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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11)] 농사 고초 직접 맛보며 풍흉 점친 왕의 농원 

고종 때 경복궁 후원엔 ‘팔도’가 있었다 

현 영빈관 자리, 매년 봄 조선 8도 곡식 종자 심고 경작
경농재와 부속건물들, 일제 강점기 때 흔적없이 사라져


▎옛 팔도 터를 상징해 청와대 영빈관 앞뜰에 조성된 중앙의 삼도와 좌·우측 품계마당. / 사진:대통령 경호처,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2019년, 228면 전재(轉載)
청와대 영빈관 앞뜰에는 중간이 약간 높고, 좌우가 약간 낮은 길, 그리고 그 좌·우측에 잔디로 구획 지어놓은 공간들이 있다. 이른바 삼도(三道)와 품계(品階) 마당이다.

삼도 중 가운데 길은 임금만 다닐 수 있는 길로 좌우의 길보다 약간 높다. 품계 마당이란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 또는 덕수궁의 중화전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 각 궁의 정전 앞에 품계석을 세워놓고 신하들의 품계에 따라 그 서는 위치를 정할 수 있도록 조성해 놓은 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조선 후기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을 조성할 때 경농재(慶農齋)라는 건물과 임금이 직접 농사지을 수 있는 전답(田畓) 있었다.

예로부터 동아시아의 임금은 몸소 농사를 체험하고 권장하며, 풍년을 기원하고 풍흉을 살피려는 목적에서 궁궐 안에 전답을 만들었다. 이를 대개 ‘친경전(親耕田)’ 또는 ‘적전(籍田)’이라고 했다. 조선 왕실의 경우 이와 관련해 세종 22(1440)년 경복궁 후원에 밭을 두고 직접 경작했고, 세조 2(1456)년에는 경복궁 안에 취로정(翠露亭)을 짓고 그 남쪽에 2~3경(頃)의 논을 만들어 관가(觀稼: 농사짓는 일을 살펴보는 것)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거의 폐허 상태였던 경복궁 중건은 고종이 즉위한 이후인 고종 2(1865)년 4월,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의 명에 의해 시작됐다. 흥선대원군 책임 하에 시작된 경복궁 중건은 그로부터 3년 3개월 후인 고종 5(1868)년 7월 2일 고종과 왕실이 이어(移御)함으로써 완료됐으며, 신무문 밖에도 새롭게 후원이 조성됐다. 후원의 오운각 권역의 건물들과 융문당, 융무당 권역의 건물들은 후원 조성 약 1년 후인 고종 6(1869)년 7월 건립됐다.

후원 조성 약 25년 후인 고종 30(1893)년에는 후원 서쪽 궁장 인근에 경농재와 부속 건물들이 건립됐고 앞쪽으로는 논밭을 8구역으로 나눠 친경전이 만들어졌다. 이 논밭의 이름은 친경전 또는 적전이라는 본래의 이름보다는 별명인 ‘팔도 배미’로 더 많이 불렸다. ‘배미’란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의 하나하나의 구역을 말한다.

따라서 팔도란 당시 조선의 전국 8도, 즉 함경도·강원도·경상도·평안도·황해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를 각각 나타낸 것이다. 고종은 매년 봄 신하들을 거느리고 팔도 배미에 거둥(擧動)해 각 도에서 올라온 곡식의 종자를 심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동아일보] 1921년 5월 22일 자 ‘조선민족미술관을 경농재에 건설키로’ 제하의 기사에는 “경농재 관풍루(觀豊樓) 앞뜰에 작은 규모의 논과 밭이 있는데 만민에게 농사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친히 고초를 맛보며 조선팔도의 풍흉을 점치기도 하던 곳”이라 해 팔도 배미의 용도와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임금 친경(親耕) 때 사용하려 경농재 등 세워


