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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24)] 폭군 네로의 무덤, 어떻게 1900년 건재할까 

망자에 대한 단죄, 신의 소관이라 생각 

후대의 잣대로 과거 모든 문제 근본부터 허물 권한은 없어
여당의 ‘친일파 파묘법’ 21세기 문명국에선 유례없는 야만


▎고대 로마의 승전 영웅은 정치 중심지였던 ‘로만 포럼’(Roman forum)에서 개선 퍼레이드를 벌였다. 로만 포럼을 찾은 관광객이 기둥 옆을 지나고 있다. / 사진:AP/연합뉴스
"Respice post te, Hominemte memento(뒤를 돌아보라, 그대도 인간일 뿐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2세기 기독교 학자 테르툴리아누스의 책 [호교서(Apologeticus)]에 나오는 경구다. 책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의 핵 ‘로만 포럼’(Roman Forum)에서 이뤄지던 개선 퍼레이드 풍경을 묘사한다. 포럼 양쪽에 늘어선 신 조각상 사이로 로마 병정과 노예, 전리품을 실은 수레가 차례로 행진한다. 전쟁을 지휘한 황제나 장군은 황금마차를 타고 들어선다. 행진대열 주변은 무희들로 메워진다.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로마명 바쿠스)를 따르는 기쁨조다. 이들의 춤과 노래로 개선 영웅의 세속적 영광은 절정에 치닫는다.

그런데 한 가지 말이 영웅의 귀에 은밀히 울려 퍼진다. 앞서 테르툴리아누스가 소개한 경구다. 웅장한 교향곡 가운데 숨은, 바이올린의 하이 피치처럼 들린다. 더구나 전령사 역할을 노예나 어린이가 맡는다. 천하를 얻은 영웅이라도 죽음 앞에선 가장 미천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환희와 박수가 극에 달할수록 노예와 어린이는 영웅의 귀에 대고 “너도 유한한 인간에 불과하다”라고 반복한다.

지난 8월 여당의 한 의원이 ‘친일파 파묘(破墓)법’(국립묘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의 오랜 경구를 다시 떠올렸다. 파묘법은 정치적 단죄를 위해 망자를 무덤에서 파내자는 법이다. 명분은 친일파 처벌이다. 국립묘지에 묻힌 인물의 행적 가운데 친일이 드러날 경우, 유골을 국립묘지 밖으로 이장(移葬)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현재 서울과 대전의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12명. 박정희 전 대통령과 지난 7월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주된 인물이다.

전국시대 일본에서도 적장의 주검 예우


▎로마의 한 유적지에 전시된 사르코파구스. 겉면엔 신화 속 인물들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 사진:유민호
필자는 파묘법 소식을 듣는 순간 ‘뭔가’ 섬뜩함을 느꼈다. 조선시대 사화(士禍) 때나 이뤄지던 파묘 논쟁이 2020년 문명국, 그것도 선진국을 자처하는 나라에서 펼쳐지고 있어서다. 그나마 사화 때의 부관참시는 연산군 개인의 복수 차원이었다. 2020년 파묘는 공적 명분과 절차에 따라 이뤄진다는 점에서 다르다. 파장 이장이 이뤄질 경우 혈육의 동의는 필요 없다. 유골을 어디에 묻을지,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에 대한 문제도 논외다.

꼰대스럽게 “동방예의지국에서 어떻게 묘를 파헤치느냐”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필자가 아는 한, 21세기 문명국 가운데 파묘를 법으로 정하려는 곳은 한국뿐이다. 국립묘지 안장은 당대의 공적 합의에 따라 결정된다. 아무리 거룩한 명분이라고 해도, 후대 사람이 과거의 모든 문제를 근본부터 허물 권한은 없다.

소포클레스가 기원전 441년 쓴 비극 [안티고네(Antigone)]는 천륜으로서의 망자에 관한 모범적 스토리이기도 하다. 안티고네는 인륜을 넘어선 오이디푸스 왕의 딸이다. 근친상간, 아버지 살해를 안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왕국을 떠난다. 뒤이어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진다. 장남을 해친 차남이 새로 부임한 왕에 의해 국가반역자로 지정된다. 이미 죽은 차남이지만, 국가법에 의해 시신을 수습하지 말고 그냥 버려두도록 명령한다. 어길 경우 사형이다.

