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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1)]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 꿈꾼 도산 안창호 

군주제 대체할 자유문명국 건립 천명 

샌프란시스코 유학시절 새 국가 성립 목표로 대한신민회 창설
을사늑약 체결되자 한양 돌아와 비밀리에 조직 만들어 공론화

1905년 을사늑약과 함께 사실상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다양한 현대 국가 건설 담론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상동파(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조직된 신민회의 자유민주국가 건설 담론이다. 이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건설 담론은 상호 협조·경쟁하면서 3.1 운동으로 승화됐다. 3.1 운동 이후 양측은 각자 임시정부를 조직해 경쟁했고, 그것은 결국 남북 간 체제 경쟁으로 이어졌다. 이 연재에서는 과거 100여년간 국가 건설 담론과 갈등을 반추하는 한편 미래 통일 한국을 전망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도산 안창호는 미국 유학을 통해 부강한 문명국가 건설 필요성을 깨달았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위치한 도산공원 내 도산 동상.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제국에 강탈당했다. 외교권은 내치권과 더불어 국권을 구성하는 양대 기둥이다. 그런 외교권을 강탈당한 대한제국은 사실상 멸망한 나라로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다.

을사늑약은 공식적으로 1905년 11월 17일 체결됐다. 하지만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을사늑약을 보도하던 기자들의 마음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 제목에 압축됐다. ‘오늘, 목놓아 통곡한다’는 사설 제목 그대로 을사늑약을 접한 기자들은 목놓아 통곡했다. 나라가 망했기에 목놓아 통곡했고, 2000만 동포가 식민지 노예가 됐기에 목놓아 통곡했다. 황성신문을 통해 을사늑약 소식을 접한 대한제국 백성도 목놓아 통곡했다.

진실로 을사늑약은 500년 조선왕조의 죽음을 알린 조종(弔鐘)이었다. 그 조종을 울린 주인공이 조선 동포가 아니라 일본 침략자였기에 2000만 대한제국 백성은 더더욱 목놓아 통곡했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새 생명으로 이어지듯, 모든 통곡도 새 희망으로 이어져야 했다. 을사늑약에 목놓아 통곡하던 2000만 대한제국 백성들은 새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

조국의 멸망을 목도한 대한제국 백성에게 새 희망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멸망한 조국을 다시 건국해내는 것이 새 희망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식민지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이 바로 새 희망이었다. 그 같은 새 희망은 두 가지 건국 담론으로 모색됐다. 하나는 옛 방식의 건국 담론이었고, 또 하나는 새로운 방식의 건국 담론이었다.

대한제국이 제국으로 멸망했으니 다시 군주국으로 건국하자는 것은 옛 방식의 건국 담론이었다. 옛 방식의 건국 담론은 이른바 위정척사파로 불리던 양반과 성리학자들이 추구했다. 그들은 반만년 한국 역사상 단군조선으로부터 대한제국까지 존재했던 모든 국가는 군주제 국가였기에 당연히 전통을 계승해 군주국으로 건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충성과 효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위정척사파는 멸망한 대한제국을 부활시키고 고종을 황제로 복권시키는 것이 신민(臣民)의 도리상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서 위정척사파는 을사늑약을 무효화하고자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의 최종 목표는 멸망한 대한제국의 부활 그리고 고종황제의 복권이었다. 그런 면에서 위정척사파의 건국 담론은 옛 방식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복벽(復辟) 운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세에 만민공동회 대표 연설가로 명성


▎송재 서재필(왼쪽)과 도산 안창호. 서재필은 대중 연설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반면 당시의 개화파 그리고 동학 계열은 새로운 방식의 건국 담론을 모색했다. 개화파는 세계 추세에 맞춰 군주제 대신 자유민주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동학 계열은 수천 년 지속한 군주제에서 농민이 큰 고통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새로운 건국 담론을 모색했다. 이에 따라 을사늑약 이후 위정척사파·개화파 그리고 동학 계열 사이에서 다양한 건국 담론이 제기됐고, 다양한 건국 운동도 출현했다. 그렇게 등장한 다양한 건국 담론과 건국 운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담론과 운동은 도산 안창호 주도로 1907년 4월 한양에서 창립한 신민회(新民會)가 이끌어나갔다.