▎경농재 관풍루 / 사진:대통령경호처,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2019년, 123면 전재
청와대는 이러한 역사에 근거해 1998년 6월부터 2000년 6월에 걸쳐 영빈관의 앞뜰을 8개 권역으로 나누고, 아울러 옛 궁궐 정전(正殿) 등에서 볼 수 있는 삼도와 품계를 나타내는 마당을 만들었다. ‘북궐도형’에는 팔도 배미 터를 동쪽에 큰 규모로 3개, 서쪽에 큰 규모로 1개, 작은 규모로 4개 등 8개 구획으로 나누고 있는 것으로 봐 동쪽은 함경도·강원도·경상도의 3개 도를, 서쪽은 평안도·황해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5개 도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북궐도형’과 1938년쯤 제작된 ‘경무대관저부지배치도(景武臺官邸敷地配置圖)’, 그리고 현재의 영빈관 위치 등을 비교해 보면 경농재의 위치는 현재의 청와대 영빈관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경농재에서 ‘경농’이란‘ 농업을 경사스럽게 여긴다’라는 뜻이다. 경농재는 고종 30(1893)년 팔도의 뒤편에 관풍루(觀豊樓)·대유헌(大有軒)·지희실(至喜室)·양정재(養正齋)·중일각(中一閣) 등의 부속 건물들과 함께 지었다. 경농재 일곽(一廓) 건물은 그 명칭과 팔도 배미와의 위치 등에서 볼 때 임금의 친경 때 사용하기 위해 마련한 건물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경농재에서 고종은 신하들을 알현하고 칙지(勅旨: 황제의 명령)를 내린 경우도 있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32(1895)년 7월 4일 자 기록에 의하면 “궁내부 협판 이범진이 경농재에서 고종으로부터 칙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 경농재는 친경 이외에 다른 용도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상이 경농재에 나아갔다. 궁내부 협판이 칙지를 받았다. 이때 입시한 궁내부 대신 이경직, 시종원경 이재순, 우비서랑 이재극·윤덕영, 궁내부 협판 이범진이 차례로 시립(侍立)했다([승정원일기] 고종 32(1895)년 7월 4일).

경농재를 비롯한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의 건물들은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1912년 이후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됐다. 1921년쯤 경농재 일곽은 [동아일보] 1921년 5월 22일 ‘조선민족미술관을 경농재에 건설키로’ 제하의 기사에서와 같이 소유주인 총독부에 의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4~1961년) 등이 개관해 운영할 조선민족미술관에 대여될 처지에 놓였었다.

[동아일보] 1922년 1월 6일 ‘경농재를 이건하야’ 제하의 기사를 살펴보면 “위치의 부적절성과 기타 사정으로 경농재를 남대문 근처 파밀리호텔 내 2000평의 부지에 옮기고자 하는데 이것도 비용과 시간이 많이 걸려 매우 걱정스럽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도 적절하지 않았는지 조선민족미술관은 1924년 4월 9일 경복궁의 집경당(緝敬堂)에서 개관됐다.

결국 경농재가 옮겨갔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므로 1922년까지도 경농재는 당시의 위치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1926년 제작된 ‘신무문외관사배치도(神武門外官舍配置圖)’를 보면 경농재의 팔도 배미 지역에 관사 배치 계획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938년쯤 제작된 ‘경무대관저부지배치도’에는 경농재에도 관사가 들어서 있도록 계획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경농재의 건물들은 총독 관저와 직원들 관사를 짓는 과정에서 일괄적으로 또는 단계적으로 철거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농재에는 여러 채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이 관풍루는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경농재 18칸(間) 중 남쪽 2칸을 반루(半樓) 형식으로 짓고 현액을 건 경농재 건물의 일부분이다. 여기에서 ‘관풍’이란 ‘풍년을 본다’는 뜻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삼청동으로 옮긴 것으로 알려진 대유헌


