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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13)] 국방력 강화 위해 선택한 신무기 ‘화포’ 

현대식 전투를 내다본 세종의 총통 사랑 

기술 유출 우려해 화약 공장은 일본에서 먼 곳으로, 환관을 전문가로 양성
젊은 관리가 평생 업무 도맡도록 하며 표준 규격 정해 전국으로 확대하기도


▎오늘날의 다연발 로켓포라 할 수 있는 화차에 장착된 신기전이 화염과 함께 화살을 발사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무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국가 중 하나에 속한다. 국방예산은 세계 10위권으로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이 부강하면서도,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가지고 있는 북한의 침략 위협을 걱정하는 처지다. 궁여지책으로, 해마다 값비싼 해외의 신무기를 도입하고 있으나, 평화를 지키려면 유사시 상대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위력적인 무기를 보유해야 할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다.

세종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신무기 개발에 힘을 쏟았다. 세종 6년(1424) 2월 30일 ‘실록’에는, 왕이 군기감에 지시해 경복궁에서 대포를 쏘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도 왕은 대궐에서 포를 발사하게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천문현상을 관측하는 서운관의 관리들이 “새벽에 북쪽에서 대포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며 변괴라고 아뢰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세종 6년 5월 16일). 궁에서, 그것도 밤에 발사시험을 했다는 것은 왕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화포 성능 개선에 신경을 썼다는 증거다.

그의 화포 사랑은 부왕 태종에게서 비롯됐다. 훗날 세종은 대신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태종께서 자주 화포 쏘는 것을 살펴보셨느니라.”(세종 27년 3월 30일) 태종은 외적 격퇴를 위해 최해산에게 화포 개발의 임무를 맡겼다. 그는 고려 말 화포를 가지고 왜구를 무찌른 최무선의 아들이었다. 부왕을 본받은 세종은 화포와 화약의 제조법도 개량했고, 전술적인 쓰임도 더욱 확대했다.

요샛말로 왕은 ‘기계화 부대’를 양성하려는 야심을 가졌다.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는 여진족을 단번에 격퇴하려면 기동성도 있고 화력도 뛰어난 소형 신무기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왕은 병조에 이렇게 명했다. “화포를 잘 다루는 함경도의 특수부대원(별군) 중에서 1명을 뽑아, 그에게 휴대용 작은 화포(소화포) 120자루를 주어 경원과 경성 등지로 보내라. 현지에서 총명하고 민첩한 관노들에게 그 기술을 가르치라.”(세종 8년 7월 2일)

왕은 대포의 중요성도 놓치지 않았다. 대포를 능숙하게 운용하는 기술을 방방곡곡에 널리 보급할 뜻이었다. 그 기미를 알았던지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가 보고서를 올려 “군사용 기계 가운데 화포가 가장 중요한 것이오나 제 진영에는 다룰 줄 아는 군사가 겨우 한 명뿐입니다”라며 근심을 털어놓았다. 그리하여 왕은 병조와 상의해 충청도 본영에 10명의 화포 전문가를 양성하기로 했다. 그 밖에도 도내의 모든 수군 및 육군 기지(포진)에도 화포 기술자를 기르기로 했다(세종 12년 6월 20일). 그 시절 북쪽 변방은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의 군사기지에는 이미 화포가 운용되고 있었다.

훗날 明의 과도한 요구 우려, 자체 개발 착수


▎우리나라 화포 중 가장 큰 화기인 천자총통.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부왕의 영향으로 왕자들도 화포에 큰 관심을 가졌다. 세종 26년(1444) 10월 11일, 왕명으로 진양대군(훗날의 세조) 이유는 광평 대군 이여, 금성 대군 이유 그리고 여러 대신과 함께 한강의 양화진(양화도)에서 함포사격을 지켜봤다. 세종은 화포야말로 국방의 열쇠라 생각해 후세가 자신의 방침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세종의 화포 정책은 체계적이며 지속해서 이뤄졌다. 고려 말부터 왜적을 물리치는 신무기로 화포가 떠오르자 세종은 전함을 새로 건조하고 배 위에 대포를 장착했다. 왕은 세자(문종)를 양화진에 보내어 화포의 사정거리를 시험하기도 했다(세종 26년 10월 20일). 가상의 왜선을 상대로 한 모의 전투도 실시했다. 그 이듬해에는 귀순한 일본인 도쿠로(藤九郞)가 제공한 정보를 가지고 왜구의 전선을 만들어 실전 훈련까지도 했다. 대규모 전투훈련이었다. 왕은 이 전투를 의정부와 육조의 대신들도 모두 참관하도록 지시했다(세종 27년 9월 22일).

