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3부)] 근·현대 서구화와 기독교 수용의 주역들(5) 개신교 개척자 서상륜 

삼족 몰살 위험 무릅쓰고 교회 세워 전도 

선교사들 오기 전 조선인 스스로 복음 전파, 신자 급속하게 늘어
최초 조직교회 새문안교회 창설 이어져, 초기 개신교 안착 주도


▎1885년 황해도 장연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인 소래교회.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했지만 상황은 심각했다. 지난해 연말 발발했던 갑신정변의 여파 때문이었다.

김옥균 등 개화파가 주동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다. 고종은 개화파 인물들을 대역죄인으로 단죄했다. 개화파가 수용하고자 했던 서구 근대문화는 대역죄인들의 음험한 문화로 간주됐다. 서양인과 서양문화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반감이 팽배했다. 설상가상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곧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유언비어까지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한양 입성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주한 미국공사 푸트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올 것을 권고했다. 그 권고대로 아펜젤러는 한양에 입성하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에게는 신혼 초의 부인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혼 전이던 언더우드는 순교할 각오로 한양에 입성했다. 당시 언더우드는 27세였다. 그렇게 한양에 입성한 언더우드에게 우호적인 상황도 없지 않았다. 갑신정변 때 알렌 선교사의 활약이 그것이었다.

1884년 6월,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 목사의 권고에 따라 일본에서 조선으로 온 맥클레이 목사는 김옥균의 주선에 힘입어 의료 사업과 교육 사업을 허락받았다. 그 때가 7월이었다. 그 허락에 따라 미국의 북장로교와 북감리교는 의료 선교사와 교육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와 알렌은 북장로교에서 파송됐는데 언더우드는 교육 선교사, 알렌은 의료 선교사였다.

또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은 북감리교에서 파송됐는데, 아펜젤러는 교육 선교사, 스크랜턴은 의료 선교사였다. 그들 중 알렌이 1884년 9월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최초의 공식적인 내한 선교사가 됐다. 뒤이어 1885년 4월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5월에는 스크랜턴이 내한했다. 그 뒤에도 수많은 선교사가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1884년 12월에 있었던 갑신정변 때 알렌은 뜻하지 않은 활약을 하게 됐다. 갑신정변 3개월 전에 내한했던 알렌은 주한 미국공사관의 공의(公醫) 자격으로 한양에 머물며 의료 선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신정변에서 민영익이 암살객의 칼을 맞고 빈사 상태에 빠지게 됐고, 그 민영익을 알렌이 치료해 살려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고종은 알렌을 자신의 주치의로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광제원(廣濟院)이라는 병원을 세우고 알렌을 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때가 1885년 4월 10일이었다. 알렌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의료 선교를 시작한 셈이었다. 광제원은 4월 23일부터 제중원(濟衆院)으로 바뀌었는데, 현재 세브란스 병원의 모태가 제중원이었다.

사경 헤매다 선교사 병원서 살아나자 신앙


▎1890년대 조선에 온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 왼쪽 아래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이 유진 벨, 윗줄 가운데 모자를 쓰고 서 있는 남자가 알렌이다. / 사진:유진벨재단
언더우드가 한양에 입성한 때는 제중원이 막 출범하던 즈음이었다. 당시 제중원에는 서양 의사가 알렌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하루에 70명 정도의 환자가 찾아오고 5~6명이 수술하는 상황이라 서양 의사가 아주 부족했다. 그런 알렌에게 언더우드는 크나큰 도움이었다. 언더우드는 비록 교육 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했지만, 기초적인 의술을 배워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알렌의 도움으로 덕수궁 주변에 거처를 마련한 언더우드는 매일 오후 제중원에 나가 알렌을 도왔다. 남는 시간에는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교육 선교를 준비했다. 언더우드가 한양에 들어온 지 3개월이 지난 1885년 7월이 되자 몇몇 아이가 영어를 배우러 찾아왔다.

1886년이 되자 언더우드는 그 아이들을 기반으로 교육 선교를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장은 학교가 없으므로 자신의 집을 이용하기로 했으며, 공식적인 입학생들이 없었기에 고아들을 모아 가르치기로 했다. 1886년 2월, 조선 정부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은 언더우드는 자신의 집 맞은편 건물을 사들여 고아원 겸 학교로 이용했다.

