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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3부)] 근·현대 서구화와 기독교 수용의 주역들(6) 조선 첫 ‘전도부인’ 이경숙 

19세에 홀로된 청상과부의 인생 반전 

가난한 양반 집안 딸, 유교 윤리에 묶여 노예 같은 삶
이화학당 세운 스크랜턴 도와 한국 근대 여성사 개척


▎1886년 세워진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기관 ‘이화학당’.
19세기에 내한했던 미국 선교사 중에서 매리 플레처 스크랜턴(Marry fletcher Scranton) 여사는 한국의 근대 여성사를 개척한 선구자였다. 이화여대의 모체가 되는 이화학당을 설립해 근대 여성 교육을 선도한 주인공이 스크랜턴 여사였다. 또한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여성 병원을 개설해 근대 여성 의료를 시작하고, 감리교 여성 선교를 통해 근대 한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여성 지도자들을 양성해 낸 주인공 역시 스크랜턴 여사였다.

여사는 1832년 미국 매사추세츠 밸처타운에서 에라스투스 벤턴의 큰딸로 태어났다. 혼인 전 이름은 매리 벤턴으로, 벤턴 가문은 뉴잉글랜드의 저명한 감리교 가문이었다. 여사의 부친인 에라스투스 벤턴 역시 미국 북감리교의 저명한 목사였고, 동생과 조카 또한 감리교 목사였다. 이처럼 저명한 신앙 가문에서 태어난 스크랜턴 여사 역시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을 자랑했다.

24세가 되던 1855년, 여사는 윌리엄 스크랜턴과 혼인했다. 다음 해에 여사는 외아들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을 출산했다. 하지만 41세가 되던 1872년 남편과 사별했다. 그때 아들 벤턴 스크랜턴은 17세였다. 남편을 잃은 후 여사는 아들 뒷바라지에 전념하면서 미국 북감리교의 여성 해외 선교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독실한 신앙 가문에서 성장한 여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어려서부터 해외 선교에 관심이 컸다. 기독교 신앙인에게 해외 선교는 당연한 사명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믿음은 남편과 사별한 후 더욱 깊어졌다. 홀로 된 여사는 세상에 남겨진 자신과 아들의 사명에 대해 깊이 묵상했다. 어째서 신은 남편만 데려가고 자신은 세상에 남겨뒀을까? 남겨진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이 신의 뜻에 맞는 것일까? 이런 질문 끝에 여사는 해외 선교가 자신의 사명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런 확신에서 스크랜턴 여사는 북감리교의 해외 여성 선교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나아가 외아들 벤턴 스크랜턴 역시 의료 선교사로 키우고자 했다.

벤턴 스크랜턴은 1878년 예일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 의과대학에 입학해 1882년 졸업했다. 그 사이 여사는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했는데, 뉴욕에서도 여성 해외 선교 활동에 열심이었다. 한편 벤턴 스크랜턴은 뉴욕 의대를 졸업한 후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 병원을 개업했고, 혼인도 했다. 개업의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는 1884년 딸까지 둬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다.

아들 중병 앓자 ‘조선 선교는 신의 뜻’ 이라 생각


▎한국의 근대 여성사를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되는 매리 플레처 스크랜턴.
그런데 벤턴 스크랜턴은 1884년 가을 갑자기 중병을 앓게 됐다. 당시 미국 북감리교에서는 조선에 파송할 의료 선교사를 물색 중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사는 병상의 아들을 간호하면서 조선에 선교사로 갈 것을 권유했다. 아마도 당시 스크랜턴 여사는 아들이 갑자기 중병에 걸린 이유를 조선에 파송하기 위한 신의 뜻이라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여사는 아들이 조선에 선교사로 갈 결심만 굳히면 중병에서 완쾌할 것으로 확신했다. 당시 여사는 자신도 조선으로 가서 여성 선교에 헌신할 결심이었다. 해외 선교를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던 여사의 평소 확신이 조선 선교로 구체화된 것이었다. 한 달 정도 어머니의 권유를 받은 후 벤턴 스크랜턴은 조선에 선교사로 갈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그 결심이 굳어질 즈음 중병에서 완쾌됐다. 병원을 처분한 그는 1884년 10월 미국 북감리교의 조선 의료 선교사로 임명됐다. 그때 스크랜턴 여사 또한 미국 북감리교 여성 해외 선교회의 교육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1885년 2월 3일, 스크랜턴 여사 그리고 아들 내외와 2세 된 손녀 등 4명의 가족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항해 2월 27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때 여사는 54세, 아들 벤턴 스크랜턴은 29세였다. 당시 미국 북감리교의 교육 선교사로 임명된 아펜젤러와 그의 부인이 스크랜턴 가족과 동행했다.

