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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19)] 프로야구 원년 24승 ‘불사조’ 박철순 

“맞아도 직구 인생도 야구도 정면승부” 

현역 시절엔 치명적 부상·사고 이겨내고 재기, 은퇴 뒤엔 대장암 극복
선발투수는 150개 완투 능력 갖춰야… 기본 지키고 강한 훈련만이 살길


▎‘불사조’ 박철순이 시선을 던지는 먼 곳은 어디일까. 월간중앙과의 인터뷰를 끝낸 뒤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의 한 커피숍 앞에서 멋진 포즈를 잡았다.
박철순(66)의 별명은 ‘불사조’다.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를 빛낸 강속구 투수이자, 상상 못 할 고통과 불운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표상이기도 하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뛰던 박철순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에서 24승을 올리며 OB의 우승을 이끌었다. 시즌 중 기록한 22연승은 아직도 깨지지 않은 KBO리그 불멸의 기록이기도 하다. 다이내믹한 투구 폼으로 불같은 강속구를 뿌렸고, 미국에서 배운 무회전볼(팜볼·너클볼)을 구사해 “마구를 던진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몸에 무리가 가는 투구 폼으로 인해 늘 허리 부상을 안고 살았다. 타구에 맞아 앰뷸런스에 실려 가기도 했고, CF를 찍다 발목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철순은 ‘이젠 끝났다’는 세간의 전망을 비웃듯 늘 제자리로 돌아왔고 에이스의 품격을 잃지 않았다. 1995년 OB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결정되자 OB 선수들은 박철순을 목말 태웠다.

불사조답게 박철순은 2007년 발병한 대장암을 거뜬히 이겨냈다. 그러나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며 일으켜세웠던 부인 채수정씨는 수년 전 발생한 대장암이 여러 곳으로 퍼져 힘든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박철순 감독(그는 이 호칭을 가장 좋아했다)과의 인터뷰는 몇 차례 연기된 끝에 힘들게 성사됐다. 부인의 항암 치료 일정 때문이었다. 긴 장마가 이어지던 날, 서울 장안동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요즘 일과는 어떤가요?

“거의 24시간 아내 곁을 지키고 있지요. 선배들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할 때마다 이해를 못 했는데 겪어보니 그렇겠구나 싶네요. 아내가 다음 주 항암(치료) 들어가면 벌써 23번째인데 이제 좀 지치네요. 그래도 5년 전 암세포가 머리로 들어와 대수술을 한 뒤 남은 기간을 1년 정도로 봤는데 지금까지 살아 있어주니 너무 감사하죠.”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요즘은 야구 볼 시간도 없고, 어쩌다 병원에서 사람들이 TV로 야구 중계를 보고 있으면 피하게 돼요. 가끔 두산 경기는 보는데 김태형 감독 말고는 아는 얼굴이 거의 없죠. 그래도 ‘야구 기술이 엄청나게 좋아졌구나. 야, 이런 건 메이저리그 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특히 수비가 정말 많이 발전했다고 봅니다. 다이빙 캐치 같은 허슬 플레이나 어려운 타구를 처리하는 것보다는 평범한 걸 안정되게 처리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만큼 연습을 많이 하고 기본기가 탄탄해졌다는 거죠. 프로라는 건 아마추어보다 연습을 몇 배로 강하게 해서 기본에 충실한 겁니다. 홈런 치고 화려한 팬 서비스 하는 것 이상으로 실수를 줄이고 관중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플레이를 하는 게 중요합니다.”

