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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11)] 성군(聖君)의 밑거름 된 왕성한 독서량 

‘읽고, 쓰고, 말하기’ 습관이 태평성대 만들었다! 

59권짜리 고전, 30번씩 읽어… 고전 공부하고 토론하며 결론 내려 노력
[태종실록]도 보려 했으나 ‘공정성’ 우려한 신하들 반대에 마음 접어


▎세종대왕의 왕자 시절 독서도. / 사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유럽에서 10여 년을 살다 보니 한국은 공부를 강조하는 나라인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그로 인해 이만큼 빠르게 성장한 것이 사실이고, 공부 특히 학교 성적만 강조해서 폐단을 낳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공부제일주의 나라로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한 이가 세종이 아니었을까. 왕은 매사를 공부로 풀었으니 말이다. 세종의 공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공부벌레였다. 어느 날 신하와 대화를 나누면서 세종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렇지.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성실히 공부하였소.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오.”(실록, 세종 1년 2월 17일)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평소 독서를 너무 좋아한 세종이 잠시 몸이 아팠다. 이때 부왕(태종)이 환관에게 명해 방 안의 서책을 모두 감췄다. 그런데 책을 다 치우기가 민망했던지 송나라의 구양수와 소식이 주고받은 서간집 [구소수간(歐蘇手簡)]만은 남겨뒀다. 그랬더니 왕자는 그 책을 부지런히 읽었단다. 거의 독서광이었던 셈이다.

왕이 된 뒤로도 책 읽는 습관은 여전해, 식사 시간에도 상 옆에 책을 펴놓고 읽었단다. 밤이 깊도록 독서 삼매경에 빠지기 일쑤였다. 덕분에 왕은 여러 방면에 능통했다. 읽어보지 않은 중국과의 외교문서가 없을 정도였다. 기억력까지 뛰어나 “나는 책을 읽고 나서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세종 5년 12월 23일, 1423년).

부모들은 자식이 공부하지 않아서 걱정인데, 세종의 부왕은 그 반대였다. 젊은 왕이 밤새도록 책을 읽고 있자 태상왕(태종)은 아들이 너무 피로할까 염려됐다. “과거시험을 보는 선비라면 모르겠으나, 어찌 임금이 이렇게까지 고생하느냐”며 부왕은 탄식했다. (세종 3년 11월 7일) 참고로, 태종은 고려 말 과거시험에 급제한 수재였다.

세종의 스승은 누구였을까. 왕자 시절 이수라는 학자가 그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수는 탁월한 문장가로 나중에 정2품의 대제학까지 올랐다.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 조 고사본말) 대학자 신인손에게서도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 13년(1413), 신인손은 승정원 주서(정7품)로 대궐에 들어와 여러 대군에게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고, 유독 충녕대군(세종)은 그를 몹시 따랐단다. 자신이 그린 난초와 대나무 그림을 그려서 선물할 정도로 두 사람은 각별한 사이였다. 신인손은 학식도 풍부하고 성품이 강직해 충녕대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종 27년 7월 25일)

왕은 한문 공부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 당시의 중국어도 배웠는데 조숭덕이란 관리가 세종의 중국어 선생님이었다(세종 7년 8월 12일). 그는 귀화한 중국인의 아들로 과거시험에 급제해 중국에 보낼 외교문서를 담당했다. 그럼 세종이 생활어인 중국어를 배운 까닭이 무엇일까. 왕은 이렇게 설명했다. “명나라 사신과 만날 때, 그가 한 말을 내가 미리 알아들으면 대답할 말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어서 좋다.”(세종 5년 12월 23일 1423년) 외교를 잘하기 위해서 역관이 통역하기 전에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매사에 철저한 세종다운 일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책이 따로 있었을까. 경연을 담당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오직 사서(四書)·오경(五經) 그리고 [통감강목(通鑑綱目)]을 돌려가며 강독하고 싶다.” 동아시아의 고전들 특히 철학과 역사 공부에 전념하고 싶다고 했다. 필자가 보기에 왕은 특히 역사를 좋아했다. 그는 경연에서 59권짜리 [통감강목(通鑑綱目)]을 독파했는데, 고금에 없는 일이었다. 세종 자신도 감회가 대단했다.

