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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14)] ‘최초의 세계사’로 서술된 몽골제국 기록 '集史' 

쿠빌라이 옆 ‘몽골 천하’ 설계자 있었다 

중국 원나라 체제 확립 이끈 볼라드, 일-칸국 도우려 페르시아 파견
무력 대신 지혜로 지배 안정시키고, 문명의 융화·교류 매개자 역할


▎[집사]의 삽화. 칭기즈칸이 최초로 몽골 제국의 수립을 선포했던 1206년의 쿠릴타이를 묘사한 것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볼라드(Bolad, 孛羅, 1238?~1313)는 [원사(元史)]에 열전이 따로 없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원나라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1283년 일-칸국으로 떠난 후 원나라 조정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열전에서 빠진 것으로 보이는데, [원사(元史)]의 여러 부분에 나오는 기록을 모아보면 열전 하나 만들기에 충분한 분량이다.

그리고 그에 관한 많은 기록이 라시드 알-딘(Rashid al-Din)의 [집사(集史, Jāmi‘ al-Tawārīkh)]에도 들어있다. [집사]는 올슨([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 2001)과 김호동([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2010)이 모두 ‘최초의 세계사’로 지목한 책이다.

1248년 쿠빌라이가 자기 아들들과 함께 글을 배우게 한 귀족 자제 중에 볼라드가 있었다. 1260년 쿠빌라이 즉위 후 친위대 장교로 있다가 1264년 아리크 보케 심문에 참여한 뒤 관직으로 나아가 어사중승·대사농·어사대부를 지내고 1280년 중서성 승상의 직에 이르렀다. 그리고 40대 중반 나이에 사신으로 일-칸국에 갔다가 근 30년 여생을 그곳에서 지냈다.

몽골의 인사이더만 알 수 있는 미묘한 정보


▎쿠빌라이에게 중용되어 ‘제2의 야율초재(耶律楚材)’로 일컬어지는 유병충(劉秉忠, 1216~1274) 초상. / 사진:바이두
올슨은 4개 부로 구성한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 중 한 부를 볼라드에 바쳤다. 원나라와 일-칸국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중국 문명과 페르시아 문명 사이의 교류에서 그 역할을 매우 중시한 것이다. 그 역할을 통해 이뤄진 가장 크게 보이는 성과는 [집사]다. 일-칸국 고관인 라시드가 편찬한 이 책에서 몽골과 중국의 최근 사정까지 소상하고도 정확하게 수록된 것은 볼라드의 공헌 덕분일 수밖에 없다고 올슨은 주장한다. [집사] 편찬에 많은 자료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두 문명권과 초원지대를 포괄하는 거대한 세계관을 제시하는 데 볼라드의 경험과 식견이 뒷받침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몽골과 중국에 관한 [집사] 내용 중 진짜 인사이더가 아니면 파악할 수 없는 미묘한 정보까지 많이 들어있음을 보면 올슨의 주장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볼라드의 아버지는 칭기즈칸 친위대의 간부이자 그 아내 보르테의 요리사였다고 한다. 요리사는 유목사회 지도자에게 최고의 신임을 받는 측근이었다. 볼라드가 소년기에 쿠빌라이의 자제들과 함께 공부한 일을 앞에 적었는데, 공부만 함께 했겠는가? 볼라드는 대칸 일족의 그림자와 같은 측근 집단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아리크 보케 심문을 비롯한 민감한 사안에 관여하게 되었고, 관직에 나아가서도 일반 관리들과 달리 대칸의 분신과 같은 역할을 겸한 것으로 보인다.

올슨은 또한 볼라드의 경력에 나타나는 통합·절충 능력을 중시한다. 그가 맡은 업무에서 예법(禮法)과 농정(農政)의 비중이 컸는데, 둘 다 중국 문명의 핵심요소였다. 이런 업무에서 볼라드는 한인 관리들과 협력했다. 쿠빌라이에게 중용되어 ‘제2의 야율초재(耶律楚材)’로 일컬어지는 유병충(劉秉忠, 1216~1274)이 대표적 인물인데, 여러 번에 걸쳐 협력한 일이 있었던 것을 보면 협력의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다.

