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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12)] 1·21사태와 왕을 낳은 일곱 후궁 신위 모신 칠궁 

궁궐 담장이 무장공비 막은 방벽 역할 

1968년 김신조 등 북한군 31명 청와대 근처까지 침투
칠궁, 경호·교통 이유로 관통도로 개설해 일부만 남아


▎1968년 1·21 사태 당시 무장공비 소탕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 / 사진:대한뉴스 제659호(1968년 1월 26일)
1968년 1월 21일 밤 10시쯤 청와대 인근에서 요란한 총성과 폭발음이 이어졌다. 청와대를 기습, 요인 암살을 위해 침투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대남 공작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특수요원 31명이 도주하면서 쏜 총소리와 수류탄의 폭발음이었다.

이들 무장공비를 검문하며 저지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은 그들이 쏜 총탄 세례에 그 자리에서 숨졌다. 저들의 후미에서 추격하던 정종수 경장도 공비들의 총격에 중상을 입고 며칠 후 치료 도중 사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뿔뿔이 도주했다.

무장공비들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됐다. 작전이 종료되기까지 약 보름. 일부 언론에서는 남파된 총인원과 작전 종료 당시 월북 인원에 이견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식적으로는 총 31명 중 자폭·폭사 포함 사살 29명, 월북 1명, 생포(투항) 1명이었다. 생포된 1명이 지금 목사로 활동 중인 당시 27세의 김신조다. 그의 증언으로 남파 총인원 및 그들의 침투 경로와 목적이 밝혀졌다.

1968년 1월 17일 개성에서 출발한 그들은 초저녁 무렵 북방한계선 내의 북한 초소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완전히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저녁 7시쯤 초소를 출발해 군사분계선을 통과한 후 밤 10시쯤에는 미2사단 지역의 남방한계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절단기로 철조망을 자른 뒤 남방한계선을 넘어 은밀히 침투하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아군의 경계초소가 있었기 때문에 이동이 더디었지만, 새벽이 되기 전 임진강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이 트기 시작하면 움직임에 제한을 받기에 18일은 밤이 될 때까지 근처에서 은거하다가 하얀 천으로 몸을 위장한 후 야음을 이용해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넜다.

아군의 경계지역을 벗어난 이후에는 시간당 12㎞라는 빠른 속도로 이동해 파주의 파평산을 경유, 19일 새벽이 되기 전 법원리 초리골 삼봉산에 도착했다. 여기에서도 낮에는 은거에 들어갔다. 그런데 무장공비들은 그날 오후 예상치 못하게 삼봉산에 나무하러 온 동네 나무꾼 우씨 4형제와 조우하게 됐다. 작전 도중 만나는 군인이나 민간인이나 모두 죽이게 돼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나무꾼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 생각하기도 했고, 4명 모두 죽이면 마을에서 찾으러 올 뿐만 아니라 겨울이라 땅이 얼어서 땅 파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반대 의견도 제시됐다. 투표 결과 18대 13, 풀어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냥은 풀어줄 수 없어 4시간 동안 붙잡아 두고 사상 교양과 위협을 가하다가 어두워져서야 풀어줬다. 그들 중 한 명은 나무하지 못한 값이라며 세이코 손목시계까지 선물로 줬다고 하며, 땅 파기 싫어서라도 살려 줬다고 한다. 우씨 형제가 내려와서 파출소에 신고한 시각은 19일 밤 9시쯤, 인근 군부대에는 9시30분쯤 전달됐으며, 합참에는 자정 무렵에 보고됐다.

그 후 본격적인 작전이 시작돼 포위망을 펼쳤으나 포위망 속에서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우리군은 야간 급속 산악행군의 경우 완전군장 상태에서 한 시간에 4㎞ 정도 이동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20㎏의 군장을 멘 상태에서 시속 10㎞ 정도의 속도로 산악을 주파했던 그들보다 항상 늦게 포위망을 펼쳤던 것이다.

나무꾼 형제의 신고로 소탕 작전 개시


▎1968년 1·21 사태 당시 총격전이 벌어졌던 장소와 칠궁 담장. / 사진:이성우
그들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강인한 체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씨 형제들을 풀어준 즉시 법원리를 출발해 이동을 시작했기에 아군의 작전이 시작돼 지역 단위 차단선을 펼치고 있을 때는 미타산~앵무봉~노고산을 거쳐 이미 북한산 진관사 계곡까지 도착해 은거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그때가 20일 새벽 무렵이었다.

