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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34)] 조선은 왜 정도전 아닌 정몽주를 추앙했을까 

선죽교의 순교, 성리학 이상(理想)으로 승화 

신념 지키려 죽음 향해 스스로 나선 길, 영원한 충절의 상징으로 봐
조선 건국 반대파는 비극적 종말, 전향한 권홍은 세종 때까지 천수 누려


▎정몽주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경북 영천시 임고서원 전경.
1392년 4월 정몽주에 동조해 이성계파를 탄핵했던 간관들을 살펴보자. 이감은 정몽주의 문생이다. 1385년(우왕 11) 과거에 합격할 때 시험관이 지공거 염국보, 동지공거 정몽주였다. 염국보는 공민왕 대의 명신 염제신의 아들이자, 우왕 대의 권신 염흥방의 형이다. 그와 염흥방은 1388년 무진정변 때 처형됐다. 염국보와 정몽주, 이감의 두 좌주가 모두 이성계파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이감은 강직한 관리였다. 공양왕은 즉위 후 환관들에게 무분별하게 상을 내렸다. 이 때문에 왕실 창고가 비었다. 당시 이감은 종6품 사헌부 규정으로서, 풍저창의 출납을 감찰하는 분대(分臺)였다. 풍저창은 궁중의 미곡을 관장하는 창고다. 그 임무는 관리와 관청, 창고를 감독, 감찰하고 민정을 살피는 것이다. 풍저창이 빈 것을 본 이감은 개탄했다. “집안을 잘 다스리는 자는 먼저 아껴서 써야 한다. 하물며 임금이 자기 사람에게 함부로 하사를 하여, 창고가 비게 만든다면 괜찮겠는가? 환관은 항상 궁궐 안에서 먹는데다, 또 녹봉도 받는다. 그런데 지금 또 쌀을 하사하니, 그 명분은 비록 다르지만 그 비용은 똑같다.” 왕의 낭비를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이감은 환관들에게 썩은 보리를 주었다. 화가 난 환관들이 고소하자, 공양왕은 도당에 이감의 처벌을 명하고 그의 가노를 가뒀다. 이감은 정몽주처럼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김진양과 함께 1392년 4월 4일 유배됐다. 그리고 1392년 7월 28일, 이성계의 즉위교서에 따라 직첩 회수, 곤장 70대, 원지 귀양에 처해졌다. 그 뒤 1410년(태종 10), 사헌장령에 임명됐다. 18년이 흐른 뒤 조선왕조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그 뒤 별다른 행적은 없었다.

정몽주파 권홍의 딸 후궁으로 맞은 태종


▎경기도 용인시 소재의 정몽주 묘.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의 묘가 없는 것과 대비된다. /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권홍(1360~1446)은 안동 권씨 권보(權溥)의 현손으로, 명문세족 출신이었다. 부친은 참찬문하부사를 역임한 권균(權鈞)이다. 권근의 7촌 조카이기도 하다. 기황후의 소생인 황태자 아유시리다라(愛猷識里答臘)의 비는 권겸의 딸로서, 권홍의 재종조모였다. 권겸은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 때 피살됐다. 황태자비는 1368년 원 수도 대도가 함락당할 때 명군에 사로잡히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권홍은 1382년(우왕 8) 과거에 급제했다. 그는 “성품이 온아하고 사람을 접대함이 공손했다”고 한다.([세종실록] 권홍 졸기) 또한 “일찍부터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드러났으며, 전서와 예서에 더욱 공교하였다.”(<해동잡록>) 가문의 전통을 잘 이은 것이다. 1392년 4월, 권홍은 정몽주 당파로서 유배돼 10년간 복권되지 못했다. 1394년(태조 3), 이성계는 무고하게 수장된 왕씨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금으로 법화경을 필사하고 독경하도록 했다. 이때 권홍도 필사자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태종 대에 그의 삶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1402년(태종 2) 3월, 태종은 그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여 의빈(懿嬪)으로 삼았다. 애초 태종은 권씨가 어진 행실이 있다고 하여 예를 갖춰 맞아들이고자 했다. 이에 반발한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의 옷을 붙잡고 힐난했다,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이방원은 태조 대에 한때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세자 이방석을 지지한 정도전, 남은 등의 견제 때문이었다. 그때 민씨와 민무구 등 남동생 4명이 힘을 합쳐 제1차 왕자의 난을 성공시켰다. 그 일을 상기시키고, 이방원의 배은망덕을 비난한 것이다. 이후 원경 왕후는 울기를 그치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았다. 일종의 단식 투쟁이었다. 결국 정식 혼례식은 무산됐다. 그러나 태종은 혼인을 포기하지 않고, 환관과 시녀 몇 명과 함께 약식으로 권씨를 맞아들였다. 원경왕후는 이 일로 마음의 병을 얻어 일생을 불행 속에서 살았다.

