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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56)] 730년 전 이 땅에 성리학 도입한 회헌(晦軒) 안향 

동방 예학 왕국 이끈 사상적 좌표 제시 

고려말 이념 공백기에 [주자서] 들여와 미신 타파하고 국풍 쇄신
선비 양성에 전념, 소수서원은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을 이끌어가는 류준희(왼쪽)·권기열 도감이 강학당 앞에 걸린 편액 ‘백운동’ 앞에 섰다. / 사진:사공정길 학예사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일대가 선비 문화의 요람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을 비롯해 건너편에는 지역 명가(名家)를 재현한 선비촌과 인성교육장 선비문화수련원이 있다. 또 한쪽에는 ‘충(忠)’을 기리는 금성단(錦城壇)이 있다. 9월 17일 소수서원은 코로나19 여파로 한산했다. 서원 소수박물관에서 사공정길 학예사를 만났다. 소수서원 두 도감(都監)이 기다리고 있었다. 류준희 도감은 서원 일을 총괄하고 권기열 도감은 행사를 관장한다고 했다. 도감은 서원에 따라 별유사로도 불린다. 원장을 도와 서원을 이끌어가는 집행부다.

이들과 함께 소수서원 답사에 나섰다. 박물관을 나와 백운교로 죽계천을 건너자 서원 뒤뜰이다. 후문으로 들어서자 충효교육관과 관리사무소가 먼저 보인다. 류 도감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저는 여기서 학교를 다녔어요. 이 자리에 소수 중학교가 있었습니다.” 1952년 유림은 신교육 물결이 일자 서원에 사립 소수중학교를 설립한다. 서원의 교육 정신을 잇자는 뜻에서다. 그 시절 교육관 자리는 교실 10칸, 앞은 운동장이었다고 한다. 류 도감은 여기서 공부하고 1965년 졸업했다. 재학생은 300~4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세워진 서원이다. 소수서원은 400년이 지나 이렇게 신식 교육까지 품어 안은 것이다. 소수중학교는 이후 베이비붐으로 학생 수가 증가하자 순흥면 소재지로 옮겨진다. 서원사료관을 지나 남쪽으로 더 나오면 직방재(直方齋)·일신재(日新齋)와 강학당 등이 나온다. 류 도감은 “직방재·일신재는 소수중학교 시절 교장실과 교무실로 사용됐다”고 덧붙였다. 소수서원에 숨은 또 다른 역사다.

소수서원은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 선생을 모신 곳이다. 건립 역사는 교과서에도 나온다. 풍기군수였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은 고려 말 유현(儒賢)인 회헌이 태어난 순흥에 1542년(중종 37) 사당을 세워 위패를 처음 봉안했다. 신재는 이듬해 다시 강학 공간을 지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다. 동시에 선비를 기르고 현인을 제향하는 양사(養士)와 존현(尊賢)이란 서원의 두 기능도 가동했다.

회헌은 우리 유학사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선생은 고려 무인집권기에 나고 자란 뒤 1260년(원종 1) 과거에 급제해 관료의 길을 걷는다. 그의 나이 18세 때다. 1275년에는 상주 판관을 지낸다. 당시 백성을 현혹하는 무당이 있었는데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쇄신한다. 회헌은 능력을 인정받아 3년 뒤에는 국학 일을 맡고 좌부승지로 임명된다. 그는 이후 근본적인 사회 혁신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그 해법으로 새로운 사상, 유교를 떠올렸다. 1289년(충렬왕 15) 그는 원(元)나라를 방문한다. 거기서 처음으로 성리학의 실체를 접하고 받아들인다.

무당 다스리며 풍속 쇄신


그 과정을 좀 더 들여다보자. 1288년께 회헌은 원으로부터 학교·제사·저술 등을 관장하는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임명된다. 충렬왕은 이듬해 세자와 공주를 대동하고 원으로 가는데 회헌도 수행한다. 그의 첫 연경(燕京, 베이징) 방문이다. 회헌은 연경에 머무는 동안 현지 학자들과 교유한다. 또 [주자서(朱子書)]를 발견한 뒤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사한다. 1290년 귀국하자 회헌은 그때부터 이 땅에 성리학을 전파한다. 선생은 돌아올 때 왕을 호종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얻어 부밀직사사(副密直司使)로 임명된다. 이후 왕은 나라의 중대사가 있을 때 그에게 자문하고 질병에 걸리면 그의 집으로 몸을 옮겼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나온다. 회헌은 1296년과 1298년에도 다시 원으로 간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졌을 것이다. [회헌선생실기]에는 1296년 그가 거처하던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연경에서 모사해 온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봉안한 뒤 아침저녁으로 추앙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자신의 호도 회암(주자)을 본 따 회헌이라 불렀다. 신천식 전 명지대 교수는 “회헌은 무인집권기를 거치면서 사상적 이념을 잃고 공동화(空洞化)된 당시 사회에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적 좌표를 제시했다”고 의미를 정리한다.

