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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11)] 근대 ‘세계제국’ 탄생 이끈 세력의 공통점 

유럽도 몽골처럼 주류 문명 외곽 ‘오랑캐’였다 

중화제국의 ‘그림자’ 몽골, 경계를 넘어 다문명 제국 이뤄
이슬람·중국에 문명 뒤졌던 유럽, 19세기 이후 세계 패권


▎8세기의 문명과 16세기의 야만이 한눈에 대비되는 코르도바 모스크-대성당. / 사진:위키피디아
1980년대 10년간 대학에 전임으로 있을 때 사학과의 동양사 전공자는 필자 하나였다. 동양사 강의의 절반가량은 강사를 초빙해 맡기고 나머지는 필자가 맡아야 했다. 고대사에서 근대사까지 여러 시대 역사의 강의를 준비하며 동양사의 통시대적 흐름을 어설프게라도 한 차례 파악해놓아야 했다.

대부분 역사학도가 지역과 시대를 기준으로 연구 분야를 설정하는 것과 달리 필자는 좁게는 천문역법, 넓게는 과학사상이라는 통시대적 주제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시대 역사를 공부할 기회를 반갑게 활용했다. 넓은 범위를 파악하는 것이 처음에는 꽤 힘들었지만, 몇 해 매달려 있다 보니 동양사 분야에 어떤 주제들이 떠올라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고, 중국사의 굴곡도 머릿속에 대충 그려지게 되었다.

그때 그리던 중국사의 굴곡은 왕조 중심의 스케치였다. 진시황과 한 무제의 제국 건설에 이르는 과정을 중국문명의 성숙 과정으로 보고, 다른 문명권에 비해 제국의 역할이 꾸준히 지켜진 것을 중국사의 특성으로 보는, 그때 세운 관점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윤곽만을 그려놓은 이 스케치의 구석구석을 보다 정밀하게 채워 넣는 작업을 그 후 40년간 해온 셈인데, 지금까지도 잘 채워지지 않는 구석이 원(元)나라다. 다른 구석들은 처음에 막연하다가도 기존 연구를 찾아보면 차츰 명료해지는데, 이 구석은 그렇지가 못했다. 왕조 중심의 틀로는 어떻게 해도 몽골제국의 특성과 의미를 제대로 그려낼 길을 찾을 수 없다.

왕조사관, 극복보다는 보완할 필요 있어


▎네덜란드인 얀손이 1658년에 그린 인도양 해도. 세 개의 해역이 유럽인들에게도 명확히 구분-인식되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왕조사관의 극복’을 중국사의 과제로 더러 이야기하는데, 필자는 왕조사관을 극복하기보다는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제국의 역할이 꾸준히 지켜진 것이 중국사의 특성인 만큼, 왕조의 성쇠에서 그 흐름의 윤곽을 읽을 수 있다. 다만 왕조에 완전히 묶여 있던 전통시대 역사서술의 한계를 넘어설 필요가 있는데, 나는 외부세력들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의 길을 찾고자 하는 뜻에서 ‘오랑캐의 역사’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오랑캐의 역사’ 작업의 가장 큰 목적은 이른바 ‘전통시대’와 ‘근대’ 사이의 연속성을 찾는 것이다. 전통시대에는 중화제국이 만만한 오랑캐들만을 상대하고 지냈기 때문에 제국의 틀이 지켜졌는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양상이 나타난 근대에 들어와서는 외부의 충격이 너무 커서 제국의 틀이 무너지기에 이른 것으로 보는 것이 역사학계 안팎의 통념이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보면 이 통념에 다시 생각할 점들이 있다. 3세기 초에 한(漢)제국이 무너지고 6세기 말 수(隋)나라의 통일까지 근 400년간 중화제국의 틀이 지켜진 것이 확실한가? 지금의 중국이 ‘제국’ 아닌 ‘인민공화국’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중화제국의 특성을 이어받은 측면도 있지 않나? 근대의 경험이 전통시대의 어떤 경험과도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근대 속에서 살아온 우리가 근대의 충격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문명의 연속성을 과소평가해온 것은 아닌지 되짚어보고 싶은 것이다.