타격·수비 기술 크게 향상, 도망가는 피칭엔 실망


▎박철순 선수가 OB 베어스 시절 역투하던 모습. 그는 “교과서에 없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만든 피칭 폼”이라고 말했다.
요즘 후배 선수들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타자들의 타격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어요. 일본 프로 선수 못지않아요. 우리 땐 인코스로 볼이 와도 팔을 쭉 뻗어서 치라고 했거든요. 요즘은 팔꿈치나 손목을 꺾어서 안타나 홈런을 만들어냅니다. 박병호 같은 선수가 대표적이죠. 제가 24승을 한 1982년 그 수준에서 지금 던지면 10승도 어림없어요. 겸손 떠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투수들을 보면 좀 안타까워요. 원스리(스리볼 원스트라이크)나 투스리(스리볼 투스트라이크)에서 안타를 맞거나 볼넷을 내줘요. 그럴 거면 초구부터 정면승부 하는 게 낫죠. 요즘은 손가락 장난이 많아요. (볼 속도에 변화를 주는) 체인지업도 필요하지만 직구가 시속 145km는 돼야 체인지업이 통하는 겁니다. 투구수 10개 중에 5개는 포수 정면으로 집어 던질 수 있어야 선발투숫감이지요.”

현역 때 제일 까다로운 타자는 누구였나요?

“자주 받는 질문인데, 답은 ‘다 까다로웠다’입니다. 특별히 얕보는 타자도, 겁먹는 타자도 없었죠. 나한테 20타석 연속 삼진을 먹은 타자가 타석에 들어와도 두려워요. 반대로 나한테 안타 많이 치고 홈런 친 타자가 들어와도 두렵지 않았어요. ‘맞으면 되지 뭐’ 이런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1번 타자든 9번이든 똑같이 던졌어요. 물론 위기에서는 아주 조심했지만.”

박철순은 부산 용두산공원 밑에 있는 동광국민학교(현 광일초등학교) 6학년 때 야구부 모집 공고를 보고 야구부에 지원했다. 롯데 자이언츠 초창기 3-4번을 치며 ‘Y-Y 타선’으로 인기를 모았던 김용희(전 삼성 감독)와 김용철(전 경찰청 감독)이 그의 동문이다. 박 감독은 “공부에 흥미도 없고 해서 별생각 없이 야구부에 지원했는데 그때는 키도 작고 바싹 말랐어요. 볼 캐치도 제대로 못하는 수준이었는데 동기인 (김)용희는 키도 크고 운동도 잘했어요”라고 회상했다. 연세대에 진학해서도 투수로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오히려 후배 최동원에게 체벌을 한 사실이 알려져 한동안 욕을 많이 먹기도 했다.

연세대에는 투수가 아니라 타자로 스카우트됐다면서요?

“맞습니다. 우리 땐 투수가 거의 4번타자를 했잖아요. 난 투수로선 볼만 빠른 선수였지만 타자로서는 3~4할을 쳤어요. 청룡기 고교야구 서울시 예선에서 내가 홈런 두 개를 쳤고 배명고가 우승했어요. 그때 연세대에서 눈여겨봤나 봐요. 당시에 프로가 있었다면 나를 투수로 스카우트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내가 연세대 법학과로 입학했는데 깐깐한 법대 노 교수님들이 ‘외국에선 체육 특기생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데 왜 그렇게 못하냐. 공부하려면 공부를 하고, 야구하려면 체육교육과로 전과해서 야구만 하라’고 하셨어요.”

박철순에게 최동원은 어떤 존재였나요?

“그 얘기 왜 안 나오나 했네(웃음). 지금도 생각하면 안쓰럽죠. 지금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지만 당시 운동 세계에선 ‘빠따’라는 게 엄연히 존재했어요. 그건 동원이와의 사건이 아니고, 동원이 아버지와의 사건이었죠. 동원이랑은 동향으로서 정말 친했고, 동원이가 날 잘 따랐어요. 근데 동원이 아버지가 무슨 일 때문인지 ‘빠따 사건’을 언론을 통해 이슈화시킨 거죠. 나는 법대에서 강의 듣다가 들이닥친 경찰한테 끌려갔어요. 동원이랑은 아무 감정이 없지만 아버님과는 앙금이 안 풀리더라고요.”