태종 대 이후 권홍의 일생은 여유롭고 행복했다. 권홍은 종2품의 가정대부 영가군(永嘉君)으로 봉해졌으며,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또한 지의정부사, 판돈녕부사, 예조판서, 판한성부사를 역임했으며, 정1품 영돈녕부사로 관직 생활을 마쳤다. 자연을 좋아한 그는 남산 기슭에 집을 짓고,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다. 그리고 은사들이 쓰는 폭건과 명아주 지팡이로 소요하며, 좋은 계절이면 손님을 맞아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태종과 세종의 대우도 극진했다. 세종은 매월 초하루에 그를 인견했다. 1440년(세종 22년) 9월 6일, 가을이 깊어갈 때, 세종은 근정전에서 연로한 83명의 전직 관인들을 초청해 양로연을 베풀었다. 이때 권홍 등 4인은 전내에 들어와 왕과 함께 앉았다. 잔치가 끝날 무렵 권홍은 감사의 말과 시 한 수를 바쳤다. “우리 주상 전하는 하늘이 낳으신 성인이시고, 나날이 새롭게 하는 학문으로서 주나라의 인후한 덕을 본받아서 노인에게 연회의 영화를 하사하시니, 양로의 예가 예전보다 더욱 융숭하도다. 성수(聖壽)의 영원하심과 국운(國運)의 장구함이 마땅히 천지와 함께 오래 갈 것이니, 어찌 주나라와 같이 800년뿐이리오, 신 권홍은 해 질 녘 같은 늙은 나이로 오랜 동안 우로 같은 특별한 은혜에 젖어서 태평세월을 편하게 지내며 여생을 즐기니, 진실로 천년에 만나기 어려운 큰 다행이도다. 하물며 지금 지척에서 임금의 얼굴을 즐거이 바라보며 흠뻑 내린 이슬 같은 은덕에 젖을 수 있으니, 감축하는 성심은 몸이 가루가 되어도 잊기 어렵사와, 삼가 사운(四韻)의 시 한 편을 얽어서 향안(香案) 앞에 받들어 드립니다.”

조선의 국운이 장구하고 세종의 수명이 영원할 것을 빌면서, 자신이 누리는 행복에 깊이 감사하는 뜻을 표한 것이다. 세종이 그의 글을 읽고 “내가 이미 아름다운 뜻을 알았다”고 치하했다. 이에 권홍은 갓을 벗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두 번 세 번 숙였다. 세종이 “얼굴과 모습이 윤택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니, 내가 매우 기쁘오”라고 하자, 권홍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1446년(세종 28) 87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한때 조선건국에 반대했지만, 그 조선에서 권홍의 삶은 행복했다. 조선건국에 반대한 인물들의 비극적 종말을 생각하면, 그는 예외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성계 역성혁명 꿈 부추긴 이색의 제자


▎1930년 촬영된 개성 숭양서원 전경. 정몽주의 옛 집터에 지어졌다.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기(柳沂)의 부친은 유후(柳厚)이고, 어머니는 안종원의 딸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상당한 명성을 지닌 명문가였다. 유기의 조부는 유숙이다. 유숙은 공민왕을 원에서 시종한 37명의 원저수종공신 중 한 사람이자 가장 현명하고 유능했다. 하지만 신돈의 음모에 빠져 1368년 처형됐다.