그리고 20일 밤 북한산 승가사 쪽으로 올라가서 21일 새벽에는 북한산 비봉사모바위 인근에 도착해 은거하면서 최종 침투 루트를 점검했다. 최종 침투 루트는 북악산을 넘어 바로 청와대로 진입하는 코스였다. 승가사에서 청와대까지는 약 4㎞ 조금 넘는 거리였지만 문제는 험준한 급경사와 성벽, 그리고 행동에 제한을 주는 허리까지 빠지는 쌓인 눈이었다. 기존의 코스로는 작전 거행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고 판단됐기에 세검정 골짜기를 거쳐 자하문길을 이용하는 코스로 변경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려 이동을 시작했다.

우리 군과 경찰에도 이미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상태이긴 했으나 그들의 목표가 청와대 습격인지는 알지 못했기에 상대적으로 청와대 주변의 경계병력 배치는 전방지역만큼 촘촘한 상태는 아니었다. 도로를 따라 2열 종대로 2~3명씩 구평동(현재의 평창동)에서 세검정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그들은 마침 무장공비 출현에 대비해 지역을 순찰 중이던 이각현 서대문경찰서장의 눈에 띄었다. 이 서장은 거동 수상자들이 무장공비일 수 있어 즉시 시경에 “괴한 30명 출현”이라는 무전 보고를 한 후 세검정 파출소로 앞질러가 의심 사항을 전파하면서 관계기관에도 훈련 상황을 확인함과 동시에 군 병력 동원도 요구해 군에서도 책임 구역별로 병력 배치가 시작됐다.

세검정에서 창의문 쪽으로 방향을 바꾼 그들은 창의문 고개 넘어 도로 확장 공사장 부근 초소까지 도착했으나 이곳을 지키던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 2명에게 검문을 받게 됐다. 2명의 경찰관 중 1명이 사망한 정종수 경장이다. 그들은 “육군 방첩부대 소속 대원들로서 특수훈련을 마치고 복귀 중인데 방해하지 말고 비켜라”고 다그쳤지만 2명의 경찰관은 그들이 무장공비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총기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수적으로도 불리해 검문으로 시간을 지체하며 종로경찰서에 연락한 후 길을 열어줬다. 그리고는 모른 척 말을 걸며 같이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경복고등학교 후문을 막 지나 현재의 청운실버센터 건물 근처까지 도달했다.

그곳은 청와대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이며 막혀 있는 칠궁의 담장으로 인해 도로가 오른쪽으로 굽어진 곳이다. 그들은 더는 갈 수 없었다. 미리 연락을 받고 출동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 일행이 강력히 저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최 서장 뒤쪽으로 라이트를 켠 채 버스가 한 대 오고, 그 뒤에도 추가로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그들은 버스 불빛을 아군의 증원군으로 오인했다. 그 순간 경찰 병력에 총기를 난사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진 뒤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최 서장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자하문 고개에서부터 그들을 추격하며 후미에서 시간을 끌며 기회를 엿보던 정종수 경장은 동료 박태안 형사와 함께 무장공비 1명을 돌로 머리를 때려서 제압하고 생포했다.

그러나 생포 과정에서 도주하던 나머지 공비의 총격에 중상을 입고 치료 도중 1월 30일 사망했다. 생포된 무장공비는 김춘식이었다. 그는 치안국으로 압송돼 무장해제를 받던 도중 7번째 수류탄과 연결된 8번째 수류탄의 안전핀이 같이 뽑히는 바람에 어처구니없게 폭사해버렸다.