최동원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오래전 인터뷰에서 내가 ‘한국 야구 역사에서 그런 투수는 다시는 나오지 않을 거다’고 했어요. 요즘 ‘대투수’라는 말을 듣는 선수가 있다지만 최동원 정도 돼야 대투수 소리를 들을 수 있죠. 나보다 먼저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었고 일본에 갔어도 에이스로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지만 당시 정권에서 놔주질 않았어요. 나하고 동원이를 ‘전설’이라고 동급에 놓는 분들이 계신데 그건 아닙니다. 나는 한 시즌 반짝했고, 그 후 부상 딛고 재기했다며 ‘불사조’ 별명이 붙었는데, 이 친구는 차원이 다른 선수예요.”

최동원은 차원이 다른 역대 최고 대투수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 뒤 OB 베어스 선수들이 박철순을 목말 태우고 있다.
연세대 1년을 마치고 공군에 입대했는데요.

“내가 군대 가서 사람이 됐어요. 체계 없이 멋대로 살다가 단체생활도 알게 되고 연습하는 맛을 알았죠. ‘요렇게 하니까 되는구나’ 하는 참에 고참 이종도를 만납니다. 저와 배터리(투수-포수)도 했죠. 당시 대스타인 그 선배가 왜 날 찍었는지 모르겠어요. 괴롭힌다는 게 아니라 ‘이 XX야. 넌 열심히 하면 되는데 왜 안 해. 안 하려면 나가 죽어’ 이러면서 날 몰아붙였어요. 그걸 나쁘게 받아들였다면 무슨 사고가 났겠죠. 그런데 ‘대선수인 이 양반 눈에도 내가 조금만 열심히 하면 잘하게 보였나?’ 하는 생각에 동기부여가 된 거죠. 나도 기량이 늘었고 당시 성무(공군 야구팀)도 전성기를 누렸어요.”

1980년 메이저리그 밀워키에 입단했는데 겪어보니 어땠나요?

“허허허허. 당시 저희 집이 미국에 있어서 메이저리그 경기 비디오를 보내줘서 보긴 했지만 직접 보니 상상을 초월해요. 체격이나 힘의 차이는 예상했던 거고, 내가 시속 150km를 찍어 아시아에선 엄청 빠르다고 했는데 거기선 중간 정도였어요. 마이너리그 캠프 하는데 1000여 명이 한 호텔에 다 모입니다. 10일이 지날 때마다 몇백 명, 몇십 명씩 내보내고, 50명으로 압축해 트리플A, 더블A, 싱글A로 보내는 겁니다. 안 쫓겨나고 버텨야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얘들한테 이길 수 있는 건 뭘까 생각해보니 달리기밖에 없는 겁니다. 뜀뛰기는 게거품을 물고서 무조건 일등을 했지요.”

미국에서 배우고 깨달은 건 뭡니까?

“우리 야구 할 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너는 정신력이 없어’ ‘정신력이 떨어져’ 소리를 들으며 많이 맞았어요. 우리 선배들이 일본에서 배워 와서 강조한 정신력이란 게 거기서 말하는 ‘집중력’이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산만한 걸 제일 싫어해요. 예전 메이저리그 경기나 영상을 보면 더그아웃에서 씹는 담배 피우고 시시덕거리는 게 보이죠? 실제로는 진짜 살벌합니다. 눈에 안 보이는 생존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몰라요. 거기다 흑백 차별이 있는데 동양인이 끼니까 더 꼴불견이었겠죠. 아이고 참, 수모란 수모는 다 당하면서도 ‘생큐’하고 웃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때 뇌리에 깊이 박힌 ‘인내’가 국내 복귀 후 22연승과 절망적인 부상을 이겨낸 힘이 된 거죠.”

투구 동작이 독특하고 다이내믹했는데요.

“와인드업 동작에서 허리를 크게 젖히고 다리를 높이 올리는 피칭 폼은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에요. 당시엔 일본 잡지에 나온 것 따라 하는 정도였지 제대로 된 이론을 갖고 가르쳐줄 분이 없었어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나간 거죠. 내 폼이 우완 정통파와는 정반대예요. 해서는 안 되는 폼이고, 엄청난 연습량과 러닝, 웨이트 트레이닝이 뒷받침돼야 하는 폼입니다. 미국 가서 제대로 교정을 한 겁니다.”

국내에서 무회전공을 최초로 던지지 않았나요?

