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9)] 외국 귀빈 맞는 영빈관(迎賓館) 변천사(제1부 조선시대~대한제국) 

처칠 자고 간 손탁호텔, 망국의 회한 서려 

조선시대엔 모화관·태평관-중국, 동평관-일본, 북평관-여진 사신 접대
대한제국, 황실 영빈관 일제에 빼앗기고 독일 여성이 세운 호텔 활용


▎청와대 영빈관은 대규모 회의나 외국 국빈들이 방한했을 때 공식행사를 개최하는 건물이다.
1978년 건립된 청와대 영빈관은 대규모 회의나 외국 국빈들이 방한했을 때 공식행사를 개최하는 건물이다. 1층은 대접견실로 외국 국빈의 접견 행사를 치르는 곳이다. 만찬 행사 때는 이곳에서 음악과 무용 공연이 행해지기도 하며, 국빈 행사 외에 대규모 회의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2층은 대규모 오찬 및 만찬 행사를 하기 위한 장소로, 내부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와 월계수 등으로 장식돼 있다.

청와대 영빈관은 국빈이 유숙할 수 있는 숙박 시설을 갖추지 않고 있으나, 외국의 경우 자국 수도에 유숙이 가능한 영빈관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많다. 미국은 ‘블레어 하우스(Blair house)’, 중국은 ‘조어대(釣魚臺)’ 그리고 일본은 ‘영빈관 아카사카 이궁(迎賓館赤坂離宮)’이라는 숙식이 가능한 영빈관이 있다. 북한도 ‘백화원 초대소’라는 영빈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2019년 금수산 태양궁전 인근에 ‘금수산 영빈관’을 새로 지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첫 손님으로 맞이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바 있었다.

광화문 앞부터 서울역 앞까지 길이 2.2㎞, 폭 50~100m의 왕복 10차선 도로를 세종대로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도로 중 하나다. 이 세종대로는 종로구 구간인 광화문 앞에서 광화문네거리(세종로사거리)까지의 세종로, 중구 구간인 광화문네거리에서 숭례문(남대문)까지의 태평로, 남대문로의 일부인 숭례문(남대문)부터 서울역까지의 구간이 합쳐진 도로다.

대일 항쟁기 이 세 도로는 광화문통(光化門通)·태평통(太平通)·남대문통(南大門通)의 지번명(地番名)을 가지고 있었으나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지명을 우리 지명으로 바꿀 때 각각 세종로와 태평로, 그리고 남대문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조선시대에는 규모나 격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한양에 모화관(慕華館)·태평관(太平館)·남별궁(南別宮)·동평관(東平館)·북평관(北平館) 등 주변국의 외교사절이 방문했을 때 영접하거나 묵을 수 있는 영빈관이 여럿 있었다. 모화관은 중국의 사신을 주로 영접하던 곳으로 지금의 독립문사거리 근처에 있었으나 청일전쟁 이후 폐지되고 모화관의 흔적인 영은문(迎恩門)은 주춧돌만 남은 채 그 자리에 독립문이 세워져 있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외국 사신 숙소 운영


▎1910년쯤 대관정 전경[서울아카이브 번호 78655, 유물 번호 서3735, 시기 1910, 자료 출처 [韓國風俗風景寫眞帖](京城日韓書房)]. / 사진:이성우
태평관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태조 4(1395)년 윤9월 19일(양력 11월 2일) 여러 도의 인부 1000명을 징발해 지었다. 조선 초기에는 한성부 서부 황화방(皇華坊)에 속했으나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영조 이후 서부 양생방(養生坊) 소속으로 변경됐으며, 지금의 남대문 근처 신한은행 본점 뒤쪽에는 위치를 알려주는 표석이 남아 있다.

태평로라는 도로 명칭은 부근에 태평관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태평관은 임진왜란 기간 중 많이 파괴돼 임란 후 복구 논의가 있기는 했지만 국고 부족으로 수축하지 못하고 남아 있던 일부 전각들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중국 사신의 숙소로는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던 남별궁을 이용했다.