▎1926년 경농재 권역(왼쪽 사진)과 1938년쯤의 경농재 권역. / 사진:국가기록원(합본 편집)
[동아일보] 1921년 5월 22일 자 ‘조선민족미술관을 경농재에 건설키로’ 제하의 기사 내용 관련 사진을 통해 관풍루의 형태와 현액을 윤곽만이라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33년 12월 3일 자 ‘서울 고금종담(古今縱談)33, 경농재와 관풍각’ 제하의 제목이나 내용을 보면 관풍루 대신 관풍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건물의 형태상 ‘각(閣)’보다는 ‘누(樓)’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지도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1927년 제작된 ‘경성시가도’에는 경농재라는 명칭과 함께 건물의 형태가 표기돼 있으며, 1937년에 제작된 ‘경성부관내도’에도 해당하는 위치에 형태로써만 표기돼 있어 적어도 1937년쯤까지는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쯤 만든 ‘궁궐지(宮闕志)’에 의하면 대유헌(大有軒)은 경농재의 동쪽에 있으며, 8칸 반(半)으로 기록돼 있다. 경농재의 부속 건물 가운데 하나인 대유헌에서 ‘대유’란 ‘크게 소유한다’ 즉 풍년을 뜻한다. 이 대유헌에서도 고종은 여러 차례 신하들을 알현하고 칙지를 내린 바 있음을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대유헌도 왜성대에 있던 조선총독의 관저를 경무대에 신축하면서 해체, 이전됐다.

이와 관련해 [동아일보] 1939년 3월 7일 자 ‘이전하는 대유헌’ 제하의 기사를 보면 대유헌은 총독부 관사로 사용되다가 1939년 조선총독 관저 건립을 위해 해체돼 종로구 삼청동 뒷산 약수터 부근으로 이전됐음을 알 수 있으며 현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경복궁 신무문(神武門) 밖 경무대(景武臺)에 있는 대유헌이라는 건물이 이번 총독관저 신축상 옮기지 아니할 수 없어 이제 헐려간다. 이 건물은 명치(明治) 25년인 이태왕(李太王) 즉위 30년 음력 4월 25일에 창건된 바로 지금부터 45년 전에 경농재 속에다 신축된 것인데 대유는 곧 대풍을 의미하는 것으로 황제가 직접 농원에 출어해 각 도에서 들어온 종자로서 경운하는 것과 농사를 독려하시던 곳이다. 근대에 와서는 총독부 관사로 사용하던 것인데 이 집은 삼청동 뒷산 약수터 부근에 이전한다 해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은 어제(御製)로 붉은 비단 한 필 40척에 달하는 것으로 당시 교시강원검교필선(敎侍講院檢校弼善) 민경호의 본교근서(本敎謹書)인데 전중(田中) 통역관이 국어로 번역 중이다. ([동아일보], 1939년 3월 7일)

현재의 청와대 자리인 경복궁 신무문 밖의 후원은 경복궁이 중건될 당시 함께 조성됐다. 그리고 약 1년 후인 고종 6(1869)년 7월에는 오운각 권역의 건물들과 융문당 권역의 건물들이 건립됐다. 그러나 경농재 지역의 건물들은 후원 조성 약 25년 후인 고종 30(1893)년에야 건립됐다. 후원을 조성하면서 25년의 차이가 나는 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경농재의 또 다른 부속 건물인 양정재는 규모와 위치 등으로 볼 때 아마도 경농재일곽에서 일종의 안채(內堂)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경농재의 부속 건물로서 양정재와 관련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곳 양정재는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7년) 나신 곳, 즉 탄강지(誕降地)인 양정재’와 이름이 동일하다. [승정원일기] 고종 3(1866)년 3월 29일 기록에서 양정재를 봉심(奉審: 능묘나 사당을 찾아가 살펴보는 것)하고 있는 것을 봐 양정재의 위치가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으나, 고종 당시인 1866년에도 양정재는 잘 관리되고 있었음은 알 수 있다.

인원왕후는 숙종의 두 번째 계비로 본관이 경주인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이다. 숙종 27(1701)년 숙종의 첫 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죽자 이듬해 간택돼 왕비에 책봉됐다. [영조실록] 33(1757)년 3월 26일의 내용에 따르면 ‘인원왕후는 순화방 사제(私第)의 양정재에서 탄강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속 건물 이름으로 남은 인원왕후 탄강지


▎‘북궐후원도형’ 중 경농재 지역의 건물 배치. / 사진:문화재청, [경복궁(景福宮)], 2002년, 428면 전재
임금이 친히 대행(大行: 죽은 왕과 왕비에게 시호를 올리기 전에 부르는 호칭) 대왕대비의 행록(行錄)을 지었다. (…) 그 글에 이르기를 “우리 대행 자성(慈聖: 왕의 어머니 또는 그에 대한 호칭)은 바로 우리 성고(聖考: 왕의 아버지) 숙종대왕의 계비로서 성은 김씨이고 본관은 경주인데, (…) 정묘(숙종 13)년 9월 29일 축시에 우리 자성께서 순화방(順化坊) 사제의 양정재에서 탄강하셨으니, 바로 (증조) 조희일의 구제(舊第)다([영조실록] 33(1757)년 3월 26일).

