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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22)] ‘문명의 접경지’ 아르메니아에서 찾은 생존의 법칙 

유연했을 때 살았고, 고집했을 때 망했다 

‘내륙 소국’ 한계 넘으려 가톨릭 십자군은 물론, 몽골과도 손잡아
‘첫 기독교 국가’ 명분에 이슬람과는 사생결단… 600년 망국 시작


▎12~13세기경 아르메니아인들이 축성한 이란칼레(Yilankale) 전경.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십자군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디아스포라(diaspora)’. 이스라엘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흩어져 퍼트려진 상태’라는 그리스어를 기원으로 한, 돌아갈 땅도 없이 떠도는 수난사를 의미한다.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을 디아스포라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지만, 고전적 개념으로 보면 틀린 말이다. 돌아갈 모국을 가진 해외동포나 전쟁 난민도 디아스포라와 무관하다.

아르메니아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디아스포라를 상징하는 나라다. 한국에서는 ‘이스라엘=디아스포라’로 인식되지만, 서방에서는 아르메니아도 이스라엘에 준하는 디아스포라의 대명사로 받아들인다.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幽囚)로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가 길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벨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에 따라해 국가재건에 성공한다. 2600여 년 지속된 디아스포라 역사도 끝난다.

그러나 디아스포라가 끝난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아르메니아의 비극적 역사가 한층 더 깊다. 아르메니아는 1375년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나라를 잃게 된다. 이후 잠시 독립국으로 나선 적도 있지만, 20세기 말까지 전 세계를 무대로 한 디아스포라 역사가 이어진다. 주권을 되찾은 것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다. 불과 29년 전 독립한 나라로, 616년간 디아스포라 비극의 주인공이다.

예루살렘 네 개의 기둥 중 하나


▎예루살렘 ‘거룩한 무덤 성당’에 있는 예수 무덤을 보기 위해 방문객들이 줄서 있다. 성당은 가톨릭과 아르메니아정교 등 6개 종파가 함께 관리한다. / 사진:AP/연합뉴스
아르메니아에 대한 필자의 기억은 프랑스 여가수 실비 바르탕(Sylvie Vartan)에서 출발한다. 그녀가 부른 ‘러브 이즈 블루(Love is Blue)’를 대학 때 자주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아르메니아인이다. 샹송 ‘라 보엠(La Boheme)’으로 유명한, 샤를 아즈나부르(Charles Aznavour)도 아르메니아 출신자다. 2년 전 타계할 때까지 무려 50여 년간 프랑스를 대표한 국민가수다. 두 가수뿐 아니라, 프랑스 예술·문화 영역에서 활동하는 아르메니아인이 무척 많다.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 출신자는 70만 명에 달한다.

이탈리아 베니스는 유럽에서 아르메니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 출발점이다. 필자가 겨울에 머무르는 민박집에서 보이는, 바다 건너 섬 ‘산 라자로(San Lazzaro)’가 무대다. 아르메니아 수도원이 들어선 곳으로,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베니스 명소 중 하나다. 원래는 나병 환자를 위한 격리소였다. 아르메니아 특별 공간으로 변한 것은 1717년. 터키에서 쫓겨난 아르메니아 정교 신부들을 위한 망명처로, 당시 공화국 베니스의 특별명령에 의해 탄생했다.

평일 오후 3시에 출발하는 산마르코 광장발(發) 배를 타고 몇 번 들렀지만, 중세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유서 깊은 수도원이다. 갈 때마다 궁금한 것은, 아르메니아에 대한 베니스의 ‘남다른 배려’에 관한 부분이다. 유럽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절대 손해를 안 보는 ‘속(俗)과 욕(欲)의 대명사’가 베니스다. 셰익스피어가 쓴 소설 [베니스의 상인] 속의 주인공 샤일록은 탐욕스런 유대인으로 등장한다. 누울 공간을 보고 다리를 뻗는다. 샤일록이 채무자에게 살덩이를 요구한 것은 그 같은 논리가 통하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샤일록만이 아닌 베니스 전체가 한 치의 양보도 허용치 않는, 살벌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 결과가 1000년을 넘긴 베니스의 번영과 안정이다.

