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7)] ‘천제의 아들’과 재혼한 소서노의 야망 

‘나쁜 남자’ 주몽 버리고 왕이 된 돌싱녀 

고구려 건국 도왔지만, 주몽의 적자(嫡子) 나타나 왕위 차지
두 아들과 남쪽으로 떠나, 하북위례성 도읍으로 백제왕 올라


▎MBC 드라마 [주몽]에서 주몽 역의 송일국(오른쪽)과 소서노 역의 한혜진.
"백제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이며, 한양 하북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 재위 13년에 죽으니 조선 역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다.”(신채호, [조선상고사]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기원전 37년까지 과부 소서노는 자신의 인생에 그토록 위대한 여정이 펼쳐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서노는 졸본의 부유한 세력가 연타발의 딸이었다. 졸본(卒本)은 압록강의 북쪽 지류인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위치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이 지역에는 여러 세력이 난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작지만 나라를 칭하기도 하면서 서로 싸우고 경쟁했다. 우위에 서거나 살아남으려면 힘을 키워야 했다.

연타발은 풍족한 재물을 이용해 외부 세력과 손잡았다. 문제는 외부인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충성을 확보하려고 그가 쓴 방법은 결혼이었다. 딸과 혼인시켜 동맹으로서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소서노는 북부여 해부루왕의 서손(庶孫) 우태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적통은 아니지만 강국 부여의 왕족이니 방패막이로 손색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가 태어났다. 우태는 어질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소서노와 아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세력 확장에 나섰다. 비류수 유역의 경쟁자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특히 비류국은 여러 대에 걸쳐 왕을 배출해 온 터줏대감이었다. ‘굴러온 돌’ 우태가 치고 나오자 눈엣가시로 여기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주변 세력들의 표적이 된 우태는 자식들이 장성하는 것도 못 보고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과부가 된 소서노는 졸본에서 비류와 온조를 키우며 꿋꿋하게 살았다. 아직 젊은 데다 집안의 재물이 막대해 구혼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 형제를 키우는 어머니가 함부로 남편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비류와 온조를 지켜주겠다는 우태의 수하들까지 거느렸다. 첫 혼사는 연타발의 뜻에 따랐지만 이제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늙은 아버지도 딸의 처지를 헤아리고 재물을 물려주면서 힘을 보탰다. 소서노는 야무지게 부를 쌓아나가며 세상의 움직임을 신중히 살폈다.

기원전 37년 졸본에 낯선 무리가 나타났다. 우두머리는 동부여에서 쫓겨온 자로 ‘주몽’이라고 했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자를 그리 불렀다. 함께 도망 나온 벗 오이·마리·협보와 도중에 만난 현자(賢者) 재사·무골·묵거 등이 그를 열성적으로 따랐다. 마침내 졸본에 이르자 주몽은 부하들에게 큰소리쳤다. “내가 하늘의 명을 받아 이곳에 나라를 열고자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소서노는 관심을 갖고 그들을 예의주시했다. 22세 청년 주몽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나라를 열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기초를 닦을 땅도, 근본을 이룰 백성도 없었다. 궁실을 지을 재물도 없어 무리가 비류수 강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이 서른에 산전수전 겪은 과부가 볼 때 어린아이 불장난 같았다. 그래도 당장 내쫓지는 않고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어쩌면 청년의 자질과 능력이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33세 과부와 22세 청년의 결혼동맹


▎백제 시조 온조왕의 위패를 모신 숭렬전. 남한산성 내에 자리하고 있다.
주몽은 괴상한 자였다. 그는 현자라는 재사·무골·묵거를 여기저기 보내 자기가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자”라고 선전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라는 것이었다. 정탐 보고를 받은 소서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허풍을 치려면 이 정도는 쳐야지.’ 원래 작은 거짓말은 안 믿어도, 큰 거짓말은 통하는 법이다. 사람들의 흥미를 끌면 그 자체로 힘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호기심을 느낀 자들이 주몽의 초막을 찾기 시작했다. 비류수 강변으로 군중이 몰려들었다.

자칭 천제의 아들은 태연히 초막에서 걸어 나왔다. 골격이 탄탄하고 외모가 빼어난 청년이었다. 군중이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주몽은 활과 화살을 집어 들고 말에 올랐다. 7세 때부터 직접 활을 만들었다. 사냥대회에 나가면 적은 화살로도 많은 짐승을 잡아 항상 주목받았다. 주몽이 보여준 활 솜씨는 과연 신묘했다. 말 달리면서 화살을 쏘는데도 백발백중이었다. 군중은 우레와 같은 함성을 터뜨렸다. 부하가 되겠다는 자들이 속출했다.