그 고아원 겸 학교는 언더우드 학당 또는 구세 학당으로 불렸는데, 한국사 최초의 고아원이었다. 그 구세 학당에서 안창호·김규식 등 뛰어난 독립 운동가 겸 기독교 지도자들이 배출됐다. 제중원에서 알렌을 돕던 언더우드는 본연의 사명인 복음 선교도 실행하고자 했다. 1885년 7월부터 언더우드는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봄으로써 복음 선교를 시작했다. 당시 의료 선교와 교육 선교를 제외한 복음 선교 자체는 불법이었지만 미국인 언더우드 집에서 서양인들이 모여 예배보는 것은 불법이라 할 수 없었다.

1886년이 되면서 언더우드 집에서 열리는 예배에 조선인들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86년 7월 18일 언더우드는 노춘경에게 세례를 줬는데, 노춘경은 조선 내부에서 세례를 받은 첫 번째 주인공이었다. 서울 근교에 살던 노춘경은 1886년 봄 알렌의 집에 들렀다가 한문 성경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 밤새 읽었다고 한다. 마음속에 큰 감동이 일어난 노춘경은 다음 날 언더우드를 찾아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노춘경은 언더우드 집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참석해 신앙을 키우다가 마침내 세례를 받게 됐다. 그 이후 세례를 받고자 하는 조선인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이에 언더우드는 어떻게 하면 복음 선교를 공식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다. 바로 그때 서상륜이라는 의주 사람이 언더우드에게 나타났다. 그 서상륜을 만남으로써 언더우드의 복음 선교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서상륜은 의주 출신으로 국제상인이었다. 14세에 부모를 잃은 서상륜은 젊은 시절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탕진했다고 한다. 그렇게 탕진한 재산을 만회하기 위해 서상륜은 홍삼을 구매해 1878년 아우 서상우와 함께 만주의 심양을 거쳐 우장(牛莊)까지 갔다.

황해도 소래마을에 한국 최초 자생교회


▎우리나라에 서양 의술을 들여온 선교사 알렌이 고종에게 하사받은 의복.
하지만 우장에서 그는 갑자기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됐는데, 고향 친구들의 주선으로 선교사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마침 로스 목사 후임으로 우장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하던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그 사실을 알고 병원으로 찾아와 위로하며 기독교를 전도했다. 그때 서상륜은 병이 완치되면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했는데, 실제 병이 완치되자 착실한 기독교인이 됐다. 그리고 1882년 5월 서상륜은 만주 심양에서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때는 서간도의 김청송이 세례를 받은 지 두어 달 후였다. 그 후 서상륜은 당분간 심양에 머물며 로스 목사의 한글 성경 인쇄를 도왔다.

한글 성경이 준비되자 로스 목사는 1882년 10월 6일 서상륜을 권서로 임명해 의주와 한양으로 파송했다. 서간도로 파송된 김청송에 뒤이어 두 번째 파송이었다. 수백 부의 한글 성경을 짊어진 서상륜은 일단 고향 의주로 향했다. 의주로 가려면 책문(柵門)을 지나야 했다. 그때 책문의 검문관이 서상륜의 짐을 수상하게 여기고 수색했는데, 성경이 나오자 체포해 의주 검문소로 압송했다. 자칫 문제가 커지면 생명도 보장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이었지만, 그의 친척 김효순이 의주 검문소에 있다가 극력 주선해 풀려나게 됐다.

하지만 고향 의주에 도착한 서상륜은 안심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또 한글 성경까지 받아온 사실이 알려진다면 삼족이 몰살당할 판이었다. 불안해진 서상륜은 우선 한글 성경을 백홍준 등 친구들에게 넘겨줬다. 그 한글 성경을 백홍준이 의주에 뿌렸고, 그로써 의주에도 개신교가 빠른 속도로 퍼지게 됐다.