산 라자로 아르메니아 수도원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주 예외적인 땅이다. 베니스는 왜 아르메니아인들을 특별히 대했을까?

아르메니아의 위상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도 느낄 수 있다. 특히 예루살렘 구시가지(Old City)에는 아르메니아의 족적이 강하게 남아있다. 구시가지는 한 변의 길이가 1㎞ 쯤 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총면적은 1㎢에 불과하다. 이 좁은 지역은 다시 네 개 권역으로 나뉜다. 유대인과 크리스천, 무슬림, 그리고 아르메니아인이 각자의 권역에서 살아간다. 유대인·크리스천·무슬림과 달리, 아르메니아인은 이스라엘 밖에서 온 집단이다. 그런데도 세계 기독교의 중심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거룩한 무덤 성당(Sancti Sepulchri)’은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성지(聖地)다. 예수가 처형당한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성당의 가운데는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작은 제단이 마련돼 있다. 현지에 가본 사람이라면, 제단 주변을 에워싼 4개 종파(宗派)를 기억할 것이다. 가톨릭, 그리스정교, 에티오피아정교, 그리고 아르메니아정교다. 개신교는 아예 없다.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에 왜 아르메니아의 흔적이 이토록 강하게 남아있을까?

디아스포라 아르메니아의 흔적은 미국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정통 기독교 원리주의의 선봉에 선 커뮤니티가 아르메니아 이민자 그룹이다. 유대인·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글로벌 시대 이전 미국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왔다. 미국 내 아르메니아인의 수도 적지 않다. 10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르메니아 모국의 인구는 300만 명 정도다. 모국 인구의 30%가 미국에 거주하는 셈이다.

기독교-이슬람 접경에 위치한 이란칼레


▎험준한 암벽과 높이 20~30m의 망루는 아르메니아 축성술이 공통으로 갖춘 요소들이다. 이란칼레를 이루는 암벽과 망루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 전 세계에 흩어진 아르메니아인들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다. 파리-베니스-예루살렘-뉴욕으로 이어지는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아르메니아는 서기 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나라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392년보다 91년 앞선다. 아르메니아는 내륙 국가다. 도망가고 빠져나갈 출구도 없는 것이다. 이런 나라가 전 세계 디아스포라에 나설 수 있게 된 이유는, 바로 최초의 기독교 국가라는 역사에서 출발한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서방의 가치 기준으로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성(聖)의 상징’이 바로 아르메니아다. 파리에서의 성공, 공화국 베니스의 특별한 배려, 예루살렘의 역사이자 일부분으로 자리 잡은 아르메니아정교와 커뮤니티, 유대인과 더불어 미국을 지키는 기독교 원리주의자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라는 ‘관록’에서 시작된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준하는 비극적인 역사다.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1940년 대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됐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여러 번에 걸쳐 대규모로 일어났다. 멀리는 11세기와 14세기, 가까이는 19세기와 20세기 초에도 벌어진 100만 명 단위의 사건이다. 주범은 터키를 비롯한 아르메니아 주변의 이슬람 국가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맞부딪치는 현장 중심에 아르메니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방 기독교 국가들이 아르메니아인을 관대하게 대하면서, 현지 정착을 적극 추진한 이유이기도 하다. 최초의 기독교 국가인 동시에, 이슬람에 의해 핍박받는 형제라는 것이 서방 세계에 비친 아르메니아의 이미지다.

필자는 전염병 망명지로 여름 내내 터키와 아르메니아 주변을 맴돌고 있다. 상식이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된다. 생존 본능이랄까? 의식·무의식 중 놓쳤던 중요한 가치와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필자에게 아르메니아는 피상적 수준에 머무르던, 멀고 먼 나라였다. 그러나 전염병 망명 기간 중 곳곳에서 아르메니아의 흔적을 접하며 생각이 달라졌다. 지구상 그 어디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문화·문명·세계관을 가진, 고품격의 나라가 바로 아르메니아다.

