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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3부)] 근·현대 서구화와 기독교 수용의 주역들(7) 근대민족운동 이끈 전덕기 목사 

상동교회 중심 구국운동 깃발 

스크랜턴 선교사 집 ‘머슴’ 일하다 신앙 갖게 돼
3.1운동 이어 상해임시정부 수립도 상동파가 주도


▎상동교회가 보이는 1920년대의 남대문시장과 명동일대에 조랑말이 지나가고 있다. / 사진:한국민속홍보센터
한국 근대사에서 1900년대는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시대였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강탈당한 을사조약(1905년), 대한제국의 인사권과 행정권이 크게 침해당한 정미조약(1907년) 등 절망적인 사건이 연속되다가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합병조약으로 망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런 1900년대에도 희망은 있었다. 그 절망의 1900년대에 근대민족운동이 본격화됐다. 단군조선 이래 5000년 가까이 지속하던 군주제·농업사회·신분제 등을 민족 지성들이 주체적으로 반성하고 그 대안으로 자유민주제·산업사회·만민평등 등을 목표로 근대민족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시대가 1900년대였다.

그런데 1900년대 근대민족운동은 개신교 세력이 주도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한국의 전통시대를 주도했던 유교 지식인들, 불교 지식인들은 대체로 근대민족운동에 저항적이거나 소극적이었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제·산업사회·만민평등 같은 근대 가치는 아주 맹랑한 소리로 들리거나 아니면 가당찮은 공갈·사기 등으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반면 개신교 세력에 근대 가치는 친숙하고 당연했다. 자유민주제 등 근대 가치를 창출해낸 사람들은 유럽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사람들 즉 개신교 세력이었다. 1517년 마틴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유럽의 종교개혁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 결과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존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로써 로마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는 크게 약화한 반면 근대민족국가, 개인 자유 등이 성장하면서 유럽에서는 자유민주제·산업사회 등이 발전했다. 이렇게 종교개혁 결과 창출된 자유민주제 등의 근대 가치를 바탕으로 건국된 서구 국가 중 대표 국가가 영국과 미국이었다. 1880년대 조선에 개신교를 전파한 주역은 다름 아닌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을 통해 개신교를 수용한 조선의 피지배층들 예컨대 여성이나 노비·농민·노동자·몰락양반 등에 자유민주제·산업사회·만민평등 같은 근대 가치는 그 자체가 복음(福音)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피지배층을 중심으로 1880년대 개신교 세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조선의 장로교·감리교 등 개신교 세력은 1900년대가 되면서 조선 출신의 근대민족운동 지도자들을 대거 배출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서는 이승만·주시경·여운형 등을,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학당에서는 안창호·김규식 등을 배출했다.

또한 한양과 조선 8도의 개신교 교회와 개신교 조직을 통해서도 수많은 근대민족운동 지도자들이 배출됐다. 한양의 전덕기와 이상재, 황해도의 김구, 평안도의 이승훈, 함경도의 이동휘 등이 그런 지도자들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1900년대 근대민족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단연 한양 상동(常洞)교회의 담임목사 전덕기(全德基)였다.

‘내 백성’은 정동 아닌 남대문 쪽 사람들


▎근대민족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되는 전덕기.
전덕기는 1875년(고종 12) 12월 8일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10세가 되던 1884년(고종 21) 부모를 여의고 남대문 쪽에 살던 삼촌 전성여(全成汝)에게 입양됐는데, 삼촌은 숯 장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성여는 자녀가 없어서 조카 전덕기를 입양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로 미뤄보면 전덕기의 부모 역시 가난한 노동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린 시절 전덕기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아마도 부모와 함께 살던 10세까지는 부모 일을 도왔을 것으로, 입양된 후는 삼촌과 함께 숯 장사 일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랬던 전덕기의 삶이 극적으로 변한 것은 1892년(고종여름 스크랜턴 선교사와 메리 스크랜턴 여사를 만나면서부터였다. 1885년 여름 조선 한양에 들어왔던 스크랜턴 선교사는 1891년 1월 가족들과 함께 안식년 휴가차 미국으로 갔다가 1892년 5월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스크랜턴 선교사와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 여사는 정동이 아니라 남대문 쪽에서 선교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는 어서 가서 내 백성(my own people)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서원했던 메리 스크랜턴 여사의 선교 이념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영향을 깊게 받은 스크랜턴 선교사 역시 ‘내 백성’에 대한 선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1885년에 메리 스크랜턴 여사와 그의 아들 스크랜턴 선교사가 한양에 와서 정착한 곳은 서대문 안쪽의 정동이었다. 당시 정동은 한양에서 아주 특별한 공간이었다.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이 밀집해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에게 정동은 외국인 마을처럼 보였고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그 결과 스크랜턴 선교사와 메리 스크랜턴 여사가 세운 시병원·보구여관·이화학당 등에 오는 고객 중에는 왕족·양반 등 특권층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1880년대 말이 되면 정동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학교 등이 넘치도록 밀집하게 됐다. 언더우드의 새문안교회와 언더우드 학당, 아펜젤러의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 등이 정동에 있었다. 여기에 더해 시병원과 보구여관 그리고 이화학당까지도 정동에 있었다.

