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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55)] 세상을 밝힌 ‘만인의 스승’ 퇴계(退溪) 이황 

환히 깨달았지만 없는 것처럼 낮추다 

70차례 벼슬 사양하며 학문에 몰두, 제자 300여 명 길러내
자연·인간의 이치 꿰뚫는 방대한 저술, 일본 유학에도 영향


▎도산서원 김병일 원장이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한 도산서당 앞에서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이광훈 작가
경북 안동시청에서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가는 길은 퇴계로다. 길 주변은 역사가 담긴 서원과 정자·고택 등에 관련 기관까지 모여 있는 한국 정신문화의 1번지나 다름없다. 그 중심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이 있다. 선생은 숱한 언행과 저작을 남긴 겨레를 넘어선 ‘만인(萬人)의 스승’이었다. 8월 20일 선생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도산서원 덜 미쳐 한국국학진흥원이 나온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유교책판 6만여장이 보관된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청사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박경환 국학진흥본부장을 만났다. 오는 11월 27일 ‘퇴계 선생 서세(서거) 450주년 추모’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주제는 ‘군자유종, 세상의 빛이 되다’. 선생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제자 간재 이덕홍이 점을 쳐 얻은 겸괘(謙卦)에서 따왔다.

이번 행사에선 퇴계의 도산십이곡을 노래로 처음 선보인다고 한다. 김종성 충남대 교수가 작곡하고 중창단이 노래한다. 추모 강연은 퇴계의 70년 생애 중 마지막 1년 9개월에 집중된다. 마지막 21개월은 퇴계가 조정을 떠나 그토록 원하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출발점이다. 도산서원 등은 지난해 4월 마지막 귀향길을 재현했다. 답사팀을 꾸린 뒤 기록에 따라 서울에서 안동까지 열이틀을 걸었다.

1569년 봄 선조 임금은 69세 퇴계에게 고향에 내려가도 좋다고 허락한다. 3월 4일 임금은 떠나는 퇴계에게 호피 등을 선물하고 말과 뱃사공을 지원했다. 선생은 정오에 임금께 하직한 뒤 한양 도성을 나와 해 질 무렵 한강 변 동호 몽뢰정(夢賚亭)에 이른다. 1568년 7월 임금의 거듭된 요청으로 상경한 선생은 대제학·이조판서·우찬성 등을 제수받지만 모두 사양했다. 대신 한직인 판중추부사로 경연에서 당시 17세인 선조 임금 지도에 공을 들였다. 그해 12월 선생은 평생의 학문적 공력을 담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린 뒤 은퇴를 요청한다. 고향에서 학문과 수양에 힘쓰면서 여생을 보내게 해 달라는 것이다. 임금과 신료들은 선생이 조정에 남아 소년 임금을 보좌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선생은 더 간곡히 요청한다. 마침내 귀향이 받아들여졌다. 퇴계가 그토록 임금의 지근거리를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려 한 까닭은 무엇일까. 박경환 본부장은 “서세 450주년은 바로 그 답을 찾는 행사”라고 말했다.

기다리던 매화와 먼저 시를 주고받다


선생은 봉은사~광나루~미음나루(남양주)~충주~단양~죽령~풍기 등을 거쳐 3월 17일 고향으로 돌아온다. 집이 있는 계상은 돌림병이 있어 산 넘어 도산서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매화가 퇴계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퇴계는 매화와 시를 주고받는다. 먼저 매화가 주인에게 한 수를 건넨다(梅贈主).

총애나 명예가 어찌 님에게 맞으리/흰머리로 속세에 있는 님 해를 넘겨 생각했네/오늘 다행히도 물러남을 허락받았는데/하물며 이 좋은 꽃피는 시절에 오시다니

이번에는 주인인 선생이 매화에 답을 한다(主答).

국솥에 간 맞추려 그대 얻으려 함 아니라/맑은 향내 사랑하고 스스로 생각하며 읊조리네/이제 내가 약속 지켜 다시 돌아왔으니/밝은 세월 버렸다고 허물일랑 마오

선생이 매화를 가까이 한 것은 음식 재료로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고 맑은 향기 때문이었다. 떠나 있는 동안 매화와 나눈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박 본부장의 설명에 이어 국학진흥원이 최근 개관한 세계기록유산 전시체험관을 둘러봤다. 1층은 목판인 유교책 판 수장고다. 1600년 간행된 [퇴계선생문집] 경자본 책판 등이 보관돼 있다. 2층은 현판 수장고다. 선생의 체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퇴계가 제자 김부륜에게 써 준 ‘雪月堂(설월당)’ 편액 등이 보였다.