올슨이 소개하는 유병충 등과 볼라드의 협력 사례를 훑어보면서, 어쩌면 볼라드의 통합·절충 능력이 당시 몽골 지도자의 대표적 덕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의 목표를 구체화하고 추진하는 역할은 한인 관리가 맡고, 볼라드는 진행을 순조롭게 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문명 수준이 낮은 유목민이 고급 문명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좋은 결과만 기대하며 전력을 기울이기보다, 진행이 늦더라도 안정된 자세를 지키면서 장기적인 성과를 바라보는 방식이 바람직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인 관리들이 각 방면 전문가였다면 볼라드는 관리자 역할을 맡은 셈인데, 관리자에게도 사업 내용에 대한 어느 수준의 이해는 필요한 것이다. 유병충은 중국사상의 전문지식위에서 대원(大元)이란 국호를 제안한 것이고 쿠빌라이는 그 제안에 대한 의견을 볼라드 같은 사람들에게 듣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볼라드가 관리자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다스릴 왕조의 청사진을 나름대로 뚜렷하게 그려놓고 있었을 것이다.

유목민 입장에서 정착 문명을 지배할 정복왕조의 청사진을 그리는 일, 그것이 볼라드가 전문성을 가진 분야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쿠빌라이가 그를 일-칸국으로 보낸 뜻도 추측할 수 있다. 1260년 대칸에 즉위한 쿠빌라이가 1271년 대원 왕조를 선포하고 1283년까지는 남송 정복을 끝낸 뒤 안정된 체제를 구축해 놓고 있었던 반면 일-칸국에서는 1265년 훌레구(Hülegü)가 죽은 후 왕조가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1283년은 아바카(Abaqa, 1265~82)의 뒤를 이은 동생 아흐마드(Ahmad, 1282~84)와 아들 아르군(Arghun, 1284~91)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최측근이면서 왕조 설계의 전문가 볼라드를 사신 명목으로 보내면서 왕조를 안정시키는 길을 도와주게 한 것으로 추측된다.

‘제2의 야율초재’로 불리던 한인(漢人) 유병충과 협력


▎김호동 교수가 번역한 [집사]의 2편 [칭기즈칸기] 표지.
아흐마드와 아르군의 쟁패에서 쿠빌라이가 아르군을 지지했을 것으로 올슨은 추측한다.(같은 책 27~28쪽) 1284년 여름 아르군의 승리에서 1286년 초 책봉 사신의 도착까지 걸린 시간이 이례적으로 짧은 것을 볼 때 책봉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볼라드의 도착은 아르군의 승리 후였지만 역시 아르군 체제의 안정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289년 부카(Buqa)의 처형을 보면 새 체제가 쉽게 안정되지 못한 것 같다. 부카는 아르군의 승리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인데, 쿠빌라이가 아르군의 책봉 사신을 통해 부카에게 승상 관직을 수여한 데서 은밀한 방식으로 부카의 향배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 아닌가 추측이 가능하다. 쿠빌라이의 뒷받침으로 일-칸에 버금가는 권위를 갖게 된 부카가 배제되는 것을 보면 쿠빌라이가 애초에 권했던 권력구조가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볼라드는 1286년 초 부사(副使) 이사 켈레메치(Isa Kelemech)와 함께 일-칸국을 떠났는데 이사만 원나라로 돌아왔다. 정거부(程鉅夫)는 이사의 전기에 이렇게 적었다.

“돌아오는 길에 반란을 만나 정사와 부사가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부사인) 이사는 시석(矢石)을 뚫고 이 죽음의 땅을 지나 2년 후 대도(大都)에 도착해 아르군 칸이 보낸 소중한 옷과 허리띠를 바치고 사행을 통해 보고 겪은 일을 모두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황제는 (듣고 난 후) 매우 기뻐하고 신하들을 향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볼라드는 이 땅에서 태어나 복록을 누린 사람인데도 그곳에 머물렀는데, 이사는 그곳에서 태어나 (원래의) 집이 거기 있는데도 나에게 충성을 지켰구나. 참으로 다르도다!”(올슨 같은 책 72쪽에서 재인용)