요코하마에 도착한 스크랜턴 가족과 아펜젤러 부부는 곧바로 조선으로 가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전년 12월에 조선 한양에서 발발한 갑신정변 때문이었다. 주한 미국공사는 미국 여성과 어린이가 갑신정변 직후의 한양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며 당분간 일본에 머물 것을 권유했다. 이에 스크랜턴 가족과 아펜젤러 부부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면서 때를 기다렸는데 그때 이수정·김옥균·박영효 등 조선 개화파 인사들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 일본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났다.

당시 상황을 스크랜턴 여사는 ‘여기 환경은 아주 좋습니다. 선교사들은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잘하고 있으며 일본 생활도 아주 유쾌합니다’라고 언급하면서 ‘그러나 나는 어서 가서 내 백성(my own people)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표현에서 여의치 않은 조선 입국에 조바심을 내던 여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나는 어서 가서 내 백성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라는 표현에서, 조선 선교에 임하는 여사의 마음가짐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본래 ‘내 백성(my own people)’이란 표현은 출애굽기 6장 7절의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I will take you as my own people, and I will be your God.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your God, who brought you out from under the yoke of the Egyptians)”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조선 선교에 임하는 스크랜튼 여사의 마음은 바로 출애굽 당시 모세의 마음 그것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이집트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이집트로 간 모세처럼, 스크랜턴 여사 역시 조선 사람을 구원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미국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조선 선교에 나섰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조선 여성들은 사실상 조선 유교사회의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면에서 조선 여성들을 선교하기 위해 조선으로 향하던 스크랜턴 여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집트로 향하던 모세와 본질적으로 같았다고 평가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요코하마에 도착한 후 한 달쯤 기다리던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는 3월 31일 나가사키를 출항해 조선으로 갔고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하지만 스크랜턴 가족은 그들과 동행하지 못했다. 연로한 스크랜턴 여사와 어린 딸 때문에 좀 더 안전해지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조선에서 미국 북감리교 선교의 시발점


▎개교 초창기 이화학당 교수와 여학생들.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그래서 한 달 정도를 더 기다리고 난 후 벤턴 스크랜턴은 4월 20일 혼자 요코하마를 출항해 조선으로 향했다. 먼저 출항했던 아펜젤러 부부가 안전 문제 때문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언더우드가 한양으로 입성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가족들 안전을 확신할 수 없기에 벤턴 스크랜턴 혼자 출항했던 것이다.

5월 3일 제물포에 도착한 밴턴 스크랜턴은 마침 그곳에 와 있던 알렌을 만났다. 알렌을 통해 제중원과 언더우드 이야기를 들은 벤턴 스크랜턴의 마음은 더욱 촉박해졌다.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의료 선교사 알렌은 이미 조선국왕의 허락을 받은 제중원을 운영하는 데 비해 북감리교에서 파송한 의료 선교사인 자신은 한양에도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벤턴 스크랜턴은 하루속히 한양으로 들어가 의료 선교에 착수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양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그런 벤턴 스크랜턴에게 알렌은 제중원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우선 한양으로 입성하는 것이 시급했던 벤턴 스크랜턴은 알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5월 5일, 알렌과 함께 한양에 들어온 벤턴 스크랜턴은 정동 주변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어서 5월 13일부터 제중원으로 출근하다가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의료 선교사 헤론이 6월 21일부터 제중원에 합류하자 6월 24일 그만뒀다. 그 직후 벤턴 스크랜턴은 자신의 거처를 진료소로 삼아 의료 선교를 시작했다. 이 같은 벤턴 스크랜턴의 의료 선교가 조선에서 미국 북감리교 선교의 시발점이었다.