주몽의 무리는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오이·마리·협보가 새 식구들을 훈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열렬한 추종자들은 건국에 앞장설 전사들로 거듭났다. 그러나 무리가 늘어나고 정예화될수록 고민도 깊어 갔다. 문제는 재정이었다. 장정들을 먹이고 재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초막에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천제의 아들은 빈털터리였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은 ‘건넛마을의 여인(越郡女)’을 찾아갔다.

소서노는 주몽이 올 줄 알고 있었다. 그 사이 과부는 동부여에 사람을 풀어 주몽을 뒷조사했다. 그가 궁궐 마구간지기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어느 날 준마를 알아본 주몽은 몰래 말의 혀 밑에 바늘을 꽂아 놓았다. 혀가 아픈 말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야위어갔다. 대신 다른 말들은 잘먹여 뽀얗게 살찌웠다. 동부여 금와왕이 마구간에 나왔다가 살찐 말들을 보고 기뻐하며 그에게 상을 내렸다. 상은 그 야윈 말이었다. 준마를 얻자 바늘을 뽑고 밤낮으로 먹여 자기가 타고 다녔다(이규보, [동국이상국집]‘동명왕편’).

결국 임금을 기만한 죄가 드러나자 도망쳐서 졸본에 이른 것이다. 그럼에도 주몽은 천제의 아들이라는 둥, 나라를 세우겠다는 둥, 큰소리치며 마치 맡겨놓은 사람처럼 소서노의 재물을 요구했다. 그 뻔뻔스럽고 위풍당당한 태도에 졸본의 과부는 오히려 감탄했다. ‘이거 봐라. 물건이네.’ 만약 주몽이 아부를 떨며 재물을 구걸했다면 퇴짜를 놓았을 것이다. 야망이 크고 배포가 두둑한 사람이야말로 투자 가치가 높았다. 게다가 그의 열기 띤 눈빛은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30세 과부와 22세 청년은 서로 통했고 사랑에 빠졌다.

소서노는 주몽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사실 두 사람은 정략적으로 잘 어울리는 짝이었다. 졸본을 넘보는 세력들을 막으려면 소서노에게는 젊고 용맹한 주몽과 그의 열렬한 전사들이 필요했다. 졸본에 뿌리내리고 나라를 세우려면 주몽은 땅과 백성, 그리고 재물을 가진 소서노와 손잡는 게 바람직했다. 결국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토착세력과 신흥세력의 결혼동맹이었다.

주몽의 고구려, 압록강 북쪽 유역 평정


▎서울 송파구에서 매년 개최하는 ‘한성백제문화제’에서 온조왕 입성 행렬 재현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연상연하 부부는 드디어 고구려를 건국했다. 임금이 된 주몽은 졸본에 흘승골성(紇升骨城)을 쌓아 도읍으로 삼았다. 부분노·부위염 등 좋은 장수와 병사들도 영입했다. 소서노가 재산을 바쳐 도운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라를 세우는데 내조가 많았기 때문에 주몽은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 비류와 온조 또한 자기 친아들처럼 대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주몽은 곧 군사를 일으켰다. 비류수 유역의 여러 세력을 차례로 제압했다. 상류에 위치한 비류국에 이르자 송양왕이 맞이하러 나왔다. 비류수 유역은 땅이 좁아 두 임금을 용납할 수 없었다. 패권을 놓고 힘겨루기가 불가피했다. 송양은 가시 돋친 말로 주몽의 화를 돋웠다. “나는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다.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서 왕 노릇을 했고,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속국으로 들어오는 게 어떤가?”([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상대를 근본 없는 신출내기로 깎아내리고 뼈대 있는 임금인 자신에게 굴복하라는 것이었다. 송양에게는 ‘선인(仙人)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것은 고조선의 옛 땅에서 끊긴 혈통을 다시 잇고자 하는 의지이기도 했다. 주몽은 전가의 보도처럼 ‘천제의 아들’이라고 맞받아치며 활을 쏘아 재주를 겨뤄보자고 역제안을 했다. 선인의 후손이든, 천제의 아들이든 실력으로 증명하자는 것이었다.