국학진흥원을 나와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으로 이동했다. 북동쪽으로 8㎞쯤 떨어진 위치다. 10분쯤 지나 퇴계종택이 보였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종택 뒤편 경사진 산자락에 있다. 퇴계종택에는 16대 종손 이근필(88) 옹이 집을 지킨다. 종손은 연로해 코로나19 이후 손님 만나기를 조심스러워한다. 종택을 지나 최근 증축한 선비문화수련원 2원사로 올라갔다. 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 탄신 500주년인 2001년 설립됐다. 퇴계종택 등이 나서 ‘도덕입국(道德立國)’을 기치로 선비정신 교육장을 만든 것이다. 도산서원이 존현(尊賢)인 제향을 한다면 선비문화수련원은 양사(養士)인 사회 교육을 담당한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 간 교원과 학생·기업인·외국인 등은 84만여 명.

“집에 가는 도중에 읽지 말게”


▎도산서원 전경. 맨 앞이 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도산서당이다.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2원사에서 두루마기 차림의 김병일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예산처 장관 등을 지낸 뒤 2008년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맡아 국학진흥원장 등을 거쳐 퇴계와 선비정신을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퇴계는 1534년 문과에 급제한 뒤 단양·풍기 군수 등을 지내다 1546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며 학문과 인격을 도야했다. 이후 선생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정으로부터 벼슬에 다시 나올 것을 제의받았지만 70여 차례나 사양하고, 선비로서 청렴결백을 지켰다.

“선생은 임금이 그토록 붙잡으려는 걸 뿌리치고 대체 무엇을 하러 이곳으로 돌아왔을까요? 선생의 마지막 1년 9개월은 알면 알수록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김 이사장은 선생이 이 시기에 쓴 편지 이야기를 꺼냈다.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는 제자 309명의 이름이 나온다. 제자 가운데 전라도 순천 출신 이함형이 있었다. 1569년 배움을 청했으니 선생의 마지막 귀향 시기 제자다. 당시 이함형의 나이는 손자뻘인 20세. 그는 부인과 금실이 좋지 않아 이혼 이야기가 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함형은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청을 한다. 다음날 이함형이 길을 떠나려고 인사를 하자 퇴계는 편지 한 통을 건넸다. “이 사람 평숙(이함형의 字)! 내가 자네에게 편지 한장을 썼네.” 이함형은 스승으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건네받는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네! 무엇인지요?” “이 편지는 집에 가는 도중에 읽지 말게!” “그러면…” “집에 도착해서 대문을 들어서기 전에 읽어 보게나.”

꼬박 열흘이 걸려 순천 집 앞에 도착했다. 이함형은 서둘러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편지(與李平叔)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공자는 말하기를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후에 예의(禮義)를 둘 곳이 있다’ 했습니다. (…) 부부 윤리가 소중한 게 이와 같거늘 어찌 정이 흡족하지 않다고 멀리할 수 있겠습니까? (…) 그대가 부부 금실이 좋지 않다 하니 어쩌다 이런 불행이 있게 되었습니까? 옛날에는 칠거지악을 범한 부인을 쉽게 내칠 수 있었지만 오늘날 부인은 대체로 일부종사(一夫從事)하며 일생을 마치니 어찌 정의(情義)에 맞지 않는다고 부인을 천 리 밖으로 내쳐 가정의 도리를 망가뜨리고 자손이 끊기게 하는 불행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이어 퇴계는 자신의 아픈 경험을 들려준다. “[대학]에 ‘자신에게 허물이 없어야 다른 사람을 탓한다’고 했으니 여기에 황(滉, 자신을 낮춰 이름을 표기)이 일찍이 경험한 것을 말하겠습니다. 황은 두 번 장가를 들었지만 내내 불행했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마음을 박하게 먹지 않고 노력해 온 것이 수십 년이 됩니다. 그동안 몹시 괴롭고 심란하여 번민을 견디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어찌 감정에 이끌려 대륜을 소홀히 해 편모에게 근심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 그대는 마땅히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반성하고 고치도록 하십시오. 이 문제에 끝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찌 학문을 한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으며 또 어찌 실천한다고 하겠습니까?”