볼라드에 대한 서운함을 비치는 듯한 쿠빌라이의 말이 쿠빌라이의 진심이었을까? 인간적인 서운함이라기보다는 볼라드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정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 말을 정거부가 이사를 돋보이려고 약간 윤색한 것 같다. 오히려 쿠빌라이는 자기 측근 볼라드가 일-칸국에서 역할을 맡고, 시리아 출신 점성술사이며 기독교도(네스토리아파)인 이사가 자기 조정에 돌아오는 데서 세상을 통합하는 ‘대몽골제국’의 의미에 만족감을 느꼈을 것 같다. 이사가 원나라로 돌아오기 전에 아르군 칸의 사신으로 로마 교황청을 방문한 사실도 대몽골제국의 통합성을 말해준다. 대칸의 사신이 제국 바깥으로는 일-칸의 사신으로도 나간 것이다.

볼라드는 일-칸국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일-칸 세계도만 봐도 왕조의 안정이 힘들었던 것 같다. 아르군의 뒤를 동생 게이하투(Geikhatu, 1291~95)가 이어받았다가 죽은 다음 아르군의 아들 가잔(Ghazan, 1295~1304)이 5촌 숙부 바이두(Baidu)와의 내전 끝에 일-칸에 오른 후에야 계승 문제가 잠잠해졌다. 중국을 완전히 점령한 원나라에 비해 이슬람권의 일부만을 차지하고 여러 적대세력에 접하고 있던(북쪽의 두 개 칸국과 서남쪽의 이슬람권, 서쪽의 기독교권) 일-칸국은 계승 문제만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불안정한 문제들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일-칸국에 안정된 왕조가 자리 잡고 대칸을 받드는 조공 관계가 이어지기 바라는 쿠빌라이의 뜻에 볼라드의 사명이 있었을 것이다.

이 사명을 무력 아닌 지혜로 수행하는 것이 볼라드의 역할이었다. 일-칸국 쪽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풀라드 칭상(Pulad Chinksank)’으로 나온다. ‘승상’의 직함이 이름의 일부처럼 쓰인 것은 그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일-칸의 권위는 칭기즈칸의 자손, 톨루이의 가문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대칸의 ‘승상’으로서 볼라드의 권위는 칭기즈칸-톨루이 가문의 내력을 일-칸국의 누구보다 깊이, 그리고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이것이 라시드의 [집사]에도 반영된 것으로 올슨은 추정한다.(같은 책 83~94쪽)

정착 문명 지배할 정복왕조 청사진 그려


▎[집사]의 내용 일부. 정교한 삽화가 풍부한 데서도 이 편찬에 많은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일-칸국은 원나라의 조공국 중 가장 서열이 높은 나라였다. 그 다음가는 서열인 고려의 내정에 원나라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이하 정동행성)을 통해 ‘간섭’한 상황과 비교해 보는 것이 볼라드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정동행성은 원나라 관내의 지방행정기관인 행중서성(행정기구인 중서성의 현지사무소라는 뜻으로 지금의 ‘省’의 기원이다.)과 동격으로 일본 원정을 위해 설치한 임시기관이었다. 1280년(충렬왕 6년) 처음 설치된 것을 원정 상황에 따라 없애고 도로 만들기를 반복한 끝에 상설로 하되, 수장인 승상을 고려왕이 겸하고 원나라와의 의례적 관계를 맡게 되었다.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던 정동행성이 부각된 것은 1299년(충렬왕25년) 한희유(韓希愈) 반란사건을 계기로 고려 지도부 내의 갈등이 불거지면서였다. 비워놓던 고위직 평장정사(平章政事)에 활리길사(濶里吉思)를 보내 정동행성의 역할을 활성화하면서 두 가지 정책을 추진했다. 하나는 고위관리의 처벌을 원조정에 보고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비제도를 원나라 기준에 맞춤으로써 지나친 확대를 막는 것이었다. 고려 귀족층은 이것이 고려의 습속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격렬히 반대해서 결국 1년여 만에 활리길사가 소환되고 정동행성의 역할은 도로 축소되었다. 나는 [밖에서 본 한국사](2008)에 이런 생각을 적었다. (157~158쪽)