유기의 큰아버지인 유실은 무재가 뛰어나 제2차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을 호종했고, 김용이 일으킨 흥왕사의 난을 평정하는 데도 공을 세워 2등공신에 봉해졌다. 우왕 대에는 왜구와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유기의 아버지 유후는 군부총랑을 지냈다고 하나 [고려사]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권근이 쓴 유기의 외삼촌 안종원의 묘비명에서는 유후를 ‘단정한 사람(端人)’이라고 기술했다. 안종원은 안축의 아들이다. 안축의 아버지 안석은 흥녕현(현 영주시 순흥면) 호장 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했다. 안석이 일찍 죽자, 안축은 동생 안보, 안집을 공부시켜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안축과 안보는 또한 원나라 과거시험인 제과에도 합격했다. 원나라는 1314년부터 과거제를 실시했다. 고려도 그때부터 정동행성 향시를 실시해, 그 합격자 3인을 제과에 응시하게 했다. 그리하여 1353년(공민왕 2)까지 총 12회에 걸쳐 응시해 총 15명이 합격했다.(고혜령, [고려 사대부와 원 제과])

유기는 이색의 손자 사위였다. 이색과 정치적 거취를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색의 장남 이종덕의 맏딸이 유기와 혼인했다.([목은선생이문정공행장]) 유기는 이색과 친밀했다. 1389년(공양왕 1) 12월 1일 이색은 아들 이종학과 함께 파직을 당했다. 그리고 12월 5일 간관의 탄핵을 받았다. 이튿날 순군제공 박위생이 와서 내교(內敎)를 전했다. 내교란 왕비의 명이다. 내용은 장단에 있는 이색의 별장에 나가 지내라는 것이었다. 이색을 보호하고 싶은 공양왕이 내교를 빌린 듯하다. 이색은 대궐을 향해 숙배를 하고 이성계에게 편지를 쓴 다음, 장단을 향해 출발했다. 그 이튿날 새벽 한 수를 지었다.

불등이 깜박이는 속에 새벽의 닭 울음소리 / 내 신세 예나 이제나 바다 속의 물거품 하나 / 홀연히 들리는 경쇠 소리에 깊이 느껴지는 마음 / 봉황이 쇠한 세상인 걸 어찌 꼭 창오(蒼梧)를 바라리오.”([목은시고])

판세 오판한 태종 처남 형제의 몰락


▎서울시 서초구에 있는 태종 헌릉 신도비. 보물 제1804호로 지정됐다. /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이때의 여정을 이색은 장단음(長湍吟)이란 연작시로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첫날 저녁 무렵 문생 유경(劉敬)이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했다. 이색은 6차례 과거 시험관을 지내며 135명의 문생을 배출했다. 신돈은 이제현의 문생이 나라에 가득 찼다고 했는데, 이색은 그를 넘어섰다. 고려의 습속은 과거시험관을 좌주 또는 은문, 과거 합격자를 문생이라고 하여, 일생에 걸쳐 부자 같은 인간관계를 맺었다. 그것이 이색의 정치적 힘이었을 것이다. 유경은 1371년 이색이 지공거일 때 과거에 급제했다. 그는 일찍부터 이색의 주목을 받았다. 1368년(공민왕 17) 이색은 성균관대사성이 돼 생도들에게 5경을 가르쳤다. 고려의 성리학 운동이 그로부터 본격화됐다. 이색에 따르면, “당시 [서경]을 공부하는 자가 80여 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유경의 행동거지가 단연 뛰어났다.”([목은집]) 그 뒤 유경은 이성계의 지우를 받아 그 막료가 됐다. 이성계는 군중에서도 유경과 더불어 유교 경전과 사서를 공부했다. 특히 [대학연의]를 좋아해, 늦은 밤까지 읽으면서, 개연히 세상의 도의를 회복할 뜻을 품었다고 한다. 유경은 무인 이성계의 독선생 역할을 하며, 역성혁명의 꿈까지 품게 한 듯하다.

4월초 이색은 장단현령, 손자 이맹균과 함께 천렵을 갔다. 그 자리에 유기도 함께 했다. “물이 한데 모이는 상류까지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고 음식을 먹으며 즐기다가 늦게야 돌아왔는데, 이 자리에 맹균과 유기가 참석하였다. 이날 문생인 맹사성과 이치(李稚)가 와서 소식을 알려 주기를, 대성(臺省)이 전의 일을 또 논핵하여 함창으로 부처(付處)하였다고 하였다.”([목은시고]) 유기는 이색 가족의 일원처럼 지낸 것이다.