이틀 뒤 미군 첩보함 푸에블로호 납북


▎박정희 대통령이 주민등록증을 교부받는 모습. / 사진:정부기록사진집(1968년 11월 21일)
김신조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버스에 국군의 증원 병력이 대거 타고 있다고 오인한 것이었는데 사실은 창의문길을 다니는 원효여객과 진흥여객 소속의 시내버스들이었다. 먼저 도착한 원효여객 소속 버스는 무장공비가 던진 수류탄이 내부에서 폭발해 크게 부서지고 사상자도 발생했다. 무장공비 소탕작전 기간 중 사상자에 대한 기록은 언론사 및 시기마다 다소 차이가 나지만 1996년 9월 24일 자 [동아일보]에는 전사 36명, 부상 68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일한 생존자로 사건의 전모를 밝혀준 김신조 목사는 홍제천쪽 인왕산 하단부에서 생포됐다. 1968년 1월 27일 자[동아일보] ‘김신조 잡은 세 용사’ 제하의 기사에 의하면 “김신조는 총격전 당시 경복중학교(현 경복고등학교) 담을 넘어 인왕산 정상 근처에서 무기와 휴대품을 버린 후 자폭용 수류탄 1개만 휴대한 채 북쪽으로 탈출하는 도주로를 선택했으나 홍은동 5번지 독립가옥 근처에서 30사단 수색대와 조우한 후 투항함으로써 생포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 시각이 1월 22일 새벽 한 시 반쯤이었다. 홍은동 5번지는 지금의 홍지문에서 서쪽으로 약 300m 이내의 거리에 있는 곳이다.

1·21사태 이틀 뒤인 1968년 1월 23일, 미군의 최첨단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동해 원산항 앞바다에서 북한에 나포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또한 1968년 10월 30일에서 11월 2일 사이에는 김신조 목사와 같은 소속의 124군 부대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봉화·명주·정선 등지로 침투했다.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불리는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던 당시는 북한의 대남적화 야욕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경향신문] 1968년 8월 30일 자 ‘올해 들어 공비 156명 사살·검거’ 제하의 기사에 의하면 “66년도엔 106명, 67년도엔 345명, 68년 8월 30일 현재 156명의 무장공비가 사살 또는 검거되는 등 북괴의 도발 행위가 가중될 것”이라는 대간첩대책본부의 발표와 같이 우리 정부는 국가적 위기감을 느끼고 범국민적인 대응체제를 준비할 필요성이 절박해졌다.

약 보름간에 걸쳐 진행된 무장공비 소탕작전은 종료됐지만, 그 결과는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민등록증의 발급일 것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지금과 같은 개념의 주민등록증이 없었을까? 답은 ‘없었다’라고 본다. 물론 고려 말인 공민왕 당시에도 호패(號牌) 제도를 실시했으며, 조선시대에도 ‘호패법(號牌法)’이라는 제도가 있었기에 개개인을 식별하는 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완벽하게 정착되지는 않았던 제도였다.

조선의 경우 태종 때 처음 실시된 호패법은 16세 이상의 양인(良人) 남자에게 신분증명서 격인 호패를 나눠주고 반드시 휴대하고 다니도록 한 법이다. 현재의 주민등록증과 유사한 개념으로 조세와 군역의 대상자를 파악하기 위해 시행했다. ‘양인’이란 천민을 제외한 모든 양반과 상민(평민)을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양반의 지배를 받던 상민만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호패법은 시행과 폐지를 반복하면서도 조선 말기까지 계속됐다.

주민등록증 1번은 박정희, 2번은 육영수


▎현재까지 남아 있는 칠궁 서쪽 궁장의 흔적과 보호수. / 사진:이성우
대일 항쟁기에는 휴대하고 다니던 신분증 같은 것이 있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나 일제 패망 이후 1950년대에는 시민증이나 도민증 같은 것을 발급해주기도 했다. 이 경우에도 군인이나 공무원이 원하지 않으면 발급하지 않았으며, 거주 기간이 부족하거나 영구히 기거할 수 없는 사람도 발급되지 않는 등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현재의 주민등록증 발급요건과는 차이가 있었다.

지금과 유사한 주민등록제도의 직접적인 기원은 대일 항쟁기의 조선기류령(朝鮮寄留令)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조선기류령은 1942년 10월 15일부터 시행된 제도로서 그 이전에는 호적만으로 거주지와 인구를 파악했다. 1912년부터 시행된 호적제도는 농업을 기본으로 하던 당시에는 출생 후 타지로의 이동이 적었던 관계로 별문제가 없었으나 점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도시 등지로의 인구 이동이 많아지다 보니 호적만으로는 거소지의 인구를 파악하기 어렵게 됐다.