“이러한 저항을 자주성의 발현이라 하여 칭송할 것인가? 노비제 개혁을 거부한 사람들이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모두 한결같이 자주성을 보였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이런 자세 때문에 고려의 사회경제구조는 악화일로의 길을 걸었고, 원나라의 통제가 사라지자 구조적 문제로 인해 왕조가 무너지기에 이른다. (…)

원나라가 고려 국가의 소멸을 원하지 않은 것은 고려 내부에서 제기된 입성(立省, 국왕을 없애고 원나라 관내처럼 행중서성을 만들자는 주장) 청원을 기각한 사실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원나라가 구축하는 천하체제에 고려를 적응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법률과 제도를 보편적 기준에 맞추도록 계속해서 압력을 가했다. 이 압력에는 고려의 국가 정체성을 위협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또한 고려의 문명 수준을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피정복국 고려에 대해서도 보편적 기준을 권하되 강압적 수단을 가급적 피하는 것이 조공국을 대하는 원나라의 원칙이었다면 형제국인 일-칸국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일-칸국에서 볼라드의 역할은 힘을 통해 원나라의 요구를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나눠줌으로써 일-칸국이 원나라와 잘 어울리는 방향의 진로를 찾도록 도와주는 데 있었다. 같은 몽골의 뿌리가 서로 다른 문명의 토양 위에서 번성할 길을 찾는 그 노력의 방향이 두 문명의 융화를 향한 방향이기도 했다.

역사의식은 정치조직의 가장 기본 소프트웨어다. 문자가 없던 시대에도 한 부족이 공유하는 과거의 기억은 주술사의 푸닥거리를 통해 부족 정체성의 발판이 되었다. 부족의 범위를 넘어서는 국가 형성 단계에서는 역사를 문자에 정착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1240년대에 나온 [몽골비사(元朝秘史)]는 푸닥거리의 문자 정착을 통한 국가 형성 단계를 보여준다. 우리 [삼국사기]보다는 [삼국유사]에 가까운 형태로 신화·설화와 국가형성사가 결합되어 있다. 이후 대몽골국이 다문명 제국으로 나아감에 따라 ‘세계사’ 형태의 역사서술이 필요하게 된 데 부응한 것이 라시드 알-딘의 [집사]였다.

세계제국을 지향하는 세계사가 왜 대칸의 조정인 원나라가 아니라 그 조공국인 일-칸국에서 나오게 된 것일까? 두 가지 기술적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원나라가 자리 잡은 중국에는 역사 편찬의 강력한 전통적 형태가 있었다. 원나라의 역사가들은 초기부터 [요사(遼史] [금사(金史)] [송사(宋史)] 등 정사(正史) 편찬에 착수하면서 중국의 전통적 역사 편찬을 따라가는 길로 들어섰다.

둘째, 일-칸국은 동쪽 끝에 치우쳐 있던 원나라에 비해 대몽골국에 속하는 다른 칸국들과도 접촉이 많고 대몽골국 밖의 다른 지역에 관한 정보도 얻기 쉬운 조건이었다. 원나라에서도 다양한 출신의 색목인이 등용되고 있었지만 소수파에 그친 반면 일-칸국 관리들은 출신 성분이 훨씬 더 다양했다.

내부적으론 이슬람국가, 대외적으론 대몽골국


▎[집사]의 삽화로 들어있는 훌레구 칸과 도쿠즈 카툰 왕비의 초상. 케레이트 출신의 왕비는 네스토리아파 기독교인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일-칸국은 다른 조공국과 달리 종주국과 한집안으로, 종주국의 할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위치였다. 가잔 칸이 재상(vizier)인 라시드에게 맡긴 [집사] 편찬은 일-칸국 차원의 사업에 그치지 않고 대몽골국 차원의 사업으로도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최고 관직의 라시드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은 일-칸국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하라는 뜻이었다.

일-칸국에서도 라시드 이전에 역사 편찬이 있었다. 1260년까지의 [세계정복자의 역사]에 대몽골국 역사를 담은 주 베(Juvayni, 1226~83)이는 호라즘 출신으로 훌라구 밑에서 대신을 지낸 사람이었다. 일-칸국 자체만을 위한 역사라면 주베이니 수준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집사]는 이와 다른 차원의 작업이었다.