1392년 4월 4일, 이성계파 탄핵에 앞장선 간관들은 모두 유배됐다. 그러나 강회백과 유기는 면제됐다. 강회백의 동생 강회계는 공양왕의 사위였고, 유기는 병중이었다. 그러나 대간의 탄핵을 받아 5월 18일 유배됐다. 1392년 7월 28일, 유기 역시 이감과 같이 이성계의 즉위교서에 따라 직첩 회수, 장 70대, 원지 귀양에 처해졌다. 그 뒤 1401년(태종 1) 1월 15일,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세운 공으로 좌명공신 2등에 책봉됐다. “봉상경(奉常卿) 유기(柳沂) 등 12인은 정성과 힘을 다해서 여러 번 충성을 바치어 익대 좌명하였으니, 3등으로 칭하하고, 부·모·처는 1등을 뛰어 봉증하고, 직계 아들은 1 등을 뛰어 음직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는 자는 조카와 사위를 음직을 주고, 밭 80결, 노비 8구, 2품 이상은백은 25냥, 3품 이하는 은대(銀帶) 1요(腰), 표리 1단, 구마 1필, 구사 3명, 진배파령 6명을 주고 처음 입사하는 것을 허락한다.”([태종실록]) 거의 10년 만에 복권된 것이다. 유기는 곧 간관의 장인 정3품 좌산기상시, 그리고 비서에 해당하는 대언(代言)이 됐다. 태종의 신임이 깊었던 것이다.

유기는 태종의 둘째 처남 민무질과 친했다.([태종실록]) 태종이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태종 즉위 후 민씨 형제는 군권을 장악했고,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다. 유기의 복권은 민무질의 도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분이 오히려 유기의 운명을 파산시켰다. 1407년(태종 7), 태종은 민씨 형제의 권력이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다. 태종은 젊은 시절부터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다. 권력 앞에서는 아버지도, 형제도 없었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복동생 두 명을 죽였다. 아버지 이성계도 결국 왕위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태종이 외척 세력의 신장을 묵과할 리 없었다. 민씨 형제들도 태종이 자신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들도 제거될 것을 두려워했다. 민무질은 구종지(具宗之)에게 “전하가 우리들을 의심하고 꺼리신다”고 토로했다. 불안에 대처할 수 있는 대안은 세자 양녕대군이었다. 양녕대군은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랐다. 자연히 외삼촌들과 인간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민씨 형제들은 하루 빨리 양녕대군이 왕위에 오르기를 고대했다. 1406년 8월, 태종이 왕위를 양위하겠다고 선언하자 신하들 모두는 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민씨 형제들은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태종의 양위 소동은 기실 외척과 공신들의 속마음을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였다. 태종은 민씨 형제들의 생각을 확실히 읽었다. 1407년 7월 민무구·민무질이 모반죄로 탄핵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 첫째가 태종의 전위를 기뻐했다는 것이었다. “지난해에 전하께서 장차 내선(內禪)을 행하려 할 때, 온나라 신민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스스로 다행하게 여겨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습니다. 전하께서 여망에 굽어 좇으시어 복위하신 뒤에 이르러서도, 신민이 기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도리어 슬프게 여겼습니다. 이는 대개 어린아이를 끼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고자 한 것이니, 불충한 자취가 밝게 나타나, 여러 사람이 함께 아는 바입니다.”([태종실록] 7년 7월 10일) 왕조 국가에서, 더욱이 태종 같은 왕 밑에서 이러고도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민무구·민무질은 유배됐다.