또한 호적 주소인 본적은 실제 거주 사실과 차이가 있으며 거주지를 바꿀 때마다 본적을 옮기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기에 본적 이외의 장소에서 90일 이상 거주할 의사를 가지고 주소 또는 거소를 정해 신고하게 되면 그곳을 2차 본적지로 갈음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가 조선기류령이다.

1942년부터 시행된 이 제도의 이면에는 제2차 세계대전 와중이었던 당시 조선인의 징병 대상 인원을 용이하게 파악하기 위해 만든 제도라고 이해된다. 조선기류령은 일제 패망 이후 1962년까지 기류법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했으나 주민등록법이 시행되는 1962년 6월 20일부로 폐지됐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발급하는 주민등록증의 탄생은 주민등록법이 시행되고도 6년이 더 지난 다음에야 시행됐다. 그 원인이 됐던 사건이 바로 1968년 1월 21일 밤 무장공비들에 의한 청와대 기습사건이었다. 1·21사태 이후 개정된 주민등록법에는 ‘치안상 필요한 특별한 경우 신원이나 거주 관계를 확인하고, 간첩이나 불순분자를 용이하게 식별 색출하기 위하여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도록 한다’고 해 주민등록증 발급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주민등록증 발급 초창기의 주민등록번호체계는 앞의 6자리부터 지역표시번호(6)-성별표시번호(1)-주민등록등재순서(5) 등 총 12자리로 이루어져 13자리 체계의 지금과는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110101-100001이라는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사람은 서울(11) 종로구(01) 자하동(01)에 거주하는 남자(1)로서 제일 먼저 등록한 사람(00001)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는 바로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육영수 여사의 주민등록번호는 110101-200002이었다. 서울 종로구 자하동에 거주하는 여자로서 등재 순서는 두 번째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현재는 없는 동명인 자하동은 청운동으로 동명이 바뀌어 1970년 6월 9일 개정 시행된 주민등록법시행규칙부터 적용됐다.

북악산 성곽길은 38년 동안 폐쇄


▎1968년 1·21 사태 당시 무장공비의 수류탄 투척으로 내부가 대파된 시내버스. / 사진:대한뉴스 제659호(1968년 1월 26일)
1975년 10월 31일부터는 생년월일(6)-성별(1)-지역표시번호(6) 등의 13자리 숫자체계로 만들어진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고 있으며. 2020년 10월 5일부터는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주민등록번호 중 읍·면·동을 나타내는 마지막 6자리의 지역표시번호 대신에 임의번호를 부여하도록 개정됐다.

주민등록증과 함께 1968년 4월 1일부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됐으며 1·21사태를 보복하기 위해 1968년 4월 공군 정보부 소속의 특수 북파공작부대인 684부대도 창설됐다. 영화[실미도]로 잘 알려진 684부대는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실미도에 있었으며, 창설된 연도와 달의 숫자를 따서 684부대라는 위장명칭을 사용했다.

육·해·공군의 현역병 복무 기간은 3개월에서 최대 6개 월까지 연장됐다. 1968년 11월에는 정예 초급장교 양성을 목표로 육군 제3사관학교가 경북 영천에 창설되는가 하면 1955학년도부터 중단됐던 교련과목은 1969년부터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부활했다. 1971년에는 전투경찰제도가 도입돼 42년간 운용되다가 2013년 폐지됐다. 북악산 성곽길은 1·21사태 이후 폐쇄됐다가 38년 만인 2006년 4월부터 민간에 개방되는 등 1·21사태와 당시의 상황은 우리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궁(宮)이란 임금을 포함한 왕실 가족이 사는 곳이다. 그리고 왕실과 인연이 있는 곳에 세운 본궁(本宮), 임금이 왕궁 밖으로 행차할 때 묵는 행궁(行宮),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인 잠저(潛邸), 일부 후궁의 처소 및 사당도 궁으로 높여 불렀다. 그런데 후궁의 사당에 궁 이름이 붙은 것은 대부분 임금을 낳은 후궁의 경우였다. 이때 궁으로 높이려면 대개 봉원[封園: 묘 이름을 원(園)으로 높인 의식]이라는 의식을 가졌다.