먼저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에 들렀다. 사당 이름은 격을 높여 ‘문성공묘(文成公廟)’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류 도감이 문을 열었다. 명칭 때문에 “이곳이 선생의 무덤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고 한다. 사당 출입은 동쪽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나오는 동입동출(東入東出)이다. 촛불을 밝히고 위패를 열었다. 위패에는 ‘文成公晦軒安先生(문성공)’이라 쓰여 있었다. 충렬왕은 1306년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황해도 장단 대덕산을 장지로 하사하고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묘소는 지금도 장단에 있다. 알묘했다. 위패 뒤 검은 바탕에 흰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위패 오른쪽에는 시호 ‘문성공’이 왼쪽에는 ‘도덕박문왈문(道德博問曰文) 안민입정왈성(安民立政曰成)’이란 시호에 담은 뜻을 썼다. 명나라 주지번(朱之蕃)이 선조 시기 사신으로 왔다가 소수서원을 찾은 뒤 남긴 글씨라고 한다. 사당에는 선생과 함께 주세붕이 종향돼 있다.

제자들에 술자리 만들어 감화시켜


▎안향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문성공묘의 내부 모습. / 사진:소수박물관
1304년(충렬왕 30) 회헌은 마지막 벼슬인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이라는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은퇴할 때까지 국가가 당면한 책무를 교육의 중흥에 두고 거기에 힘을 쏟는다. 그는 59세에 자신의 사저를 나라에 헌납해 국학 안에 대성전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왔다. 불교와 미신은 배척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걱정하며 쓴 시(題學宮)가 전한다.

곳곳에 향불 연등 부처에게 빌고/집집마다 피리소리 귀신을 섬기는데/오직 두어 칸 공자 사당엔/봄풀만 무성하고 찾는 이 없어라

나라의 풍습을 바꾸는데 성리학은 절실했다. 61세에는 장학기금 마련 등에 나서 국학 운영을 활성화한다. [고려사] ‘열전’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안향이 날이 갈수록 학교가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첨의부 등과 의논한다. ‘재상의 직임은 인재교육이 가장 시급한데 지금 양현고(養賢庫)가 고갈돼 선비를 양성할 비용이 없으니 6품 이상은 각각 은 1근, 7품 이하는 베를 차등 있게 내어 양현고에 돌려주라’고 했다.” 양현고의 재원을 확충한 것이다. 왕도 돈과 양곡을 보탰다. 또 양현고의 원금은 두고 이자로는 장학금을 주는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했다.

이어 회헌은 박사 김문정을 중국으로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초상화를 비롯해 문묘에 사용할 제기·악기·6경 등을 구해 오도록 했다. 또 밀직부사 치사 이산, 전법판서 이진을 경사교수로 추천한다. 그런 노력으로 한림원 등에서 배우는 자들이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고려사]에는 당시 성격이 담대한 회헌이 예(禮)를 강조하며 정성을 다해 학생을 직접 지도하는 대목이 나온다. “어떤 학생들이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안향이 성을 내며 그들을 처벌하려 하니 그들이 잘못을 사과했다. 안향은 ‘내가 제생을 내 자손 보듯 하는데 제생은 어찌 이 늙은이의 뜻을 모르는가?’며 그들을 데리고 집으로 가 주연을 베풀었다. 학생들이 서로 돌아보며 ‘공이 우리 대하기를 극진히 하는데 만약 우리가 감화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라고 했다.”

회헌은 64세로 생을 마쳤다. 선생의 장례식이 있던 날 7관·12도의 학생들은 소복을 입고 길가에 나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알묘를 마치자 권기열 도감이 향사를 소개했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향사를 지낼 때는 서원 설립 이래 지금도 변함없이 지키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종묘나 성균관 문묘에 버금가는 제례악을 행한다는 것이다. 초헌과 아헌, 종헌이 잔을 올릴 때마다 주세붕이 지은 경기체가 ‘도동곡(道東曲)’을 제관이 함께 부른다고 한다. 선생 덕분에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복희 신농 황제요순…’으로 시작되는 노래다.

