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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포럼 명사 인터뷰] ‘소비자 행복 지킴이’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 

“우린 지능정보사회(AI)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 있다” 

인생 행로 바꾼 해외 연수 “미국·캐나다 시민사회 둘러보며 눈떴죠”
사후 피해구제 위해 소비자 3법 필요… 특정 계층의 정보소외 없어야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지능정보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가는 건전한 소비행위를 계도하고 생산품의 품질향상을 촉구하기 위한 소비자보호운동을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한다.’ 헌법 제9장 제124조의 내용이다. 헌법이 소비자보호운동을 보장하고 있지만 실상 소비자 개인이 혼자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 막기 위해 서구에서는 1930년대부터 소비자단체들이 조직됐다. 우리나라는 1950년대 중반 일부 여성단체에 의해 소비자보호운동이 일기 시작됐고, 1970년 처음으로 소비자 운동 전문단체인 한국소비자연맹이 설립됐다. 50년 역사를 이어온 한국소비자연맹의 실무를 지휘하는 정지연 사무총장(중앙일보 JTBC 최고경영자과정 J포럼 21기)은 25년 넘게 연맹에 몸담으며 국내 소비자보호운동을 이끌고 있다.


▎2019년 9월에 열린 J포럼 21기 입학식 모습.
“1년만 버텨보자고 했는데 25년이 넘었네요”

어떻게 소비자보호운동에 뛰어들게 됐나?

“중학 시절에 정광모 회장님이 방송 프로그램에 나오는 걸 보고 인상이 깊었다. 은발에 빨간 옷을 자주 입으신 분이 텔레비전에서 하자가 있는 제품에 대해 지적하고 대기업 총수들을 향해 큰 목소리를 내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때 ‘저런 일을 하는 분도 있구나’ 하는 걸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다 대학에서 소비자 경제를 전공으로 선택했고 사회생활 진로를 고민하게 됐다. 사실 패션 분야에 관심이 많아 관련 기업에 들어가려다 어느 날 지도교수께서 ‘정광모 회장이 계시는 한국소비자연맹에서 사람을 뽑는데 혹시 관심 있느냐’라고 물으셔서 ‘정광모 회장님 계신 곳이요? 그러면 가보겠다’ 하고 선택한 것이 지금에 이르게 됐다.”

2013년에 별세한 정광모 한국소비자연맹 전 회장은 ‘한국 소비자운동의 개척자’로 불린다. 언론인으로도 활동했던 정 회장은 1968년 한국여기자클럽 회장으로 재임할 당시 일본을 방문해 소비자운동을 처음 접했다. 귀국 후 YWCA 산하에 소비자모임 결성을 시작으로 1970년 한국소비자연맹을 창립해 부회장을 맡았다. 1979년부터 34년 동안 한국소비자연맹 회장을 역임하면서 소비자운동의 대모(大母)로 불리기까지 했다.

처음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어땠나?

“사회 초년생이 일을 시작하게 되면 시기마다 고비를 겪게 되지 않나. 사실 이상하다 싶으면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한 달만, 3개월만 버텨보자 하던 차에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어떤 기회였나?

“정부에서 시민사회단체를 지원하는 해외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사실 소비자연맹에 들어온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아 순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 회장님께서 저를 보내겠다고 하셨다. 면접도 정 회장님이 직접 하셨는데 저를 좋게 보셨나 보다. 그렇게 소비자연맹이 어떤 일을 하는 단체인지도 잘 모르던 시절에 미국과 캐나다를 3주 동안 다녀오게 됐다.”

연수 결과는 어땠나?

“한마디로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워낙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됐고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경험을 한꺼번에 압축적으로 했다고 할까. 경실련, 여성민우회 등 국내 여성·환경·소비자 등 시민운동을 하시는 분들을 한자리에서 만나게 되고 그분들과 단체활동에 대해 듣게 됐다. 거기에 더해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와 각종 해외 NGO 단체를 방문하면서 외국에서 어떻게 시민활동이 이뤄지는지 직접 목격할 기회를 얻게 됐다. 그러면서 나도 ‘시민사회활동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면?