이런 목적을 놓고 볼 때, 지금까지 필자가 많은 수수께끼를 품고 있던 몽골제국에서 큰 열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 이전의 제국은 각 문명권 내의 정치질서였다. 여러 문명권을 포괄하는 전 지구적 의미의 ‘세계제국’은 문명의 세계화가 이뤄진 근대세계의 특이한 현상이다. 그런데 몽골제국은 그런 세계제국에 접근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바로 그 특성이 중화제국의 틀로는 포착이 되지 않는 것이다. 몽골제국의 성립을 ‘문명의 세계화’ 과정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온 ‘근대’라는 시기의 역사적 의미에 접근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문명(civilization)’의 기본 의미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문화(culture)’도 비슷한 뜻을 품은 말이다. 두 말을 구분해서 쓰는 데는 사람마다 꽤 차이가 있는데, 필자는 역사의 흐름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경우에 ‘문명’이란 말을 쓰고자 한다.

역사의 흐름에서 큰 줄기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장의 메커니즘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인접한 두 사회에서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갖고 있을 때, 한쪽이 다른 쪽을 부러워해서 따라 할 수(동화, assimilation)도 있고, 더 큰 힘을 키운 쪽이 자기네 방식을 다른 쪽에게 강요할 수(정복, conquest)도 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 이후 몇 군데 지역에서 농업을 기반으로 한 문명권이 형성되었다. 초기 농업에 적합한 자연조건(기온·강우량·지형)을 가진 곳의 인구 증가에 따라 인접한 사회들 사이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동화와 정복 과정을 통해 하나의 문명권으로 합쳐지게 된 것이다.

각 문명권은 바다·산악·건조지대 등 농경이 불가능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상호 접촉이 극히 적은 반면, 농경지가 연결된 하나하나의 문명권이 그 안의 사람들에게 ‘세계(world)’로 인식되었다. 하나의 문명권이 하나의 ‘제국(empire)’으로 정치적 통합을 이룰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문명권으로서 정체성은 그와 관계없이 계속 유지되었다. (‘제국’이란 말에도 혼란이 있는데, 필자는 ‘하나의 문명권을 포괄하는 정치조직’이란 뜻으로 제한해서 쓰려고 한다.)

이슬람 혁명 500년 뒤 몽골, 문명권 지각변동

문명권의 위치와 규모는 일단 지리적 조건으로 결정된다. 그러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 발전으로 농경지가 확장되면서 문명권이 커지고, 인접한 문명권의 통합도 이뤄지게 된다.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유역은 별개의 문명으로 오랫동안 존재했지만 그 사이에 큰 지리적 장벽이 없기 때문에 접촉이 점차 늘어나다가 7~8세기 이슬람 혁명을 통해 하나의 문명권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 혁명 다음의 문명권 지각변동이 13세기의 몽골제국이었다. 그 사이 문명권의 분포를 개관한다면, 동아시아에 중국문명권이 있고 남아시아에 힌두 문명권이 있었으며, 이슬람 문명권이 서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유럽에 기독교 문명권이 있었다.

몽골제국이 여러 문명권의 상당 부분을 정복해서 이룩한 역사상 최초의 ‘다문명 제국’에서 문명권 통합의 추세를 읽을 수는 없을까? 김호동 교수는 문명권의 울타리를 넘어 전 세계를 시야에 담는 ‘세계사’의 탄생이 몽골제국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주목한다.