이렇게 의주에서 한글 성경을 처리한 서상륜은 동생 서상우와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 자신은 원래 목적지인 한양으로 가고, 동생 서상우는 친척들이 살고 있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마을로 가게 했다. 그때는 1883년 1월쯤이었다. 한양으로 간 서상륜은 석 달 동안 모르는 사람 집에 은신했다가 남대문 안으로 거처를 옮겼다. 훗날 서상륜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예수님은 내 영혼과 육신의 죄의 결단으로 죽음에 빠진 나를 건져 구원하사 영생하는 자기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또 로스 목사에게 감동하사 조선국에 전도할 사무를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주 앞에 로스 목사와 그 부인과 함께 엎드려 주께서 도와주시며 보호하심을 기도하고 서로 작별했습니다. 그 후 나는 심양을 떠나 바로 조선국 한양으로 올라가 석 달 동안 남에게 더부살이하다가 남대문 안쪽 창동으로 집을 정하고 옮겼습니다.”(‘서 선생 상륜의 경력’, [그리스도신문] 5권 38호, 1901년 9월 19일)

1883년 4월쯤 창동으로 옮긴 서상륜에게는 한글 성경이 없어 본격적인 전도가 어려웠다. 서상륜은 로스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 한글 성경을 요청했다. 로스 목사는 김청송 후임으로 식자공(植字工)이 된 평양 출신 류춘천을 1883년 5월 평양으로 파송하면서 서상륜에게 보낼 한글 성경도 함께 보냈다. 류춘천은 한글 성경을 가지고 평양으로 가 전도했으며, 한양의 서상륜에게도 수 백 부의 한글 성경을 보내줬다.

이로써 1883년 가을부터 평양과 한양에서 한글 성경을 매개로 개신교가 급속히 확산됐다. 1883년 연말 서상륜은 로스 목사에게 편지해 한양에서 세례 받기 원하는 신자가 13명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뒤이어 로스 목사는 1884년 봄에 배편을 이용해 또다시 수백 부의 한글 성경을 서상륜에게 보냈다. 그 한글 성경을 이용해 서상륜은 1884년 연말까지 한양에서 전도했다.

한편 서상륜은 황해도 장연군 소래마을에 있던 동생 서상우에게도 전도하고자 했다. 그래서 1884년 봄에 서상륜은 편지를 써서 서상우를 한양으로 오게 한 후 한글 성경을 줘 읽게 했다. 소래마을로 돌아온 서상우는 한글 성경을 읽으면서 점차 신앙심이 솟아났고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도 시작했다.

이렇게 서상륜이 의주에 뒤이어 한양과 황해도 소래마을을 대상으로 기독교를 전도하던 1884년 연말 한양에서 갑신정변이 발발했다가 실패했다. 당연히 한양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던 서상륜은 큰 불안에 휩싸였다. 서양 개신교를 전도하는 자신 역시 대역 죄인으로 몰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한양을 탈출한 서상륜은 일단 심양으로 돌아가 로스 목사에게 그간의 사역을 보고했다.

뒤이어 동생 서상우가 있는 황해도 소래마을로 갔다. 그때가 1885년 3월이었다. 당시 소래마을에는 동생 서상우가 전도한 신자 20명이 있었다. 서상륜은 그들을 모아 동생 서상우의 사랑방에서 일요일마다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로써 정기적으로 주일 예배를 드리는 자생교회가 탄생하게 됐다.

소래교회는 조선인이 자체적으로 조선에서 세운 최초의 자생교회라는 면에서 역사적이었다. 물론 예배는 서상륜이 인도했다. 소래교회 창설 후, 세례를 원하는 신자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1886년 겨울이 되자 한양과 소래교회에서 세례를 원하는 신자는 70명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세례를 주려면 로스 목사가 오거나 아니면 다른 선교사가 있어야만 했다. 그때 서상륜은 로스 목사를 통해 미국 선교사들이 한양에 파송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1886년 12월 말에 서상륜은 한양으로 갔다. 알렌과 언더우드를 만나 소래교회와 한양신자들의 세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서상륜은 먼저 제중원의 알렌을 만났는데, 알렌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당시 알렌은 고종의 신임을 받아 제중원을 운영 중이었기에, 고종으로부터 정식 허락을 받은 후 복음 선교를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조선인 전도자, 생명 초개같이 버린지 오래”