사실 화포 개발은 어려운 일이었다. 원천기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은 고심이 많았다. “명나라 태조가 화약을 보내줬으나, 아직도 우리는 화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중국 화포는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발사한다. 우리 화포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태조와 태종 때에는 화포 한 발로 10개의 화살도 날리지 못했다. 최근까지도 화살 7, 8개를 한 번에 쏘는 것이 불가능했다.”(세종 26년 10월 12일)

15세기의 화포는 우리가 막연히 짐작하는 대포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날리는 방식이 주류였다. 세종은 조선의 화포 기술에 근본적 한계가 있다는 점을 걱정했다. 그래서 명나라로부터 화포 수입 및 화포 기술 이전 요청도 고려했다. 이 밖에 화약 기술자를 데리고 오거나 그게 안 된다면 화약을 사 오거나 유학을 보내 기술을 배워오게 할 궁리까지 했다. 그러나 정승들의 생각은 달랐다. 명나라의 도움으로 기술을 배운다면 나중에 무리한 요구를 해올 가능성이 있다며 왕을 만류했다. 수긍한 왕은 제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자력으로 화포 기술을 향상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술 개발에 전념하자 성과는 나타났다. 세종의 회고담에 잠시 귀를 기울여보자. 세종 27년(1445) 3월 30일, 실록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태종 때의 지자 화포와 현자 화포는 화약은 많이 들었으나, 화살은 채 500보도 나가지 못했다.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쏘려고 했으나 아무리 연구해도 방법을 몰랐다. 나중에 중국의 화포를 구해서, 내가 군기감에 그대로 만들어보라고 명했다. 그랬더니 화약은 적게 들어도 화살은 더 멀리 나갔다. 이것이 이른바 황자포였다. 임자년(세종 14년, 1432)에는 두 발의 화살을 동시에 장전하는 쌍전 화포도 만들었다. 화살이 200보를 나가자 의정부와 육조의 신하들이 모두 ‘좋다’며 탄성을 질렀다. 과연 파저강 토벌(세종 15년) 때 이 무기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세종 재위 중에 개발한 화포 가운데는 물론 실패한 것도 있었고 신무기의 성능을 둘러싸고 전문가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리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세종은 화포 성능 개량과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화약의 힘으로 화살을 쏘는 화포, 그 이점은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한 방으로 적을 서너 명씩 살상할 수가 있지 않은가. “공격 전에는 천하에 화포만큼 유리한 것이 없다”는 세종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세종 27년 3월 30일).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조선의 화포 기술은 날로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왕은 매우 흐뭇해했다. “나는 군기감에 명령하여 행궁(行宮) 옆에 대장간을 설치하고 화포를 제작하여 사정거리를 늘리도록 연구하게 하였다. 과거에는 천자 화포가 겨우 400~500보도 나가지 못하더니, 이제는 화약이 훨씬 덜 들어도 무려 1300여 보를 나간다. 한 번에 화살을 4개나 쏘는데, 모두 1000보를 나간다.”(세종 27년 3월 30일)

기술 유출 막고자 환관을 화약 전문가로 양성


▎조선 세종 때의 로켓인 신기전이 복원돼 발사되고 있다.
세종은 화포가 무한히 발전할 가능성을 내다보며 자신만만한 결론을 내리기도 하였다. “재위 28년 동안 나는 화포에 관하여 신하들과 토론도 자주 하는 한편, 제도를 뜯어고치기도 하였다. 신하들은 신무기가 나올 때마다 칭찬하였다. 전에는 이와 같은 신식 무기가 있을 줄 모르고, 그 시절의 무기가 최상인 줄로 생각하였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하면 훗날에는 지금의 기술을 무어라 평가할까. 마치 오늘날 우리가 과거의 무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세종 27년 3월 30일)

