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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10)] 보편 교육을 향한 열망, 훈민정음 창제 

스승 없이도 깨칠 수 있는 28자 문자혁명 

국내·외 인적자원 총동원해 만들어… 반포 전 궁내서 시범 사용도
기득권 학자들 거센 반대에도, 공식문서까지 한글로 바꿔 보급 힘써


▎2009년,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이 훈민정음 반포 563돌 한글날 제막됐다.
[소학]에 따르면 태평성대에는 모든 남자아이가 소학(小學)이란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세종은 그러한 보편 교육의 이상을 가슴 깊이 품었고, 한글을 통해 그 꿈을 이루려 했다. 15세기 조선의 현실에 사로잡힌 신하들로서는 따라가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 그러나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글 창제를 둘러싼 이야기는 잘 알려진 편이나, 우리가 미처 몰랐던 대목도 있다. 세종의 한글 창제를 역사적으로 검토하면서, 다음의 네 가지에 주목했다. 첫째, 왕은 평범한 백성도 교육을 받으면 달라진다고 확신했다는 점이다. 이런 신념이 강했기에 그는 모든 창제 과정을 자기 스스로 주관했다. 둘째, 창제 과정에서 세종은 국내외의 ‘문화 자본’을 종합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는 집현전 학사들뿐만 아니라 유능한 왕자들의 도움도 받았다. 또, 명나라의 음운학자까지도 사업에 끌어 들였다. 셋째, 창제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설득하고자 노력했다. 반대파의 논리에 귀를 기울였고, 이치에 따라 반박할지언정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끝으로, 한글의 용도를 다방면으로 시험했다. 이런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못했는데, 만약 세종이 10년쯤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한글로 말미암아 조선 사회는 크게 변모했을 것이다.

15세기에는 가족을 살해하거나 불효를 저질러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사건이 많았다. 근친상간도 흔했고, 동기간의 재산 다툼도 심했다. 유교 국가를 표방했으나 조선의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진주(경상도)의 어떤 백성이 친부를 살해했는데, 그 소식에 접한 세종은 절망감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부덕해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도다. 일찍이 대신 허조가 상하의 분수를 엄격히 세우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의 주장이 과연 옳았다.”(실록, 세종 10년 10월 3일)

그때 대제학 변계량이 왕에게 [효행록]을 반포하자고 건의했다. 백성들이 책을 통해 도덕적 삶의 가치를 배우기를 염원한 것이었다. 도덕을 가르치고 싶어도 큰 걸림돌이 있었다. 백성은 한문으로 된 어려운 책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궁리 끝에 왕은 삽화를 많이 넣자고 했고, [삼강행실도]가 탄생했다(세종 16년). 백성이 충신과 효자 및 열녀의 언행을 그림으로나마 보고 뜻을 헤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백성은 그런 공부를 할 수 없었다. 배우기 쉬운 우리 문자로 책을 만들 때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할 일이었다.

백성을 가르칠(훈민, 訓民) 올바른 소리글자(정음, 正音)를 만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은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고, 세종 25년(1443) 12월, 드디어 새 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날짜는 아무도 모른다. 실록도 그해 12월 어느 날이었다고만 썼다.

“왕이 몸소 한글(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모양은 옛날 글자(篆字)를 본뜬 것으로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뉘어, 합치면 곧 글자가 되었다. 그것으로 한문(문자)도, 우리 말(俚語)도 모두 다 기록할 수 있었다. 글자는 간단한데도 쓰임이 무궁하니, 이를 ‘훈민정음’이라 불렀다.”(세종 25년 12월 30일)

화장실서 깨달았다? 자나깨나 창제 작업 몰두


▎한문을 못 읽는 백성들에게 그림으로 도덕적 삶의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삼강행실도]. / 사진: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 글에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다. 첫째, 한글 창제의 주인공이 세종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한글은 옛 글자를 모방했어도 소리글자였다는 것이다. 옛 글자를 본떴다고 한 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으나, 완고한 유학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만든 억지스러운 변명이었다. 끝으로, 소리글자 한글의 실용성이 높았다는 평가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옳은 말이었다. 한글이 등장하기에 앞서 설총이 만들었다는 ‘이두’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두는 배우기도 어려웠고, 말과 생각을 기록하는 데도 한계가 뚜렷했다. 세종은 이렇게 한탄했다.

“모든 나라가 저마다 자기 나라의 글자를 만들어 자기 나라의 말을 기록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문자가 없구나!”(성현, [용재총화] 제7권)

독창적인 문자로 평가받는 한글의 아이디어를 세종은 어디서 얻었을까.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일찍이 세종(장헌대왕)께서 화장실에서 측주(廁籌, 용변을 보고 난 뒤 밑을 닦는데 쓰는 대나무로 만든 박편)를 가지고 이리저리 배열해보다가 문득 깨침을 얻으셨다.”(이덕무, [청장관전서] 제54권, “훈민정음”)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왕이 밤낮으로 한글 창제로 고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볼 수 있다.