남별궁은 원래 태종이 둘째 딸인 경정공주의 남편 평양부원군조대림에게 이 땅을 주면서 소공주제(小公主第)·소공주택(小公主宅) 등으로 불렸으나 경정공주 사망 후 국가 소유가 됐다. 선조 16(1583)년 선조는 200여 칸의 별궁을 지어 셋째 아들인 의안군 이성에게 하사했으나, 그가 요절하면서 빈 집이 됐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남별궁 같은 큰 저택은 불에 타 모두 없어졌으나 이곳만은 임란의 화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선조수정실록] 25(1592)년 5월 1일 기록에 따르면 임란 초기 한양을 점령한 왜장 우키다 히다이에(平秀家)는 처음엔 종묘에 머물렀다. 그런데 밤중에 괴상한 일이 많이 생기고 갑자기 죽는 병사도 생기다 보니 조선 종묘의 신령을 두렵게 생각한 우키다가 종묘를 태워버리고 남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또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명장 이여송·양호 등의 숙소로 이용됐던 것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연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선조 임금이 남별궁과 가까운 ‘정릉동 행궁(지금의 덕수궁)’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조 역시 임란으로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대부분이 손실됐으므로 거처할 마땅한 궁궐이 없어 왕족의 집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온전히 남아 있었던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궁궐로 삼았으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임시 궁궐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들인 광해군도 정릉동 행궁에서 즉위식을 올렸으며 광해 3(1611)년 10월 4일에야 수축이 완료된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이어한 일주일 후인 10월 11일 선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를 부여했다. 남별궁은 임란 후에도 복구되지 않은 태평관을 대신해 중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곳으로 사용되다 보니 조선 후기까지도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동평관은 일본뿐 아니라 류큐(오키나와)·샴(태국)·자바(인도네시아) 등 남쪽 나라의 사신들을 접대하던 곳으로 한성부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뒀다. 일본 사신 방문 관련 동평관을 새로 짓는 것이 어떤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광해군일기] 2(1610)년 11월 18일 기록이나 ‘동평관의 옛터나 빈터에 거민들이 들어가 살도록 했다’는 [광해군일기] 9(1617)년 7월 15일 자 기록으로 봐 동평관은 광해군 이전에 이미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중구 인현어린이공원 안에 동평관이 있던 자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현재 이 지역은 공사 중인 관계로 표석 위치는 확인할 수 없다.

북평관은 여진의 사신들이 묵던 곳이므로 야인관(野人館)으로 불리다가 예조의 건의에 따라 세종 20(1438)년 2월 19일 북평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명종실록] 8(1553)년 이후의 기록은 실록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미뤄 명종 당시 또는 명종 이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성부 동부 흥성방(興盛坊), 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맞은편 쪽에 표석이 남아 있다. 이렇듯 조선은 한양으로 천도한 조선 초기부터 외국의 사신들이 묵을 수 있는 영빈관들을 운영해 왔으며, 남별궁의 경우 기능의 변화는 있었지만 1890년대 초까지도 유지되고 있었다.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을 단행했고, 1년 후인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서구와의 교류를 중시했던 고종이 경복궁 대신 경운궁을 선택해 환궁한 것은 미국·러시아 등 각국 공사관이 인접해 있던 정동의 지정학적 특성을 고려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1897년 10월 황제국으로서의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서구식 근대국가를 지향한 고종은 그 이듬해인 1898년 남별궁터에 황제국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인 환구단(圜丘壇)을 새롭게 세웠다. 그리고 그 건너편 쪽으로 대관정이라는 황실 전용 영빈관도 준비했다. 외국에서 국빈 방문이 잦을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그들을 위한 국빈용 숙소가 가까이에 있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대관정은 당시 국내에 드물었던 벽돌식 서양 건축물로 국빈들을 맞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원래 대한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지은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미국선교회가 유럽식 숙박 구조로 개조한 건물을 국빈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매입한 것이다.