두 가지가 돋보인다. 첫째, 일단 생존 능력이 대단하다. 다른 나라에 없는 뭔가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둘째는 고립되지 않기 위한 노력, 즉 주변 국가와 관계 맺는 노력이 대단하다. 군사·외교적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성(城)은 생존 능력이란 점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중세의 고성(古城)으로, 필자가 아르메니아를 재평가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 동남쪽, 시리아 국경선에서는 북쪽으로 100㎞ 떨어진 곳에 들어선 성이 주인공이다. 국도를 따라 자동차로 지나가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마치 신기루처럼, 멀리서 뿌연 형상의 초대형 조형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깎아 자른 모양의 언덕 위에 세워졌다. 지중해 특유의 검붉은 석양빛 때문이겠지만, 가슴을 파고들 정도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와 닿았다. 곧바로 달려갔다.

안내판을 따라가니 성의 뒤쪽에 도착했다. 전문 산악인이 아니면 올라갈 엄두도 못 낼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때마침 양 100여 마리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소년을 만났다. 말도 안 통하지만, 반대편에 도보로 올라갈 입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짙게 어둠이 깔려 어차피 성에 오르는 것은 어려웠다. 다음 날을 기약하고 물러섰다.

호텔로 돌아가 이날 만난 성에 대해 알아봤다. ‘이란칼레(Yilankale)’라는 이름의 성으로, 십자군 전쟁 때 활용됐다고 한다. 테마는 ‘아르메니아와 십자군 전쟁’에 관한 부분이다.

아르메니아의 하드웨어, 건축술


▎1236년 아르메니아는 유럽으로 쇄도하던 몽골과 연합을 맺는다. 13세기 아르메니아 전성기의 시작이었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이야기는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터키-페르시아 연합국인 셀주크 대제국이 서쪽에서 들이닥치고, 동쪽에서는 비잔틴 대제국이 아르메니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이 아르메니아를 공격했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자식 사이에 벌어진 형제간 살인극에서 보듯, 가까울수록 더욱 잔인하게 변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는 이미 5세기, 비잔틴의 한 부분으로 흡수됐었다. 이후 9세기 잠시 비잔틴에서 벗어나지만, 11세기 이후부터는 셀주크 대제국에 종속된다. 나라를 빼앗긴 아르메니아인들은 비잔틴 서쪽 땅으로 몰려든다. 실리시아(Cilicia)라 불리는, 원래부터 아르메니아 출신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비잔틴은 1080년 망명객 아르메니아인들을 위한 ‘실리시아특별교구(Armenian Principality of Cilicia)’를 허용한다.

그런데 1198년 망명객으로 살아가던 아르메니아는 이곳에서 독립 왕국을 선포한다. ‘실리시아 아르메니아 왕국(Armenian Kingdom of Cilicia)’이다. 원래 모국의 땅에서 남서쪽으로 1000㎞나 떨어진 곳에 세운 새 나라다. 이란칼레는 독립 이후 축조한, 실리시아 왕국의 철옹성 중 하나다.

이란칼레에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보였다. 자동차가 성 바로 밑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차에서 내려 성 위로 올라가려 하니 너무도 험하게 느껴졌다. 경사도가 수직에 가까운 높이 50m 정도의 암벽 길을 헤쳐 나가야만 한다. 이만큼 험준하게 만들어진 성은 12세기 말 제3차 십자군 원정 때 진가를 발휘한다. 기존에 있던 비잔틴 성을 아르메니아가 확대 개조한 뒤 십자군에게 제공했다. 물론 공짜가 아니었다. 십자군 전쟁은 종교만이 아닌, 비즈니스의 현장이기도 하다.

건축학도라면 알고 있겠지만, 아르메니아는 대형건물 건설 전문가로 통하는 나라다. 아르메니아만의 독특한 생존능력이 바로 건축기술이다. 4세기에 이미 나무로 만든 돔형 지붕의 초대형 교회를 선보였다. 최근 이슬람 모스크로 바뀐, 이스탄불의 소피아 대성당도 아르메니아에 의해 복구됐다. 9세기 지진으로 무너진 소피아를 아르메니아의 첨단 건축기술을 통해 재건했다.