“경자년(세종 2년, 1420)부터 이 책의 강독을 시작해 지금(1423년)까지 왔는데, 어떤 책은 30여 번을 읽었고 또 어떤 책은 20여 번을 읽었다. 정말 다 읽어보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세종 5년 12월 23일) 왕은 역사책을 수박 겉핥기로 읽은 것이 아니라, 꼼꼼하게 뜻을 따져가며 20~30번씩 되풀이하며 읽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공부한 책이 몇 권이나 있을까.

이름난 학자들 개인적 취향까지 기억


▎세종대의 경연에서 사용됐던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 완질 59권 59책. 중국 상하이도서관에서 발견됐다. / 사진:국외소재문화재재단
첫째, 왕은 모든 공부를 정밀하게 했다. 어느 날 경연에서 [시경]의 시월 편에 일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왕은 권근이 저술한 [삼국사략(동국사략)]을 읽을 때 자신이 느낀 점을 말하며 “신라의 역사책에는 일식이 언급되어 있으나 백제 쪽 기록에는 보이지 않기도 하고, 그와 반대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사관의 기록이 고르지 않아 때로는 세밀했으나 때로는 너무 소략했다.” (세종 6년 11월 4일) 이렇듯, 세종은 어떤 책을 읽든지 허투루 대하는 법이 없었다.

둘째, 신하와 토론을 통해 왕은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그가 특히 역사에 밝았음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자치통감]의 속편을 강독하다가 마침 송나라 태종이 잔치를 사흘 동안 베풀었다는 대목이 나왔다. 그러자 왕은 이렇게 논평했다. “송 태종은 어진 임금이었으나 공치사도 하였고 희롱하기를 좋아했다. 제왕으로서 차마 할 일이 아니었다.”(세종 12년 11월 18일)

배석한 정인지가 동의를 표하면서 송 태종이 시 창작과 낚시가 취미였다고 보탰다. 이에 세종은 송 태종에게 간언한 사람은 없었는지 물었다. 정인지는 그 당시에 유행한 시 한 편이 있다며 즉석에서 외웠다. “꾀꼬리는 임금의 수레 소리에 놀라 꽃 속으로 숨고, 물고기는 임금 얼굴이 무서워 낚시에 걸리기 어렵구나!”

세종은 웃으며 그 시의 작자를 물었다. 정위(丁謂)가 지었다고 정인지가 대답하자, 왕이 이렇게 논평했다. “정위가 시는 뛰어났으나 마음씨가 옳지 못하였다.” 과연 정위는 교활하기로 유명해 많은 정치적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었다. 세종은 그런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셋째, 항상 주밀하게 공부한 결과이겠으나, 왕의 통찰력이 갈수록 깊어졌다. 한번은 송나라의 주희가 편찬한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을 읽을 때였다. 사마광이 맹자를 심하게 비판하는 대목이 나오자, 왕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온공(사마광)은 성품이 맑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맹자는 기상이 높고 엄정해 서로 기질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차이로 온공이 맹자를 존중하지 못했다.”

경연관 정창손이 왕에게 동의하며 설명을 추가했다. “온공은 맹자의 글을 사서(四書)에서 제외하려고 했습니다.”(세종 16년 7월 8일) 이런 예화에 드러나듯, 세종은 유교 사상이 역사적으로 변천한 내력은 물론이고 이름난 학자들의 개인적 취향도 정확히 이해했다.

현안 생기면 고전과 숙려 통해 결론 내


▎세종이 즐겨 읽었던 고대 중국의 시가를 모아 엮은 유교경전 [시경(詩經)]의 일부분.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왕은 젊은 시절부터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경서를 글귀로만 풀이하는 것은 학문에 도움이 적다. 꼭 마음공부가 있어야만 유익하겠다.”(세종 즉위년 10월 12일) 이때가 22살 젊은 나이였다.