대한제국 대관정, 첫 국빈은 독일 황제 친동생


▎태평관 터, 현재 신한은행 본점 뒤편이다. / 사진:이성우
대한제국 선포 이후 대관정을 사용한 최초의 국빈은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친동생인 하인리히 친왕이었다. 1899년 6월 8일부터 19일까지 일정으로 방문했던 그는 독일 황제의 친동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함대의 사령관이기도 했던 매우 중요한 군사지도자였다. 고종은 대훈위(大勳位)에 서훈하고 대한제국의 최고 등급 훈장인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특별히 수여하는 등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독일과의 밀접한 교류를 통해 외교적 입지를 다지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황성신문(皇城新聞)] 1899년 6월 10일 자 ‘친왕입성(親王入城)’ 제하의 기사에는 ‘6월 9일 오후 6시 덕국친왕(德國親王)이 경운궁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했다’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으며, 고종 황제 또한 답례로 6월 10일 오전 11시30분 황태자를 대동하고 대관정을 방문했다는 기록 역시 찾아볼 수 있어 독일과의 관계를 중시하고자 했던 고종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대한제국에서 운영했던 대관정에 대한 기록은 ‘그저께 밤 각 공사 및 영사와 신사(紳士)를 초청해 대관정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황성신문] 1902년 6월 21일 자 ‘삼차회연(三次會宴)’ 제하의 기사까지 확인된다. 그러나 [황성신문] 1904년 5월 4일 자 기사를 보면 탁지부에서 대관정 수리와 건물비로 1만3500원(元)을 요청하고 고종이 재가하는 것으로 봐 최소한 1904년까지도 대한제국에서 관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평관 터, 동대문역사공원 맞은편 도로에 있다. / 사진:이성우
하지만 이 대관정은 이미 1904년 4월 일본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 한반도 주둔 일본군사령부)로 용도 변환됐으며 주차군사령관의 관저로도 사용됐다. 대일 항쟁기 이 지역은 2대 주차군사령관이자 2대 조선총독을 역임한 육군 대장 출신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이름을 따서 하세가와초(長谷川町)라고 불렸다.

그렇지만 이 대관정 터에는 보다 유서 깊은 내력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4월 6일 자 서울 고금종담(古今縱談)(6) ‘대관정의 현초목(懸軺木)’ 제하의 기사에는 ‘소공동에 아망위(惡亡尉) 조대림이 살아서 유명하고 대관정에는 현초목이 있어서 유명했다며 대관정 옛터는 조선 초 청성백심덕부(1328~1401)의 사제(賜第: 임금의 특명으로 집을 내려 주던 일)로서 그 부근의 일류 저택은 모두 그의 자손들이 살아 왔으므로 심동(沈洞)이라 하는 것이 장곡천정(長谷川町)보다 연고가 깊을 것’이라고 하면서 대관정 터의 내력을 밝히고 있다.

1904년 2월 10일 일본의 대러시아 공식 선전포고로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은 그보다 10년 전인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어렵게 확보한 대륙 진출의 교두보인 요동반도를 러시아가 주도하고 독일과 프랑스가 지원했던 삼국간섭으로 다시 중국에 내주게 됐다. 동북아 패권을 두고 러시아에 일격을 당한 일본은 러시아를 적국으로 삼고 절치부심 10년을 준비해 러시아에 복수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러일전쟁이었다.

전쟁 분위기를 감지한 고종은 1904년 1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평화가 결렬될 경우 대한제국은 엄정중립을 지키고자 한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파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침은 러일전쟁을 시작한 일본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은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시킨데 이어 3월 봉천 전투까지 승리로 이끌어 육상전을 사실상 마무리 지었다. 또 5월 27일과 28일 사이 도고 제독이 이끄는 일본의 연합함대는 무려 3만7000㎞의 긴 거리를 9개월간 항해해 일본 근해까지 온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맞이해 총 38척 중 단 2척만 남기고 궤멸시키는 등 해상전투마저 승리하면서 러일전쟁의 승자가 됐다.

일제, 황실 영빈관에 주둔군사령부 차려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독립문 앞 모화관 영은문의 주초. / 사진:이성우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는 일본이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남만주에서 배타적인 지배권을 확립하면서 일본을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게 했다는 사실이다. 반면 대한제국은 일제 치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됐다.

고종 41(1904)년 2월 23일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강압에 의해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됐다. 한일의정서 6개 조항 중 제4조에는 ‘일본이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해 이용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따라서 대한제국으로서는 일본이 요구하는 곳은 어쩔 수 없이 내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관정도 마찬가지였다.