이렇게 정동에 밀집한 교회·학교·병원에 오는 고객은 주로 특권층이었다. 메리 스크랜턴 여사와 스크랜턴 선교사는 이런 현실에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의 왕족·양반 등 특권층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절박하게 갈망하는 ‘내 백성’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을 절박하게 갈망하는 ‘내 백성’은 여성·노비·상민·노동자 등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동이 아니라 남대문 쪽에 많았다. 당연히 메리 스크랜턴 여사와 스크랜턴 선교사의 입장에서 진정한 ‘내 백성’에게 선교하려면 정동보다는 남대문 쪽이 당연했다.

이에 메리 스크랜턴 여사와 스크랜턴 선교사는 남대문 쪽에서의 선교를 구상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1889년(고종 16) 남대문 쪽 상동(常洞)에 1000여 평 토지를 사들이고 상동약국을 개설한 것이 첫 번째 준비였다. 상동이란 ‘상민들의 마을’이란 뜻으로 상인·노동자 등이 많았기에 붙은 이름이었다. 그런 면에서 진정한 ‘내 백성’을 중시하는 메리 스크랜턴 여사나 스크랜턴 선교사에게 ‘상동’은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스크랜턴 모자와 운명적 만남


▎19세기 말 서울 정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던 러시아 공사관의 전경. 공사관 전망대에서는 경복궁·덕수궁 경희궁이 모두 보였다.
1890년(고종 17)에 스크랜턴 선교사는 상동약국을 상동병원으로 확장했다. 그때 상동병원 안에 상동교회도 병설해 운영했다. 당시 스크랜턴 선교사는 정동의 시병원과 상동의 상동병원 두 곳을 오가며 의료 선교를 하는 한편, 상동교회의 목회도 담당했다. 그러다가 1891년(고종 18)부터 1892년(고종 19)까지 1년간 안식년 휴가를 다녀온 후 상동병원과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893년(고종 20)에는 상동병원에서 상동교회를 분리해 독립시키고, 1895년(고종 22)에는 정동의 시병원을 상동병원에 통합시키기까지 했다. 그 결과 1895년부터 스크랜턴 선교사는 상동의 남대문 쪽을 중심으로 의료 활동과 목회 활동을 하게 됐다.

전덕기가 스크랜턴 선교사를 만난 시점은 안식년에서 돌아온 직후인 1892년(고종 19) 여름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전덕기 목사의 절친 김진호 목사는 두 가지 기록을 전하고 있다. 첫 번째는 1922년 쓴 [목사 전덕기 약사(略史)]이고, 두 번째는 1949년 쓴 [목사 전덕기 소전(小傳)]이다. 문제는 이 두 기록에서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김진호 목사는 첫 번째 기록을 작성한 후, 더 많은 자료를 조사한 결과 두 번째 기록에서 다른 이야기를 썼을 것으로 추청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 기록보다는 두 번째 기록이 좀 더 믿을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삼아 첫 번째 기록과 두 번째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첫 번째 기록이다.