“팜볼과 너클볼을 미국서 배웠죠. 그렇지만 난 그냥 꽂는 스타일이라 그런 공을 많이 던지지는 않았어요. 교묘한 변화구에 타자들이 헛스윙하는 게 별로 좋지는 않았어요. 몸 쪽 공 많이 던졌고 맞기도 많이 맞았는데 투수는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투수 뒤에 야수 일곱 명이 뭐 하러 있습니까. 스트라이크 존에 던져서 타자가 공을 치도록 해야지. 타자 앞에서 뚝 떨어져 원 바운드 되면서 헛스윙 유도하는 것도 좋지만 자꾸 그러면 블로킹하느라 포수 무릎 다 나가요. 난 완투하면서 원 바운드 공을 많아야 3개 정도밖에 안 던졌어요.”

무회전공 익혔지만 타자 현혹하는 변화구 잘 안 써


▎박철순 선수가 은퇴식 때 마운드에 입을 맞추고 있다.
82년 후반기에 허리 부상이 왔고 그 바람에 한국시리즈 1,2차전도 못 던졌는데요.

“허리 부상이 온 건 혹사를 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해 전반기에 너무 잘나가다 보니까 여름에 운동을 조금 등한시한 것 같아요. 나는 안 그랬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깝죽댄 거 같습니다. 방송 출연 안 해, 연예인들 안 만나, 여자 조심해야지, 술도 조용히 혼자 마셔야지 하면서 엄청나게 조심했는데도 좀 자만하지 않았나 싶어요.”

부상을 무릅쓰고 한국시리즈 3차전에 등판했죠.


▎2011년 두산- LG 경기에서 박철순(가운데)이 시구 후 원년 주장 김우열(왼쪽), 김경문 감독과 포옹하고 있다.
“내가 우겨서 등판했어요. 당시 김영덕 감독님, 김성근·이광환 코치님 모두 어떡하든지 내 연승 기록을 이어주려고 하셨고, 팀 승리를 위해 무리하지 않았어요. 한국시리즈 때도 ‘우승 못 해도 좋다. 내년이 있으니까’라고 하셨는데 진심이었어요. 그렇지만 내가 그 꼴을 어떻게 봅니까. 아픈 건 약 먹고 뛰면 되는데 구속이 안 나오는 건 미치겠더라고요. 한국시리즈 때 몇 개 더 던진 것 때문에 허리가 급격히 나빠진 건 아니고 축적된 피로 때문인 거죠. 그리고 그해 스프링 캠프에 안 따라갔어야 했는데, 거기서 한국식으로 무리를 하는 바람에 부상이 악화한 겁니다.”

1982년 22연승이 초등학교 후배 김용철에 의해 깨졌는데요.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롯데와 더블헤더를 했어요. 2차전 선발이라 구단 버스에 있는데 급히 날 찾아요. 1차전 9회 말 투아웃에 주자 2루가 되니까 날 올린 거죠. 한 타자만 막으면 무승부가 되니까요. 몸도 제대로 못 풀고 올라가자마자 김용철한테 안타를 맞았죠. 인코스 직구를 던졌는데 타구가 굴러서 내야를 통과했어요. 그 뒤에 용철이를 만났는데 날 피해서 도망가기에 ‘야, 이리 와. 이리 와’ 하면서 쫓아갔죠. 하하. 큰 기록이 깨지면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을 하는데 난 시원한 건 하나도 없고 섭섭하기만 하더라고요. 그동안 쌓아올린 뭔가가 우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죠.”

1983년은 허리 치료에 전념하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 등판했고, 거기서 또 다쳤죠?

“송영운 타구에 골반 쪽을 맞은 건 괜찮았어요. 워낙 그런 일이 많으니까. 그런데 총알 같은 타구를 맞고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허리 수술한 부위가 틀어져버린 거죠. 아마 마운드에 앰뷸런스가 올라온 건 그때가 처음이지 싶어요. 자, 이제 아킬레스건 얘기 해야죠?(웃음).”