벤턴 스크랜턴이 무사히 한양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가족은 6월 16일 일본을 출항해 6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때 아펜젤러 부부도 함께 왔다. 제물포에 도착한 스크랜턴 가족은 곧바로 한양으로 갔고, 아펜젤러 부부는 한 달가량 제물포에 머물다가 7월 29일 한양에 입성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양에 들어온 스크랜턴 여사는 곧바로 여성 선교에 착수하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우선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고, 조선 여성들의 거부감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런 상황을 스크랜턴 여사는 ‘우리가 거리로 나가 여인들이 있는 곳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기만 하면 그들은 재빨리 문을 닫거나 휘장 속으로 숨어버렸고, 아이들은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고 묘사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스크랜턴 여사는 낙심하지 않고,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더 높은 약속’을 믿으면서 더욱 열심히 여성 선교를 준비했다. 그것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 그리고 조선 여인들의 신임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에 더해 여성 교육과 여성 의료에 필요한 부지 마련이 여성 선교를 위한 준비였는데, 그 준비는 1885년 10월 정동에 부지를 구입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여성 전용 근대교육 1호 학생은 ‘김씨 부인’


▎구한말 서울 정동의 지도.
정동 부지에 세워진 최초의 여성의료 시설이 바로 보구여관이었다. 스크랜턴 여사는 미국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 보낸 1886년 8월 19일자 서신에서 ‘(…) 여의사 파견에 관해서는 여러 번 이야기 해왔지만 나는 다시 한 번 더 여의사 파견을 간곡히 부탁합니다(…)’라고 했는데, 이 요청에 따라 여의사 메타 하워드가 1887년 10월 파견됐다. 조선 최초의 내한 여의사 하워드는 벤턴 스크랜턴의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888년 11월에 여성전용 병원을 스크랜턴 여사가 마련한 정동 부지에 설립했다. 그 병원에 고종은 ‘보구여관’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스크랜턴 여사가 마련한 정동 부지에는 보구여관과 더불어 여성 전용의 근대교육 시설도 들어섰다. 시작은 1886년 5월쯤 영어를 공부하러 여사를 찾아온 ‘김씨 부인’부터였다. ‘김씨 부인’은 조선정부 관리의 첩으로 알려졌는데, 그 관리는 자신의 첩을 왕비의 통역으로 만들기 위해 보냈다고 한다.

이는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첫째는 ‘김씨 부인’이라는 조선 여성이 스스로 찾아올 정도로 여사가 조선 여성들의 신임을 얻었다는 사실이었다. 둘째는 조선 관리가 자신의 첩을 왕비의 통역으로 만들기 위해 보낼 정도로 여사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영향력은 여사의 여성 교육에 대해 고종이 호의를 갖고 지지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여사의 여성 교육이 고종의 지지를 받는다면 조만간 여사와 명성왕후 민씨의 만남이 성사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이런 예상에서 조선 관리가 자신의 첩을 왕비의 통역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여사는 ‘김씨 부인’을 자신의 방에서 가르쳤다. 이 방이 발전해 훗날 이화학당이 됐고, 그 이화학당이 이화여대가 됐다는 점에서 ‘김씨 부인’이 공부한 여사의 방은 한국 근대 여성 교육의 산실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씨 부인’은 3개월 만에 떠났다고 하는데, 통역 문제가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여학생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1886년 6월에는 ‘별단이’라는 여학생이 두 번째로 들어왔고 뒤이어 세 번째, 네 번째 여학생이 들어왔다. 이렇게 여학생이 늘어나자 여사는 1886년 11월 정동 부지에 여학교를 새로 짓고 본격적인 여성 교육에 착수했다. 새로 지은 여학교는 교실과 기숙사를 갖춘 ‘ㄷ’자형 건물로서 195칸이나 됐다고 한다.

또한 파란 잔디와 꽃나무로 장식된 이 여학교는 명절 날 한양의 부녀자들이 구경 오는 명소가 됐다. 이 여학교에 1887년 2월 고종이 ‘이화학당’이라는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스크랜턴 여사는 공식적으로 ‘이화학당장(교장)’이 됐다. 뒤이어 1887년 10월 미국 북감리교의 두 번째 여성교육 선교사 ‘로드 와일러’가 내한하면서 이화학당은 학당장(교장)과 교사의 체계를 갖추게 됐다.