줄을 잘못 선 자의 말로


▎이색의 [목은시고] 중 장단음의 첫 구 / 사진:한국고전번역원 고전종합DB
민무질은 정승 이무(李茂)와 가까운 인척이었다. 이무는 민무질을 자식같이 여겼다. 민무구와 민무질이 유배되자, 이무는 그 뒤를 돌보아 주었다. 또한 “민무질이 비록 폄출되었으나 이미 세자의 친권(親眷)이 되었으니, 후일에 용서를 받을 이치가 없지 않다”고 말했다. 언젠가 양녕대군이 즉위하면, 민무질의 시대가 올 것으로 본 것이다. 이무는 또한 유기에게 “근일에 부산하게 민씨의 죄를 청하는데,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유기는 이 말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공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조심하여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제지했다. 과연 그 말을 들었다는 것만으로 그의 운명은 수렁에 빠졌다. 순금사에서 올린 옥사에 따르면, 유기의 이 제지가 “실상은 친구의 정으로 민씨가 죄를 당하게 된 것을 불쌍히 여긴 것”이라고 한다. 억지에 가까웠지만, 민씨 형제들을 제거하려는 태종의 의지가 그만큼 확고했던 것이다. 이무와 유기는 그런 책략의 성공에 필요한 조연들이었다. 이무는 1409년 10월 대역죄로 처형됐다. 유기도 1410년 1월 참수됐다. 아버지 유후, 아들 유방선, 유방경은 유배됐고, 동생 유한은 형조도관의 노비가 되었다. 유한은 태종의 용서로 노비를 면했다. 그는 세종의 신임을 받아 연창군 공주를 양육하기도 하고, 관직은 형조참판까지 올랐다.

유기의 아들들은 신산한 일생을 보냈다. 손자 유휴복·유윤겸의 상소에 따르면, 유방선 등은 1415년 사유를 받아 관노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언관의 탄핵으로 다시 관노로 떨어졌다. 12년이 지난 1427년(세종 9)이 되어서야 지방에서 자유롭게 거주할 자유가 허용됐다. 이듬해에는 서울에서도 거주가 허락됐다. 그리고 1455년(세조 1), 유기의 손자들에게 과거 시험 자격이 주어졌다([세조실록] 1년 8월 26일). 일생 동안 유배지를 전전했지만 유방선은 학식이 뛰어났다. 12세부터 변계량·권근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명이 높았다. 18세인 1405년 사마시에도 합격했지만, 운명의 굴레에 묶이고 말았다. 하지만 유배 중에도 학문에 매진해 명성을 얻었다. 뒤에 세조의 최측근이 된 서거정·한명회·권람·강효문 등이 그 문하생이었다. 세조 원년 유기의 일족이 완전히 신원된 것은 그 덕분일 것이다. 유방선의 아들 유윤겸은 금고가 풀리자 뒤늦게 과거에 급제했다. 그는 아버지 유방선의 가르침에 힘입어 두보의 시에 능통했다. 세종은 유기의 죄가 대역죄는 아니라고 봤다. 가족을 연좌한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유기의 죄가 모반 대역이 아니고 다만 난언(亂言)일 뿐이며, 또 율에는 연좌의 규정이 없다. 성인도 또한 벌은 후사(後嗣)에 미치지 않는다 하였다.”([세종실록] 14년 1월 2일) 세종의 판단이 합리적이다. 유기는 외척을 제어하려는 태종의 정략에 희생됐을 뿐이다. 그래서 유기는 목숨을 잃고, 그 가족들은 비극적 일생을 보내야 했다. 유기는 명문가에서 출생해 여말선초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상식적으로 합당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이성계파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유배됐고, 10여 년간 고초를 겪었다. 그는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고수하지는 않았다. 민무질과의 친분에 힘입어 복권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의 삶을 파괴했다. 가족은 모두 관노로 떨어져 17년 뒤에야 서민이 됐고, 45년 뒤에야 양반으로 복귀했다.

고려에 대한 충성 자기에게 한정한 길재


▎강원도 원주 소재의 법천사 터. 유방선은 이곳에서 한명회·서거정·권람 등을 가르쳤다. /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건국을 전후해 이성계파에 반대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은 대체로 조선왕조에 참여했다. 권근의 전향이 대표적이다. 끔찍한 비극을 겪은 이색·우현보의 자손도 다를 바 없다. 길재는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을 자신 1대에게만 국한시켰다. 1418년, 갓 즉위한 세종이 길재의 아들 길사순을 불렀다. 이에 길재는 아들에게 “임금이 먼저 신하를 불러 보는 것은 3대 이후의 드문 일이니, 너는 마땅히 내가 고려에 쏠리는 그 마음을 본받아 네 조선의 임금을 섬기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조선의 개국을 ‘불의’가 아닌 ‘천명’으로 본 것이다. 그의 절의는 단지 고려왕조로부터 입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을 뿐이다.