▎한국 최초의 장로교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 신도들의 예배 모습.
반면 서상륜은 고종의 허락 여부와 관계없이 복음 선교를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즉 세례를 원하는 소래교회와 한양의 신자들에게 당장 세례를 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박완의 [실록한국기독교 100년]에서는 서상륜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조선에 건너온 미국 선교사들은 왜 그리 겁쟁이들입니까? 자신들 신변이 위태롭고 목숨이 아깝다고 선교사 본연의 사명을 팽개치고 목숨의 안전을 위해 ‘나는 선교사가 아니라 의사로소이다.’ 발뺌을 해가면서 이 썩어빠진 조선 조정에 갖가지 아부를 하고, 꼬리를 치고 몸을 사리는 겁쟁이들이 이 땅에는 무엇하러 왔단 말입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알렌 선교사님! 당신은 최대의 권력자 민영익의 생명의 은인이며, 국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행운아가 아니오? 그러면서 아직도 ‘나는 선교사가 아니다.’ 하고 발뺌할 방법밖에 취할 수 없단 말이오? 목숨이 아까워서요? 아니면 조선 조정에 좀 더 잘 보여 지금보다 더 편안한 당신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입니까? 대답해 보란 말이오! 우리 조선인 전도자는 생명을 초개같이 버린 지 이미 오래전입니다.”

하지만 알렌은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서상륜은 언더우드를 만나 다시 세례 문제를 논의했다. 그때 언더우드는 매우 놀랐다. 알렌과 자신을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공식 선교사로 알던 언더우드라 당연히 조선에는 개신교 신자도 없고, 개신교 교회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서상륜에 의하면 이미 조선에는 한양·평양·의주·강계·서간도 등에 수많은 개신교 신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소래교회라고 하는 자생교회까지 있었다. 게다가 수많은 개신교 신자가 당장 세례를 받고 싶어 한다고 했다. 언더우드는 매우 놀라는 한편 크게 기뻐했다. 자신과 알렌은 아직 고종의 허락이 없어 내놓고 복음 선교를 하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이미 몇 년 전부터 조선 신자들이 순교할 각오로 복음선교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 당연히 언더우드는 서상륜을 비롯한 조선 신자들의 요청과 열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동생 서경조는 조선인 최초의 목사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운 서상륜.
그러나 한양의 제중원에서 일하던 언더우드가 공개적으로 황해도 소래교회까지 가서 세례를 주기는 곤란했다. 우선 알렌이 결사반대였다. 결국 언더우드는 세례를 받고자 하는 신자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오면 세례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서상륜은 소래마을로 내려가 일차로 동생 서상우를 비롯한 신자 3명을 데리고 와서 세례를 받게 했다. 그때가 1887년 1월 23일이었다.

당시 세례를 받은 서상륜의 동생 즉 서상우는 달리 서경조라고도 불렸는데, 훗날 서경조는 조선인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됐고, 그의 아들 서병호는 조선인 최초의 유아 세례자가 됐으며, 백범 김구의 가까운 동지로서 상해임시정부의 유력 인사가 됐다.

그 3명을 뒤이어 한양·소래교회 등에서 세례를 요청하는 신자들이 계속 언더우드 집을 찾아왔다. 이에 따라 언더우드 집에서 비밀리에 세례를 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됐다. 결국 언더우드는 공식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 안에서 세례를 주기로 결심했다. 즉 공개적으로 복음 선교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마침내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는 서대문 안쪽에 새문안교회를 창설했다. 그 새문안교회가 한국사 최초의 장로교 조직교회였다.

역사적인 새문안교회 창설 예배에는 만주 심양의 로스 목사와 세례를 받은 조선 신자 14명이 참석했다. 그 14명 중 5명은 서상륜·서경조 등 소래교회 출신이었고, 나머지 9명은 노춘경 등 한양 출신이었다. 한양 출신 9명 중에서 노춘경을 제외한 8명 그리고 소래교회 출신 4명을 합한 총 12명은 서상륜의 전도로 세례를 받고 참석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실에서 새문안교회 창설의 주역은 사실상 언더우드가 아니라 오히려 서상륜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새문안교회의 창설예배에 참석했던 로스 목사는 당시 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신약성서 일로 배를 타고 서울에 갔다. 배편은 유일한 수단이었고 편리했다. 도착한 날 저녁은 내게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저녁이었다. 나를 안내한 언더우드 씨는 그날 저녁에 작은 무리로 장로교회를 조직하기 위해 자신의 작은 예배당에 가야 한다고 알려줬다. 그의 친절한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나는 그와 그의 학교 학생과 동행했다. 이미 어둠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넓은 길을 가로질러 갔는데 동양의 대부분 도시처럼 불이 없어 어두웠다. 조그만 등을 든 한국인의 안내를 받아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가 마침내 작고 빈 안뜰로 들어섰다. 우리가 대문을 두드리자 그 문이 열렸다. 종이를 바른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자 문이 열리고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옷을 정제하고 학식 있어 보이는 남자 14명이 거기에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그날 밤에 세례를 받았는데 그날의 제일 중요한 일은 두 사람을 장로로 선출하는 일이었다. 이의 없이 두 사람이 선출됐고 그다음 주일에 안수받았다. 알고 보니 이 두 사람은 심양에서 온 사람의 사촌들이었다.(…)”(John Ross, ‘The Christian Dawn in korea’,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4, 1890년, 4월)