12세기부터 십자군이 본격적으로 몰려오면서 아르메니아는 바티칸을 대신해 난공불락 성을 건설해간다. 이란칼레도 그중 하나다. 흥미롭게도 이슬람권에서는 이란칼레를 ‘스네이크(뱀: Snake) 성’으로 부른다. 미인 얼굴에 뱀의 몸을 한 전설 속 악(惡)의 상징 ‘샤메란(Sahmeran)’의 거주지가 이란칼레라고 한다. 십자군을 악으로 취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전설이라 볼 수 있다. 뱀은 기독교만이 아닌, 이슬람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악의 상징이다.

십자군 전쟁용 시설로 쓰인 지중해 주변 아르메니아 성은 30여 개에 달한다. 대부분 비슷한 공법으로 세워졌다. 크게 보면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 깎아 자른 암벽 위에 건설한다.

둘. 지름 10m 정도의 원통형 망루(望樓)를 연결해 성벽을 쌓는다.

셋. 성은 크게 보아 3개의 관문으로 나뉘어 운영된다.

이란칼레는 세 개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성이다. 암반 위 건물은 지진이 나도 끄떡없다. 800년이 넘은 고성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유다. 지름 10m, 높이 20~30m에 달하는 원통형 망루는 성 위에 들어선 또 하나의 공격용 공간이다. 상대가 성을 부수면서 올라온다 해도 더 높이 올라선 망루에서 아래를 향해 공격할 수 있다.

세 개의 관문으로 만들어진 방어망은 아르메니아 축성법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우선 1차 관문만 하더라도 입구가 높이 5m 정도 바위 위에 들어서 있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면 올라설 수 없다. 무거운 장비를 들고 산 위로 올라 1차 관문을 통과할 수 있겠지만, 도중에 공격당하기에 십상이다. 한꺼번에 진입할 수도 없고 1~2명씩 기어서 올라가는 식의 공격만이 가능하다. 2차·3차 관문도 마찬가지로 설계돼 있다.

아르메니아나 십자군은 이렇게 불편한 문을 어떻게 썼을까? 간이용 사다리가 답이다. 우군이 오면, 위에서 사다리를 내려 5m 높이의 바위에 오른 뒤 관문을 통과하는 식이다. 음식·무기 같은 물자도 전부 사다리를 통해 운송했다. 운동화 차림에다 아무런 물건도 없이 올라가는데도 힘들고 위험하게 느껴진다. 십자군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성 하나 점령하려면 얼마나 많은 피가 필요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가 만든 성은 식량 보관소이나 무기 창고로도 활용됐다. 3차 관문을 통과한 뒤 나타난 이란칼레 구도를 보면, 돔형으로 만들어진 지하 공간 위에 건물을 올리고, 다시 그 위에다 성벽을 세웠다. 따라서 성안은 적어도 3층 구조다. 돔형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숙소나 교회, 음식·무기 보관소로 활용됐을 것이다. 물론 성안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은 우물이다. 초대형 우물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축성 능력이 하드라면, 외교 노력은 소프트다. 아르메니아가 십자군에 협력한 가장 큰 이유는 비잔틴 때문이었다. 비잔틴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부 도움이 필요했다. 비잔틴 건너 서방 가톨릭이 대안이었다. 오해하기 쉬운데,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정교 비잔틴의 관계는 질투와 반목 그 자체다. 기독교 형제국이기는 하지만, 서로가 정통임을 내세우며 사사건건 대립한다. 이슬람이 출현하면서 협력했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몽골과도 연합했던 외교적 유연함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6년 6월 아르메니아의 코르비랍(Khor Virap, 깊은 우물) 수도원을 방문해 촛불을 들고 있다. / 사진:AP/연합뉴스
결국 베니스의 모략으로 1204년 4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이 아닌, 비잔틴을 무력 공격해 점령하기에 이른다. 1261년까지 37년간 지속된, 이른바 ‘라틴 대제국(Latin Empire)’이다. 비잔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뒤 6명의 가톨릭 십자군 지도자가 현지 왕으로 군림한, 전대미문의 흑역사다. 로마 교황청도 눈감아준 사건으로, 이후 비잔틴과의 관계는 복구 불가능하게 된다.

십자군에 대한 아르메니아의 협력은 비잔틴이 로마 가톨릭에 굴복하는 과정에서 생긴, 국가 생존전략으로서의 결단이었다. 원래부터 비잔틴과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을 통해 아르메니아 재생을 기획했다. 성·식량·무기만이 아니라, 십자군과 함께 이슬람과의 전쟁에도 직접 나서는 공수양면 유용한 현지 가이드가 아르메니아였다.