한글의 형태가 만들어지자, 왕은 이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할 연구가 본격적으로 뒤따라야 한다고 봤다. 그는 궐내에 ‘한글(언문)청’(어떤 기록에는 의사청(議事廳)이라 했다)을 설치하고 집현전 학사 신숙주·성삼문·최항 등 6인을 초빙해 창제 작업을 돕게 했다(세종 26년 2월 16일). 학사들은 한글로 한자의 음가도 정확히 표기할 방법을 연구했고, 한자로 쓰지 못하는 일상의 모든 낱말을 기록하는 법도 시험했다. 원나라 때부터 중국에서는 한자를 음운에 따라 분류한 자전(字典)을 편찬했는데, 거기 수록된 모든 한자의 음을 외국인인 우리가 정확히 아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한글이 있으므로, 원나라의 운서 [고금운회거요(古今韻曾擧要)]와 명나라의 운서 [홍무정운]도 음가를 정확히 표기할 방법이 생겼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 6인에 더해 동궁의 학업을 보좌하는 서연관(書筵官, 총 10명) 중에서도 2~4명을 뽑아 창제를 지원하게 했다(세종 29년 11월 14일, 이석형의 주장). 조선 최고의 인재 10명가량이 왕명을 받들어 수년간 한글 사업에 매진했다.

사업을 완결하기 위해서 세종은 요동에 귀양 중이었던 명나라 최고의 음운학자 황찬(黃瓚)까지 끌어들였다. 왕은 성삼문과 신숙주 등을 그에게 보내 음운에 관한 궁금증을 풀었다. 세종 26년부터 3년 동안 성삼문 등은 13차례나 요동을 왕복하며 [홍무정운]의 음가 표기를 마무리했다.

왕은 재위 기간에 창제 사업을 매듭짓기 위해서, 왕실의 인적 자원도 총동원했다. 글에 밝은 동궁(문종)과 진양대군 이유(세조), 안평대군 이용 역시 이 사업에 참여했다. 왕자와 학사들은 한글에 관련된 사항이면 무엇이든 연구했고, 세종에게 일일이 아뢰어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속설에 따르면, 공주와 승려도 이 사업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직 없다. 여하튼 세종이 국내·외의 인적 자원을 총동원해 창제사업을 펼쳤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다. 왕은 궐내의 벼슬아치(이배, 吏輩) 10여 명에게 최우선으로 한글을 가르쳤다(세종 26년 2월 20일).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인데, 왕은 한글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 궁중에서 시범사업까지 펼쳤다.

신하들은 한글 창제 반대 목소리를 냈다. 특히 대다수 집현전 학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한글 사용으로 인해 자신들이 누려온 지식의 독점이 무너질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장문의 상소를 올려 왕의 한글 사업을 비판한 것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지 두 달쯤 지났을 때였다(세종 26년 2월 20일). 그들의 상소문에서 네 가지점이 눈길을 끈다.

첫째, 한글 때문에 조선의 문명이 후퇴하고 말 것이란 염려였다. 장차 한글을 쓰게 되면 중국의 시선도 고울 리 없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의 문명 수준이 저절로 낮아져 오랑캐가 될 우려가 있다는 걱정이었다. 둘째, 성리학도 결국 퇴보하고 만다는 비관적 전망이었다. 한글만으로도 출세할 수 있게 되면 장차 어느 누가 어려운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겠는가 하는 걱정이었다. 셋째, 교육에 대한 세종의 기대가 지나치다는 식의 주장이다. 왕은 장차 한글을 널리 사용하게 되면 백성이 자신들의 의견과 일치하는 진술서 또는 조서를 스스로 작성하게 돼 재판의 공정성도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문자 생활을 하면 백성의 도덕성도 높아져, 세상이 더욱더 밝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왕자·공주·승려도 참여… 명나라 최고 음운학자 조언 들어


▎세종대왕과 주변 인물들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 (감독 조철현)]. / 사진: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그러나 신하들은 이러한 세종의 기대가 비현실적이고 조급하다며 비난을 쏟아냈다. 그들이 보기에 한글은 국가의 시급한 현안이 아니었지만 세종의 생각은 달랐다. 휴가지에서도 한글에 매달렸고, 성리학 공부에 한창 힘써야 할 동궁(문종)까지도 한글을 위해서 전력을 쏟았다. 이에 신하들은 시간과 정력을 허비한다며 쓴소리를 했던 것이다. 장문의 반대 상소문을 읽고, 격노했을 법하지만, 왕은 노여운 감정을 억누른 채 신하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초월적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논리적 접근을 선택했으니, 과연 세종 다운 일이었다.