새문안교회를 창설한 언더우드는 1887년 10월 말 제1차 지방순회전도를 떠났다. 한 달가량 걸린 그 순회전도에서 언더우드는 개성·평양·의주·소래교회 등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 세례를 원하는 신자들에게 세례를 줬다. 언더우드는 소래교회에서 4명의 신자에게 세례를 줬다. 개성·평양·의주 등에서는 복음 선교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했다.

장로교회가 한국 개신교 주류 되는 데 기여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부인과 함께 아들을 안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 / 사진:유영익 저 [이승만의 삶과 꿈]
다음 해인 1888년 4월에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와 함께 제2차 지방순회전도를 떠났고 평양까지 다녀왔다. 제2차 지방 순회전도 중 언더우드는 소래교회에서 6명에게 세례를 줬고,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에게는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그 유아세례가 조선 최초의 유아세례였다.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근무하던 여의사 호튼과 1889년 3월 혼인했다. 호튼은 언더우드보다 8세 연상이었다. 혼인 후, 언더우드는 신혼여행을 핑계로 3월 14일 아침 일찍 제3차 지방순회전도에 올랐다. 그때 개성·평양·강계·의주를 거쳐 압록강 너머까지 다녀왔다. 당시 언더우드는 세례를 주지 않고 단지 의료 활동만 하겠다는 조건으로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의 지방순회전도 모습을 언더우드 여사는 [상투의 나라]라고 하는 저술에서 자세하게 묘사했다.

예컨대 개성에서의 순회전도 모습을 “언더우드 씨는 누구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았지만 예비 신자들을 만나 시험하고, 가르쳤으며, 조수들의 일을 지도하고 바로잡아줬다”라고 적었다. 또한 평양에서의 순회전도 모습은 “평양에서 1주일쯤 머무르면서 많은 방문객을 만났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호기심에서 찾아왔지만, 어느 누구도 복음서를 받지 않거나 말씀을 듣지 않고 간 사람은 없다”고 했다.

아울러 의주에서의 전도 모습을 언더우드 여사는 “우리는 아주 많은 사람의 방문을 받았는데 대개는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례를 바라는 듯이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그러한 지원자 중 100명 이상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 이 100명의 지원자 중에서 우리는 33명을 골랐다. (…) 우리는 외국인의 신분으로 조선에서 세례를 주는 것이 여권 발급의 조건으로 금지돼 있었으므로 우리는 모두 압록강을 가로질러 청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우리는 아주 엄숙하고 깊은 감동을 주는 성체 의식을 가졌으며, 언더우드 씨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그렸다.

이 같은 언더우드의 3차 지방순회전도를 통해 서간도·강계·의주·평양·개성·소래교회·한양 등에서 로스 목사의 한글 성경을 매개로 급속히 확산되던 개신교 신자들은 미국 북장로교로 통합될 수 있었다. 그 통합에 힘입어 평안도와 황해도의 서북 지역은 물론 경기도와 충청도 등 기호 지역에서도 미국 북장로교가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장로교회가 한국 개신교의 주류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한국 개신교 수용의 역사는 언더우드 등 미국 선교사의 노력으로 장로교회가 개신교 주류가 된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김청송·이수정·서상륜·서경조 등 조선인들의 한글 성경 보급에 힘입어 주류가 됐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19세기 개신교 수용의 역사는 삼국시대 불교 수용, 고려말 성리학 수용 그리고 18세기 천주교 수용과 마찬가지로 민족지성의 주체적 자각에 의한 능동적 수용의 역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images/sph164x220.jpg
202009호 (2020.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