송양은 100보 거리에 사슴 그림을 붙여놓고 자신만만하게 활을 잡았다. 그가 쏜 화살은 장담과 달리 사슴의 배꼽을 꿰뚫지 못했다. 반면 주몽은 100보 바깥에 옥가락지를 매달아 놓고 활시위를 당겼는데, 화살이 가락지를 부수며 기왓장 깨지는 소리를 냈다. 송양은 주몽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첫 번째 힘겨루기는 고구려왕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아직 비류국을 복속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졸본에 돌아온 주몽은 신하들에게 아쉬움을 토로했다. 비류국은 고각(鼓角), 곧 의식용 북과 나팔로 위엄을 갖추는데 신생국 고구려에는 그런 것이 없어 저들이 가볍게 여긴다는 한탄이었다. 이때 맹장 부분노가 그 북과 나팔을 가져오겠다고 나섰다. 고각은 비류국의 무기고에 감춰져 있어서 빼내기가 어려웠다. 주몽은 만류했지만 부분노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늘이 준 물건을 어째서 가져오지 못합니까? 대왕께서는 만 번 죽을 위태로운 땅에서 빠져나와 지금 우리나라에 이름을 날리십니다. 천제의 명령으로 하는 것이라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이규보,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부분노는 주몽이 천제의 아들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런 종교적 믿음이 고구려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 떡하니 뒤를 봐주는데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결국 비류국에 잠입해 북과 나팔을 고구려로 빼돌렸다. 뒤늦게 알아챈 송양왕은 사자를 보내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고각의 빛깔을 오래된 것처럼 검게 만들어 놓으니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두 번째 힘겨루기에서도 승리한 것이다.

역학관계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진 것은 재위 2년째(기원전 36년) 여름이었다. 이레 동안 장맛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비류국 도읍이 물에 잠기고 말았다. 송양왕이 갈대 밧줄을 잡고 격류를 횡단하며 피해를 줄이고자 애썼으나 허사였다. 이때 주몽이 새하얀 사슴을 붙잡아 거꾸로 매달고 하늘에 홍수를 일으켜 달라고 빌게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비류국 백성들은 천제의 아들과 힘겨루기를 한 국왕을 원망했다.

민심이 등을 돌리자 송양은 나라를 바치며 주몽에게 항복했다. 고구려왕은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았다. ‘다물’이란 옛 땅을 회복한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고조선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국가적인 의지 표명이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의 북쪽 지류 유역을 평정하고 역사적인 정통성까지 확보하게 됐다.

소서노, 하늘의 성채 짓고 신화 유포


▎백제 21대 개로왕이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풍납토성.
주몽이 밖으로 치고 나가는 동안 소서노는 안에서 내실을 다졌다. 무엇보다 도성과 궁궐을 위엄 있게 짓는 일이 급선무였다. 졸본의 지리에 밝은 그녀는 골령(鶻嶺, 오녀산) 정상을 도읍지로 골랐다. 절벽으로 둘러싸인 산꼭대기에 둘레가 2000보나 되는 평지가 자리했다. 끊이지 않고 물이 솟는 깊은 연못이 있어 식수도 해결됐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산 정상에서 소서노가 쏟아부은 재물로 공사가 이뤄졌다. 보이지는 않는데 일하는 소리가 들리니 마치 하늘나라 장정들이 대역사를 벌이는 것 같았다. 마침내 운무가 걷히자 성곽과 궁실, 누대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기원전 34년). 이름하여 흘승골성(紇升骨城, 오녀산성)! 천혜의 요새이자 신들의 치소(治所)였다.

분지의 백성들은 이 하늘의 성채를 우러러봤다. 상서로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면 황룡이 승천하는 형상을 자아냈다. 사람들은 이곳에 거처하는 왕이 천제의 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경배를 불러일으키는 풍경 때문이었다. 그것은 소서노가 연출한 성소가 아니었을까? 덕분에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이자, 신성한 나라로 여겨졌다(광개토대왕 비문).

그것은 종교와 정치를 아우르는 동방의 오랜 통치술이었다. 주몽이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소서노와 신하들은 신령스러운 이야기, 곧 신화를 지어내 유포했다. 그들은 부여의 건국자 동명왕을 거울로 삼았다. 북쪽 나라 탁리국 임금의 시녀가 하늘로부터 알의 기운을 받아 동명을 낳았고, 활 잘 쏘고 재주가 빼어난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봐 왕이 죽이려 했고, 동명이 도망쳐 강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만들어 줘서 남쪽으로 건너가 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다(왕충, [논형] ‘길험편’).