혁신적인 기술발전을 이루려면 인적 쇄신이 필요했다. 세종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화포 제작에 관여하는 당상관들(제조)이 모두 늙었다고 주장하며 이제 적어도 한 사람 쯤은 40세 미만의 젊은 관리를 새로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만일 신임 당상관이 평생 중단 없이 군기감의 사무를 기획한다면 효과가 클 것이라며, 세종은 인사혁신을 추진했다.

의정부 대신들은 왕의 뜻을 따랐다. 그들은 숙의를 거쳐 대호군 박강을 천거하였다. 그로 말하면 옛 정승 박은의 아들로 전도유망한 중견 관리였다. 왕은 박강을 군기감의 우두머리(정)로 삼고, 화포에 관한 정책을 진두지휘하게 했다.

화포 성능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화약이었다. 그 성능을 개선하고 품질을 유지하는 것은 막중한 과제였다. 우리가 개발한 화약 생산기술이 외부로 새어나가면 안 될 일이므로, 보안유지도 철저히 해야만 했다. 기술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그동안 노력해 얻은 성과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보안유지를 염려한 끝에 왕은 특이한 결론에 도달했다. 화약전문가를 궁중 환관으로 제한하기로 한 것이었다. 대신 허조는 이런 충고를 했다. “화약(염초)을 제조하는 곳이 일본에 가까우면 비밀이 누설되지 않을까 염려이옵니다. 마땅히 삼가고 비밀리에 전수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왕은 이 말을 심중에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마침내 왕은 자신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는 내사복이란 궁중의 한 관청에 화약 제조를 맡겼다. (세종 27년 5월 9일)

제도 개편을 단행하자 화약 생산량은 전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정확히 말해, 화약 공장(합약소)은 내사복의 남쪽에 설치돼 있었고, 환관이 운영을 전담했다. 화약의 생산성이 개선되자 왕은 기뻐하며 군기감의 화포장, 약장, 그리고 그들을 돕는 노비에게도 쌀과 베를 주어 그간의 노고를 위로했다(세종 27년 6월 13일).

문 잠그고 화약 생산, 보안에 극도로 신경 써


▎1994년 전남 여천 앞바다에서 인양된 6점의 조선시대 총통 가운데 별승자총통에서 당시 장전된 것으로 보이는 콩알만 한 크기의 탄환 4개와 화약 심지가 발견됐다.
환관들이 궐내에서 화약을 능숙하게 생산하자 군기감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기존의 화약 기술자(화약장)는 화포 기술자(화포장)로 직책을 바꿔 향후 화포의 제작과 수리만 맡아보게 했다(세종 27년 8월 26일). 후속 조치로, 궁중의 화약 공장은 사표국(司豹局)으로 개편하고 임무 수행에 필요한 여러 관직도 뒀다(세종 27년 9월 27일).

그 밖에 왕은 무기 제작에 관한 전문 지식을 갖춘 전직 관리의 관리에도 엄격했다. 당시 군기감의 전직 관리 중에는 화약 제조법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퇴직하고 고향에 내려가서 살면, 소재지 관청에 명하여 그들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하도록 했다(세종 28년 1월 26일). 이런 식으로 군사기술이 적에게 유출되지 않게 막았고, 국가가 필요하면 언제든 다시 불러들일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왕은 화약생산법을 비밀리에 전수하기를 바랐고, 그에 부응해 병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 “지방에서 화약을 제조할 때는 화약전문가 2명, 즉 염초장 1명과 취토장 1명을 현지에 파견합니다. 그들을 도울 보조 인력 5명도 함께 보냅니다. 그들은 은밀한 관청 건물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화약을 만들 것입니다. 외부 사람은 절대로 보지 못하게 보안을 철저히 유지합니다.”(세종 29년 2월 26일)