서당 밖으로 나가 새 제자를 맞이하다


▎선생은 매화를 노래한 시 104수를 모아 [매화시첩]을 따로 만들었다. 친필 판본이다.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편지를 읽은 이함형의 눈시울이 붉어졌을 것이다. 나이 차를 뛰어넘은 간곡하고도 친절을 다한 편지다. 그날부터 부부는 사이가 회복됐다. 이후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이함형 내외는 마음으로 예를 다하는 심상(心喪) 삼 년을 보냈다고 한다. 퇴계는 일생 3150여 통의 편지를 남겼다. 대부분 학문과 경륜이 무르익은 60세 이후 쓴 것이다.

“지금 들으니, 젖 먹일 노비가 서너 달 된 아기를 두고 서울로 올라와야 한다는구나. 이는 그 아기를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근사록(近思錄)]에 이 일을 말하기를 ‘남의 자식을 죽여 나의 자식을 살리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 지금 일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선생이 손자 안도(安道)에게 답한 이 편지도 마지막 1년 9개월에 썼다. 조부 퇴계의 강한 반대로 결국 여종 학덕이는 서울로 가지 않았고, 증손자 창양은 영양실조 등에 시달리다 두 돌을 갓 넘기고 죽는다. 신분을 뛰어넘는 인간 존중 실천은 큰 슬픔을 동반했다.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제자·친지 등은 궁금하던 것을 편지로 묻고 또 글씨를 써 달라며 끊임없이 찾아온다. 더러는 시를 지어 보냈다. 퇴계는 이런 사사로움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힘닿는 데까지 정성을 다한다. 편지에 답장을 하고 글씨를 써 주었으며 보내온 시에는 일일이 화답했다. 매화시의 절반도 이 시기에 지어졌다. 김 이사장은 “이게 바로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만년에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이라고 말한다. 선생은 누구든지 자신이 필요해서 다가오면 성심을 다해 답을 줬다. 그것도 자신을 낮춰서다. 그게 만인이 선생을 존경한 이유이자 바탕이었다.

선비문화수련원을 나와 김 이사장과 함께 도산서원으로 향했다. 그는 도산서원 원장을 겸하고 있다. 산 하나를 넘으면 바로 서원이다. 돌아나가는 도로 대신 지르는 2㎞ 산길을 택했다. 선생이 생전에 도산서당을 오가던 길이 산속으로 나 있었다. 도산서원 진입로는 언제 걸어도 숲의 짙은 향기와 낙동강을 품은 넉넉한 안동호가 여유를 선사한다. 강 가운데 우뚝한 시사단(試士壇)이 보이면 서원 앞이다. 선생이 강학한 도산서당에 먼저 들렀다. 서당 담장 옆 절우사(節友社)에 눈길이 머물렀다. 선생은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와 더불어 절개를 지키는 절우사란 모임을 만들어 자신을 돌아봤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이어 ‘도산서당’이라는 자그마한 편액을 설명했다. 대학자의 근엄한 필체가 아닌 새가 그려진 글자 등 장난스러움이 느껴진다. “서당 앞 담장은 복원된 지금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서당으로 올라오는 길은 계곡이어서 처음 글 배우러 오는 사람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이곳이 처음인 서생은 잔뜩 주눅이 들어 있을 테고. 그때 퇴계는 기다리지 않고 서당 유정문 밖으로 나가 새 제자를 맞이합니다. 서생은 순간 이름난 스승이 자신을 반기는 겸손과 따뜻함에 감동할 것입니다. 거기다 서당 편액을 보면서 한 번 더 긴장이 풀리겠지요.”

도산서원을 나오다가 진입로 옆에 세워진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맹자의 고향)’ 비 앞에 멈췄다. 1980년 공자(孔子)의 77대 종손인 공덕성(孔德成)이 퇴계를 기리는 도산서원을 방문한 뒤 공맹의 고향처럼 학문과 도덕이 높은 곳이라며 남긴 글이다. 30년이 지나 2012년에는 그 손자이자 공자 79대 종손인 쿵추이장(孔垂長)과 맹자(孟子)의 76대 종손인 멍링지(孟令繼)가 다시 도산서원을 찾았다. 중국에서 시작된 유학이 공자·맹자를 거쳐 주자(朱子)를 사숙(私淑)한 조선의 퇴계로 이어진 연원(淵源)을 돌아본 것이다.