그런데 1889년까지 이화학당의 교과는 영어와 영어성경이 전부였다. 1889년까지는 스크랜턴 여사와 로드 와일러 교사의 한국어 실력이 능숙하지 못해 영어와 영어성경 위주로 가르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사는 영어와 영어성경 교육을 통해 조선 여성을 미국 여성으로 변화시키기보다는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양성하고자 했다.

그 같은 교육이념은 ‘우리의 목표는 여아들로 하여금 우리 외국인들의 생활양식, 의복 및 환경에 맞춰 바꿔지기를 바라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다만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이 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갖기 바라며, 나아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으로 완전한 한국인이 될 것을 바랄 뿐이다’는 여사의 언급에 명확히 드러난다.

명분과 체면 중히 여기는 유교윤리에 속박


▎한국 최초 여성병원인 ‘보구 여관’.
하지만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이 되게’ 하려면 영어와 영어성경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보다 나은 한국인’이 되려면 그것에 더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한글과 한문을 알아야 했다.

그렇지만 여사와 로드 와일러 교사는 한글과 한문을 가르칠 실력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조선 남성을 교사로 채용할 수도 없었다. 아직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윤리가 팽배한 조선에서 남성교사가 여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는 1890년 초에 조선 여성이경숙이 이화학당의 교사가 되면서 해결됐다. 이경숙은 이화학당 최초의 조선인 여성교사로서 한글과 한문을 교육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최초의 전도부인(傳道婦人)이 돼 감리교를 전도했다는 사실에서도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그 이경숙이 이화학당 최초의 조선인 여성교사가 되는 과정 자체도 극적이었다. 이경숙은 1851년 충청도 홍주에서 가난한 양반의 딸로 태어났다. 비록 가난했지만 그녀는 양반의 딸이었기에 한글과 한문을 배워 읽고 쓸 수 있었다. 15세가 되던 1865년 이경숙은 한양에서 내려온 어떤 청년과 초례를 치렀다. 조선시대 여성의 혼인 연령이 15세이기에 이경숙 역시 그 나이에 초례를 치른 것인데, 물론 중매혼이었다.

조선시대 초례는 신랑이 신부를 신랑 집으로 데려가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경숙의 신랑은 한양에 사정이 있다며 나중에 데리러 온다는 말만 남기고 처갓집에서 초례를 치르고는 다음 날 혼자 한양으로 가버렸다. 사정이야 어쨌든 초례를 치렀으므로 이경숙은 기혼녀가 됐고, 오매불망 한양 신랑으로부터 소식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러다가 19세 되던 해에 한양으로부터 소식이 왔는데 신랑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때부터 이경숙은 당시의 관행에 따라 수절할 수밖에 없었다. 유교윤리가 지배하던 당시에 양반집 부녀가 재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19세의 젊은 청춘에 홀로 된 이경숙은 가난한 친정에 얹혀 살면서 연명했지만, 그마저도 38세 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불가능하게 됐다.

친정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친정이 경제적으로 파탄 났기 때문이었다. 가난을 견디지 못한 친정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경숙 역시 삼촌이 있는 한양으로 올라가 바느질과 빨래 등으로 근근이 연명했다. 그렇게 생활고에 찌든 이경숙은 40세 되던 해 출가해 비구니가 되려고까지 했다. 훗날 이경숙은 당시 상황을 ‘나의 40세 지난 역사는 실로 인간고의 여실한 기록이라 하겠다. 나는 서울 와서 산 지 3년 후부터 건널수록 물이요, 넘을수록 산이 있는 나의 쓰리고 아픈 생애를 비판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이경숙은 40세가 될 때까지 자신의 삶을 ‘인간고의 여실한 기록’이라 했는데, 이는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가난한 양반집 딸로 태어나 명분과 체면에 속박돼 살았던 40년 세월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노예 같은 삶의 연속이었고, 그래서 ‘인간고’였다. 이경숙의 40년 인생이 노예 같은 삶의 연속이었던 이유는 가난 때문이기도 했지만 명분과 체면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유교윤리 때문이었다.