세종의 주장은 세 가지 논점으로 간추려진다. 첫째, 왕은 한글이 왜 필요한가를 차분히 설명했다. 설총이 이두를 제작한 것도 백성의 편리를 위해서였고, 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도 그와 똑같은 목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글은 이두의 단점을 크게 혁신한 것으로 함부로 반대할 일이 아니라며 그 자신을 변호했다. 둘째, 한글이 지식인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설명을 했다. 한글이 있기에, 식자가 날마다 사용하는 운서(韻書)를 정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하면서, 왕은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이것을 고치겠느냐?”고 반문했다. 셋째, 창제 사업을 가볍게 여기는 관점은 그릇됐다는 지적이었다. 한글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업이기에 왕도 동궁도 깊숙이 참여하고 있다며 신하들의 왜곡된 시각을 나무랐다.

이번에는 두 가지 논점이 부상했다. 그 하나는 한글은 형상부터 괴기스럽다는 것이었다. 한자의 고상한 느낌을 한글에서는 찾을 길이 없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동궁이 창제사업처럼 가벼운 문제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큰 걱정이라고 했다.

훈구파로 훗날 성종 재위 시절 영의정까지 오른 정창손은 세종의 면전에서 감히 교육의 효과를 부정했다. 그는 [삼강행실도]를 반포했으나 충신·효자·열녀는 늘어나지 않았다며, 도덕을 실천하는 것은 타고난 성품에 달렸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장차 백성을 한글로 교육하더라도 그들의 저열함은 개선되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에 “그따위가 어찌 이치를 아는 선비의 말이란 말이냐?”(세종 26년 2월 20일)라며 세종은 깊이 절망했다. 누구든지 배우고 익히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는 점에서 세종이야말로 공자의 충직한 제자였다.

세종은 허탈한 심정을 감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반대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사 7인(최만리·신석조·김문·정창손·하위지·송처검·조근)을 의금부에 가둔 것이다. 그 이튿날 바로 풀어줬지만 정창손에겐 관직을 빼앗았다. 그러나 넉 달 뒤 그를 집현전에 다시 기용했다. 7인의 학사 중에서 한 사람도 조정에서 쫓아내지 않았다.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왕은 창제 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그리하여 세종 28년 초겨울, 창제 사업이 완결됐다. 세종은 몸소 [훈민정음]의 서문을 지어 창제의 근본 목적을 천명했다.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끝끝내 자신들의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도다. 내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서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이 쉽게 배워서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려 하노라.”

세종 28년 9월 29일, 왕명으로 한글 사업을 함께 했던 예조 판서 정인지도 서문을 지었는데, 그 글에는 두 가지 점이 눈길을 끈다. 첫째, 어려운 한문도 한글로 번역하므로 앞으로는 공부를 더욱 정확히 잘할 수 있다는 것. 한글이 지식층에 도움 된다는 일종의 설득이었다. 둘째, 앞으로는 범죄 수사에서도 한글로 조서를 작성할 것이므로 백성에게도 여간 편리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글은 신분의 높낮이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이득이라는 말이었다. 정인지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 한글의 구성원리를 상세히 설명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한글이야말로 배울 때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세상에 이렇게 편리한 글자가 있었던가.

창제 사실을 공식적으로 반포하기 전부터도 왕은 한글의 활용범위를 넓히려고 힘썼다. 우선 한글로 조선왕조 창립의 역사를 기록해 대서사시 [용비어천가]를 만들게 했다(세종 27년). 문장가로 손꼽히던 권제와 정인지는 왕명에 따라 세종의 6대조 목조(이안사)부터 국가의 기틀을 차례로 마련한 사실을 장편 서사시로 기술했다(국조보감 세종 27년). 그들은 총 125장의 시를 한글과 한문 두 가지로 썼다. 왕은 이 책자를 무려 550부나 인쇄해 신하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다(세종 29년 10월 16일). 그 뒤 [용비어천가]는 국가의 중요 행사 때마다 노랫말로 애용됐다.

빗발치는 반대 상소, 왕은 논리적으로 설득


▎조선왕조 창립의 역사를 한글로 기록한 대서사시 [용비어천가].
세종 28년(1446) 3월, 소헌왕후(1395-1446)가 세상을 떴다. 왕비의 넋을 위로하는 뜻에서 왕은 몸소 찬불가를 지었는데, 한글로 쓴 [월인천강지곡] 3권(보물 제398호)이 그것이다. 진양대군(세조)에게는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보물 제523호)을 한글로 완성하게 했다. 실록에는 왕과 대군이 한글로 2종의 책자를 저술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왕실 차원에서 한글로 소헌왕후의 추모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였다는 점은 기억해야 할 일이다.