넷째, 왕은 현안이 있으면 우선 책에서 답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과거의 지식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세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크고 작은 현안이 있을 때마다 왕은 고전을 널리 조사했다. 그래도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신중히 결정했다. 책을 중시하면서도 거기에 얽매지 않는 점, 이것이 그를 성공적인 지도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 눈에는 사소한 문제지만 그 당시에는 아주 중요한 문제도 있었다. 제사를 앞두고 재계를 하는데 그때 술을 마시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였다. 그 당시 조선의 관계 문헌에는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지 않으면 무방하다고 했다. 이 때문에 재계 중 술을 과도하게 마셔서 실수하는 관리들이 많았다. 세종은 중국의 사례를 충분히 조사했고, 그 결과 재계하는 3일 동안에는 자극성이 강한 식물이나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세종 27년 2월 7일)

그런데 신하들의 의견은 찬반으로 갈렸다. 왕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부탁해 고전의 사례를 철저히 분석해서 보고하도록 했다. [논어]의 향당 편과 그에 관한 주희의 주석에서는 술을 마시거나 냄새나는 식물을 먹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다른 문헌에는 문란할 정도로 마시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금주 논의는 원점으로 회귀했다.

보름가량 세종은 이 문제를 다시 궁리한 끝에 결론을 내고 예조에 이렇게 명했다. “앞으로 재계할 때는 사냥해도 안 되며, 잔치의 참여도 금한다. 형벌을 주는 일에 관여해도 안 되고, 가축을 도살하거나 문병도 삼간다. 매운맛이 강한 식물을 먹는 일이며, 술 마시는 행위는 모두 금지한다. 단 예외적으로, 새벽에 1~2잔 마시는 정도는 허용한다.” (세종 27년 2월 24일) 그동안 어떤 절차를 거쳐서 왕이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는지 신하들이 잘 알았으므로, 감히 이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독서를 하면서도 세종은 그 당시의 현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시절 엄숙한 전례(典禮)에는 알맞은 음악이 필요했다. 주요 행사 때마다 어떤 악곡을 연주할지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선정 기준이 모호했다. 사당의 댓돌 위에서 연주하는 당상악과 그 아래서 연주하는 당하악을 한꺼번에 아뢰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세종은 고전에 해박했기 때문에 [시경]의 문맥을 자세히 검토한 끝에 당상악과 당하악은 동시 연주가 아니라 번갈아서 아뢰는 것이 옳다는 점을 확인했다(세종 7년 10월 15일).

왕은 종묘 제사 때 중국의 아악을 오래 연주하고 끝날 때쯤에야 우리나라 향악을 제공하는 풍습을 적절하지 않다고 봤다. 생전에 듣던 향악을 제사 때 많이 연주하는 것이 조상의 넋을 위로하기에 더 낫다는 것이 왕의 생각이었다. 왕은 예절과 음악에 정통한 맹사성과 허조에게 이 문제를 연구하도록 했다. (세종 12년 9월 11일)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세종 때는 아악과 향악도 훌륭하게 정리됐다. 왕이 정간보(음의 시가를 알 수 있게 창안한 악보)라는 독특한 채보법을 만든 점도 특기할 일이었다.

문헌 속 사례 반면교사 삼으려 해


▎종묘에서 봉행된 종묘제례에서 종묘제례악이 연주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세종을 사상 최고의 지도자로 만든 배경에는 책의 힘이 컸다. 그는 책을 읽으며 서슴없이 공감을 표할 때가 많았다. [대학연의]를 공부할 때 [운한장(雲漢章)]을 펼쳐두고 이렇게 탄식했다. “가뭄도 올해처럼 심하게 겪은 적이 없었다. …(중략)… 이 장은 내가 가뭄을 근심하는 뜻과 어쩌면 이렇게도 같은가.” (세종 8년 11월 2일) 자신이 읽은 고전의 내용을 기준으로 왕은 정치를 했다. 백성에게 부과되는 부역이 너무 많고 무겁다고 여겨서, 왕이 내린 교서(敎書)의 한 대목만 읽어도 그의 고상한 정치철학이 가슴에 와 닿는다.