이러한 방침에 따라 화약은 극비리에 생산됐다. 그래도 행여 화약기술이 일본이란 잠재적 적국에 알려질까 봐, 왕은 조바심을 냈다. 기술 유출을 방지하려고 병조 및 의정부의 대신들과 함께 상의를 거듭했다. 그러려면 화약의 사용은 공적 용도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당시 몇몇 화약 기술자는 화약을 이용해 몰래 구슬을 만들었고, 이를 민간에 팔아서 이익을 취했다. 군사용 화약을 이용해 상업행위에 종사한 것이었다. 세종은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막으려고 금지규정을 마련하게 했다. 새로 제정된 법에 따라 구슬을 매입한 사람은 곤장 80대의 엄벌을 받게 됐고, 구슬을 만들어 판 화약 기술자는 곤장 100대에 3000리의 유배형까지 추가됐다(세종 29년 4월 8일). 그러나 뜻밖의 사고가 일어나 기술 인력을 잃기도 하였다. 화약 창고에 불이 나서 기술자 22명이 한꺼번에 중화상을 입은 것이었다. 왕은 대궐의 어의들을 파견해 그들을 치료하게 했다. 그럼에도 무려 11명의 기술자가 사망하고 말았다(세종 29년 10월 3일). 엄청난 대형 사고로 귀중한 기술자가 집단으로 사망한 안타까운 참화였다.

세종 때는 다종다양한 화포가 등장하였는데, 일일이 다 소개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할 정도이다. 그 가운데서도 전술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는 개인 화기라 할 수 있다. 병사들이 휴대하는 화살 발사기, 그 당시 총통이라고 불렀던 무기가 특히 중요했다. 왕은 총통을 이용해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는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올해 농사는 실패했다. 그러나 총통은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무기인 까닭에 부득이하게 새로 제작해야 한다. 그 제작에 필요한 몇 가지 자재를 바꿔 백성의 부담을 줄이도록 할 것이다.”(세종 27년 11월 15일) 제작비 절감을 위해 왕은 군기감에 대안을 마련하게 했다. 마침내 화살의 깃(箭翎)도 가죽을 빼고 대나무와 나무로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 화살대도 구하기 어려운 자작나무를 쓰지 않고, 느릅나무와 참나무 등 구하기 쉬운 나무를 이용했다.

왕은 총통을 능숙하게 다루는 특수부대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총통위’를 편성해 중앙군에 소속시켰다. 근무조는 모두 800명으로 3총통이 300명이요, 사전 총통과 팔전 총통이 각각 250명씩이었다. 총통위 병사는 날마다 시행한 사격훈련을 통해 곧 정예부대가 됐다(세종 28년 1월 22일). 2년 뒤 왕은 총통위의 정원을 4000명으로 증편하고, 이를 5조로 나누어 800명이 넉 달마다 교대로 근무하도록 규칙을 바꿨다(세종 30년 1월 28일).

주력부대로 떠오른 ‘특수부대’총통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한 개인 화기인 소소승자총통. 2012년 명량대첩 해역에서 건져 올렸다. 길이 58㎝, 지름 3㎝, 무게는 약 2㎏ 정도다. / 사진:문화재청
현대의 ‘기계화 부대’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총통위였는데, 지방에도 총통 부대가 주력으로 떠올랐다. 그러자 병사들이 총통에 넣어 발사하는 화살의 규격도 모두 통일해, 군수물자의 보급과 관리에 효율성을 높였다. 전국의 육군 및 수군 기지에서는 서울에서 병조가 보낸 견본에 따라 화살의 규격과 품질을 일정하게 관리했다. 왕은 총통과 화살을 제작·수선하는 기술자들의 근무시간도 법으로 규정했다. 각 부대는 월말이 되면 해당 지역 관찰사에게 기술자들의 실적을 보고 했다. 연말에는 서울의 군기감에서 감찰관을 내려보내 각 부대의 근무실적을 현장 점검했다. 이처럼 왕은 총통위의 군수물자 관리를 철저히 관리 감독하였다.

세종은 총통 부대의 훈련을 강화해 최고 수준의 전투태세를 유지하고자 했다. 사격 솜씨가 우수한 총통군은 상을 줘 표창했는데, 실전에서 총통부대의 위력이 입증됐다. 그러자 일반 군인들까지도 총통 사용법을 보고 익히라고 명령했다. 그만큼 총통에 거는 왕의 기대가 컸다.