안티고네는 새로운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동생의 시신을 땅에 묻은 뒤 자살한다. 정치적 의미의 법이 아니라, 인륜에 근거한 시신처리가 먼저라는 생각이 반영된 고대 인류의 상식인 것이다. 한국 정치 논리를 보면, 그리스 비극의 교훈 정도는 간단히 무시할 태세다. 인간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아버지조차 모순덩어리 그 자체다. 가정을 지키려고 비굴해지기도 하고, 거짓말도 한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의 잣대만으로 단죄할 순 없다.

적잖은 한국인이 혐오 대상으로 여기는 일본은 어떨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던 15세기 전국시대에도 망자를 단죄하는 법은 없었다. 당시 적의 수장(首長)을 참수해 보상을 노리는 사무라이들이 즐비했다. 수장과 닮은 사람의 머리를 베어 통에 들고 다니면서 보상을 요구하는 얼치기도 난무했다. 수장의 머리가 맞을 경우엔 부와 명예를 얻었다.

이후 참수된 자의 머리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엄혹한 때였던 만큼 저잣거리에 나뒹구는 모습을 떠올릴 법하다. 그런 경우도 없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 망자를 따르던 포로를 시켜 망자의 가족이나 고향의 법당에 넘겨줬다. 오늘날 일본의 시골 법당에 가도 전국시대 관련 인물의 유물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이유다. 사무라이 예찬론이 아니다. 파묘가 얼마나 반역사적인지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사실 참수한 수장에 대한 예의는, 승자 본인을 위한 보험이기도 하다. 인류가 쌓아온 문명·문화, 나아가 인륜에 반할 경우 언젠가 ‘천 벌’로 되돌려 받기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유적 중 필자가 찾는 곳은 주로 부서진 돌과 흔적만 남은 황량한 땅이다. 수많은 사람이 독차지하려 했던 곳이라지만, 어제의 영광이나 번영을 느낄만한 잔해가 거의 없다. 마구 자란 나무와 부서진 돌, 건물의 흔적만이 간신히 남아있기 마련이다. 대부분은 한눈에 훑어보는데 그치는, 눈에 들어오는 특별한 풍경 하나 없는 침묵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곳에서 마주치는 신비하고도 독특한 매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고대도시 외곽에 들어서 있는 반원형 극장(Teatro)이나 200m 길이의 원형경기장(Stadium)에 찾아가면 2500여 년 전 울려 퍼졌던 인간의 함성과 희열이 가슴에 밀려온다. 소나무 바람 소리와 더불어 어제의 인간들이 나눴던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되살아난다.

그리스 로마 유적의 정수는 무덤에 있다. 도시의 북쪽이나 서쪽에 조성되는 공동묘지를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라고 부른다. 또 이곳에 묻힌 석관(石棺)은 사르코파구스(Sarcophagus)라고 부른다. 그리스 말로 ‘육신을 불태운다’라는 뜻이다. 그리스·로마인들은 토장(土葬)이나 화장을 멀리했다. 토장의 경우, 동물이나 벌레에 먹힐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이나 권력이 있다면, 석회암에다 장식도 화려한 사르코파구스를 선호했다. 석관의 정면엔 헤라클레스·디오니소스 같은 신화 속 인물도 나온다.

로마 유적 정수는 화려한 석관 ‘사르코파구스’


▎로만 포럼에서 2㎞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이집트 양식의 피라미드.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유력 정치인 세스티우스의 무덤이다. / 사진:AFP/연합뉴스
석관 안엔 귀한 장신구도 함께 넣었다. 어떤 장신구가 들어가는지에 따라 생전 삶의 모습이 드러난다. 갑옷·칼·창은 군인, 돌로 된 작은 신의 우상이나 거울은 검투사의 사후 동행품들이다. 죽은 이의 눈에는 동전을 두 개 올린다. 사후세계로 넘어갈 때 건너는 강, 스틱스(Styx)의 사공에게 전해줘야 할 운임이다. 동전이 없으면 강을 건널 수 없다. 영원히 이승과 저승을 표류하는 신세가 된다. 파묘를 한다고 해서 망자의 갈 길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서방의 유명 뮤지엄도 사르코파구스를 고대 유적의 핵심으로 여긴다. 파리 루브르, 피렌체 우피치, 런던의 대영제국 박물관, 로마의 카피톨리니 뮤지엄에 이르기까지, 고대 유물 전시관의 출발점은 단연 사르코파구스다. 신전 주변 장식품의 격이 높기는 하지만, 양으로 보면 사르코파구스가 압도적으로 많다. ‘뮤지엄=무덤 백화점’으로 볼 수 있을 정도다. 망자를 기리는 석관 안 장식물들도 뮤지엄을 구성하는 중요 전시물이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이집트인은 삶의 희열 전부를 죽음의 길에 투자했다. 그리스인의 경우는 평소 삶의 희열과 죽음의 길을 반반으로 나눠 생활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인간 모두를 하늘의 신으로 끌어올리는 삼각 접점이다. 죽음을 관장하고 새로운 생명까지 약속하는 신이야말로 이집트인 생사관의 전부다. 그리스 사르코파구스 벽면에는 죽음의 길에서 맞이하게 될 신들의 조각으로 메워져 있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를 통해 인간의 쾌락과 삶의 환희도 부분적으로 드러낸다.