그 유교윤리 때문에 이경숙은 혼인 전 돈을 벌 수도 없었고, 19세에 홀로 된 후 재혼할 수도 없었다. 그런 삶은 살기는 살았지만 죽은 것과 같은 삶 즉 산송장이나 노예 같은 삶이었다. 그런 산송장이나 노예 같은 삶에 지치고 지친 이경숙은 결국 40세 되던 해에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려고까지 했던 것이다. 이처럼 산송장이나 노예 같은 삶은 이경숙 개인만의 상황이 아니라 조선 여인 모두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경숙의 친구 남편이 마침 스크랜턴 여사의 한국어 선생님이었다. 부인을 통해 이경숙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한국어 선생님은 어느 날인가 여사에게 이경숙 이야기를 했다. 당시 이화학당 여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한문과 한글을 가르칠까 고민하던 여사에게 이경숙은 더할 나위 없는 여성교사로 생각됐다. 여사는 이경숙을 만나자고 요청했고, 이경숙은 친구 남편을 따라 정동에서 여사를 만났다. 1890년 봄의 어느 날이었다.

수양딸로 삼아 여성 교육·전도의 길 동행


▎상동교회가 보이는 1920년대의 남대문시장과 명동 일대에 조랑말이 지나가고 있다. / 사진:한국민속홍보센터
훗날 이경숙은 그 첫만남을 “노부인은 나를 반겨 맞으며 처음 보는 사람이로되 친절한 태도는 오래 동안 사귀어 아는 사이보다도 대단하였다. 나는 그날 밤을 노부인 집에서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노부인은 여러 가지 음식을 풍성히 차려놓고 내게 많이 먹기를 권고하였다. 그러나 친척들의 굶주림을 생각하니 목이 메이고 눈물이 앞을 가려 그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조반 후에 노부인은 나를 자기 수양딸로 정하고 새 옷을 많이 줬다”고 회상했다. 수양딸로 삼았다는 것은 여사가 이경숙의 생활을 책임지겠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여성선교 역시 함께 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마도 당시 스크랜턴 여사는 이경숙의 삶을 들으면서 남다른 공감과 슬픔을 느꼈을 듯하다. 남편과 사별했다는 공감에 더해 가난과 고독으로 점철된 이경숙의 인생이 너무나 슬펐기 때문이었다. 이경숙의 삶을 들으면서 스크랜턴 부인은 이런 이경숙을 만나게 한 신의 뜻이 무엇일까 자문했을 것이다. 그리고 해답은 자신의 조선 여성 선교를 위한 신의 뜻이라 생각했을 듯하다. 그런 생각에서 여사는 이경숙을 수양딸로 삼아 여성 선교를 함께하게 됐을 것이다.

이렇게 1890년 초 스크랜턴 여사의 수양딸이 된 이경숙은 실제로 여사의 집안일도 돌보고 이화학당의 한글 교육과 한문 교육도 담당했다. 즉 이경숙은 조선 여성 최초의 스크랜턴 여사 선교 동역자였으며, 또한 이화학당 최초의 조선인 여성 교사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경숙은 훗날 ‘그때나 지금이나 4월 8일, 또는 5월 5일이면 장안 부녀자들이 각처 사찰이나 남대문 밖과 동대문 밖 관왕묘나 그밖에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풍속이 있는데 마침 그해 4월 8일이 되니 서양 부인이 나와서 사는 모양과 집 구경을 하겠다고 장안 남북촌 부녀들이 혹은 교군도 타고 또 장옷을 쓰고 오는 이들이 노부인의 집으로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나는 1000여 명이나 되는 그들을 안내해 이리저리 다니면서 설명하기에 하루 동안 정신이 없이 지낸 일도 있다’고 회상했다.

이경숙은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해서 1890년 9월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드루실라(Drusilla)였다. 성경에서 드루실라는 로마 총독 펠릭스 부인으로서 여러 차례 결혼과 이혼을 겪은 유대 여성인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했다. 아마도 이경숙에게 드루실라 세례명을 준 이유는 조선 여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널리 전도하라는 뜻일 듯하다.

스크랜턴 여사는 1897년 남대문 시장 언덕에 달성교회(상동교회)를 세우고 서울과 경기지역을 순회하면서 전도 부인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때 여사를 도와 경기·수원 지역을 순회하면서 여성 전도에 앞장선 전도부인이 바로 이경숙이었다.

이처럼 이경숙은 스크랜턴 여사를 매개로 조선 최초의 여성 교사, 조선 최초의 전도부인이라는 사명을 담당하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스크랜턴 여사와 더불어 이경숙은 한국의 근대 여성사를 개척한 선구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010호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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