주몽과 고구려는 바로 그 동명과 부여를 대체했다. ‘천제의 아들’이라는 주몽의 정체성을 정교하게 확립하고 동방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부여의 정통성을 끌어온다는 노림수였다. 여기서 핵심은 난생(卵生), 곧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어머니 유화부인은 다섯 되 크기의 알을 낳았는데 그것을 마구간에 뒀더니 여러 말이 밟지 않고, 깊은 산에 버렸더니 모든 짐승이 호위하고, 구름 끼고 음침한 날에도 알 위에 항상 햇빛이 비쳤다고 한다(이규보,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새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새는 지상의 낡은 세계를 파괴하고 하늘의 최고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이 바로 천제다. 동방에서는 새를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존재로 숭배했다. 따라서 주몽의 난생은 천제의 아들이 하늘의 명령에 따라 땅을 다스린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상징적으로 이야기한다.

이 믿음은 정벌전에도 쓰였다. 기원전 32년 임금이 오이와 부분노를 시켜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을 쳐서 빼앗았을 때 신령한 새들이 궁궐 뜰에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28년 부위염에게 명해 북옥저를 멸하고 성읍으로 삼았을 때도 전설에 나오는 상서로운 난새가 왕궁에 날아들었다고 한다. 이 모두가 하늘의 명령이라는 뜻이다.

신생국 고구려의 기초는 세월이 흐를수록 탄탄해졌다. 주몽의 군사력과 소서노의 경제력은 상생 효과를 발휘했다. 주몽이 정벌전에 나설 때마다 소서노는 내심 흐뭇했다. 남편이 넓혀나가는 고구려를 비류와 온조, 제 자식들이 물려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몽은 딴마음을 품은 지 오래였다. 왕위를 계승할 태자는 따로 있었다.

기원전 19년 4월 부여에서 주몽의 아내 예씨와 아들 유리가 찾아왔다. 주몽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소서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자기가 제2왕비로 밀린 것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자식들의 미래가 캄캄해진 데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주몽은 동부여의 마구간지기로 지낼 때 예씨 부인에게 장가들어 뱃속 아이를 가졌다. 임금을 기만한 죄로 쫓기게 되자 그는 아내에게 후일을 기약하고 길을 떠났다. 나중에 태어난 유리는 장난꾸러기로 자라났다. 새총으로 참새를 잡으려다 물 긷는 아낙의 항아리를 깨뜨리기도 했다. 아비가 없어서 버릇이 없다고 아낙이 꾸짖자 유리는 씩씩거리며 제 어머니에게 물었다. 자기는 왜 아버지가 없느냐는 것이었다. 예씨 부인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부러진 칼 들고 찾아온 주몽의 친아들


▎서울 송파구 방이동 백제 고분군. 분묘 8기가 위치한 이 지역은 공원화됐다.
“네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라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했다. 그래서 남쪽 땅으로 도망가 고구려를 세우고 임금님이 되셨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면 먼저 한 가지 물건을 찾아야 한다. 그분이 떠날 때 ‘내가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 소나무에 물건을 감추어 두었으니 그것을 가지고 오면 자식으로 인정하겠다’고 하셨다.”(이규보,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라는 말에 소년은 날마다 산에 들어가서 찾아 헤매다가 지쳐 돌아왔다. 하지만 물건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월이 무심히 흘러 유리는 어느덧 장성했다. 하루는 집에 앉아 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구슬픈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그 기둥은 소나무였는데 모양이 칠각형이었고 주춧돌 위에 있었다. 문득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는 칠각형 기둥의 일곱 모서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일어나 다가가 보니 과연 기둥 위에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에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이 나왔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부절인가?’ 부절(符節)은 하나의 물건을 갈라서 둘이 나눠 가졌다가 나중에 신분을 증명하거나 서로 알아보는 신표(信標)로 사용했다. 주로 돌·옥·대나무 등으로 만들었는데 특별한 관계에서는 거울이나 칼을 쓰기도 했다. 유리는 기뻐하며 어머니 예씨를 모시고 고구려로 왔다.

졸본에 이른 유리가 칼 한 조각을 바치자 주몽은 다른 조각을 꺼내 합쳐봤다. 부러진 칼은 피가 나면서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됐다. 끊긴 인연도 혈육의 정으로 이어져 온전한 부자가 됐다. 고구려왕은 유리를 받아들이고 기꺼이 태자 자리를 내줬다. 이 모든 일이 부절을 맞추듯이 너무 깔끔하게 맞아 떨어졌다. 소서노는 그것이 찜찜했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내막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몽이 중한 병으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왕은 진즉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치밀하게 후사를 안배한 것이다(실제로 그해 9월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비류와 온조를 친아들처럼 대했다지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사실은 제 혈육을 감춰뒀다가 부절 신화까지 곁들여 번듯하게 불러들인 것이다.