반면 로마인은 삶의 희열을 100% 만끽하면서 죽음의 길조차 삶의 시간에 투자한 사람들이다. 로마 사르코파구스 벽면에는 신의 그림자가 드물다. 대신 죽은 자의 얼굴이나 가족상, 평생 업적에 관한 기록이 중심이다. 성(聖)에서 속(俗)으로의 변화다. 로마에 이어 기독교 시대가 시작되면서 무덤 벽면은 십자가 하나로 단순해진다.

한국의 파묘법 주창자들이 보기에 서방 뮤지엄들이야말로 제멋대로 파묘를 해오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는 묻혔던 곳에서 망자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문명적, 예술적 근거에 따라 한층 더 격을 높여 보존하는 것이 서방 뮤지엄의 원칙이다. 추방과 말살이 아니라 보존과 전시다.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라, 나라와 뮤지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보존한다.

둘째는 오늘의 선악 기준으로 파묘를 하지 않는다. 부모를 죽이고, 도시를 불 지른 폭군 황제의 무덤이라도 원래 장소에 그대로 두고, 관련 유물은 뮤지엄 곳곳에 철저히 분산 보관한다. 기독교 탄압의 대명사, 폭군 황제 네로가 본보기다. 로마 근교에는 네로의 무덤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때 기독교도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지만, 네로 무덤은 사후 19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건재하다. 공식적 차원의 보존이다. 역사·민족이란 거창한 명분과, 그에 따른 정치적 논리에 의한 파묘가 아니다. 기독교도를 콜로세움에 산채로 집어넣어 사자의 밥으로 만든 인물이라도, 로마를 이끌고 구성한 인물이란 점에서 아직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싫고 좋음의 단죄는, 무덤 앞에 서서 각자가 하면 된다.

이탈리아 로마의 매력 중 하나는 ‘뮤지엄=무덤 백화점’뿐 아니라 ‘도시=무덤 백화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로마에 들른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체험했겠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건축물을 접하는 경우가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당대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이 모여 있을 법하다. 그러나 차를 타고 가다 우연히 눈에 띈 피라미드는 상상 밖이다. 높이 37m 정도의 대리석 피라미드를 접하는 순간, “이탈리아 로마에 왠 피라미드?”란 생각이 들었다. 이집트에 비하면 작고 박력도 떨어지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크기의 피라미드를 이집트 밖에서 본 적은 없다. 남미의 계단형 피라미드를 제외할 경우, 아마 이집트 밖에 세워진 유일한 고대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나라와 뮤지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보존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비(非)가톨릭 신자 공동묘지(CimiteroAcattolico). 영국 등 유럽 개신교 국가들이 운영비를 분담하고 있다. / 사진:유민호
주인공은 기원전 1세기 당시 로마의 유력 정치인 ‘가이우스 세스티우스(Gaius Cestius)’다. 예수 탄생 15여 년 전에 들어선 세스티우스 전용 무덤으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작정하고 들린 때는 지난해 여름이다. 한 달에 두 번씩 있는 피라미드 내부 공개일에 맞춰 갔다. 2015년 개수했다고 하지만, 내부는 별로 볼 것이 없었다. 작은 타원형 방 전체가 도굴로 인해 음산했다.