위는 인원왕후 김씨가 별세하자 영조가 친히 지은 인원왕후 행록(行錄: 일생 행적을 간추려 기록한 글)이다. 순화방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북부 12방 중의 하나인데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효자·신교·궁정·창성동 각 일부와 체부·누하·누상·통의동 각 일원에 해당하며, 이 행록을 통해 인원왕후의 친가와 외가의 계보, 그리고 탄생한 곳이 순화방에 있었던 조희일이 살았던 집 안 양정재임을 알 수 있다.

조희일은 인원왕후의 외할아버지인 조경창(1634~1694년)의 할아버지로서 쌍정문(雙旌門: 정문이란 충신·효자·열녀에게 왕이 하사하는 문)을 받아 오늘날 종로구 효자동의 이름을 만든 효자 조희정과 조희철의 동생이다. 또한 인원왕후의 외할아버지 조경창은 운강(雲江) 조원의 증손이다.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교 내에는 조원의 손자 조석형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 ‘운강대(雲江臺)’ 각자(刻字) 바위도 남아 있어 이 지역이 인원왕후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왕자 연잉군 때는 물론 특히 세제(世弟)때 경종과 인원왕후의 비호를 받아 목숨을 유지한 바 컸다. 이에 영조는 즉위한 뒤 정성으로 인원왕후에게 효도를 다했으며 인원왕후가 별세한 뒤로도 지극한 추모의 정을 표시했다. 아래 실록의 내용을 통해 양정재가 조학천의 집 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담양부사를 역임한 조학천은 조희일의 6대 종손이자, 조경창의 형인 조경망의 현손(玄孫)인데 아들이 없어 형 경창의 셋째 아들 조정하를 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회가(回駕: 왕이 가마를 돌려 돌아가는 것)할 때 양정재에 역림(歷臨)했다. 양정재는 바로 조학천의 집인데, 인원왕후가 여기에서 탄생했다. ‘어제 양정재기(御製養正齋記)’를 친필로 써서 판(板)을 걸기를 명했다. 조학천을 승서(陞敍: 품계를 올려주는 것)하고 조명욱(조경창의 손자)을 우직(右職: 지위가 높고 중요한 직위)에 조용(調用: 관리로 등용하는 것)하며, 사재감계(司宰監契) 동인(洞人)들에게 복호(復戶: 충신·효자·군인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해 주던 일)를 3년 동안 주라고 명했다([영조실록] 34(1758)년 3월 9일).

인원왕후에 대한 효성 지극했던 영조


▎경농재 관련 궁궐지 내용(1907년). / 사진:이성우
이 양정재는 현재 전하지 않고 그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양정재가 육상궁(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의 동편 담 밖에 있었다는 것은 아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육상궁은 현재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의 서쪽 궁장을 청와대 영빈관과 이웃하고 있다.

임금이 양정재에 나아갔다. 양정재는 바로 인원왕후의 외가인데, 왕후가 이 집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임금이 성모(聖母)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육상궁을 전배(展拜)하는 길에 들른 것이다. 양정재는 육상궁 동편 담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술회문(述懷文)을 지어서 세손에게 명해 벽에 걸고, 집주인 조학천 부자(父子)를 모두 조용(調用: 관원을 골라서 등용함)하라고 명했다. 이어 육상궁에 나아가 하룻밤을 유숙했다([영조실록] 46(1770)년 9월 25일).

그런데 아래 [영조실록] 51(1775)년 8월 4일 기록을 보면이 당시 양정재는 조희일의 후손 소유가 아니고 이미 윤광심(인원왕후의 조카인 윤동절의 아들)의 소유로 넘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윤광심에게 구마(廐馬: 왕궁 안 내사 복시에서 기르며 왕이 거둥할 때 사용하는 말)를 특별히 하사하면서 양정재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표현하고 있다.