“미국의 대표적 소비자단체인 소비자협회(Consumer Union)였다. 이곳이 그 유명한 [컨슈머리포트(Consumer report)]를 만드는 곳이다. 소비자협회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유료 구독을 통해 운영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소비자의 권리에 대해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여러가지 면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소비자운동에 눈떴지만 한국에 돌아온 뒤로 그에게는 혹독한 트레이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오고 나서 정 회장님이 저를 강하게 가르치셨죠. 공문 한 장 작성하는 데에도 ‘자간이 틀렸다’, ‘오타가 있다’, ‘단어가 적절하지 않다’며 수없이 퇴짜를 놓으셨을 정도예요. 꼼꼼하기가 한이 없었죠. 하지만 그러고 나니 내부 문서든 외부 자료든 굉장히 집중해서 보는 습관이 생겼어요. 그 덕분에 지금은 직원들이 작성해온 문서를 쓱 한번 보고 고치게 될 정도가 됐죠.(웃음)”

전자상거래 기틀 마련… 가습기 사건엔 ‘아쉬움’


▎한국소비자연맹은 2020년 11월, 한준호 민주당 의원실과 함께 ‘지능정보사회(AI) 소비자 권리장전’을 발표했다. / 사진:한준호 민주당 의원실
오랫동안 소비자보호운동을 해오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전자상거래 분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나름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2000년 즈음 시작한 전자상거래 초창기부터 관심을 가졌다. 초기에는 사이트에 원산지나 유통기한 등 상품 정보 고시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상품·품목별로 소비자 피해 사례를 분석해 소비자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가이드라인을 작업했다. 아울러 2002년 전자상거래 소비자보호법 제정에도 관여했고 이후 지금도 소비자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개정 작업에도 힘쓰고 있다. 여기에 2004년에는 서울시와 함께 ‘서울시 전자상거래센터’를 설립해 오픈마켓, 소셜커머스, 해외 구매대행 등 다양한 방식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소비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당시 전자상거래 센터를 운영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꼽으라면?

“사기 피해가 너무나 컸다. 가령 컴퓨터나 TV 등 가전제품을 할인해준다고 하고 연락이 안 되는 사이트가 많았다. 그런 사기 사이트를 확인하면 호스팅 업체에 공문을 보내 사이트를 내리는 작업을 하고 경찰에 신고도 했다. 그 덕에 경찰서도 참 많이 다녔다. 사이트를 내리면 판매자들이 연맹으로 달려와 ‘내 일에 왜 방해하느냐.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 적도 더러 있었다. 그땐 혈기가 넘쳐서인지 별로 무섭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열렬하게 대응했다(웃음). 그렇게 실제로 범인을 검거하면 합의금을 받아 피해자에게 돌려주는 일도 많이 했다.”

지난 일 가운데 아쉬움이 남은 것도 적지 않을 것 같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그렇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 뭔가 문제가 있구나’라고 인지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원인을 특정할 수 없어 규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소비자 문제가 스펙트럼이 넓은 탓에 그 문제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문제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피해자와 지속해서 함께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2016년 첫 법원 판결이 나오고 옥시 등 관련 기업 불매운동을 하면서 압박을 했다. 아쉬운 점은 그때 우리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추적했더라면 피해자 규모가 조금은 더 줄어들고 피해자 보상을 앞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이 이렇게 오랜 기간 고통받지 않게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아프다.”

한국소비자연맹이 속한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는 오랫동안 집단소송제, 징벌적 손해배상제, 소비자권익증진기금 등 소비자 권익증진을 위한 소비자 3법 입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현재의 소비자 법제로는 소비자 권리를 구제받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경총, 대한상의, 전경련 등 경제단체들은 “기업의 법적 비용부담이 과도하게 커질 수 있다”며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소비자3법이 왜 도입돼야 하나?

“똑같은 피해 사안임에도 국내 소비자는 해외 소비자보다 터무니없이 적은 보상을 받는다. 결국 법적 체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소송으로 인한 경영 부담이 반대 주장의 근거인데 그전에 기업이 소비자 관련 부문을 강화하면 될 일이다. 똑같은 소비자인데 대한민국에 산다고 차별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중소기업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과도한 해석이다. 집단소송은 소비자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치거나 부당행위 등 명백한 불법 행위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아무 사안이나 소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불법행위를 억제하기 위한 장치로 봐야 한다. 법이 무서워서 물건을 못 만들면 기업을 운영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소비자 3법을 도입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다양한 상품이 나오고 있는데 어떤 피해가 발생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는 점이다. 사전적으로 규제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그래서 미국처럼 규제를 자유롭게 풀어주되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강력한 사후 피해 구제를 위한 법적 안전장치를 만들어놓자는 얘기다.”

“지능정보사회에서 정보취약계층 없어야”


▎정지연 사무총장은 “지난 50년 동안 소비자보호운동을 위해 국내 기업과 제품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일조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소비자 3법이 도입되면 소비자 권익은 한층 더 높아지겠다.