한양의 신민회는 1880년대 김옥균의 개화운동, 1890년대 박영효의 개혁 운동 그리고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계승한다는 점에서 역사적이었다. 게다가 도산 안창호를 비롯해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 성재 이동휘 그리고 전덕기 목사 등 식민지 시대 민족운동을 주도한 핵심지도자들이 신민회에 대거 망라됐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었다.

1907년 당시 안창호·이승만·김구·이동휘 등은 공히 30대(代)로 각각 한 지역을 대표하던 젊은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천타천 미래 독립국의 최고 지도자감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1907년에 30세이던 안창호는 평안도를 대표하는, 32세이던 김구는 황해도를 대표하는 지도자였다. 또한 33세이던 이승만은 기호지역을 대표하는, 35세이던 이동휘는 함경도를 대표하는 민족지도자였다.

그들은 비슷한 연배에 더해 국권 회복이라는 공통분모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자유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공통분모까지 있었기에 신민회를 중심으로 뭉칠 수 있었다. 아울러 신민회의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이던 성재 이동휘가 훗날 사회주의로 전향해 식민지 시기 사회주의 건국 담론을 주도했다는 사실에서도 한양의 신민회 창립은 역사적이었다.

그런데 한양의 신민회가 1880년대 김옥균의 개화운동, 1890년대 박영효의 개혁 운동 그리고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계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안창호를 비롯해 이승만·이동휘·전덕기 등이 독립협회 회원으로 개화운동을 벌인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재필이 지도한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안창호·이승만·이동휘·전덕기 등은 민족독립 정신과 자유주의 국가 사상을 공유하게 됐다.

안창호는 1878년 11월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 도롱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가 될 때까지 집안일을 도우며 한문과 유교를 공부하던 안창호는 17세이던 1894년 한양에 올라가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했다.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은 당연히 장로교 계통의 학당이었다. 그래서 안창호는 유교 교양을 갖춘 장로교 신자로 성장했다.

안창호는 19세 되던 1896년 구세학당을 졸업했고, 다음 해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당시 20세이던 안창호는 이승만·이동휘 등과 더불어 만민공동회를 대표하는 대중 연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한국의 근·현대 역사에서 만민공동회는 대중 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 지도자들을 양성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었다.

급진보다 점진 추구했던 도산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의 안창호. 오른쪽 둘째 컵을 들고 있는 사람이 안창호다.
조선시대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사서삼경을 공부한 양반들이었다. 그들은 연설이 아니라 과거시험 즉 문장 실력으로 양반이 됐다. 따라서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뛰어난 문장가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대중 연설을 연마하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조선 양반들에게 대중 연설의 중요성을 알린 사람은 서재필이었다.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은 미래 조선의 지도자들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대중 연설가가 돼야 함을 예견하고 배재학당 등에서 대중 연설을 훈련시켰다. 당시 배제학당에서 대중 연설로 단연 두각을 나타낸 학생이 이승만이었다.