“필자는 세계사에서 ‘근대성’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었느냐에 대한 이처럼 다양한 논의들을 재론할 생각은 없다. 다만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논의들 가운데 아부 루고드의 제안을 제외한다면, 연구대상이 되는 시대는 대체로 ‘대항해의 시대’가 시작되는 15세기 후반 이후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 그러나 우리는 ‘대항해의 시대’가 어떻게 해서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던 13~14세기는 ‘대항해의 시대’와 그 이후에 나타난 세계사의 전개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근대세계의 출현을 논하는 대부분 학자는 몽골 시대가 남긴 영향에 대해서 그다지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실상 별다른 영향이나 유산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농경지대와 정주문화를 중시하고 유목의 세계를 소홀하게 여기는, 편견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과거의 전통적인 관점 때문일까?”([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199~200쪽)

20세기에 보편화된 근대적 학술은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것이라서 유럽중심주의의 편향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유럽 패권 이전’을 살피는 역사학에서도 그렇다. 모든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유럽 전통에서 찾으려는 심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객관적 시각을 지키려 애쓰는 학자들조차도 유럽사를 보는 틀에 모든 지역의 역사를 끼워 맞추려는 경향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대표적인 주제가 ‘근대성(modernity)’이다. ‘근대’라는 시대를 유럽의 발명품처럼 여기고 모든 인류가 이 새로운 시대의 혜택을 받기 위해 유럽의 특성들을 본받아야 한다는 ‘근대화’의 바람이 20세기를 휩쓸었다. 근대문명이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근래 늘어나면서 근대성의 의미에 대한 냉정한 검토가 확대-심화되고 있다.

중세로부터 근대로의 이행을 문명권 간의 장벽 제거, 즉 ‘세계화’라는 밑바닥 의미에서부터 검토하고자 한다. 오랜 기간 여러 단계를 거쳐 이뤄져온 과정이다. 7~8세기 이슬람 혁명도 ‘문명권 통합’이란 의미에서 이 과정의 한 단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13세기 몽골제국에서는 더 진전된 단계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학술계의 유럽(서양)중심주의를 반성하는 두 가지 중요한 담론이 1970년대에 나왔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학술계의 유럽(서양)중심주의를 반성하는 두 가지 중요한 담론이 1970년대에 나왔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The Modern World System 근대세계체제](4책, 1974~2011)와 에드워드 사이드의 [Orientalism](1978).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세계체제의 한계와 문제점을 살피는 길이 되었고, 사이드의 오리엔털리즘은 근대학술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이 어떤 굴레에 묶여있었는지 드러냄으로써 큰 파장을 일으켰다.

두 담론을 아울러 수용한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 두 가지가 1980년대에 나왔다. 키르티 차우두리의 [Trade and Civilisation in the Indian Ocean(인도양의 교역과 문명)](1985)과 재닛 아부-루고드의 [Before European Hegemony(유럽 패권 이전)](1989). 두 책 모두 근대 이전 인도양의 교역망을 중심 주제로 삼은 것이다.

차우두리는 서문에서 페르낭 브로델의 [La Méditerranéeet le Monde Méditerranéen à l’Epoque de Philippe II(펠리페 2세 시기 지중해와 지중해세계)](1949)를 모델로 삼았음을 밝혔다. 브로델은 새로운 연구방법을 추구하던 아날학파의 대표적 연구자로, 월러스틴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차우두리가 브로델의 방법론을 계승하되 그 적용 대상을 인도양으로 옮긴 데는 브로델조차 극복하지 못했던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뜻이 있었다.

유럽중심주의 벗어나려는 시도 잇따라


▎13세기에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세계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제국의 영토. / 사진:이정권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차우두리의 의지는 그가 인도 출신이라는 사실로 어느 정도 설명된다. 아부-루고드의 경우에도 개인적 이유로 비슷한 의지를 설명할 여지가 있다. 그 부군이 사이드와 함께 ‘팔레스타인 출신의 양대 지성’으로 꼽히는 이브라힘 아부-루고드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도 학술계에서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는 길이 이른바 ‘제3세계’와 특별한 연고를 갖지 않은 학자들에게는 몹시 어려웠던 사정을 돌아볼 수 있다. 차우두리는 초년의 탁월한 동인도회사 연구를 발판으로, 아부-루고드는 도시사회학자로서 카이로 등 이슬람권 여러 도시를 관찰하고 연구한 경험을 발판으로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었다.