그러나 목적지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원하는 결과를 못 얻는다 해도 다른 뭔가가 새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주인공은 로마 피라미드 바로 위쪽에 마련된, 축구장 규모 크기의 공동묘지다. 피라미드 주변을 돌다가 만난, 전혀 예상치 못한 침묵의 공간이다. 드높은 사이프러스 소나무에 둘러싸인 비(非)가톨릭 신자 공동묘지(Cimitero Acattolico)다. 지중해 문화권에서 사이프러스 소나무는 망자의 상징이다. 공동묘지 주변에는 반드시 사이프러스 소나무가 드리워져 있다. 하늘을 뚫고서라도 망자의 영혼을 전하려는 전령사가 수직 소나무 사이프러스의 운명이자 역할이다.

비가톨릭 공동묘지는 프로테스탄트, 또는 영국인 무덤이란 이름도 갖고 있다. 1738년 로마 여행 중 사망한 영국 옥스퍼드대 학생 랑톤(Langton)이 묘지에 처음 묻혔기 때문이다. 1821년엔 로마 체류 중 결핵으로 25세 나이에 요절한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ts)가 묘지 안에 들어선다. 이후 영국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독일과 북유럽, 이탈리아 내 비가톨릭 신자와 그리스정교 신자도 공동묘지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20세기 현대 공산주의 운동의 아버지쯤으로 불릴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도 무종교 신자로서 묘지에 안장돼 있다.

필자의 흥미를 끈 인물은 독일 문호 괴테의 아들, 아우구스트 괴테(August von Goethe, 1789~1830)다. 문호 괴테에겐 5명의 자식이 있었다. 괴테의 명성은 19세기 이미 유럽 전역에 알려진 상태였다. 괴테 자신이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얻었듯, 아들도 로마에 들른다. 그러나 공부하던 중 병으로 사망한다. 아무리 인류 문화의 보고(寶庫)라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범죄와 질병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곳이 로마다. 당시의 로마 여행이나 유학은 목숨을 건, 인생의 결단을 필요로 했다.

현재 공동묘지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프로테스탄트 국가의 분담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엄밀히 말해 이탈리아 정부와 무관한 사유지다. 따라서 지금도 묘지비용만 내면 누구라도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필자의 미래도 생각하면서 물어봤지만, 종교계의 허락과 함께 최하 5만 유로의 기부금이 필요하다고 한다. 묘지엔 일본인·중국인의 무덤도 볼 수 있다.

한국, 아니 아시아는 종교전쟁과 무관한 지역이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피의 대결이 얼마나 잔인하고 살벌한지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문화권이다. 모범생 도식처럼 ‘종교=평화·헌신’으로만 생각한다. 유럽은 다르다. 종교전쟁·종교재판·종교대학살에 관한 역사가 예수 이래 19세기, 아니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톨릭 내에서 시작해 비잔틴과의 전쟁으로, 11세기 이후 십자군 전쟁, 나아가 14세기 프로테스탄트와 17세기 남미 잉카·마야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을 정도의 종교적 재난이 이어졌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가톨릭 총본산인 로마 한가운데에 프로테스탄트, 나아가 그리스정교인·무신론자·불교도의 무덤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관용이라고나 할까?

‘로마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 비가톨릭 공동묘지


▎비가톨릭 공동묘지에 있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묘비.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인 그람시는 현대 공산주의 운동의 거두로 꼽힌다. / 사진:유민호
그러나 그런 생각은 파묘론자에게나 어울리는 야만적 상식일 뿐이다. 마녀사냥으로 이교도를 불태워 죽이고, 이슬람 땅에까지 가서 집단학살에 나선 가톨릭이지만, 일단 세상을 떠난 인간에게는 원한이 없다. 이미 죽은 이상, 땅이 아니라 하늘에 맡겨진 문제일 뿐이다.

평평한 돌무덤은 로마 교회 내 제단 주변 곳곳을 지키는 일상적 풍경이다. 동양 예법으로 볼 때, 밟고 지나가기가 어렵다. 워낙 촘촘히 들어서 있어서 피할 수도 없다. 보통 양손을 가슴에 모은 채 누워있는 모습의 조각이 개개 무덤 위에 새겨져 있다. 제단 중심에 가까이 갈수록 당대의 권력자이자 부자로 통했다. 일단 교회에 묻히면 파묘는 없다. 노예장사를 했다고 파내고, 이탈리아를 영국에게 팔아먹었다고 쫓아내는 역사는 없다.