만민공동회가 활성화되면서 대중 연설의 중요성은 현실로 나타났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는 명칭 그대로 만민공동회에는 수많은 대중이 운집했고, 그래서 대중 연설이 중요했다. 아무리 뛰어난 문장가라고 해도 대중 연설 능력이 없으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고 지도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민공동회를 통해 뛰어난 대중 연설을 자랑하던 젊은 운동가들이 차세대 지도자로 떠올랐다. 안창호·이승만·이동휘 등이 그들이었다. 김구는 비록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신민회 활동 기간에 뛰어난 대중 연설을 자랑했다. 이런 사실에서 안창호·이승만·김구·이동휘 등은 공히 뛰어난 대중 연설 능력을 바탕으로 핵심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민공동회에서 대중 연설가로 이름을 날리던 안창호는 1898년 연말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당하자 1899년 평양으로 낙향했다. 한양에 그대로 있다가는 체포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평양에서 안창호는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해 학생들을 교육했다. 점진(漸進)이란 ‘점차로 진전한다’는 뜻인데, 안창호가 이런 이름의 학교를 설립한 사실에서 그의 성품을 추정해볼 수 있다. 즉 안창호는 급진적인 경향보다는 점진적인 경향의 성품을 가졌다고 판단할 수 있다.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당한 그 상황에서도 안창호는 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점차로 진전시키는 것이 국권회복의 첩경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점진을 선호하는 그의 성품이 천성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20대 전후로 안창호는 급진보다는 점진을 추구했고, 그것이 안창호의 전 일생을 관통하는 특징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대략 3년 정도 점진학교를 운영하던 안창호는 1902년 9월 3일 한양에서 이혜련과 혼인하고, 다음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혼인 당시 안창호는 25세, 이혜련은 19세였다. 안창호는 1932년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진술한 신문조서(訊問調書)에서 미국 유학 이유를 “교육학을 배우고 조선에 귀국한 후 조선에서 교육 사업에 종사하고자 생각하고 있었고 또한 기독교의 깊은 뜻도 연구하고자”라고 밝혔다. 즉 교육학과 기독교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에 올랐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진술은 정확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때 안창호를 신문한 판사는 “당시 한국은 전제정치 상황으로 미국의 정치를 동경해 미국으로 간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했는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학습하기 위해 즉 정치적 목적으로 유학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해 질문한 것이었다. 그 질문에 안창호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자유민주주의 배우러 美 유학길


▎1937년 11월 세상을 떠나기 4개월 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안창호의 모습.
하지만 실제 유학 목적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학습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당시 안창호는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킨 대한제국의 황제체제에 크게 실망해 미국 유학을 결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렇게 진술할 경우 안창호의 미국 유학과 유학 이후의 활동 모두가 대한제국의 황제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활동, 즉 반정부 활동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래서 안창호는 미국 유학의 정치적 목적은 단호히 부정하고 단지 교육적·신앙적 목적만 인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서는 안창호의 미국 유학 목적을 정치적·교육적·신앙적 측면에서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안창호가 정치적 목적에서 미국 유학을 했다는 함의(含意)는 그가 대한제국의 황제체제를 대체할 자유민주주의를 배우기 위해 유학했다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1902년 안창호의 미국 유학은 자유민주주의를 배우기 위한 조선인 최초의 미국 유학이라 평가할 수 있다.

1902년 9월 4일 제물포를 출항한 안창호는 상해에 잠깐 들렀다가 요코하마·하와이·밴쿠버·시애틀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상해에 들른 안창호는 그곳에서 양주삼을 만나 자기 여동생 안신호와 혼인할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때 양주삼은 아직 학생 신분이라 학업 이후 결정하겠다고 대답했다. 물론 평양의 안신호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1903년 연초부터 근대 교육과 기독교 운동에 적극 투신한 황해도의 김구가 그해 여름 평양에 갔다가 안신호를 만나 선을 보게 됐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김구와 안신호는 다음 날 만나 약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그날 밤 상해의 양주삼이 보낸 편지가 안신호에게 도착했다. 자신은 이제 학업을 마쳤으니, 오빠 안창호의 부탁대로 자신과 혼인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라는 편지였다.

결국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안신호는 김구도 포기하고 양주삼도 포기하고 말았다. 미국 유학길에 잠깐 들른 안창호의 상해 체류가 동생 안신호와 김구의 인연을 가로막은 셈이었다. 해방 이후 김구가 남북연석회의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안신호를 시켜 김구를 안내하게 함으로써 두 사람의 인연이 잠시 동안 이어지기도 했다.

