶의 터전은 여전히 대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아이폰을 생산하는 대만의 폭스콘


▎차이잉원 대만 총통. 대만은 코로나 사태에서 방역에 가장 성공한 나라다. / 사진:위키피디아
대만이 중국 경제발전의 견인차라는 등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미국 애플과 대만 폭스콘이 협력해 중국에서 생산하는 아이폰이다. 애플은 세계 최강의 미국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뉴욕 증시 최고의 기업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디자인한 애플의 아이폰을 생산하는 것은 대만의 폭스콘이라는 기업이다. 폭스콘은 중국을 잘 알기 때문에 광둥 지역을 중심으로 수십만의 노동자를 고용해 저렴한 가격에 세련된 디자인의 아이폰을 만들어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21세기 세계자본주의의 핵심은 가장 조명을 받는 애플도 아니고, 19세기적 조건에서 피땀을 흘리며 아이폰을 조립하는 중국도 아니다. 바로 생산의 사슬을 연결해 주는 대만의 폭스콘이야말로 슘페터가 말했던 기업가 정신의 혁신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불행히도 대만은 미국이나 중국처럼 국가와 정부가 국제무대에서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목소리는커녕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입장이다. 변변한 대사관조차 없어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모습은 어떤 점에서 과거의 유태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외부에서는 고아 신세지만 대만은 내부에서 활기찬 민주화를 통해 정기적으로 정권교체를 이루는 모범적 국가로 발전했다.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계엄령을 통해 1980년대까지 삼엄한 독재체제를 유지했다. 1975년 장개석이 사망한 이후에도 아들 장경국(蔣經國)이 정권을 이어받아 1988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1986년 민진당이라는 야당이 형성될 수 있었고 점진적인 체제의 자유화가 이뤄졌다. 장개석, 장경국 부자에 이어 국민당 정권을 담당한 리덩후이(李登輝)는 대만 본성 출신으로 자유화의 진행을 이끌었다. 그는 1996년 치러진 대선에서 최초의 직선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대만의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 이후 민진당의 첸수이볜(陳水扁, 2000~2008), 다시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2008~2016), 그리고 또다시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 2016~현재) 등으로 정기적인 여야 정권교체가 일어나는 건전한 모습이다.

2010년대 대만은 이처럼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성과를 모범적으로 달성한 성공 사례다. 물론 나름 심각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예전에 비해 경제 활력이 많이 떨어졌다. 2019년 현재 출산율은 1.05로 떨어져 고령화를 재촉하고 있고 노동집약산업이 모두 대만 해협을 건너 중국 대륙으로 넘어간 탓에 성장률은 하락했다. 과거 대만이 자랑하던 평등한 분배도 수치가 많이 악화됐다. 대만은 또 일본이나 한국처럼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경쟁할 수 있는 자체 브랜드 제조(OBM, Own Brand Manufacturing) 대기업을 보유하지 못했다. 세계 차원에서 독과점이 강화되는 세계화 시대에 열세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조건인 셈이다.

대만·한국·일본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

2014년 봄에 일어난 태양화(太陽花) 학생운동은 대만이 현재 안고 있는 정체성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당시 마잉주 국민당 총통은 중국과 양안서비스무역협정(CSSTA)을 체결래 추진했지만 이를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3월 18일부터 4월 10일까지 의회를 점령했던 사건이다. 3월 30일에는 50만 명의 대규모 시위를 통해 중국과의 경제 통합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불거져 나왔다. 결국 국민당 정부는 양안서비스무역협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민진당의 차이잉원은 2016년 56%의 압도적 득표율로 집권에 성공했다. 그리고 2020년 1월에는 재선에 성공했다.

대만 역사와 정치의 맥락에서 국민당은 대륙에서 넘어온 외성(外省)인들을 상징한다. 이들은 공산당과 내전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의 전통에 가깝다. 반면 민진당은 대만에 원래 거주하던 본성(本省)인의 목소리가 강하다. 전통적으로 민진당은 대만의 독립을 선언하자는 주장을 폈다. 집권을 하면서 이런 강력한 주장이 보다 현실적으로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민진당의 성향은 중국과의 통합보다는 대만의 독립을 지향한다. 중국은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면 무력 침공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밝히고 있다. 개혁개방 초기에 세계의 눈치를 보며 와신상담의 태도로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추구하던 중국은 점차 자신감을 드러내며 강대국의 오만을 표출하고 있다. 특히 대만은 중국이 홍콩의 자치권을 묵살하고 점점 직접 통제하려는 시도를 보면서 커다란 위협을 느끼게 됐다.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대만 정부가 홍콩으로부터 망명하는 이주민들을 받아들이겠다는 정책을 밝힌 것은 민주적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적적 경제발전과 탄탄한 민주주의라는 균형 잡힌 근대사회를 구성했다는 점에서 한국, 일본, 대만은 동아시아의 자랑이다. 지금은 경이로운 경제발전을 이뤘지만 여전히 국내의 독재와 국제적 횡포를 일삼는 중국이 대만을 점점 강하게 압박하면서 위협하는 시대다. 한국과 일본이 중국의 위세에 눌려 대만을 외면한 지는 오래다. 일본은 1972년에 미국보다 앞서 대만을 버리고 중국을 선택했으며, 한국은 1992년 일본의 선택을 따랐다. 하지만 중국의 압박과 팽창이 대만에서 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중국은 대만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을 자신의 앞마당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2008호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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