“하루는 전덕기 공이 선교사의 집에 기왓장과 돌덩이를 마구 던져 유리창이 깨졌다. 선생님 한 분이 나왔는데 먼저 꾸중하지 않고 도리어 따뜻한 말을 하며 위로하고 주님을 믿으라고 권고했다. 그때 전덕기 공은 18세였다. 이것이 동기가 돼 그 선생님의 말씀이 전덕기 공의 심금을 감동했다.”(김진호, [목사 전덕기 약사], 1922)

이 첫 번째 기록은 1892년 당시 한양 주민 중 상당수가 선교사들에게 반감을 가졌고, 18세 청년 전덕기 역시 그런 반감에서 스크랜턴 선교사 집에 돌팔매질하다가 스크랜턴의 말씀에 감동해 개신교도가 됐다는 설명이다. 이 기록은 전덕기가 스크랜턴을 만나기 전 개신교와 선교사들에게 매우 반감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두 번째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한 번은 선교사 시란돈(施蘭敦-스크랜턴) 의사가 조선에 들어와 조선 정부의 지시로 전도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교육과 의료만 허락하므로 병원을 개업하고 사무원을 구했다. 전성여씨는 그 조카인 전 목사를 병원에 소개해 일을 보게 했다. 메리 스크랜턴 여사가 전덕기를 보고 끔찍이 사랑해 모든 일을 가르쳐줬는데, 특히 가정예배를 볼 때는 일부러 조선말을 사용해 전 목사에게 알아듣게 했다. 전 목사는 이에 감동해 차차 진리를 배우게 됐다.”(김진호, [목사 전덕기 소전], 1949)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청년 전덕기


▎100여 년 전 창립 당시의 서울 정동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랑채에서 시작했다.
이 기록에서는 첫 번째 기록과 달리 전덕기를 신앙으로 인도한 사람은 스크랜턴 선교사가 아니라 메리 스크랜턴 여사라고 했다. 김진호 목사가 두 번째 기록에서 그렇게 쓴 이유는 여러모로 봤을 때 두 번째 설명이 합리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첫 번째 기록은 개신교도가 되기 이전의 전덕기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그가 청년 시절 기독교와 선교사에 매우 적대적이었다는 이야기들을 접하고 그런 전덕기를 기독교도로 인도한 사람이 스크랜턴 선교사였다고 이해한 결과라 이해된다.

반면 두 번째 기록은 보다 많은 자료를 수집하면서 실제 전덕기가 스크랜턴의 상동병원에 어떻게 취직하게 됐고, 또 개신교에 적대적이던 그가 어떻게 신자가 됐는지를 확인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두 기록을 종합하면 전덕기는 청년 시절 개신교에 적대적이었다가 삼촌의 권유로 18세 되던 여름 그러니까 1892년(고종 19) 여름 상동병원에 심부름꾼으로 취직했다고 이해된다.

그런데 노블(W.A.Noble) 여사는 전덕기에 대해 “그야말로 스크랜턴 박사 부부 집에 부엌 일꾼으로 들었다가 나중에 요리사가 돼 수년간 일을 하면서 스크랜턴 부부의 가정생활에 깊은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전덕기는 상동병원의 심부름꾼일 뿐만 아니라 스크랜턴 선교사의 부엌 일꾼이기도 했던 것이 분명하다.

당시 상황에서 본다면 말이 병원 심부름꾼 또는 부엌 일꾼이지 전덕기는 사실상 스크랜턴의 가정 머슴이었다. 분명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또 삼촌의 강요에 의해 18세의 젊은 전덕기는 어쩔 수 없이 스크랜턴의 가정 머슴이 됐을 것이다.

그런 전덕기는 당연히 스크랜턴 가족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을 듯하다. 그 같은 전덕기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고 가정예배에 참여시켜 신자로 인도한 사람이 바로 메리 스크랜턴 여사였던 것이다. 1892년 당시 전덕기는 18세, 스크랜턴 선교사는 37세, 그리고 메리 스크랜턴 여사는 61세였다.

반항기 넘치는 18세의 청년 전덕기가 61세의 메리 여사에게는 사랑스런 손자처럼 보였음 직하다. 또한 전덕기처럼 가난한 조선 청년이 바로 메리 스크랜턴 여사나 스크랜턴 선교사가 강조하는 ‘내 백성’이었기에 꼭 전도하고 싶기도 했을 듯하다.

1892년 당시 메리 스크랜턴 여사에게는 1890년 수양딸로 삼은 이경숙이 있었다. 스크랜턴 선교사의 가정예배에는 그의 가족을 비롯해 이경숙·전덕기 등이 참여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전덕기는 자발적으로 가정예배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메리 스크랜턴 여사와 스크랜턴 선교사의 권유로 참여했을 듯하다.