1392년 4월 4일 정몽주가 피살되고, 사흘 뒤 지용기(池湧奇)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성계를 위협했던 또 한 명의 무장이 세상을 떠났다. 역성혁명의 마지막 마침표를 상징하는 죽음이었다. 지용기는 고려 말의 대왜구전에서 크게 활약했다. 1388년 위화도회군에도 참여했다. 1390년 회군공신에 책봉될 때 지용기의 서열은 심덕부·왕안덕에 이어 세 번째였다. 회군파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1389년 11월, 그는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의 옹립을 결정한 흥국사 회의에도 참석했다. 이른바 중흥 9공신의 일원이었다. 9공신 중 무장은 이성계·심덕부·지용기·박위였다. 이성계파 무장 중 서열이 세 번째였던 것이다. 그는 중흥공신에 책봉되고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그러나 1390년 5월, 명나라에 이성계의 처벌을 요청한 윤이·이초사건이 발생하면서 그에게 불행이 닥쳤다. 윤이·이초사건의 관련자 명단에 무장 김종연이 있었다. 그와 친한 지용기는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일로 지용기는 김종연 일당으로 탄핵을 받고 삼척에 유배됐다. 더욱이 충선왕의 서증손(庶曾孫)을 자처하는 왕익부를 지용기가 비밀리에 길렀다는 사실이 발각됐다. 간관의 탄핵대로, 그것은 “때를 보아 가만히 그 자를 임금으로 추대해 반역의 음모를 실행”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4월 4일, 간관들이 대거 유배된 것은 조선건국을 둘러싼 1392년 권력투쟁에서 제1차 숙청이었다. 국문을 담당한 관리는 김진양 등의 죄가 참형에 해당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내가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김진양 등은 정몽주의 사주를 받았을 뿐이니 어찌 형을 함부로 집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거절했다. 그렇다면 엄히 곤장을 때려야 한다고 건의하자, 이성계는 “이미 그들을 용서하였는데 곤장을 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다시 거절했다. 이성계는 평생 전장에서 누비며 적들을 죽였다. 황산대첩 때는 왜구의 피가 수일간 대지와 하천에 흘렀다고 한다. 위화도 회군 뒤에도 숱한 정적들의 피가 흘렀다. 역전의 노장이라도 피에 질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앞길에는 여전히 피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건국 뒤에도 수많은 왕씨들이 죽임을 당했다. 종국에는 이방간과 이방석, 두 아들이 이방원의 칼에 피를 흘렸다. 이성계의 일생은 피로 가득했다. 이방원의 일생도 마찬가지였다. 정치, 그중에서도 건국의 정치는 이런 비극을 피할 수 없다.

4월 5일, 조준이 소환됐다. 그리고 4월 6일, 대대적인 인사조치가 이뤄졌다. 배극렴이 수문하시중, 조준과 유만수가 문하찬성사에 임명됐다. 이성계파가 조정을 가득 채웠다. 조정을 완전히 점령한 것이다. 그리고 정몽주의 머리를 거리에 매달고 죄목이 적힌 방문을 붙였다. 정몽주가 당시 고려 사회에서 차지했던 명망을 생각하면, 그것은 매우 도발적인 전시였다. 즉, 어떤 권위와 존엄도 이성계파의 권력 앞에서는 정몽주의 목처럼 하찮다는 것을 뜻했다. 정몽주의 죄목은 이렇다. “없는 일을 꾸며서 대간을 꾀어 대신을 모해하고 국가를 요란시켰다.”([정몽주전]) 없는 일로 대간을 속여서, 이성계를 모해하고 국가를 혼란에 빠트렸다는 것이다. 대역죄였다. 정몽주의 가산도 몰수됐다.