로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이 벌인 수도원 파괴와 가톨릭 신자 처형은 세계적 추문 중 하나다. 15세기 영국 국교 성공회의 아버지 격인 헨리 8세는 당시 살아있는 악마로 통한, 가톨릭의 철천지원수다. 가톨릭 수도사들이 화형에 처할 당시 손톱으로 파 남겼다는 고통스러운 기록은 흑역사의 슬픈 기억이다.

그런 관계였음에도 18세기 로마 교황청은 영국인 무덤 개설을 공식 인정한다. 전통은 혀에 달고 보기에 좋은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숨기고 싶고, 부끄러운 것도 전통의 일부분으로 정착될 수 있다. 로마의 비가톨릭 공동묘지는 현재 전 세계 예술인의 성지순례지로 꼽힌다. 묘지 주인 대부분이 로마 문화예술에 인생을 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877년 이곳을 방문한 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로마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란 찬사를 남긴다.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는 파묘 주창자들의 언급하는 친일 척결 음악가로 통한다. 일본 천황을 위해 음악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파묘에 흥분하는 이들을 만난다면, 중국의 국가 ‘의용군 행진곡(義勇軍行進曲)’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전해주고 싶다. 주인공은 니에얼(聶耳)란 이름의 중국인이다. 공산 중국은 원래 공식 국가가 없었다. 니에얼의 의용군 행진곡이 1982년에야 정식 국가로 지정됐다. 니에얼은 공산당원 출신으로, 국민당 추적을 피해 일본에 망명한 인물이다. 1935년 4월 일본에 머물던 형의 도움으로 도쿄에 숨어든다. 이후 일본 생활은 3개월에 불과하다. 도쿄 주변 후지사와(藤沢) 시 바닷가에서 익사한 채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24세로 세상을 뜬 니에얼은 파묘 주창자들이 보면 전혀 다른 각도에 선 인물이다. 니에얼이 의용군 행진곡의 모델로 삼았던 프랑스 혁명가, 라 마르세이유는 당시 도쿄에서 유행하던 일본 공산주의의 유행가 같은 노래다. 간단히 말해 좌익의 도움으로 베낀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당시 중국은 암흑시대다. 일본에 이미 장기 거주한 니에얼 형의 경우를 봐도, 친일 행적이 곳곳에 드러난다. 친일도 좌우 구별해서, 좌의 친일은 좋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본이나 중국은 그 같은 어제의 얘기를 파고 들어가지 않는다. 니에얼이 남긴, 24세의 젊은 정기만이 중요할 뿐이다.

‘성지’가 된 중국 국가 작곡가의 일본 무덤


▎지난 8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상훈법·국립묘지법 개정을 위한 국회 공청회’ 자리에 고 백선엽 예비역 대장 등의 묘비 모형이 전시돼 있다. / 사진:연합뉴스
중국에서는 항일에 날밤을 세는데, 일본 여자와 놀다가 수영 중 빠져 죽었다는 식의 에피소드가 그의 용기를 덥지는 못한다. 문화혁명 당시 니에얼은 일본에 도망간 친일분자에다, 총이 아닌 피아노에 매달린 ‘루저 지식인’ 정도로 처리됐다. 문혁이 끝난 뒤, 복권 형식으로 니에얼이 다시 등장한다. 필자가 니에얼 비석에 처음 들린 것은 1994년이다. 일본에서 공부할 당시 학교가 근처였기 때문이다. 현지인에게만 알려진 곳으로, 당시 중국인 방문객은 전무했다. 2017년 가을 다시 들렀을 땐 깜짝 놀랐다. 니에얼의 비가 초대형 묘소로 바뀌었고, 중국인 단체 관광객 수천 명이 매일 들리는 중국판 성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영웅 애국자는 하늘에서 떨어져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엮고 메우고 키우면서 진화한 결과다. 니에얼을 안익태 다루듯 한다면, 중국의 국가는 지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여당 일각에서 20~30년 집권론이 흘러나온다. 언제나 그러하듯 땅의 논리인 정치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하늘의 정의가 무엇인지, 신이 생각하는 인간세계가 무엇인지가 우선이다. 개선마차를 탔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속삭여 본다. “뒤를 돌아보라, 그대도 (언젠가 목숨을 다할) 인간일 뿐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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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호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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