그렇게 예배에 참여한 젊은 전덕기는 예배에 집중하기보다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메리 여사는 일부러 조선말을 사용해 가정예배를 봤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 같은 메리 여사의 속 깊은 배려 그리고 성경말씀 덕분에 전덕기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게 됐을 듯하다. 훗날 상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전덕기는 스크랜턴 선교사의 가정예배에서 인연을 맺은 이경숙이 상동교회에서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1892년 스크랜턴 가족과 인연을 맺으면서 감리교 신앙을 접하게 된 전덕기는 22세 되던 1896년(고종 23) 상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전덕기는 매일 남대문시장에 나가 전도하는 등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그 결과 24세이던 1898년(고종 25)에는 상동교회 속장(屬長)이 됐다.

뒤이어 직업 목회자가 될 결심을 한 전덕기는 26세이던 1900년(고종 27) 감리교신학대의 모체인 신학회(神學會)에 입학했다. 그는 27세이던 1901년(고종 28)에는 권사가 됐고, 다음 해인 1902년(고종29)에는 전도사가 됐다. 그리고 1905년(고종 32) 31세 나이에 마침내 상동교회 담임목사가 됐다.

그런데 1898년부터 1899년까지 1년간 스크랜턴 선교사는 제2차 안식년을 다녀온 직후 감리사가 됨으로써 상동교회에서 사역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교회 설교 등 중요 업무가 28세의 젊은 전도사인 전덕기에게 넘어가게 됐다.

이것은 개인 전덕기뿐만 아니라 한국 개신교에서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1902년을 기점으로 한국 개신교의 주도권이 선교사들로부터 점차 조선 목회자들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는데, 그 시작이 전덕기의 전도사 임명이었던 것이다. 겨우 28세의 전도사에 불과한 전덕기가 상동교회의 운영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열렬한 신앙생활과 탁월한 설교 능력 그리고 스크랜턴 선교사의 감리사 사역이 겹쳐졌기에 가능했다.

청년회 간부 맡으면서 독립협회 참여


▎1887년 세워진 배재학당의 양옥 교사(校舍).
전덕기가 근대민족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때는 1898년 24세의 나이로 상동교회 속장이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상동교회에는 ‘엡윗청년회(Epworth League)’라는 청년조직이 있었다. 이 청년조직은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를 기려 그의 고향 엡윗(Epworth)에서 이름을 땄는데, 상동교회에서는 1892년에 엡윗청년회가 조직됐다. 전덕기는 1898년 초에 상동교회 속장이 되면서 엡윗청년회 간부직도 맡게 됐는데, 이것이 근대민족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한양에서는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근대민족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 독립협회의 청년조직은 한양의 개신교 학교와 개신교 교회 조직을 바탕으로 했다. 이에 따라 감리교의 배재학당, 정동제일교회, 상동교회의 청년 신도들과 더불어 장로교의 언더우드 학당, 새문안교회의 청년 신도들이 대거 독립협회에 가입해 있었다. 배재학당의 이승만, 언더우드 학당의 안창호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1898년 초에 상동교회 엡윗청년회 간부가 된 전덕기 역시 자연스럽게 독립협회에 참여하게 됐는데, 이동휘와 함께 재정 분야를 담당했다. 1898년 당시 전덕기와 이승만은 24세로 동갑이었고 이동휘는 26세, 안창호는 22세로 모두 20대 청년이었다. 전덕기는 독립협회에서 근대민족운동의 가치와 방법론뿐만 아니라 안창호·이승만·이동휘 등 또래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24세의 젊은 전덕기가 근대민족운동에 열심히 참여한 이유는 ‘내 백성’을 구원해야 한다는 기독교 사명 때문이었다. 해방 후 귀국한 백범 김구는 전덕기 목사를 추모하면서 “전 목사님은 바로 이 강대상 이 자리에서 왼손을 하늘 높이 쳐들고 또 발을 구르면서 ‘여러분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철저하게 동포와 나라를 사랑하시오’라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이런 언급으로 본다면 젊은 전덕기는 기독교 복음을 개인 차원보다는 민족 차원과 국가 차원에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개인 구원 이상으로 민족 구원 또는 국가 구원을 중요시했다. 이런 생각에서 젊은 전덕기는 독립협회를 통한 근대민족운동을 열심히 하였다. 젊은 전덕기에게 민족 구원과 국가 구원 없는 개인 구원이란 무의미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 복음의 실천 방법에 대해서는 과거로부터 다양한 주장들이 있었고 각각 장단점이 있었다. 예컨대 개인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고 그래서 정치적 탄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반면 민족 구원 또는 국가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개입을 강조하고 그래서 정치적 편향이라는 비난, 나아가 정치적 탄압을 초래할 수 있었다.