가잔 칸의 10년(1295~1304)은 일-칸국 왕권 재확립의 시기였다. 1291-95년 게이하투와 바이두의 4년간을 [위키피디아]에서 살펴보면(https://en.wikipedia.org/wiki/Gaykhatu, https://en.wikipedia.org/wiki/Baydu, https://en.wikipedia.org/wiki/Ghazan), 왕실 내의 반목으로 일어난 싸움이 아니라 귀족들의 쟁투에 왕족들이 말려든 느낌이 든다. 혼란의 진행에 따라 영토와 군대에 대한 귀족의 장악이 계속 확대·강화됐다. 가잔은 20세 때 숙부 게이하투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어렸을 때부터 총독을 맡고 있던 호라즘의 통치에 전심했다. 호라즘에서 키운 실력이 귀족의 전횡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가잔은 바이두 토벌에 나선 후에 이슬람에 입교했다.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인 주민과 군대의 지지를 받기 위해 필요했던 조치로 이해된다. 일-칸 즉위 후 국가 정비도 이슬람국가 건설에 기본방향을 두었지만, 배타적인 원리로 삼지는 않았다. 내부적으로는 이슬람국가이면서 대외적으로는 대몽골국의 일원이라는 2중 정체성을 구축했다. 대몽골국의 일원이라는 측면을 지키는 데 볼라드가 큰 역할을 맡았을 것이고, [집사] 편찬을 돕는 것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길이 되었을 것이다.

이슬람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 적은 우리 사회에는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이미지가 깔려있다. 그러나 그 역사를 조금씩 알아가는 데 따라 이 이미지가 씻어진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 말 안 되는 얘기라는 버나드 루이스의 지적이 재미있다. 이슬람교도에게 왼손은 더러운 일을 맡는 손이므로 그 손에 코란을 들 수 없으니 모두 왼손에 칼을 들고 싸웠겠냐는 것이다.([The Jews of Islam 이슬람 세계의 유대인](1984) 3쪽) 이슬람의 신축성과 포용성을 알게 되면서, ‘칼과 코란’의 얘기는 기독교인들이 ‘칼과 십자가’를 든 자기네 십자군의 모습을 뒤집어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교도 박해 없었던 몽골과 이슬람의 포용성


▎[집사] 중 가잔의 이슬람 입교 장면. / 사진:위키피디아
이슬람의 포용성에 관한 루이스의 설명을 보면서, 그런 포용성이 이슬람만이 아니라 당시의 여러 문명권에서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이슬람 율법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딤미(dhimmi)’ 제도가 있었다. 이슬람세계의 ‘이교도’는 다소의 ‘차별’은 받더라도 신앙의 근본적 자유를 위협하는 ‘박해’는 받지 않았던 것이다. 몽골제국에서도 몽골 정복 이전의 중국에서도 특정 종교를 강요한 일은 거의 없었다.

유럽 기독교의 편협성이 그 시대의 예외적 현상으로 보인다. 기독교는 5세기에 두 차례 공의회(431년 에페소스, 451년 칼케돈)를 계기로 큰 분파를 겪었고, 갈라져 나온 네스토리아파와 오리엔트정교회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많이 퍼져 있었다. 이집트와 시리아 등 비잔틴제국의 영역에서는 이 동방교회들이 심한 차별과 박해를 받았는데, “이슬람의 등장과 이 나라들의 이슬람화에 따라 상황이 크게 좋아지고 종래보다 더 큰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같은 책 18쪽) 루이스는 이슬람권의 중심부에서는 포용성의 원리가 확실한 반면 주변부에서는 그 원리로부터의 일탈이 더러 나타났다고 하는데(같은 책40~41쪽), 십자군시대 기독교의 편협성도 주변부 현상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가잔이 추구한 일-칸국의 2중 정체성(내부적으로는 이슬람국가이면서 대외적으로는 대몽골국의 일원)은 라시드의 [집사]에도 비쳐져 나타난다. 김호동의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224~232쪽에 [집사]의 내용과 구성이 설명되어 있는데 [위키피디아] ‘Jāmi‘ al-tawārīkh’ 조의 설명과 다소의 차이가 있다. 두 설명에 공통되는 중요한 부분은 이런 것들이다.