아부-루고드는 차우두리와 달리 브로델에 대한 비판의식을 분명히 한다. 다음 인용 중 ‘세계-경제(world-economy)’는 브로델이 설정한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브로델처럼 지혜로운 사람도 무의식적인 유럽중심주의적 착오를 피할 수 없었다. ‘유럽에서 최초의 세계-경제는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사실, ‘여러 개 세계-경제가… 유럽이라는 지리적 영역 안에서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는 사실, 또는 ‘유럽의 세계-경제는 13세기 이후 몇 차례 모습을 바꿨다’는 사실을 모두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그는 내가 보기에 요점이라 할 내용을 놓쳤다. 12~13세기에 유럽이 지중해를 지나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거쳐 인도양, 말라카 해협과 중국에 이르는 장거리 교역체계에 끼어들어 세계-경제의 ‘하나’를 빚어내기 전에 다른 곳에는 여러 개의 세계-경제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 세계-경제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유럽이 차츰 손을 밖으로 뻗쳐 더듬어 보기 시작했을 때 재부(財富)가 아니라 허공만 움켜쥐었을 것이다.” ([유럽 패권 이전] 11~12쪽)

7~18세기의 1000여 년 기간을 다룬 차우두리의 책에 비해 13~14세기의 100년 기간을 다룬 아부-루고드의 책이 16세기 후반을 다룬 브로델의 책과 더 잘 비교된다. 그리고 몽골제국 성립 시점에 문명권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펼쳐지고 있었는지 살펴보려는 필자의 과제에도 적합한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이다. 13세기에 여러 문명권이 어울려 새로운 현상을 빚어내고 있던 두 개의 큰 마당 중 하나가 내부 유라시아의 초원지대였고, 또 하나가 인도양이었다. 바다 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아부-루고드의 안내를 따라가본다.

이집트·메소포타미아·페르시아·인도 등 인도양의 인접 지역에 여러 고대문명이 발달했기 때문에 인도양의 해상 교역은 일찍부터 자라나기 시작했다. 여러 문명 유적에서 종종 발굴되는 먼 지역의 물품으로 그 시기 교역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교역은 규모에 한계가 있었다. 자급자족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 다른 지역 물품에 대한 수요가 적었고, 선박과 항해술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단계에서 해상운송의 비용과 위험이 컸다. 그래서 장거리 교역의 대상 품목은 소량의 사치품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잉여생산율의 확대와 도시의 성장에 따라 식량, 직물 등 생필품까지 교역 대상이 되고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해상 교역이 꾸준히 늘어났다. 그러다가 인도양에 안정된 교역망이 자리 잡고 교역량이 대폭 늘어나기 시작하는 계기가 7~8세기의 이슬람 혁명으로 만들어졌다는 데 차우두리와 아부-루고드의 견해가 일치한다.

이슬람 문명, 인도양 바닷길 타고 확산


▎그라나다의 헤네랄리페 분수. 코르도바 모스크- 대성당에 이어 이 분수를 보면 이슬람 미술의 깊이를 실감할 수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사막에서 오아시스 도시가 교역의 거점으로 일어난 것처럼 큰 경제권을 배후지로 가졌거나 장거리 항로의 요충에 위치한 항구들이 교역의 거점으로 자라났다. 이 거점들이 모두 통일된 정치조직의 지배하에 있을 때는 운송비용이 줄어든다. 교역로의 유지 등 제국 차원의 비용만 징수하면서 지방 세력의 착취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같은 제국에 속하지 않더라도 같은 문명권에 속해서 ‘말이 통하는’ 관계라면 그에 버금가는 조건을 누릴 수 있다. 이슬람의 확산은 인도양 연안의 넓은 지역에 이런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아부-루고드는 인도양을 아라비아해(아프리카 동해안과 인도 서해안 사이), 벵골만(인도 동해안과 말레이반도-수마트라섬 사이), 남중국해(동남아시아와 중국 주변)의 세 개 해역으로 구분한다. 13~14세기에는 중국에서 아라비아 지역까지 세 개 해역을 관통하는 항로는 확립되지 않고, 각 해역의 분절점인 인도 동남-서남 해안 지역과 말라카 해협 일대에서 중계무역이 성행했다고 한다.