무장 서열 3·4위 지용기·박위의 몰락

정몽주의 저항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첫째, 그의 저항은 왜 그처럼 무모했을까? 이성계에 대한 정몽주의 공격에는 군사적인 요소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정몽주는 오직 왕과 도당의 지지, 간관의 탄핵에 의해 일을 추진했다.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사망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몽주는 비폭력적 저항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상황이 불가피했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 잠재적으로 위협적인 무장들은 모두 제거됐기 때문이다. 이성계파는 군사력에 대해서는 철저한 조치를 취했다. 군대의 지휘를 일원화시키고, 잠재력을 지닌 무장들은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박위도 대표적 사례다. 그는 1389년 쓰시마정벌을 감행해 왜구 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한 명장이었다. 또한 위화도회군은 물론 공양왕의 옹립에도 참여했다. 철저한 이성계파였다. 하지만 그 역시 제거 당했다. 그 계기는 지용기처럼 1390년 5월 윤이·이초사건에서 비롯됐다. 이 무렵 정몽주는 이성계의 진정한 의도에 점차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사시 이성계를 공격하기 위한 무력을 확보하기 위해 박위를 설득했다. 이성계에 따르면, “박위가 나에게 모반하려는 마음이 있음은 오늘날 시작된 것은 아니다. 지난 경오년 공양왕이 한양으로 옮겨 갔을 적에 정몽주의 말을 곡청(曲聽)하고는 나에게 모반하려는 마음이 있었다.”([태조실록] 3년 3월 3일)고 한다. 이때가 1390년 9월이었다. 하지만 그의 전향은 곧 이성계파에게 포착됐다. 그래서 김종연 사건에 연루되자 11월 30일 풍주로 유배시켰다. 1년여가 지난 1391년 9월, 그는 유배에서 풀렸다. 그러나 정작 정몽주가 무력을 필요로 할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정몽주는 아무런 무력도 없이 이성계파와 대결했다.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면, 이성계가 낙마하고 최후의 결단을 주저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방원이 그 허점을 즉시 메꾸자, 그 가느다란 희망조차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정몽주가 이성계의 병문안에 나선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을 향해 스스로 나선 길이었다. 그 사건에서 핏빛 돌과 대나무라는 선죽교의 전설이 만들어졌고, 충절이라는 조선정신이 탄생했다.

둘째, 정몽주는 개혁과 역성혁명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전제 개혁에 대해서는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성계파의 개혁에 찬성했다. 그러나 개혁이 깊어질수록 혁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근본적인 것과의 투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의 토지 소유권을 겨냥한 전제개혁이 대표적이다. 전제 개혁은 재산의 재분배이자 대대적인 부의 이동이었다. 즉, 체제의 핵심부를 이루는 계층 또는 집단의 물질적 기반을 허무는 것이었다. 이를 혁명 없이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정몽주는 이런 투쟁 없이 개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중흥’이라는 개념이 그렇다.

위화도회군 뒤 이성계는 회군을 어떤 형식으로 수습할지 혼란을 겪었다. 섭정부터 역성혁명까지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었다. 정몽주의 대안은 ‘중흥’이었다. 중흥이란 노쇠한 고려의 소생(revitalization), 즉 고려 내의 개혁이었다. 이것은 공민왕이 천명한 대안이었다. 공민왕은 전쟁과 노국공주의 죽음 같은 불운 때문에 좌절했다. 그리고 좌절한 자신을 자책하며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나 그 깊숙한 곳에는 시대정신에 대한 무지가 숨어 있다. 이 무지 때문에 이제현, 이색, 정몽주와 최영을 결합시켜 역사의 대안으로 성숙시키지 못한 것이다. 정몽주의 대안은 무장 이성계와 유종 이색, 외척 이림을 결합시켜 중흥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중흥을 위한 권력은 이성계, 방향은 이색, 정통성은 이림이 담당케 하려고 한 것이다.

혁명 없이 이상세계 실현하려 한 정몽주

그의 대안은 실패했다. 그 이유는 결합될 수 없는 것을 결합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즉, 혁명 없이 불가능한 일을 혁명 없이 실현하려고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정몽주가 어리석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몽주의 세계관을 이루고 있는 성리학은 혁명 없이 이상세계를 실현하려는 논리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었다. 성리학은 천리가 실현된 세계, 예컨대 요순시대를 열망한다. 그러니 역성혁명에 부정적이다. 혁명 없이 현실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이상세계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정몽주가 자신의 세계관에 충실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순을 초월하는 길은 오직 순교 밖에 없다. 이상을 위한 순교를 통해 역사의 영원한 이상으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조선은 정몽주의 죽음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 때문에 정도전이 아니라 정몽주의 위패가 조선정신의 사원인 문묘의 가장 앞자리에 놓인 것이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2011호 (202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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