순화방 노인들을 불러 보고 술을 내렸다. 김효대에게 이르기를 “경 등을 또한 가인(家人)의 예로써 볼 것이니, 각자 먼저 술잔을 들라” 했다. 은잔(銀盃) 하나를 김효대에게 특별히 내려줘 국구(國舅: 왕의 장인, 여기서는 인원왕후의 아버지 김주신)의 집에 보관해 두도록 명했다. 양정재 주인 윤광심에게는 구마를 특별히 내려서 광명전 앞에서 친히 받아 가도록 하고, 노인들에게는 각자 비단 한 필씩을 내려줬다([영조실록] 51(1775)년 8월 4일).

순조 30(1830)년쯤 지은 [한경지략]에는 “김주신제(金柱臣第): 순화방 대은암동에 있으며 연호궁의 곁이다. 이곳 양정재는 인원왕후께서 탄강하신 곳”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서 인원왕후의 아버지인 김주신의 집에 양정재가 있는 것으로 기록된 것은 분명 오기(誤記)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양정재가 있는 마을 이름이 대은암동이며 또 양정재 곁에 연호궁(延祜宮: 영조의 후궁인 정빈이씨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조 역시 양정재에서 재숙(齋宿)했었고 호조에 명해 수리하게 하는 것에서 보듯 양정재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또한 아래 기록은 순조는 물론 그 이전 영조 및 정조가 양정재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며 참배한 것과, 또한 양정재를 지켰어야 할 가문이 몰락해 양정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음을 잘 전하고 있다.

양정재 지켰어야 할 가문의 몰락


▎1909년 4월 5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친경식을 진행하고 있다. 일제가 이런 사진을 공개한 것은 민심 달래기 차원이었다. / 사진:한미사진미술관
김재찬이 말하기를 “양정재는 곧 고 재신(宰臣)인 조희일의 집으로, 인원왕후가 탄강한 곳입니다. 영조 때는 성가(聖駕)가 여러 번 임하였었고, 선대왕께서도 일찍이 수가(隨駕)하셨었는데, (…) 근래에는 본 주인이 영체(零替: 쇠락함)해 연달아 세를 놓아 팔고 하여 막중한 어제(御製)를 봉안한 집에 사람들이 섞여 살아서 매우 어수선합니다. 청컨대 거동 비각(車洞碑閣)의 예에 따라 담을 둘러 이를 구별하고 봉심·수호(守護)해 사면(事面)을 존중히 하소서.”([순조실록]13(1813)년 4월 20일)

또한 양정재는 위 [영조실록] 기록에서 육상궁의 동편 담장이라는 기록과 [한경지략]에서 연호궁 곁이라는 기록을 통하여 볼 때 육상궁과 연호궁의 인근, 즉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중 현재의 청와대 영빈관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승정원일기] 고종 5(1868)년 윤사월 18일 기록에 의하면 연호궁 사우(祠宇: 사당)는 창의궁으로 옮겨졌다가 [고종실록] 7(1870)년 1월 2일 기록처럼 육상궁 내의 육상궁 별묘로 옮겨져 합봉됐다고 하고 있어 연호궁 터는 일부 건물만 남았거나 빈터였을 수 있다. 물론 양정재의 훼철 시기도 명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경농재와 부속 건물들이 고종 30(1893)년에야 건립되는 것으로 봐 양정재는 후원 조성 당시부터도 계속 존속하다가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의 서쪽 궁장 일대를 정비하고 경농재와 부속 건물들을 건립하면서 훼철되거나 재정비됐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양정재란 이름이 경농재의 안채 격인 건물 이름과 동일한 것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경농재의 한 건물 이름을 양정재로 정한 것은 경농재 일대가 어쩌면 양정재의 유허(遺墟)였음을 기념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농재에는 관풍루·대유헌·지희실·양정재·중일각 등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대일 항쟁기를 거치면서 그중 단 한 채의 건물도 남아 있음이 확인되지 않는다. 어쩌면 근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렇지 어딘가에 이름을 다르게 해 한 채라도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섞인 바람을 가져 본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하게 삼청동 약수터로 이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대유헌에도 남다른 관심이 쏠린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11호 (202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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