상해·요코하마를 거쳐 태평양을 횡단하던 안창호는 하와이 근처에서 오랜만에 육지섬을 보았다. 그때의 감격을 안창호는 ‘태평양 상의 일소도(一小島)’라는 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벌써 30여년 전에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의 일이지요.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망망한 태평양을 지나게 됐습니다. 하루 이틀 십여 일을 가도 도무지 육지를 볼 수가 없더군요. 정말로 지루하고 갑갑한 중 육지가 여간 그립지가 않습디다. 그러자 하와이 부근을 지나게 됐지요. 망망한 수평선 저쪽에 조그만 섬 하나가 있더군요. 그 섬을 바라보니 여간 반갑고 그립지 않습디다. 표망(漂茫)한 대양 중에 홀로 서 있는 그 섬의 기개 --- 나는 그 섬을 바라보고 어떤 대양의 선구자나 만난듯해 여간 감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 호를 도산(島山)이라 했습니다.”(안창호, [조광(朝光)], 1937년 8월)

윗글에 의하면 하와이 부근에서 조그만 섬을 만난 안창호는 마치 대양의 선구자를 만난 것처럼 감격스러워 하며 자신의 호를 도산이라 했다고 한다. 즉 안창호에게 도산은 희망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상징했던 것이다. 그 희망은 안창호 자신에게만의 희망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확인된다.

이스라엘 백성 구한 모세의 마음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우남 이승만의 편지.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에 내려 하룻밤을 자고 거리에 나가니까 조선 사람들이 서로 상투를 붙잡고 뺨을 치며 싸움을 하는구려. 해외 수만리를 와서 조선인끼리 싸움을 하다니요?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들의 싸움을 말리고 그 이유를 물으니까 그들은 인삼을 파는 사람인데 서로 딴 곳으로 갈려 다니며 인삼을 팔자고 했는데, 자기가 가는 곳으로 그 사람이 살짝 먼저 가서 인삼을 팔았다고 괘씸해 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도산 노릇을 했지요. 그들에게 좋은 말로 설명하고 해외에 와서 고생하는 우리들이니 상부상조하고 서로 위로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공부도 공부려니와 재류 조선인을 도와주자는 주의 아래서 공립협회(共立協會)라는 것을 조직하고 그들의 살길을 열어주고 생활 개선과 융화의 정신을 가르쳐줬습니다.”(안창호, [조광], 1937년 8월)

윗글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는 공부보다는 재미 교포 사회를 조직하는 데 주력했고, 그런 자신의 역할을 도산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자신의 본래 미국 유학 목적이 교육학과 기독교에 있었다는 신문조서와는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즉 안창호의 본래 미국 유학 목적은 신문조서에서 밝힌 교육적·신앙적 차원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측면이 컸다는 방증이라고 하겠다.

애초부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배우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에서 유학길에 올랐던 안창호는 하와이 부근의 작은 섬을 바라보며 모세의 시내산을 떠올렸던 듯하다. 주지하듯 애굽인에게 매 맞던 동족을 구하기 위해 애굽인을 살해한 모세는 그 동족들의 싸움을 말리다가 시내산으로 도망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신의 부름을 받고 동족을 구하기 위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갔다. 파라오와의 대결에서 이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시내산에 와서 하나님을 대면해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 입구까지 인도했다. 그 같은 성경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태평양 상의 일소도(一小島)’를 읽으면 안창호에게 도산은 시내산의 율법이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싸우는 동포를 말리던 도산 자신은 동족의 싸움을 말리던 모세임을 연상할 수 있다.

즉 안창호는 신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집트로 향하던 모세의 마음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조선 동포들을 구할지는 막연하기만 했다. 그 방법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입학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할지 고민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안창호는 하와이 부근의 도산에서 마치 신의 음성 같은 대답, 즉 조선 동포들을 구원할 해답을 떠올린 듯하다.