'성학십도'에 평생 학문의 공력을 담다


▎공자의 79대 종손인 쿵추이장(孔垂長)이 2012년 도산서원을 방문해 할아버지(孔德成)가 남긴 ‘추로지향’ 비 앞에 섰다. / 사진:도산서원
퇴계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 가운데 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표작은 무엇일까. 고 박종홍 서울대 교수는 [국역 퇴계집] 해제에서 “[성학십도]가 웅혼한 규모와 짜임새로 볼 때 퇴계 유학 사상의 진수를 빠짐없이 드러낸 가장 알찬 저작이라 해도 좋을 것”이라고 적었다. [성학십도]는 성현에 이르는 유학의 가르침을 10폭의 그림으로 친절하게 설명한 ppt 자료 같은 것이다. 선조는 물론 이후 임금은 가끔 [성학십도]를 경연에서 강의하게 했다. 또 중국은 1940년대 베이징 상덕(尙德) 여자대학 재단이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판각·인쇄해 판매하기도 했다. 80년 전 중국이 퇴계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산서원을 나서면서 퇴계학이 한국의 사상으로 세계에는 어느 정도 알려졌는지 궁금했다. 퇴계학을 필두로 원효의 화쟁사상, 다산학 등이 그동안 언급돼왔다. 선비문화수련원으로 돌아와 김종길 원장을 만났다. 김 원장은 학봉 김성일의 종손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퇴계학 또는 조선 유학의 일본 전래로 이어졌다. 학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후일 일본 근세 유학의 기틀을 세운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난다. 이후 정유재란 시기 강항이 포로로 잡혀가 다시 유학을 전하면서 도쿠가와 막부의 정신적 바탕이 됐다. 강항은 성혼의 문인이었으며 성혼은 퇴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학자라고 한다. 동아시아를 벗어나면 미국 워싱턴대 마이클 칼튼 교수가 [성학십도]를 영역했을 만큼 퇴계학을 서방에 활발히 알려 왔다. 1985년 결성된 국제퇴계학회(회장 이기동)는 그동안 27차례 세계를 순회하는 국제학술회의 등을 통해 퇴계학을 알리는 데 노력해 왔다. 서구의 학자들도 퇴계의 실천 등에 점차 주목하고 있다. 열정은 최근 들어 다소 식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있다. 장윤수 대구교육대 교수는 “학술대회 초기에 비해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자 참여가 다소 주춤해지고 주제는 식상한 감이 있다”고 말한다.

1원사 계단 앞에는 정자관에 심의를 입고 책을 펼친 채 앉아 있는 퇴계 동상이 있다. 받침대 한쪽 면에 선생의 시에서 뽑은 소망을 짤막하게 새겼다. “所願善人多(소원은 착한 사람이 많아지기를).” 1000원권 지폐의 초상화와 달리 넉넉한 모습의 동상을 둘러본 뒤 선비문화수련원을 내려갔다. 입구 바윗돌에 선생이 생의 마지막에 스스로 지은 ‘자명(自銘)’이 새겨져 있었다. 마지막 귀향 1년 9개월의 마감이자 70년 생애의 자평이다. 종택 건너편 동쪽 건지산의 자락 선생의 묘소에 세워진 비석에 나오는 글이다.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자라서는 병이 많았네/중년에는 어찌하여 학문을 좋아하고/만년에는 어찌하여 벼슬을 탐했던가/학문은 탐구할수록 더욱 아득하고/벼슬은 사양할수록 더욱 얽매이네/세상에 나아가서는 어려움이 많았고/물러나 숨어서는 절개를 지켰네/나라의 은혜는 가슴 깊이 부끄럽고/성현의 말씀은 참으로 두렵구나/산은 높디 높이 솟아있고/물은 멀리 멀리 흐르는데/순리대로 평복을 입었으니/뭇 비난을 벗어났네/내 품은 회포는 막혀 있고/내 속 마음을 누가 알아주리/내가 옛사람을 생각해 보니/실로 내 마음을 알았구려/어찌 알리오, 다음 세상이/지금을 알아주지 못할지/근심 속에 즐거움 있고/즐거움 속에 근심 있네/조화 따라 돌아가니/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근심 속에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근심 있네”