문성공묘를 나와 서원의 중심인 강학당을 살폈다.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공간이다. 강학당 입구에 ‘白雲洞(백운동)’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주세붕이 창건 때 붙인 이름으로 서원의 역사를 말해 준다. 강학당 안으로 들어갔다. 벽면에 또 하나의 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紹修書院’이다. 서체가 단정하다. 풍기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이 당시 서원의 진흥을 위해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賜額)을 바라는 글을 올렸다. 사립대학 격인 서원을 국가가 공인하고 서적과 토지, 노비 등의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편액은 가운데 ‘소수서원’ 글자 좌우로 ‘명묘어필(明廟御筆)’과 ‘가정(嘉靖) 29년…’이란 글씨가 작게 남아 있다. 1550년 명종 임금이 서원의 새 이름을 짓고 직접 글씨를 쓴 것이다. ‘소수(紹修)’에는 자신의 내면을 닦아 유학의 정신을 이어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 백운동서원에 마침내 소수서원이란 편액과 사서오경 등 서책, 노비가 내려온다. 그래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동시에 최초의 사액서원이 됐다.

제례악 ‘도동곡’ 낭송 전통 이어져


▎안향 초상. 평정건을 쓰고 홍포를 입은 모습으로 국보 제111호로 지정돼 있다. / 사진:소수박물관
퇴계는 풍기군수 시절 소수서원에서 제자들을 직접 가르쳤다. 그 시절 대장장이 배순이 서원에 그릇을 공납하러 왔다가 자신도 배우고 싶어 선 채로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퇴계는 그 모습을 보자 배순을 제자로 받아들여 글을 가르친다. 배순은 훗날 퇴계의 문도록에도 올랐다. 퇴계가 신분을 뛰어넘는 평등교육을 실천한 도량이 소수서원이었다.

강학당 뒤편에는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 일신재, 직방재가 나란히 배치돼 있다. 류준희 도감은 “유생이 서원에 들어오면 처음에는 책을 읽으며 지락재에 머물고 이어 왼쪽으로 한 단계씩 옮겨간 서재이자 기숙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밑에서부터 배워 올라가 위에 도달한다는 이른바 ‘하학상달(下學上達)’ 교육이다. 크게 보면 강학당과 문성공묘, 직방재, 학구재가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했을 당시 건물이다. 그래서 소수서원은 이후 정형화된 서원의 모습이나 배치와는 다소 차이가 난다.

소수서원 지도문(志道門)을 나왔다. 왼쪽에 주세붕이 세운 경렴정(景濂亭)이 있다. 정자에 주세붕과 퇴계 등이 남긴 시판이 빼곡히 걸려 있다. 아래로 맑은 죽계천이 흐른다. 그동안 내린 많은 비로 하천은 모래가 잔뜩 쌓여 있었다. 죽계천 건너편 바위에 붉은색 ‘敬(경)’자가 선명히 보인다. 본래는 붉은 글씨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 위에는 ‘白雲洞’ 흰 글씨가 쓰여 있다. 주세붕이 서원을 세운 뒤 성리학의 핵심인 ‘경’을 직접 쓰고 새긴 것이다.

‘경’자가 붉은색이 된 데는 아픈 사연이 전한다. 1457년(세조 3) 순흥도호부에 유배와 있던 금성대군은 조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다. 그해 10월 거사는 관노의 밀고로 탄로난다. 실패의 후폭풍은 걷잡을 수 없었다. 고을 전체가 참화를 당한다. 이른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다. 당시 시신 일부는 죽계천에 수장되고 그 일이 있은 이후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밤만 되면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이 혼령을 달래려고 죽계천 ‘경’자에 붉은 칠을 하고 정성 들여 제사를 지내자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것이다.

소수서원 주변은 소나무 군락이 일품이다. 선비의 지조를 기리는 이른바 학자수(學者樹)다. 사학인 서원은 번화가에 자리 잡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한적하면서도 경관이 빼어난 곳에 자리 잡아 왔다. 소수서원은 수령 300년이 넘은 적송만 870여 그루에 이른다. [소수잡록]에는 “1654년 서원 경내에 소나무 1000그루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소수서원을 나와 회헌이 태어난 순흥 지역 흔적을 더듬었다. 먼저 들른 곳은 서원에서 4㎞쯤 떨어진 순흥면 석교리 평리촌 세연지비(洗硯池碑)다. 과수원 사이로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길옆에 비가 보였다. 선생이 어렸을 적 공부하고 붓과 벼루를 씻었다는 샘에 세운 돌이다. 일대에 고택과 태실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방치된 향려비와 생가 자리