항로의 분절 현상이 계절풍 때문이라고 아부-루고드는 설명한다. 계절에 따라 항해가 가능한 방향이 정해지기 때문에 바람의 방향이 달라지는 이웃 해역으로 항해를 계속하려면 바람을 기다리기 위해 항구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너무 길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바람의 방향이 항해를 힘들고 더디게 만들 수는 있어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돛의 방향을 조정해서 역풍에 가까운 바람에서도 추진력을 얻는 기술은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그리고 항해의 수익성이 충분하다면 한 차례 항해에 몇 해씩 걸리는 항로도 성립된다는 사실을 16세기 이후 유럽인의 ‘대항해시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계절풍의 제약은 여러 정치-경제적 조건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부수적 조건으로 생각된다.

필립 커틴은 8~9세기에 중국에서 아라비아까지 인도양을 관통하는 항로가 활용되고 있었다는 견해를 보인다. 그 항로가 얼마나 많이 활용되었는지는 근거가 분명하지 않지만 계절풍에 대한 그의 고려는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의 교역자 집단이 700년경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이제 페르시아만의 상인들이 중국까지 관통하는 항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한쪽 끝에 당 제국이, 다른 쪽 끝에 아바스제국이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던 8~9세기에 이 항로는 널리 활용되었다. 계절풍 이용 방법을 약간 바꿈으로써 이런 항해가 가능해졌다. 페르시아나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배가 9월에 페르시아만을 내려가 이제 익숙해진 돛 방향의 조정 기술(quartering tack)을 써서 북동풍을 뚫고 인도 남부로 건너간다. 그 뒤에는 남서풍으로 바뀐 계절풍을 이용해서 12월경까지 벵골만을 가로질러 남중국해에 들어서면 남쪽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을 이용해서 4~5월 중에 광둥에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가을에 북풍을 받으며 회항에 나서면 인도양에 북동풍이 시작할 때 들어설 수 있고, 4~5월 중에 페르시아만에 도착하게 된다. 이 일정에 따르면 초여름의 험한 날씨를 피하면서 왕복 1년 반의 항해 기간에 몇 개 항구에서 교역 활동을 위한 시간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배의 수리 등을 위해 반년의 휴식을 갖더라도 배 한 척이 2년에 한 차례씩 왕복할 수 있는 항로다.” ([Cross-Cultural Trade in World History, 세계사 속의 문명 간 교역] 108쪽)

교역량 커지면서 문명권 경계 넘는 융화

아부-루고드가 말하는 세 개 해역은 13~14세기에 서로 다른 문명권에 속해 있었다. 서쪽의 아라비아해는 이슬람 문명, 중간의 벵골만은 힌두 문명, 그리고 동쪽의 남중국해는 불교 문명과 한자 문명이 어울려 있었다. 상인과 선원들의 활동은 각자의 문명권 안에서 편리하고 안전했다. 이방인의 세계로 항해를 계속해나가 큰 이득을 바라볼 수 있더라도, 이득보다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되면 해역의 분기점에 자리 잡은 (양쪽 문명권과 모두 소통할 수 있는) 중계업자들과 거래를 끝내고 돌아가는 편을 선택했을 것이다.