1904년 3월 18일 자 [황성신문]의 ‘대관청차(大觀請借)’ 제하의 기사에는 당시 일본 공사였던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고종 알현시 대관정을 주차군사령부로 빌려 달라고 요청해 고종이 허락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 같은 1904년 4월 7일 자 [황성신문]의 ‘폐부설군(廢部設軍)’ 제하의 기사에는 ‘경성에 있던 일본주차대사령부를 폐하고 주차군사령부를 4월 3일부터 대관정에 설치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대관정은 더는 대한제국 황실 영빈관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됐다. 대관정은 주차군사령부와 사령관의 관저로 사용되다가 1904년 8월 주차군사령부는 필동으로 주둔지를 이전하고 관저만 남았다가 용산에 대규모 주둔지를 건설하면서 1911년 12월 20일 관저 역시 용산의 신관저로 이전했다.

이후 대관정은 1914년 시종무관(侍從武官) 등 총독부 관계인의 숙박이나 1916년 조선신문사 낙성연(落成宴), 1922년 4월 9일 곡물공진회 개최 등 여러 장소로 쓰이다가 1923년 일본 재벌인 미쓰이(三井) 합명회사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대관정 부지는 미쓰이가 경성부의 요청에 따라 1926년 2월 20일 원가에 매도한 후 1927년 5월 24일부터 일제의 경성부립 도서관으로 사용됐다.

러시아 공사 따라온 손탁, 정동에 호텔 운영


▎1903년 손탁호텔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전경.
1948년 8월 15일 서울시의 특별시 승격으로 도서관의 명칭도 정식으로 서울특별시립남대문도서관이라 개칭하게 됐으며, 1965년 1월 남산에 신축 건물을 지어 도서관을 이전한 후에는 민주공화당에서 당사로 사용했다. 1972년 9월 민주공화당이 남산 기슭 후암동으로 이전한 뒤에는 민간에 매각됐으며, 이후 건물은 철거되고 터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백화점 주차장으로 사용되다가 2020년 현재는 부영호텔 신축공사가 진행 중이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904년 황실의 영빈관인 대관정을 일제에 억지로 넘겨주다 보니 다시 다른 영빈관이 필요했다. 1905년 4월 일본의 특파대사(特派大使)로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伏見宮 貞愛 親王)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숙소를 정하기 위해 동궐(창덕궁)과 지금의 사간동 지역에 있었던 종정부 인수당(宗正府 仁修堂)을 수리, 임시 숙소로 활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사다나루 친왕 대신 후시미노미야 히즈야스 친왕(伏見宮 博恭 親王)이 오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히즈야스 친왕의 숙소 역시 준비하고 있던 종정부 인수당이 아니라 경운궁 돈덕전(慶運宮 敦德殿)으로 변경됐으며, 인수당은 연회장으로만 사용돼 실제 유숙이 가능한 숙소의 기능은 하지 못했다.

1905년 5월 8일 자 [황성신문]의 ‘친왕내한(親王來韓)’ 제하의 기사에는 특파대사로 히즈야스 친왕이 오게 됐다는 내용이 등장하며, 5월 15일 자 [황성신문]의 ‘친왕여관(親王旅舘)’ 제하의 기사에는 친왕의 숙소가 돈덕전으로 정해져서 인수당 수리를 정지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일본 측에서 검토 결과 한옥 건물이었던 종정부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숙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에서 또 다른 영빈관 개념으로 이용했던 곳은 당시 정동에 있었던 손탁호텔을 들 수 있다. 물론 손탁호텔이 대한제국의 공식적인 영빈관은 아니라고 보지만 당시의 팔레호텔(Hotel du Palais)이나 스테이션호텔(Station Hotel) 등 서울의 다른 호텔과는 다르게 궁내부의 프라이빗 호텔(예약된 손님만 투숙하는 특정 호텔)의 형태로 운영됐으며, 영빈관의 성격을 띠게 된 것에 대해서는 손탁과 황실과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손탁호텔은 손탁(孫澤)이라는 사람이 운영했던 호텔로서 현재의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 있던 호텔이다. 손탁은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1838~1922)이라는 독일 국적의 여성이지만 프랑스의 알자스-로렌에서 태어났다. 알자스-로렌지방은 10세기 이후 신성로마제국령에서 17세기 중반 프랑스령, 1871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프로이센(독일)령,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령, 1940년대 나치 독일령,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프랑스령으로 독일과 프랑스 사이를 왕복해야 했던 복잡한 지역이다.

따라서 손탁은 프랑스 태생이었으나 그녀가 초대 주한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1841~1910)를 따라 러시아 공사관 소속으로 조선에 첫발을 디뎠던 1885년 당시에는 독일 국적의 소유자였던 셈이다. 손탁에게 베베르는 제부의 처남으로 먼 인척이었다.