(1) 몽골과 투르크 제 부족의 기원, 역사와 설화.

(2) 가잔 칸에 이르기까지 대몽골국의 역사.

(3) 올제이투 칸의 치세(1310년까지).

(4) 창세기 이래 모든 문명과 국가의 지도자들

이 네 부분은 4중의 동심원처럼 보인다. 제일 안에 일-칸국(3), 그 밖에 대몽골국(2), 그 밖에 초원 세계(1), 그리고 제일 밖에 전 세계(4). 이것이 3부로 이뤄진 [집사] 제1~2부 내용이고 ‘제역도지’와 ‘제국도로지’를 담은 제3부는 전해지지 않는다고 김호동은 설명하는데, 그가 말하는 ‘제국도로지’ 대신 이스탄불 톱카피박물관에 소장된 ‘Shu’ab-i panjganah’를 [위키피디아]는 제시한다. 아랍·유대인·몽골·프랑크·중국의 5족 세계도를 담은 것이라 한다. 확인된 내용만 보더라도 [집사]가 “세계 속의 일-칸국”의 역사를 그리는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칸국 대표 즉석에서 기독교 깜짝 입교


▎북송시대 왕거정(王居正)의 방거도(纺車圖). 면사(綿絲)를 뽑는 데 종래보다 월등히 효과적인 방법이 된 물레는 11세기에 처음 만들어졌다. / 사진:바이두
문화 교류에서 매개자(intermediary)의 역할을 생각하며 용해(dissolution)라는 화학 현상에서 용매(solvent)의 역할을 떠올린다. 용해란 서로 다른 물질이 분자 차원에서 고르게 섞이는 상태다. 서로 용해되지 않는 용질(solute)들이 적절한 용매 안에서 용해가 가능하다. 커피와 설탕이 함께 물에 녹을 수 있는 것처럼.

문명권의 중심부는 문화적 생산이 활발한 곳이지만 다른 문명권과의 교류에서는 보수적 태도가 일반적이다. 전통의 힘이 강해서 다른 요소들을 쉽게 용해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문명권 외곽의 주민들은 높은 용해도(solubility)를 보여주는 일이 많고, 그들의 영향력이 클 때는 중심부까지 녹여내는 용매 역할을 맡기도 한다. 불교가 전파될 때 중앙아시아 지역에 먼저 자리 잡은 다음 5호16국 시대에 중국을 휩쓸게 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용매로서 몽골인의 특성은 종교 측면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몽골비사]를 비롯한 몽골 문헌에는 하늘신 텡그리(Tängri) 신앙이 두루 깔려있다. 특이한 점은 하늘신과 소통하는 특정한 방법에 대한 집착이 약하다는 것이다. 전통적 소통방법은 무당(shaman)을 통하는 것인데, 칭기즈칸이 가장 강력한 무당 테브 텡게리(Teb Tenggeri)의 탐욕을 응징하기 위해 허리를 부러뜨린(씨름을 빙자해서) 일이 [몽골비사]에 적혀있다.(바필드 [위태로운 변경] 194쪽)

1254년 몽케의 조정을 방문한 뤼브룩의 여행기에는 여러 종교 대표자들이 모여 교리를 토론하는 ‘종교회의’를 대칸이 주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느 종교든 같은 하늘신을 받드는 것으로 인정하면서 제일 잘 받드는 길을 찾자는 토론이었다. 몽골인은 다신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고, 일신교로 인정받는 이슬람교·기독교·유대교·불교·조로아스터교 등 여러 종교가 이 토론에 참여했다. 몽골 지도부의 이런 노력은 포용성이 큰 보편종교를 지향하는, 여러 용질을 용해하는 용매와 같은 것이었다.