교역이 더욱 활발해지고 교역량이 커지면서 문명권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활동도 늘어나고 그 활동을 통해 문명 간 융화 현상도 일어났다. 남송(南宋)의 해운 담당 관리 조여괄(趙汝适)이 남긴 [제번지(諸蕃志)]에 서아시아와 동아프리카 지역의 사정과 물산이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인도양의 문명 간 접촉이 13세기 초까지 벌써 얼마나 긴밀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15세기 초 정화(鄭和) 함대의 활동도 이런 추세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13~14세기까지 인도양은 아직 하나의 바다가 아니었다. 그러나 세 개 해역 하나하나가 교역의 무대로서 지중해 못지 않은 역할을 이미 키워놓고 있었고, 하나의 더 큰 무대로 통합되는 길에 들어서 있었다. ‘유럽 패권’의 필연성을 부정하는 아부-루고드의 관점은 이 연구로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필자는 본다.

월러스틴은 세계체제를 중심부(core)-반주변부(semiperiphery)-주변부(periphery)의 3중 구조로 설명했다. 선진국-중진국-후진국의 통속적 관념을 넘어 그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밝힌 것이다. 세계체제론이 큰 각광을 받은 데는 경제개발정책에 대한 함의가 크다는 이유가 있다. 종래의 관념으로는 어느 나라든 좋은 (자본주의) 정책을 잘 수행하면 모두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세계체제론에서는 구조적 제약을 지적한 것이다. 이 점에서 1960년대에 유행한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차우두리와 아부-루고드가 월러스틴 담론의 뼈대를 수긍하면서도 넘어서야 할 한계로 지적한 것은 한마디로 유럽중심주의다. 16세기 이후 유럽인이 추동한 자본주의 세계체제만을 ‘진정한’ 세계체제로 보는 데 대한 불만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항해시대 이전 인도양의 교역망에서도 세계체제의 특성이 충분히 나타났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애쓴 것이다.

15세기 이전의 인도양 교역망이 치밀하게 발전해 있었고, 그 교역을 둘러싼 금융업 등 자본주의 제도들이 고도로 발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 연구에서 확인하면서 뒤따르는 의문이 있다. 인도양뿐이었을까? 두 사람 모두 인도양과 특별한 연분을 가진 연구자들이었기 때문에 인도양으로 눈길이 먼저 간 것은 아닐까?

세계체제론을 유럽중심주의의 굴레에서 풀어내는 데 참고가 될 사례는 13~14세기의 인도양 외에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제일 먼저 비슷한 시기의 내륙 아시아를 살펴보고 싶다. 인도양 못지않게 인적-물적-사상적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이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이 지역에 특별한 연분을 가진 사람 중에 차우두리나 아부-루고드만큼 학문적 ‘세계체제’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연구자가 없었다. 그래서 인도양이 먼저 ‘뜬’ 것은 아닐까? 1990년대 이후에는 내륙 아시아 지역에 관해서도 이 시각에서 참고할 만한 연구가 나오지 않았을까?

토머스 올슨의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2001) 서론의 한 대목을 읽으며 바다와 초원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생각해본다.

“유목민을 시야에 담을 때 상황의 전개에 대한 유목민의 역할은 통상 ‘소통’과 ‘파괴’라는 두 개의 상투적 표현으로 정리된다. 전자의 의미는 유목민이 원거리 교통과 통신을 보장하는 광역 평화체제(Pax)를 만들어 여러 정착문명의 대표자들이 (마르코 폴로처럼) 유라시아의 여러 문화권을 돌아다님으로써 전파의 촉매가 되도록 해주었다는 것이다. 후자의 의미는 반대로, 흉포한 군사력으로 접촉을 막고 문화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4~5쪽)

유목민, 문명 택배업자 이상 제3의 역할


▎1. 김호동 지음,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표지. / 2. 재닛 아부-루고드 지음, [Before European Hegemony, 유럽 패권 이전] 표지. / 3. 토머스 올슨 지음,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 표지.
바다에도 ‘소통’과 ‘파괴’의 양 측면이 있다. 항로가 열리기만 하면 멀리 떨어진 사회들 사이의 접촉을 쉽게 해주는 ‘소통’의 측면이 있는 반면, 상황에 따라 참혹한 재난을 가져오는 ‘파괴’의 측면이 있지 않은가. 여러 문명권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 그 사이의 공간이 바다와 초원이었다. 그 공간의 파괴력이 문명권들을 떼어놓고 있었지만 조건에 따라 소통의 경로가 되기도 했다.