그 해답은 다름 아닌 ‘동포 사랑’이었다. 그것을 안창호는 1937년 [조광]에 발표한 ‘기독교인의 갈 길’이라는 글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도 서로 사랑할지라 하셨거니와, 신약 처음부터 묵시 마지막 장까지 전권의 골자는 곧 사랑이외다”라고 표현했다.

이로 볼 때 안창호는 하와이 부근의 도산에서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떠올리고, 그 ‘사랑’을 ‘동포 사랑’으로 확장하는 것이 민족구원의 비결이라 확신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확신을 일평생 지키기 위해 안창호는 자신의 호를 도산이라 지었을 것이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족 간의 싸움을 말린 자신의 행동을 ‘도산 노릇’이라 표현했는데, 이는 ‘동포 사랑’의 계명을 실천했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즉 안창호는 하와이 부근의 작은 섬에서 ‘동포 사랑’이라는 신의 계명을 떠올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그 계명을 실천하면서 학교 공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 학교 공부는 뒷전에 두고 재미교포 조직에 주력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안창호의 ‘동포 사랑’은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동포에 대한 사랑 헌신적 실천


▎안창호는 미국에서 체류할 때 오렌지 농장에서 잡부로 일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는 말 그대로 ‘동포 사랑’을 헌신적으로 실천했다. 그 헌신에 힘입어 샌프란시스코 교포들은 안창호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결속했다. 그런 결속력을 바탕으로 안창호는 1903년 9월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를 창설해 회장에 취임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대략 1년 만이었다. 그리고 다시 7개월 후인 1905년 4월에는 한인친목회를 확장해 공립협회를 창설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함께 서자’는 공립(共立)의 의미 그대로 안창호는 동포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것이 교포들도 살고 조국도 살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안창호가 실천한 ‘동포사랑’의 구체적인 방법론은 1906년 4월 공립협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서 그가 했던 연설에 잘 드러난다. 그 연설에 의하면 안창호를 비롯한 샌프란시스코 교포들이 미국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문명하고 부강한 것을 배우고 본받아가지고 우리나라도 미국과 같이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미국의 선진문명, 그중에서도 정치 문명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 왔다는 것이 안창호 연설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당시 모든 교포가 그 목적으로 미국에 왔다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최소한 안창호 자신은 바로 그 목적으로 유학 왔다는 고백이라 이해할 수 있다.

안창호는 공립협회 창립 1주년 기념 연설에서 미국의 문명하고 부강한 것을 배우고 본받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문명과 부강을 구하자 하면 또한 문명과 부강의 뿌리와 씨를 구할 것인즉, 문명과 부강의 씨는 무엇이뇨? 우리 협회의 목적이니, 같은 나라 인종이 서로 보호하자는 뜻으로 단합하는 것”이었다. 즉 안창호는 미국의 문명과 부강의 뿌리는 다름 아니라 사랑이라는 기독교 원리라고 인식했던 것이고, 그 같은 기독교의 사랑 원리를 동포 사회에 적용한 것이 바로 한인친목회였고 공립협회였던 것이다.

안창호가 공립협회 창립 1주년 기념 연설을 하던 1906년 4월에는 이미 을사늑약의 소식이 미국에도 퍼진 시점이었다. 동포 사랑을 통해 재미 교포들의 노예적 상황을 구원하고자 한인친목회와 공립협회를 창설했던 안창호 입장에서는 당연히 본국 동포들을 구원하기 위한 조직도 창설해야 했다. 그런 필요에서 안창호는 1906년 연말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를 조직했다.

안창호는 대한신민회 목적을 ‘자유문명국 성립’이라 명시함으로써 을사늑약 이후 본국 동포들을 구원할 새로운 국가 형태는 곧 자유주의 국가임을 천명했다. 1907년 1월 20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안창호는 2월 20일 한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4월에 ‘자유문명국 성립’을 목표로 하는 한양의 신민회가 비밀리에 조직됐다. 이로써 5000년 역사에서 군주제를 대체할 건국 담론으로 자유주의 국가 담론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론화되기에 이르렀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101호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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