그러나 십자군 행운은 오래 가지 못했다. 13세기 초부터 몽골이 유라시아 지역으로 몰려들면서 아르메니아도 영향권에 들어간다. 아르메니아가 십자군을 도운 것과 달리, 십자군은 아르메니아를 도와주지 않았다. 막판까지 몰리던 중, 1236년 아르메니아는 몽골 지도부를 찾아가 연합을 제의한다. 말이 연합이지 조공을 바치면서 몽골의 속국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이다. 몽골은 승낙한다. 아르메니아에 대한 공격도 멈춘다. 몽골과 함께 싸운 유일무이한 기독교 왕국이 바로 아르메니아다.

국가적 순교, 낭만적이지만 비극적인

아르메니아는 주변 십자군에게도 몽골과의 연합을 제의한다. 로마 가톨릭은 그런 제의에 반대했다. 몽골도 로마 교황청을 철저히 무시했다. 비잔틴을 상대라고 생각했을 뿐, 로마 가톨릭은 관심 밖이었다. 이슬람을 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십자군과 몽골의 연합은 로마 가톨릭의 반대로 무산된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몽골과 함께 이슬람을 상대로 한 전쟁에 참여한다. 그 유명한 1258년 몽골의 바그다드 점령은 아르메니아가 선봉에 서서 싸운 결과물이다. 아르메니아의 정찰·보급·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몽골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승전은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13세기 말 몽골이 내부 문제로 갑자기 철수하면서 연합은 허공에 뜨게 된다. 비잔틴과 불화에 빠진 것은 이미 오래고, 로마 가톨릭도 이교도 몽골에 협력한 아르메니아를 적으로 간주한다. 이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십자군의 성지탈환 의지도 약해진 상태다. 몽골이 빠져나간 뒤 고립무원에서 버텨나갔지만, 1335년 이집트에서 온 이슬람 용병에 의해 왕국 자체가 멸망한다. 대학살이 단행되고, 이후 디아스포라 역사가 시작된다.

내륙에 갇힌 고립무원 소국(小國)의 생존법은 무엇일까? 십자군 원정과 몽골 정복기에 보여준 아르메니아 행적에서 엿볼 수 있는 교훈이다. 11세기부터 14세기 몰락까지 약 300여 년간 보여준 아르메니아의 생존 외교가 주된 대상이다. 비잔틴과 불화에 이어, 십자군을 통한 부활, 이어 대제국 몽골과 함께한 정복사. 파란만장한 중세 300년간의 아르메니아 역사다. 무사히 타넘으면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슬람에 패한 뒤 전 세계로의 디아스포라에 접어든다. 서방 기독교 세계가 보면, 이교도 이슬람에 끝까지 맞서 기독교 순수성을 지켜낸 순교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고결한 정신과 국가 생존은 함께 하지 못할 때도 있다. 고결함은 지켰지만, 장기적 차원의 국가 생존은 지켜내지 못했다. 역사 속에서의 가정이지만, 만약 아르메니아가 이슬람과의 평화 외교에 적극 나섰더라면 어땠을까? 이교도 정복자 몽골에 머리를 숙였듯이, 외교를 통해 이슬람과의 화해에 나섰다면 어떤 역사가 전개됐을까?

2020년 한국은 북한, 나아가 일본을 가상 적국으로 대하면서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친구와 적, 어느 쪽이 옳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아르메니아 역사를 돌이키면서, ‘만약’이란 가정을 통해 한국의 내일을 알고 싶을 뿐이다. 친구 혹은 적이란 때에 따라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평화와 번영, 나아가 독립과 주권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친구와 적에 관한 원리주의적 개념을 허물어뜨리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낭만적·순교적으로도 들리는 디아스포라지만, 자기 의사에 반해서 타국에 살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아르메니아가 보여준 고품격 역사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아쉽고도 비극적인 과거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생각이 굳어질수록 그 후유증도 한층 더 오래간다. 600여 년 디아스포라는 그 증거다. 시련이 아무리 밀려와도 유연한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항상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010호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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