독립협회를 통한 전덕기의 근대민족운동은 1898년 연말 독립협회가 강제해산 당하면서 짧게 끝났다. 그러나 독립협회를 통한 전덕기의 근대민족운동 경험은 1902년 그가 전도사가 돼 상동교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면서 기독교 구국운동으로 되살아났다. 서재필의 독립협회는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고 개신교 조직이 뒷받침하는 방식의 근대민족운동이었다.

이승만·김구·남궁억·안창호 등 정예 운동가 결집


▎1946년 8월 15일 당시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8·15 1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자리를 함께한 이승만 대통령과 백범 김구 선생.
하지만 독립협회가 강제해산 당한 뒤로는 국가권력의 탄압으로 시민단체 중심의 근대민족운동이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전덕기 전도사는 거꾸로 개신교 조직이 중심이 되고 시민단체가 뒷받침하는 방식의 기독교 구국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전덕기 전도사의 기독교 구국운동은 특히 기독교 청년조직을 핵심으로 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1903년 5월 앱윗청년회의 전국 확장 및 타 교단 문호 개방이었다. 그 결과 황해도에서 장로교 계통의 구국운동을 벌이던 백범 김구가 진남포의 앱윗청년회 총무가 될 수 있었다.

이어서 전덕기 전도사는 1904년 9월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해 기독교 청년 교육을 주도했다. 이 상동청년학원의 초대 교장으로는 1904년 10월 출옥한 이승만이 임명됐고 주시경·남궁억·이동휘 등이 참여했다. 비록 이승만은 11월 미국으로 떠났지만, 앱윗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통해 전덕기 전도사는 이승만·주시경·김구·이동휘·남궁억·안창호 등 근대민족운동의 정예 분자들을 결집할 수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전덕기 전도사가 주도하는 앱윗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을 ‘상동파(常洞派)’라고 불렀는데, 그 중심 인물은 당연히 전덕기 전도사였고, 상동파 출신들은 민족 구원과 국가 구원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전덕기 목사가 주도한 상동파의 근대민족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 반대 상소, 1907년 헤이그밀사 파견 그리고 1907년 신민회 조직 등으로 나타났다. [백범일지]는 을사조약 반대 상소에 대해 “나는 진남포 앱윗청년회 총무의 직임을 이어받아, 그 회 대표로 뽑혀 경성에 파견돼 상동교회에 가서 엡윗청년회의 대표 위임장을 제출했다. 그때 각 도에서 청년회 대표가 모여 토의하는 것은 겉으로는 교회 사업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순전히 애국운동이었다.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산림학자들을 구사상이라 하면, 예수교인들은 신사상이라 하겠다. 그때 상동교회에 모인 인물로 말하면 전덕기·정순만·이준·김구 등이었다. 회의 결과 상소를 올리기로 하고 이준이 상소문을 지었다”라고 해 1905년 을사조약 반대 상소가 전덕기 목사의 앱윗청년회를 바탕으로 했음을 증언했다.

비록 상동파의 을사조약 반대 상소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 상동파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인 이준이 1907년 헤이그 밀사로 파견됐고, 또한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상동파 출신들과 협력해 1907년 신민회를 조직했다는 사실은 1900년대 근대민족운동의 중심지가 상동교회였다는 증언에 다름 아니라 할 수 있다.

1919년의 3.1운동, 나아가 상해임시정부 수립 역시 1900년대에 형성된 상동파 출신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은 1900년대 근대민족운동뿐만 아니라 1910년대 근대민족운동 역시 상동파가 주도했다는 증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은 1880년대에 수용된 개신교가 불과 20년 만인 1900년대 들어 근대민족운동의 주도 사상이 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으며, 나아가 1900년대 근대민족운동의 중심 인물이 상동교회 담임목사 전덕기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011호 (202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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