1274년의 제2차 리용 공의회에 일-칸국의 아바카 칸이 사절단을 보냈다. 맘루크 술탄국을 협공할 십자군을 일으키도록 청하는 목적이었다. 회의 진행 중 일-칸국 수석대표가 공개적 기독교 입교로 참가자들을 놀라게 했고, 그 덕분인지 십자군 방침이 결정되었다. 같은 종교 내에서도 교파끼리 용납하지 못하던 기독교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에큐메니즘이었다.

올슨은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 전체 내용의 절반을 차지하는 제4부에서 여러 부문 문화 교류의 상황을 개관했다. 역사서술·지리학·지도, 농업·음식·의약·천문학·인쇄술로 장을 나눴는데, 어느 부문에서나 공통되는 인상은 종교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전통에 대한 집착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올슨이 제시한 여러 부문 중 가장 많은 생각을 새로 일으키게 되는 것이 농업이다. 두 문명권의 기반산업이 농업이었다. 몽골제국을 통한 농업기술의 교류는 두 지역에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왔다. 페르시아 역사에 관해서는 내가 아는 것이 적지만, 중국사에 관해 내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한 가지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몽골제국에서 농업 생산 혁명 시작

명나라 이후 중국 인구의 꾸준한 증가다. 페어뱅크와 골드먼은 [China, a New History 신중국사](1992) 168~169쪽에 이렇게 썼다.

“신뢰할 수 없는 자료가 너무 많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1368년 이후 600년 동안 경작지와 곡물 생산량의 총합을 인구 기록에 비교하는 방법을 쓰게 되었다. 드와이트 퍼킨스는 1400년 중국 인구를 약 8000만 명으로 가정하고 1960년대의 7억 명까지 늘어난 것은 곡물 공급의 꾸준한 증가 덕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4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5~6배 늘어난 것이 분명하고 1800년에서 1965년 사이에 다시 50%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중국 인구는 북송 시대에 1억 명을 돌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농업사회로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구밀도에 도달한 것이다. 1800년경까지 그로부터 다시 다섯 배로 인구가 늘어난 데는 경작지의 확장보다 농업의 집약화가 더 큰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의 후반부에는 옥수수·감자 등 신대륙 작물의 도입이 큰 몫을 하지만 품종의 확장은 몽골제국에서 널리 시작되고 있었음을 [집사]의 한 대목에서 읽을 수 있다.

“(가잔 칸은) 타브리즈에 존재하지 않고 그곳 사람들이 본 적이 없던 갖가지 과일과 향초와 곡물의 씨앗을 모든 나라에서 가져와 심고 가꾸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일에 사람들이 매달려 애쓴 결과 이제 모든 것을 타브리즈에서 보게 되었고 나날이 늘어나는 그 소출을 이루 다 형언할 수 없게 되었다. (…)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에 보내는 사신에게 (가잔 칸은) 그 나라의 특색 있는 작물의 씨앗을 모아 오게 하였다.”(올슨, 같은 책 121쪽에서 재인용)

라시드는 일-칸국의 조치를 기록한 것이지만 원나라 쪽에서도 상응한 조치가 없었을 리가 없다. 중국 문명과 페르시아 문명 사이에는 장건(張騫) 시대 이래 꾸준히 문물의 교류가 있어왔다. 그러나 상인과 사절들을 통한 교류가 물 몇 바가지씩 떠서 옮기는 수준이었다면, 원나라와 일-칸국이 교류를 위한 관서까지 만들고(의약·농업·천문역법 등) 기술자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키는 등 지속적 정책으로 추진한 것은 송유관을 건설한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제국·국가 차원의 교류 활성화가 발휘한 힘은 이미 들어와 있던 전래품의 ‘재발견’에서 확인된다. 면화가 하나의 대표적 사례다. 원나라 때 도입된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었는데, 사실은 남북조시대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원나라 때 면포의 생산이 크게 확대되었기 때문에 잘못 알려진 것이었다. 문익점이 들여온 것은 당시 막 개발된 첨단상품이었다. 중국의 통제를 피해 몰래 들여왔다는 이야기는 재미를 위한 이야기일 뿐이다. 원나라 조정의 눈에 고려는 제국의 일부였고, 제국의 일부에게 무명옷의 편리함을 가로막는다는 것은 원나라가 취할 정책이 아니었다.

※ 김기협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8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2012호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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