주몽은 ‘나쁜 남자’였다. 그는 졸본의 과부가 가진 재산과 토착세력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제 고구려가 자리를 잡은 이상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소서노는 철저히 기만당했다. 그녀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정략결혼이지만 신의는 지켜야 한다. 소서노가 원한 것은 비류와 온조의 미래였다. 틀림없이 정략적으로 약속돼 있었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는 차갑게 돌아섰다. 낙담한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했다.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에서 환란을 피해 이곳까지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물을 쏟아부어 나라의 창업을 도와 이뤘으니, 어머니의 수고로움과 공로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대왕께서 세상을 뜨시게 되자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 있으면서 군더더기 혹처럼 지내느니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새 나라를 세우는 게 나으리라.”([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자식들의 뜻을 알아차린 소서노는 비장한 결심을 굳혔다. 주몽과 부부의 연을 끊고 고구려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잘 먹고 잘살아라, 하고 제 갈 길 가겠다는 것이었다. 단, 정산은 분명히 했다. 그녀는 왕에게 요청해 금은보화를 나눠가진 뒤 분연히 남쪽으로 향했다. 미지의 세계로 총총 발걸음을 내디뎠다.

소서노의 뒤를 비류와 온조, 그리고 10여 명의 신하가 따랐다. 행렬을 이룬 백성들도 많았다. 오랜 세월 신뢰를 쌓은 졸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낙랑을 지나 마한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마한왕에게 재물을 주고 그 땅의 서북 100여 리를 얻었다. 소서노는 하북위례성(서울 강북)을 도읍으로 삼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국호는 ‘백제’라고 했다(신채호, [조선 상고사]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아들이 다시 쓴 백제사

신생국이 자리 잡기란 험난한 여정이다. 기원전 18년에 창업한 이래 백제는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말갈인들은 부유해 보이는 신생국을 약탈하려고 틈만 나면 침입했다. 낙랑 또한 백제를 속국으로 길들이고자 압박의 강도를 높여갔다. 소서노 여왕은 성을 쌓고 목책을 세워 말갈인들을 물리쳤으며 낙랑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여왕은 그렇게 고군분투하다가 재위 13년째인 기원전 6년에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역사는 소서노의 백제 창업기를 둘째 아들 온조의 것으로 기억한다. 혹시 소서노의 죽음에 뭔가 감춰진 비밀이 있는 것일까? 그해에 서울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했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안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사나운 호랑이는 반란 세력이나 외부 침입을 은유한 것일지도 모른다. ‘늙은 할미’ 소서노는 남자로 변장해 화를 피하려다 원치 않는 최후를 맞았을 수도 있겠다.

그 대척점에 온조가 있다. “국모(國母)를 여의어서 형세가 불안하니 도읍을 한강 남쪽으로 옮겨야겠다”며 하남위례성(송파~하남)으로 천도했다. 기원전 18년에 하남위례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백제를 창업한 게 아니라, 기원전 5년 하남위례성으로 옮기면서 백제 역사를 다시 썼다. 역사에서 어머니를 지워야 할 만큼 큰 갈등이 있었던 게 아닐까? 늙은 소서노가 비류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온조의 측근들이 들고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백성들을 갈라 미추홀로 간 비류도 이해가 된다. 토지가 습하고 물이 짠 곳이지만 정치투쟁에서 패배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비류는 친아버지 우태를 닮아 어질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반면 어려서 친아버지를 잃은 온조는 의붓아버지 주몽을 보고 자라서 야심만만하고 뻔뻔스러웠다. 소서노는 장남인 데다우태를 닮은 비류가 좋은 임금이 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그는 주몽처럼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동생에게 밀려났다.

온조왕은 어머니가 죽은 지 4년 만에 비로소 사당을 세웠다(기원전 2년). 내전이 종식되고 나라가 안정을 찾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소서노는 백제의 국모로 받들어지며 신의 반열에 올랐다. “하기야 창업하는 임금이 성스럽지 않으면 어찌 이루랴(因思草創君 非聖卽何以)!”(이규보,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010호 (2020.09.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