칠궁이란 명칭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청와대 영빈관 밖 서쪽에 있는 칠궁은 조선시대 임금을 낳은 7명의 후궁 신위를 모신 사당[祠堂: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집] 이름이다. 이 7명의 후궁은 임금을 낳은 특별한 분들이므로 그 신위를 모시는 사당을 별도로 짓고 제사를 지냈다.

처음 이곳에는 영조 1(1725)년 12월 23일 영조가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으로 세운 숙빈묘(淑嬪廟)만 있었다. 이 숙빈묘는 영조 20(1744)년 3월에 육상묘(毓祥廟)로, 영조 29(1753)년 6월 25일 육상궁(毓祥宮)으로 높여졌다. 그러다가 대한제국 당시인 1908년 여러 임금의 사친(私親: 임금을 낳은 친어머니) 신주를를 모신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 등이 별도 지역에 있다가 이곳에 합해져 육궁(六宮)으로 불리었다가, 1929년부터는 덕안궁(徳安宮)이 또 합쳐져 지금과 같은 칠궁(七宮)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1·21 사태 직후 칠궁의 담장 철거 시작


▎1968년 1월 22일 새벽 서울 홍제동에서 생포된 김신조(왼쪽).
칠궁의 궁장은 원래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의 서쪽 궁장(현재 청와대 영빈관 담장)을 연해 같이 있었고 칠궁의 서쪽 권역은 주한교황청대사관과 담장을 접하고 있었다. 특히 칠궁의 북쪽 궁장은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재 대경빌라 D동) 앞의 가파른 경사를 따라 상당히 높게 세워져 있어 무장공비들이 직접적으로 청와대로 진입할 수 없는 자연적 방벽 구실을 했다. 종로경찰서장이 막아서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던 그 장소는 통과했을 경우 낮아지는 지형상의 불리함이 무장공비들로 하여금 쉽게 청와대로 진입할 수 있는 여건이 가능하기에 청와대 진입의 목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점부터 칠궁을 관통하며 남쪽으로 도로가 생겼다. 작업은 1·21 사태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던 1968년 2월 15일부터 시작됐다. 서울시는 1963년부터 철거 여부를 둘러싸고 5년 동안 논란이 돼왔던 칠궁 일부를 효자동(孝子洞)에서 세검정(洗劒亭) 간의 창의문길 도로확장계획에 따라 그동안 막혀 있던 칠궁 일부에 대한 철거작업을 착수했다.

당시의 창의문길은 상습 교통사고 발생지역이었다. [동아일보] 1963년 9월 18일 자 ‘길갓집 수난시대’ 제하의 기사에 의하면 이 길은 “평균 하루 1건, 큰 사고는 사흘에 한 번꼴로 발생하여 그때마다 사람이 다치거나 벽이 무너지거나 한다”고 해 도로확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문화재 애호가들은 사적 제149호인 칠궁이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자연미가 있는 순수 한국식 정원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기 때문에 어떤 손상도 가해져서는 안 된다고 철거를 반대해 왔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교통사고와 특히 1·21 사태의 영향으로 청와대 경호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주장에 그동안지속해서 철거에 반대 의견을 제시해왔던 문화재위원회가 일부 철거에 동의함으로써 도로개설을 위한 칠궁의 궁장 철거가 시작된 것이었다.

도로는 칠궁을 남북으로 관통했다. 이때 칠궁에 난 도로는 정문 바로 왼편 궁장으로부터 시작해 북쪽 담까지 총연장 140m이며 폭은 15m이다. 이 공사로 인해 칠궁은 경내가 동서로 양분됐으며, 총 7711평 면적에서 1500평이 축소됐다. 전체 면적의 20%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이때 저경궁·대빈궁은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됐으며 당시 칠궁의 재실 구역에서 살고 있었던 의왕(義王: 고종의 5번째 아들 겸 제2황자)의 5남 이수길(李壽吉)을 비롯한 10여 세대도 다른 곳으로 이사하게 됐다.

개설된 도로의 서쪽 부분을 살펴보면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칠궁의 궁장 흔적과 수령 350년이 넘은 보호수 한 그루가 여기도 조선 영조 당시 조성됐던 칠궁의 한 영역이었음을 말없이 확인해주고 있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12호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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