▎죽계천 경(敬)자 바위. 주세붕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 사진:소수박물관
세연지비를 나와 과수원 사이로 난 길을 들어서자 ‘회헌로’라는 도로명이 나타났다. 들판 가운데 선생의 고향임을 밝히는 향려비(鄕閭碑)가 세워진 유적지가 나타났다. 향려비는 선생의 14대손 안응창이 1656년(효종 7) 세웠다. 2009년 순흥 안씨 문중은 영주시와 함께 이곳 950평에 학계의 고증을 거쳐 유적지를 정비했다. ‘안자(安子)사료관’과 ‘영정각’을 짓고 세연지를 조성했다. ‘안자’라는 극존칭은 공자의 76대 종손인 공영이(孔令貽)가 1917년 우리나라 유림의 요청으로 회헌의 신도비 명을 지으면서 처음 명명됐다. 그곳에 본래는 생가도 복원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생가는 고려 건물의 고증 문제로 중단됐다. 찾아간 날 현장은 사료관에 먼지가 쌓이는 등 방치돼 있었다. 무슨 까닭일까. 영주의 후손 안병수씨는 “올해부터 다시 일대를 2000평으로 확대해 생가를 포함한 안향선생공원화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소수박물관으로 돌아와 전시실을 둘러보다 초상화 앞에 발길이 멈춰졌다. 소수서원에도 모사본이 있는 국보 111호 반신상 ‘안향 초상’이다. 1318년(충숙왕 5) 왕은 선생의 공적을 기려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회헌은 고려의 쇠퇴기에 성리학을 들여와 새로운 사상 좌표를 제시한 유종(儒宗)이다. 또 숱한 인재를 기르고 도덕을 천명한 겨레의 스승이었다. 이후 이 땅을 지배한 유학과 선비정신은 선생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게 됐다.

[박스기사] 백운동서원, 미국 하버드대학보다 93년 앞선 사립대학 - 퇴계 이황의 청원으로 ‘소수서원’ 편액 하사 받아

주세붕은 1543년(중종 38) 백운동서원을 세운 뒤 목사 안휘에게 보낸 편지에 그 과정을 밝힌다. “(풍기군수로) 부임 뒤 순흥부에 이르렀는데 숙수사 옛터가 있었다 (…) 산 아래 죽계가 있으며 소백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 등 백록동서원이 있는 중국 여산에 못잖았다. 흰 구름이 항상 골짜기에 가득해 감히 백운동이라 이름 하였다. 그리고 감회에 젖어 배회하다 비로소 사당 건립 뜻을 세웠다.”

그해 유생 3명이 첫 입학한다. 관학인 성균관과 다른 ‘최초의 사립대학’이었다. 그때를 기준으로 하면 1636년 미국에 설립된 하버드대학보다 93년이 앞선다. 백운동서원은 이후 1547년(명종 2) 경상도 관찰사 안현의 노력으로 경제적 기반이 크게 확충된다. 회헌의 11대손인 안현은 [속대전(續大典)]이 규정한 서원전 규모의 10배가 넘는 재단을 마련했다. 합천·밀양 등 많은 지역 수령의 지원도 끌어냈다.

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서원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린다. 1549년 조정에 백운동서원의 사액(賜額)을 청원하면서다. 내용에는 교육에 대한 그의 시대 인식이 담겨 있다. “이즈음 지방 향교는 가르침이 무너져 선비들이 향교에서 공부하기를 부끄러이 여길 만큼 한심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제 서원을 일으키면 학문과 정치의 결함을 보충하고 선비들의 풍습이 달라질 것이며 습속이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퇴계는 당시 사화를 거치면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학문인 성리학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향교와 국학은 나라의 제도와 규정에 얽매이고 과거 공부에만 주력해 옳은 학문을 이룰 수 없다고 봤다. 1550년 명종은 퇴계의 청원에 화답한다. ‘소수서원’이란 편액을 하사한다. 국가가 마침내 사립대학을 공인하고 서책과 토지·노비까지 내려준다. 그 정신은 지금도 이어져 정부가 사립대학에도 재정을 지원하고 있다. 소수서원 사액으로 서원 창설과 진흥은 본격화한다. 이를 통해 지방 인재 진출이 점차 늘고 사림정치가 확립된다.

소수서원은 이후 대략 4000명의 인재를 배출한다. 특히 퇴계가 풍기 군수로 있는 동안 소수서원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낸다. 소수서원을 거친 사람들의 명부인 [입원록] 1권에는 당대의 이름난 문인이 많이 등장한다. 조목을 비롯해 구봉령, 권문해, 정탁, 남사고, 김성일, 금난수, 권호문 등이다. 이후 세대로는 장현광, 권두문 등이 나온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011호 (202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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