“[서경(書經)]에서 말하였다. 적자(赤子, 갓난아이)를 보호하듯 하였더니 백성이 편안하도다. [시경(詩經)]에는 이런 말이 있다. 부자야 좋겠지. 하나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이 사람들이 가엾어라. 수령들은 [서경]과 [시경]의 이런 교훈을 본받아라. 조정의 옛 법을 따르느라 구차한 데에 얽매이지 말라. 옛 관습에 찌들지 말고, 불법한 징수와 시급하지 않은 부역을 모두 정지하고 폐지하라. 그리하여 백성의 힘이 되살아나게 하고, 그들의 생활이 윤택하게 하여라. 백성을 어질게 만들고자 하고 불쌍히 여기는 나의 지극한 뜻에 그대들이 부응하기 바라노라.”(세종 26년 7월 9일) 부디 낡은 관습의 노예가 되지 말고 백성을 위해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한 왕이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왕은 책에 언급된 사례가 조선의 현실과 유사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경연에서 당나라 목종 때 대신 전휘(錢徽)가 조정에서 쫓겨나는 대목을 읽을 때였다. 세종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예부터 권세 있는 신하가 과거 시험관을 압박해 엉터리로 합격한 사람이 있었다. 연전(태종 때)에 김점이 아들 때문에 탄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가.”(세종 10년 2월 18일)

신하가 답했다. “그 아들 김의손이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제출해 불법으로 생원에 뽑혔기 때문에 탄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는 과거시험의 폐단이 없는 줄로 압니다.”

왕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또 다른 부정 사건을 언급했다. “옛날(고려 말)에 승지들이 생원시 답안지를 펼쳐봤는데, 이안경과 신숙화의 답안이 눈에 띄지 않았다. 도승지가 말하기를, ‘그 둘은 우리 동료의 아들이다. 답안지가 있어야 합격시킬 수가 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시험관이 말을 타고 달려가 두 사람의 시권을 가져왔고, 그들도 합격하였다고 한다.”

그때 일을 신하가 상세히 아뢰었다. 이안경은 처음부터 합격자 명단에 포함됐으나, 신숙화는 부정한 방법으로 생원이 됐다고 했다.

여러 말끝에 세종이 웃으면서 지금도 과거시험의 폐단이 있느냐고 물었다. 신하들은 그런 폐단이 없다고 말하며, 봉미역서(封彌易書) 제도의 효과를 강조했다. 봉미(封彌)란 과거 답안지를 철저히 봉해 응시자의 성명, 생년월일, 주소 등을 채점자가 보지 못하게 막았다. 역서(易書)는 응시자의 필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답안지를 다른 사람이 베껴 쓰게 한 제도였다.

이런 예에서 보듯, 세종은 책을 읽으며 자신의 궁금증을 신하들과 격의 없이 토론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좋은 대책이 나오기도 했다. [시경]의 칠월 편을 공부할 때 일이었다. 왕이 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편에서는 백성이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실을 낱낱이 기록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를 구제할 제도에 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 장차 무슨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유일하게 읽어보지 못한 '태종실록'


▎독서를 사랑했던 세종도 [태종실록]만은 신하의 반대로 읽지 못했다.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사람을 잘 골라서 임명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라고 한 신하가 대답했다. 곁에 있던 정초가 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이제부터 전하는 새로 부임하는 수령을 불러서 꼭 만나보시고 그가 어진지 어리석은지를 살펴보십시오. 그런 방법을 오래 사용하시면 수령에 적합한 인재도 얻을 것이요, 백성이 정말 그 혜택을 입게 됩니다.” (세종 1년 1월 30일) 왕은 정초의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여 얼마 후부터 새로 부임하는 모든 지방관을 불러서 만나봤다. 그들을 격려하는 한편 능력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양리(우수한 관리)도 많아졌다. 신하들과 부단히 토론한 내용을 정책에도 반영한 결과, 민생도 차츰 안정됐다.

뜻밖이지만 왕에게도 금서가 있었다. 신하들이 부왕의 업적을 정리해서 [태종실록]을 편찬하자 왕은 그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한때 스승과 마찬가지였던 도승지 신인손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정승 황희와 신개가 단호한 반대 의사를 표했다. 역대 임금 가운데 선대 왕의 실록을 읽어본 경우가 없지 않았으나, 본받을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실록을 편수한 신하가 아직 살아있는데, 임금이 실록을 꺼내 읽으면 신하들의 마음이 불안해질 것이요, 그런 일이 되풀이되면 실록의 공정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 했다. 왕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태종실록]을 읽지 않기로 했다.(세종 20년 3월 2일)