▎1792년(정조 16) 도산서원에서 과거시험을 치른 것을 기념해 비석을 세우고 단을 쌓아 시사단이라 이름 붙였다.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선생과 8년 동안 사단칠정 논쟁을 벌인 후학 기대승은 묘갈명의 자명 뒤에 붙인 서문에서 “(선생은) 중년 이후 바깥일에 뜻을 끊고 전적으로 강론하고 논구하는데 정진하여 미묘한 이치를 환히 깨달았고 쌓여서 꽉 찬 것이 넘쳤다. 남들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지만 또한 겸허하게 낮추어 마치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고 적었다.

도산서원 상덕사에 선생과 함께 종향된 문인 월천 조목은 “선생의 학문은 배우는 자는 많지만 아는 자는 적고 아는 자가 비록 있다 해도 얻은 자는 더욱 적다”고 했다. 박종홍 교수는 그 이유를 “퇴계의 글은 숙독할 뿐만 아니라 깊이 생각하는 사색이 따라야 하고 나아가 생활화하고 실천하는 경지에 이를 때 비로소 참된 얻음에 이른다”고 덧붙였다. 선생의 마지막 1년 9개월의 키워드는 ‘실천’과 ‘낮춤’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한 까닭에 누구나 그 길을 따르기가 쉽지 않은 것일까.

[박스기사] 일본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동력된 퇴계학 - 에도 막부, 무사도 대체할 윤리로 조선 유학 선택

일본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전후해 선진 학문인 조선 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노 세이이치(宇野精一) 전 도쿄대학 교수는 퇴계 유학이 일본에 전래한 과정을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가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퇴계를 존신하는 강항을 만나 처음 퇴계의 이름을 들은 것 같다”고 추정한다.

학봉과 후지와라의 만남은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 ‘증학봉첩선(贈鶴峯貼扇)’ 등에 남아 전한다. 충남대 유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을 지낸 김주백은 최근 ‘퇴계학부산연구원보’에 관련 글을 발표했다. 후지와라는 1590년(선조 23) 9월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찾아 숙소인 대덕사(大德寺)에 머물던 학봉을 만난다. 그 자리에서 후지와라는 함께 한 소회를 칠언절구접이 부채로 전했다. 당시 학봉은 53세, 후지와라는 30세의 승려였다.

첩선은 비록 하찮으나 담긴 정이 어찌 없으리/우리 토산물을 공에게 드리기 부끄럽소/조그마한 정성 조선국에 기억된다면/한 움큼의 일본 풍치가 되레 전해지리 표현은 정중하면서 정이 담겨 있다. 일본 학자는 “후지와라가 당시 여러 차례 학봉을 만나면서 유학에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배경을 설명한다. 즉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스승인 후지와라는 포로로 잡혀 간 강항 이전에 이미 학봉을 만나 유학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후지와라가 승려 신분에서 유자(儒者)의 길로 가게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주장이다.

후지와라는 퇴계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접하고 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에게 전수한다. 하야시는 다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20권을 읽는다. [퇴계선생 일대기]를 쓴 전 포항공대 권오봉 교수는 “그러나 퇴계의 학문을 전면 연구해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한 사람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라고 강조한다. 그의 제자들은 퇴계의 [주자서절요]를 통해 주자학의 참뜻을 알고 본격적으로 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퇴계 자신이 생전에 반성의 자료로 엮어 열독한 [자성록(自省錄)]을 번각·유포해 애송했고 10권짜리 [이퇴계서초(李退溪書抄)] 등을 편찬하기에 이른다.

이런 과정을 통해 퇴계학은 에도(江戶)시대인 도쿠가와 막부 초기에 정착한다. 무사의 나라인 일본은 마침내 유교를 관학(官學)으로 삼았다. 다카하시 스스무(高橋進) 전 쓰쿠바대학 교수는 퇴계학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이 됐다고 분석한다. 존왕과 대의·애국·우국 정신의 고양이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010호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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