“물론이다. 하지만 소비자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기 위해서는 ‘입증책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다양한 소비자 관련 소송을 하면서 느낀 점은 입증책임의 전환 없이는 소비자는 절대로 기업과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피해 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을 소비자가 밝혀야 한다. 그런데 관련 자료는 모두 기업에 있고 그 기업은 대형 로펌에 사건을 의뢰하는 상황에서 기업을 상대로 승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이다. 집단소송, 징벌적 손해배상도 중요하지만 입증책임을 기업에 지게 해야 소비자가 제대로 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한국소비자연맹은 2020년 11월, 한준호 민주당 의원실과 함께 ‘지능정보사회(AI) 소비자 권리장전’을 발표했다. 지능정보사회로 빠르게 전환해가는 과정에서 사업자와 개발자 관점의 논의는 많이 진행되고 있지만 정작 중심이 돼야 할 소비자 관점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런 배경에서 AI가 인간성을 존중하고 함께 발전해갈 수 있도록 ▷포용성 ▷공정성 ▷차별받지 않을 권리 ▷안전성과 신뢰성 ▷투명성 ▷개인정보 통제권 ▷책임성 ▷피해구제 및 행동할 권리 등 총 8가지 소비자권리를 발표했다.

어디에 주안점을 뒀나?

“8가지 권리가 모두 접점을 갖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포용성’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장 큰 가치로 두고 싶다. 지능정보사회에서 누구도 서비스에서 소외당하지 않아야 하고 기술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우려하고 있는 부분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노년층이다. 지금도 노년층은 키오스크 사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정 연령대, 계층이 정보와 서비스에서 소외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정보취약계층은 비단 노년층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경제·사회·문화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정보 취약계층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다. 가령 훗날 돈이 많은 사람은 원격진료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데,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나올 수 있다. 그런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공동체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 발표한 ‘소비자권리’가 기업에 가이드라인이 돼 신경을 써야 할 것이고, 시민단체도 이를 기준으로 모니터링을 하다 보면 사각지대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소비자연맹 지난 50년, 앞으로의 50년

우리나라 최초의 소비자운동 단체인 한국소비자연맹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정 사무총장은 “그동안 소비자의 권리 향상과 소비자의 의견이 시장과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기 위해 뛰어왔다”며 “소비자 개개인의 힘은 약하지만 조직화해 소비자의 목소리를 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2020년은 한국소비자연맹이 소비자운동을 펼쳐온 지 반세기가 되던 해였다.

“소비자가 권리를 요구할 수 없던 시대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왔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워낙 까다롭지 않나. 그런 소비자의 요구사항을 단체를 통해 기업에 전달하고 변화를 유도해 왔다. 그렇게 개선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 기업과 제품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도 일조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앞으로의 50년은 어떻게 바라보나?

“과거의 50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질 것이다. 지능정보사회로 급격히 발전하는 과정에서 소비자연맹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의 새로운 숙제다.”

어떤 면이 가장 고민인가?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요즘은 젊은 세대가 시민사회단체를 많이 외면하는 것 같다. 이전보다 처우가 매우 좋아졌지만, 과거보다는 기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크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는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친구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즐거운 환경을 만드는 것이 과제다.”

새해 소비자연맹이 계획하고 있는 사업이나 목표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예전에는 오프라인에서 다양한 소비자 교육을 진행했다. 하지만 비대면 사회가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소비자를 조직하고 교육하는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활동에 집중할 계획이다. 또 하나는 젊은 소비자가 소비자 문제와 단체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좀 더 신경 쓸 계획이다. 지금도 ‘대소동’이라고 대학생 소비자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젊은층이 강화된 소비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 글 허인회 월간중앙 기자 heo.inhoe@joongang.co.kr / 사진 신인섭 선임기자 shinis@joongang.co.kr

※ J포럼은 - 2009년 국내 언론사 중 중앙일보가 최초로 시작한 최고경영자과정이다. 시사와 미디어·경제·경영·역사·예술 등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강좌와 역사탐방, 문화예술 체험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올해로 13년째를 맞이한 J포럼은 매년 두 차례(봄·가을) 원우를 선발하여 진행된다. 그동안 졸업생 약 1000여 명을 배출해 국내 최고의 오피니언 리더와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학습과 소통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문의·접수: J포럼 사무국(02-2031-1018), http://ceo.joongang.co.kr

202101호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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