손탁은 베베르의 추천으로 궁내부 외빈 담당 촉탁직으로 일하게 된다. 조선은 고종 13(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에 따라 개항을 하게 되면서 외교업무에 필요한 전문가나 외국어에 능통한 인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손탁의 경우 불어·독어·영어·러시아어·한국어를 습득해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기에 외빈 담당으로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처칠, 특파원으로 러일전쟁 취재차 서울 경유


▎한국주차군사령부가 주둔한 대관정의 정문 앞에서 일본군 병사 2명이 경비를 서고 있다.
손탁은 외빈 담당 겸 통역관으로 자연스럽게 궁궐을 출입하게 됐으며 용모가 바르고 성품이 밝아 곧 고종이나 명성황후와도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게 됐다. 고종에게는 커피 맛을 알려줬고 명성황후에게는 베베르 공사 부인과 함께 궁궐을 출입하면서 서양의 화장술을 알려주기도 했으며, 국제정세를 설명해 주면서 조선의 외교나 국제 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중국이나 일본 공사의 태도에 비해 예절 바른 베베르 공사의 태도 역시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좋은 인상을 줬고, 이는 을미왜변 이후 단행된 아관파천과 친러 정권 수립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손탁은 을미왜변과 아관파천 시기에 고종 곁에 있던 사람 중 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생활 1년간 직접 음식을 만드는 등 고종을 정성껏 모셨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고종은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으로 손탁에게 1898년 3월 16일 황실 소유 정동 16번지 418평 부지에 방 5개가 딸린 양관을 하사했으며, 손탁은 이곳을 서양식 인테리어의 숙박시설로 개조해 약 4년간 운영하다 1902년 10월 정동 29번지 1184평의 부지에 객실 25개 짜리 2층 건물의 손탁호텔을 새롭게 개관했다.

손탁호텔은 손탁의 이력과 외국 공사관들이 있던 정동이라는 입지 덕분에 당시 가장 유명하고도 주목받는 서양식 호텔이자 대표적인 사교 공간이 됐다. 1965년 1월 19일 자 [경향신문]의 ‘내가 만난 처칠’ 제하의 장택상 전 국무총리 회고 기사에 의하면 처칠 수상이 1904년 당시 [런던 데일리 텔레그라프지]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 취재차 만주로 가는 길에 손탁호텔에서 묵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며, [대한매일신보] 1905년 9월 21 일자 ‘귀양입성휘보(貴孃入城彙報)’ 제하의 기사에는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딸인 앨리스와 수행원이 방문했는데 앨리스는 미 공관에 묵고 수행원은 손탁호텔에 묵는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11일 자 ‘대사입성(大使入城)’ 제하의 기사, 11월 22일 자 ‘신조약청제(新條約請締)’ 제하의 기사 등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대사가 11월 10일부터 손탁호텔에 묵으며 외교권 박탈과 관련한 일본 메이지 천황의 친서를 전달하는 등 을사늑약을 직접 지휘하고 있는 가슴 아픈 내용도 등장한다.

이렇듯 손탁호텔은 각국의 외교사절이나 주요 귀빈이 머무는 정부의 ‘영빈관’ 격 호텔의 기능을 했으며 정부 주관의 각종 리셉션이나 연회도 주로 손탁호텔에서 개최됐다. 그러나 손탁호텔은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이후 서서히 기울어 가다 1909년 8월 3일 팔레호텔의 소유주인 보에르(Boher)에게 팔렸으며 통상적인 형태의 일반 호텔로 변모했다.

손탁은 1909년 7월 16일 자로 궁내부를 사퇴했다. 손탁은 사퇴하면서 궁내부로부터 3년치의 급료 3만환을 받았으며, [대한매일신보] 1909년 8월 31일 자 ‘손택폐견(孫澤陛見)’ 기사와 같은 날 [황성신문]의 ‘하사은배(下賜銀杯)’ 제하의 기사 내용을 보면 손택양이 귀국 인사차 고종황제를 알현하며 은배 1조(銀杯 一組)를 하사받았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궁중의 연회와 의전을 담당했던 그 이상이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손탁은 1909년 9월 20일 한국을 떠나 프랑스 칸으로 돌아간 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09호 (2020.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