정식 반포 후에는 왕은 공식문서를 한글로 작성했다. 대간이 죄를 짓자 세종은 그들을 질책하는 문서를 한글로 작성한 것(세종 28년 10월 10일). 지엄한 통치문서를 왕이 직접 한글로 기록했다는 점도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이로써 중추적인 권력기관 사람들은 모두 서둘러 한글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

그 시절 고관들 가운데는 이미 한글을 익힌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 등이 궁지에 몰린 대간을 극구 변호했을 때, 수양대군은 세종이 의금부에 보낸 한글 문서를 꺼내 보였다. 그러자 이계전 등은 그 문서를 읽고 나서 “대간은 나랏일을 의논한 것뿐이옵니다. 만약 그들을 처벌하신다면, 앞으로는 당연히 아뢰어야 할 일도 감히 거론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세종 28년 10월 10일). 이계전 등 대신들은 즉석에서 거침없이 한글 문서를 읽고 대응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세종은 한글 문서를 이용해서 통치 활동을 계속했다. 어느 날인가는 좌의정 하연 앞에 2~3장의 한글 문서를 펼쳐놓고 비밀리에 국사를 논의했다(세종 30년 7월 27일). 왕은 한글이 국가통치에 긴요한 문서를 생산하는 데 아무런 손색도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증명하려고 했던 것일까. 이런 사실을 두루 감안하면, 왕이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시험에 한글 능력 시험을 포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왕은 임용후보자들에게 훈민정음을 시험 치게 하라며, “문법은 통달하지 못하더라도 글자를 조합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선발하라”고 요구했다(세종 28년 12월 26일).

유네스코도 인정한 문맹 퇴치 공헌


▎조선 세종이 1449년(세종 31년)에 지은 불교 찬가(讚歌)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상권.
한글에 거는 왕의 기대는 컸다.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에서도 보았듯, 세종은 유교 경전도 장차 한글로 번역해 백성의 경전 공부를 돕고자 했다. 실제로도 그는 경전에 조예가 깊은 집현전 직제학 김문에게 명해 사서(논어·맹자·대학·중용)를 한글로 번역하게 했다. 불행히도 그가 중풍으로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사업은 차질을 빚었다(세종 30년 3월 13일).

세종은 김문의 후임으로 김구를 선발, 사서의 번역 작업을 계속하게 했다(세종 30년 3월 28일).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태 뒤에는 세종 자신이 세상을 뜨고 말아, 유교 경전의 번역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지지부진하던 이 사업은 결국 150년가량이나 세월을 허비한 끝에 선조 때 가까스로 마무리됐다. 세종이 몇 해만 더 살았더라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터라 아쉬움이 더욱 크다.

세종은 후대의 왕들도 자신을 본받아서 한글 보급에 힘쓰기를 바랐다. 어린 왕세손(단종)이 공부를 시작할 때가 되자, 세종은 집현전 학사 박팽년에게 지시해 [동국정운]을 곁에 두고 [소학]을 배우게 했다(세종 30년 9월 13일). [동국정운]이 반포되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한글로 표기된 한자음을 조금씩 익히는 가운데 세손은 [소학]의 정신은 물론 한글의 효용도 저절로 깨치기를 바란 것이었다. 이처럼 세종은 사후에도 한글을 통해 조선이 문명적 전환을 이루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문종과 단종은 차례로 숨졌고, 부왕의 뜻을 모를 리 없는 세조도 어찌 된 일인지 한글 보급에 소홀했다. 통치문서에서 한글은 사라져갔고, 한글을 통한 보편 교육은 청사진조차 그려지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 긍정적인 변화가 조금은 나타났다. 임진왜란을 겪고 사회 기강이 무너지자, 광해군은 [삼강행실도]를 대폭 손질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했다(광해 9년, 1617). 그 책자에는 한글 번역도 함께 실려, 세종의 의도에 가까이 다가갔다. 정조 때부터는 왕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윤음(綸音)도 한문과 한글로 동시에 작성됐다.

거듭 말하지만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유교적 이상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글을 이용해서 백성에게 교육의 혜택을 입히려고 했다. 만약 그때 세종이 한글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산업화에 성공한 민주국가 대한민국은 아마도 존재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20세기 후반 세계가 한글의 가치에 주목했다. 유네스코는 1989년 6월, ‘세종대왕 문맹퇴치상’을 제정해 문맹 퇴치에 공헌한 이들에게 해마다 큰 상을 준다.

왕은 인습에 젖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백성이 배우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굳은 신념에 따라 한글을 창제했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널리 사용하고자 힘썼다.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010호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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