초원은 바다와 달리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그래서 두 문명권 사이에 접촉이 일어날 때 유목민이 단순한 택배업자와 달리 제3의 역할을 맡는다는 점을 올슨은 강조한 것이다.

하나의 문명권 안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문명권을 ‘세계’로 인식했다. ‘천하’라 부르든 ‘움마(Ummah)’라 부르든 사람들이 세계로 인식하는 영역 내에서는 장기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종의 ‘세계체제’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하나하나의 체제마다 중심부와 반주변부와 주변부가 있었을 것이다.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라는 이름 자체가 ‘중심부중심주의’, 중심부가 역사 추동의 주체이며 주변부는 끌려 다니는 객체라는 선입관을 보여준다. 유목민의 역할을 생각하며 필자는 “중심부·외곽·배후지”로 바꿔서 부르고 싶다. 크리스천이 말하는 ‘내부 유라시아’의 ‘경계지역(borderlands)’을 각 문명권의 ‘외곽(periphery)’으로서 산업이 미개한 ‘배후지(hinterlands)’와 구분하는 것이다. 외곽의 유목민은 인접한 문명권에 어느 정도 소속되어 있지만 완전히 매인 것은 아니다. 위치와 상황에 따라 둘 이상의 문명권에 함께 속할 수도 있다. 문명과 접촉이 적은 배후지는 ‘미개발 자원’의 상태로 남아 있다.

토머스 쿤이 말하는 ‘정상상태(normal state)’와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의 순환이 문명의 역사에도 적용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문명의 정상상태에서는 중심부가 역사를 추동하고 외곽의 유목민은 종속적 위치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패러다임 전환 단계에 이르러 총체적 변화를 겪을 때는 유목민이 주도적 역할을 맡기 쉽다. 기존 문명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다른 문명을 받아들이기 쉽고, 배후지의 자원을 동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의 흥기는 그런 상황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지폐가 널리 쓰였는데 왜 유럽에서는 그러지 않았을까? 학생 시절 어쩌다 이 문제로 토론을 벌이던 끝에 한 친구가 확실한 답을 내놓았다. “거기는 종이가 없었잖아!”

12세기까지 지폐가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답이다. 그런데 그때까지 종이가 없었던 사실은 어떻게 설명하나?

제지술은 진입 문턱이 그리 높지 않은 기술이다. 종이가 없던 사회에서 종이를 구경하고 그 좋은 점을 알게 되면 모방하기가 어렵지 않다. 식물성 재료를 빻아 섬유질을 분해한 다음 물에 섞었다가 체로 걸러내 말리면 된다.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재료를 선택하고 공정을 설계하는 데 먼 길을 걸어야 하지만, 일단 종이 비슷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중국과 교류하는 사회에서는 종이를 구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부터 중국 왕조에서 내보내는 외교문서 대부분이 종이에 작성되었고, 황제의 하사품 중 중요한 품목 하나가 종이였다. 발레리 한센의 [실크로드, 문헌을 곁들인 새 역사]에 재활용지로 만든 수의(壽衣)가 연구 자료로 많이 활용된 데서도 종이 사용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유럽의 종이 활용, 중국보다 1000년 이상 뒤져