이 밖에도 신하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왕의 독서를 제한했다. 어떨 때는 양측이 서로 충돌하기도 했다. 가령 조선의 법궁(정식 궁궐)인 경복궁의 풍수가 좋은지를 둘러싸고 조정에서 격론이 일어났을 때였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부탁해 각종 풍수지리서를 검토해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러자 예조 좌참판 권도가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대학자 권근의 아들로, 왕이 풍수지리에 관심을 두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세종의 의견은 달랐다. 국가에서 풍수지리를 이용하기로 한 이상 정밀히 살펴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이것은 부왕(태종)의 뜻이기도 하였다. 왕은 신하들의 이중적인 행태에 화를 냈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귀신의 제사 따위는 모두 금하자고 주장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의 집에서는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설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신하들의 태도를 비판하면서도 차마 경연에서 풍수지리 책을 강론하지는 못했다. (세종 15년 7월 15일)

비록 부왕의 실록은 읽지 못했으나, 그에 앞서 세종은 [태조실록]을 이미 독파했다. 그런데 그 책은 자신이 읽은 중국의 역사책들에 비해 소략한 흠이 있었다. 생각 끝에 왕은 자신이 기른 문장가 안지와 남수문에게 태조의 행적을 상세히 보충해 기록하라고 명했다. “그대들은 노인들을 방문해 태조 때 일어난 여러 가지 사적을 조사하고, 이를 추가로 기록하라.” (세종 24년 3월 2일) 구술자료를 통해서라도 [태조실록]을 보완하라는 왕의 명령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한층 더 풍부해진 [태조실록]을 갖게 됐다.

'자치통감' 원고 손수 교정 보기도


▎세조는 세종의 뜻에 따라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서 정치에 귀감이 될 만한 사실을 모아 엮은 [치평요람] 편찬을 주도했다. 사진은 합천 해인사에 봉안된 세조 영정.
공부를 유난히 좋아하는 왕이라서 그 당시 조선의 약점 하나를 금세 발견했다. 경전의 전문가도 부족하고, 역사에 정통한 이도 없어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왕은 남수문·권채·신석견 등 다수의 문장가를 길렀다. 윤회와 설순과 같은 훌륭한 역사가도 양성했다.

책을 좋아해서 활자도 대량으로 만들고 많은 서적도 출판했다. [자치통감 훈의] 같은 역작이 편찬된 데는 세종의 의지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왕은 윤회·권도·설순 등 석학들을 집현전에 모아 [자치통감]의 판본들을 검토하게 했고, 뜻을 알기 어려운 구절은 해설을 붙이게 했다. 이 작업은 세종 16년(1434) 7월에 시작됐는데, 보름에 한 번씩 편찬관들을 음식으로 위로했다, 편찬 작업을 원만히 진행하기 위해, 그해 9월 22일부터는 경연도 중지했다. 매일 밤 편집된 원고가 궐내에 들어오면 세종이 손수 교정을 봤다. 왕은 “요즘 내가 이 글을 읽으면서 독서가 참으로 유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날마다 더 총명해지고 잠도 많이 줄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40여 명의 선비가 밤낮으로 매달린 덕분에 이듬해 여름 경회루 아래에서 사업 종료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세종 17년 6월 8일) 외람된 말이지만 필자의 16대조도 그 사업에 참여했다.

책벌레 세종이 독려해 만든 또 다른 책, [치평요람]도 소개한다. 역사를 알아야 정치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이 세종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바쁜 왕이 그 많은 역사 책을 어느 겨를에 다 읽어보겠는가. 그래서 왕은 후세의 왕들을 위해서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수십 명의 선비를 집현전에 모아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 가운데서 참고할 만한 내용만 간략하게 정리하는 작업의 결과물이 [치평요람]이다. 이 책의 편찬사업을 지휘한 이가 그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세조)이었다.

세종은 공부가 탁월했고, 그리하여 고전에서 얻은 지식과 통찰의 힘으로 우리 역사상의 황금기를 열었다. 이후 이 나라는 시간이 갈수록 공부를 더욱 중시하게 됐다. 부존자원이 거의 없는 형편이라, 앞으로도 우리는 공부의 힘으로 살게 될 것이 아닌가.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011호 (202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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