패션 내의 광고 찍다 아킬레스건 파열


▎박철순이 서울대 야구부 선수들에게 직접 피칭 폼을 시연해주며 지도하고 있다.
안 그래도 패션 내의 광고 찍다가 다친 얘기 물어보려던 참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흐, 말도 마세요. 지금도 그 생각하면 미칠 것 같다니까요. 제주도에서 동계훈련 중에 CF 제안이 왔어요. 그런 거 싫어하는 김성근 감독님이 웬일인지 ‘철순아 잘됐다. 찍어라’고 흔쾌히 허락하셨어요. 새벽에 한강 둔치에서 촬영을 했는데 개를 데리고 조깅을 하다가 나 혼자 펄쩍 점프하는 장면이었어요. 그놈의 도베르만이 얼마나 사납든지 촬영이 자꾸 끊기고 어수선했지요. 결국 점프하고 내려오는데 ‘뚝’ 소리가 나면서 왼쪽 발목 아킬레스건이 끊어져버린 겁니다. 허리 부상 때문에 몸이 전반적으로 약해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운동하다 다친 것도 아니고 창피하고 죄스러워서 감독님께 전화도 못 했죠. 그땐 사실상 포기를 했고, 방황을 좀 했어요. 며칠 뒤 감독님이 날 부르시더니 ‘너 심정은 이해하는데 다리 절룩거리는 장애인은 코치로 못 받는다. 그러니 알아서 해라. 나가!’ 이러시는 겁니다. 얼마나 섭섭하던지 욕이 절로 나왔어요. 나를 자극해서 재기시키려는 감독님 뜻이었을 거고, 나도 독을 품었죠. ‘그래 알았어. 똑바로 걸어서 나타날게. X팔’ 하면서 지옥 같은 재활을 견딘 겁니다.”

그 모든 시련들을 이겨내고 ‘불사조’가 된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는 “내 노력은 차치하고, 제일 큰 게 가족이죠. 구단과 팬들 힘도 컸고, 낯뜨겁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언론이 날 이끌어줬어요”라고 말했다. “기사화 많이 해주고 용기도 북돋워주고…. ‘불사조’라는 별명도 기자님들이 지어준 거잖아요. 항상 고맙게 생각했죠”라고 미디어에 감사를 표하던 박 감독은 “물론 말도 안 되게 씹힌 적도 많지만…”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풍운의 세월을 살았고 매스컴의 표적이 되다 보니 억울하게 느껴지는 보도도 많았던 것 같다.

특히 1994년 OB 윤동균 감독 사퇴를 불러온 ‘선수단 항명 사건’에서 박철순은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시즌 말 쌍방울과의 군산 원정경기가 끝난 뒤 윤 감독이 경기 패배를 이유로 선수들을 체벌하려 하자 박철순·장호연·김형석 등 고참들이 반발했고, 주전 17명이 윤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며 서울로 올라와버린다. 구단은 주축 선수 5명을 트레이드하고 윤 감독의 연임을 시도했으나 여론은 선수들 편이었다. 박철순이 “나도 은퇴할 테니 윤 감독도 같이 물러나게 해 달라”고 했고, ‘윤 감독 사임-김인식 감독 부임’ 결정이 났다. 결국 주축 선수들은 다 살아남았고 윤 감독만 퇴진한 셈이 됐다.

‘윤동균 감독 사퇴 사건’ 주동자로 몰린 점도 억울했나요?

“아뇨. 그건 내가 책임진다고 한 겁니다. 내가 최고참이고 주장이 내 후밴데 주장한테 뒤집어씌울 수는 없잖아요. 나도 그때 옷 벗었어야 해요. 지금도 윤 감독님과 소주를 마시면 ‘너 그때 유니폼 안 벗은 거 정말 잘했다’고 말씀하시는데 당시엔 얼마나 섭섭하셨겠어요. 감독님이 선수들에 대해 잘못 아신 것도 있고, 나하고 선수들이 감독님에 대해 오해한 것도 있었어요. 결국 소통이 안 된 거죠.”

어쨌든 윤 감독이 퇴진하고 다음 해인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는데요, 야구 인생에서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 아니었나요?