▎751년 이슬람 제국과 당나라 군대가 맞붙어 싸운 탈라스 평원. 탈라스 전투는 제지술이 이슬람을 거쳐 서양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사진:정철훈 작가
그런데 105년에 발명된 제지술이 751년 탈라스(怛羅斯, Talas) 전투를 계기로 이슬람 세계에 전파되고, 12세기 이후에야 유럽에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이처럼 유용하고 모방하기 쉬운 발명품이 이웃 문명권으로 전파되는 데 왜 수백 년씩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일단 이슬람권 전파를 보면, 6세기 반의 시차를 줄여 볼 여지가 있다. 2세기 초에 제지술이 발명되었지만 종이의 사용이 크게 확장된 것도, 황제의 하사품에 종이가 들어간 것도, 7세기 당나라 때의 일이다. 그리고 초기의 당나라가 상대한 것은 이슬람권이 아니라 유목민이었다. 유목민에게는 종이의 용도도 적고 식물성 재료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당나라에서 유입되는 종이를 사용했을 뿐, 제지술 자체를 도입하지는 않았다.

탈라스 전투는 새로 일어난 이슬람제국과 당 제국 사이 최초의 정면대결이었다. 아바스 제국은 당나라 황제에게 선물(하사품)로 받는 종이로 만족할 수 없는 큰 잠재적 수요를 갖고 있었고, 또한 독자적으로 제지술을 발전시킬 재료와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

이슬람권에서는 이슬람제국이 성립된 지 오래지 않은 시점에서 중국에서도 보편화된 지 오래지 않은 제지술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에 비해, 이슬람권에 서쪽으로 접한 유럽 기독교권에 제지술이 전파되는 데 장장 4세기의 세월이 걸린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종이의 재료도 흔한 유럽에 제지술이 늦게까지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종이의 수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종이는 다양한 용도를 가진 물품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용도는 기록이다. 돌·끈·천·점토판·파피루스·죽간·양피지 등 정보의 축적과 전달에 사용되었던 다른 어떤 재료도 따를 수 없는 정보 매체로서 큰 역할을 종이가 맡았다.

유럽 문명 ‘저급한 수준’ 확인한 코르도바 모스크-대성당

문명 발달 수준의 가장 중요한 지표가 정보처리 기술이다. 복잡한 내용의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언어가 문명 발생의 기반이었다. 정보를 보관하고 축적할 수 있는 문자의 발명이 다음 단계 문명의 발전을 뒷받침했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가 정보의 대량 전파를 가능케 한 인쇄술이었다. 중국에서는 비단에 목판으로 무늬를 찍은 220년경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종이에 찍은 목판 인쇄물은 7세기 중엽부터 나타난다. 이슬람권에서는 제지술 도입 후인 9~10세기 중에 인쇄술이 나타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필자가 16세기 이전 유럽 ‘문명’을 매우 저급한 수준으로 여기게 된 것은 1985년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방문했을 때부터다. (첫 서양 체류 때였다.) 코르도바는 8세기부터 이슬람제국 통치하에 있다가 13세기에 기독교 세계로 ‘수복(Reconquista)’된 곳이다. 8~9세기에 세워진 모스크 일각을 허물고 대성당을 지어서 ‘코르도바 모스크-대성당(Mezquita-Catedral de Córdoba)’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모스크 건축의 우아함에 대비되는 대성당 모습의 사나움에 충격을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빠져 지내던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유럽-서양을 흠모하던 마음이 뒤집히면서 반대쪽 극단으로 치우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운 마음도 있다. 그러나 8~12세기에 중국과 이슬람권이 제지술을 공유하고 인쇄술을 발전시키고 있는 동안 유럽은 어떤 상황에 있었을까, 훗날 유럽의 위세를 덮어놓고 새로운 눈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아직 제지술을 배우기 전의 유럽은 중국이나 이슬람권과 대등한 수준의 문명을 갖지 못하고 이슬람 문명의 외곽과 같은 위치에 머물러 있던 것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13세기 몽골인의 세계정복과 19세기 유럽인의 세계정복 사이에 통하는 점도 꽤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8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2009호 (202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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