“그렇죠. 그 고통스러운 부상과 재활 과정을 이겨내고 거둔 승리니까요. 그런데 감격뿐인 것만은 아니었어요. 서러웠죠. 윤 감독님이 제일 많이 생각나고, 감독님 그렇게 만들고 우승했다고 좋아만 할 수 있나, 그건 아니지 하는 생각에 눈물이 터져나왔어요. 그게 사나이의 눈물 아니겠어요? 그분이 때려죽일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박 감독 눈에 물기가 어렸고, 이내 그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두산이 강한 건 전문성 뛰어난 프런트의 힘


▎박철순은 2007년 대장암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 그는 “세월은 누구도 이길 수 없다”며 웃었다.
분위기 좀 바꿀게요. 두산이 꾸준히 강한 이유가 뭐죠?

“초석이 강하지 않았겠어요? 원년에. 크하하하하. 역대 코칭스태프의 면면을 보세요. 당대 최강 지도자들이 선수들 잘 다듬어놨죠. 특히 초대 박용민 단장이 일본 프로야구 많이 보고 그걸 도입하려고 노력했죠. 그 덕분에 프런트(구단 직원)가 굉장히 강하고 전문성이 뛰어납니다. 선수들 스카우트해서 2군에서 키워내는 것 보세요. 그게 프런트의 힘이거든요. 전문가를 인정·존중하고 믿고 맡기는 게 중요한데, 한국문화에선 그게 참 힘들어요.”

니퍼트가 두산에서 뛸 때 ‘저 선수라면 21번(박철순의 영구결번)을 양보할 수 있다’며 극찬하셨죠?

“더그아웃에서 항상 노력하는 게 보여요. 늘 튜빙(고무줄로 팔 강화 운동)하고 손에 공 가지고 놀고, 선수들한테 상황 얘기하면서 ‘나라면 이렇게 할 거다’라고 설명하는 것 같은데 참 보기 좋았어요. 그리고 마운드에서 까불지 않아요. 흔히들 얘기하는 대투수가 마운드에서 삼진 하나 잡았다고 ‘아싸’ 하는 건 삼진 먹은 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김광현이 미국 가기 전에 그런 모습이 좀 보여서 ‘미국 가서 저러면 맞아 죽어. 방망이 날아와’라고 걱정한 적이 있어요. 각자 스타일은 존중하지만 좀 자제했으면 합니다.”

요즘처럼 투수 역할이 분화되고 투구수를 관리해주는 게 부럽진 않나요?

“난 반댑니다. 9회 완투하면서 150개 던질 능력이 안 되면 선발감이 아니죠. 투구수를 80~90개로 조절해준다? 그럼 중간으로 가야지 뭔 선발입니까. 선발은 그만큼 많은 연습량이 있어야 하죠. 요즘 투수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도 ‘강한 연습 만이 살길이다’입니다. 등판 기회를 잡으면 초구부터 120% 힘으로 전력투구하고, 도망가지 말고 승부해야 합니다. 내가 이런 말 하니까 지도자가 못 되는 겁니다. 현대야구에 안 맞는 옛날 얘기한다고요. 사람들은 옛날 것은 다 틀린 거라고 생각들 해요. 그래서 김성근 감독님을 욕했잖아요. 난 선수하고는 안 싸워요. ‘왜 넌 이렇게 못해’ 하지 않아요. 강한 연습을 못 버티면 제풀에 나갈 거고, 남은 선수를 키우겠죠.”

박 감독은 두산 투수코치를 역임했고, 2015년엔 스리랑카 대표팀을 파트타임으로 맡아 동아시안컵에서 3승2패의 성적을 올렸다. 정식 감독을 맡은 적이 없음에도 그는 ‘박 감독’이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는 “야구인으로서 마지막 소망이 있다면 나만의 팀을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야구 잘하고 인생 잘 살려면?’이라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본을 지켜라. 그다음은 인내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최소한 자살은 안 할 거라고 했다. 이게 없었으면 자신도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며.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2009호 (202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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