일본인들이 출입하는 서남해안의 여러 지역에서는 농번기 중에도 군수물자의 제작을 계속하게 했다. 총통에 사용할 화살을 충분히 비축함으로써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게 했다. 총통은 북방의 여진족을 제압하기 위해서도 매우 소중한 무기였다. 세종은 군인들이 총통 사격술에 능숙하기를 바라며 평안도와 함길도의 도절제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총통을 가진 병사가 화약을 마음껏 사용하기 어려워 연습이 충분하지 못할까 걱정이다. 어떻게 하면 모든 병사가 사격술을 제대로 익힐 수 있을지 모르겠다. (…) 5명으로 대오(伍, 분대)를 편성해, 한 사람은 장약을 전담하고 나머지 넷이 돌아가며 사격하면 어떨까 한다. 한 사람이 재빨리 화약을 장전할 수 있다면 그편이 나을 것 같다. 병사들의 완력이 어떠한지를 잘 살펴서 각자 힘에 알맞은 크고 작은 총통을 배우게 하라.”(세종 29년 11월 15일)

화포 가운데 세종은 왜 하필 총통에 그토록 세심하게 마음을 기울였을까. 병사들은 대부분 농민이었고, 그래서 평소 칼 쓰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데다가 활도 능숙하게 다루는 이가 드문 편이었다. 그러나 총통은 그런 그들도 비교적 쉽게 익힐 수 있었다. 화약의 힘으로 화살을 발사하는 무기라서 조준하는 방법만 숙달하면 실전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우리 군대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총통 중심의 전투가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판단했다. 시대를 앞선 혜안이 있었다.

훗날 공조판서 양성지는 세종 때의 군사제도에 관해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그때는 총통을 제작하고 다루는 방법을 상세하게 기록한 [총통등록(銃筒謄錄)]이란 책자가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 시절에 간행된 [오례의]에는 화포를 제작하는 방법이 자세하게 기술돼 있어, 행여 누군가 이 책을 왜적에게 제공하기라도 하면 후환을 걱정해야 할 정도라고도 했다(성종 9년 10월 13일). 그만큼 세종 시대에는 총통을 포함한 다양한 화포를 제작했다는 의미였다.

임란 승리 일등공신 신기전 원형도 개발


▎영화 ‘신기전’의 한 장면. 신기전은 세종 때 실제 개발된 로켓형 화포다. / 사진:KnJ
집현전 학사 출신인 신숙주는 세종 때 다양한 신무기가 개발돼 효과적으로 사용됐다는 점을 성종에게 보고했다. “세종께서는 명나라 영락 황제(성조)가 야인을 정벌하다가 포위되자 ‘화차(火車)’ 덕분에 무사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화차를 만들어 여러 부대에 보내셨습니다.” (성종 6년 4월 18일) 화차란 수레 위에 수십 개의 총통을 장치한 것으로, 이동도 편리하고, 한꺼번에 많은 화살을 발사하는 신무기였다.

알고 보면 세종 때는 그보다 더 효과적인 화약 무기도 있었다. ‘주화(走火)’라고 불리는 일종의 로켓탄이었다. 신기전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왕은 북방의 여러 고을에 다양한 규모의 주화를 배치했다. 왕명으로 화포 전문가 박강은 평안도 각 부대에 중주화(중간 크기) 866병, 소주화(작은 크기) 4666병을 골고루 배치했다. 아울러 현지에서 조립해서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화약 무기도 많이 가져갔다. (세종 29년 12월 2일) 왕은 함길도에도 같은 무기를 다량으로 배치했다.

‘주화’는 여러 해가 지난 다음 ‘신기전’으로 발전했다. 다양한 규격의 신기전이 전국의 군사기지에 빠짐없이 배치됐는데, 여진족의 침략 위협이 존재하는 북쪽에서는 해마다 1회의 사격훈련을 했다. 나머지 지역에서는 2년에 한 번씩 사격훈련 기간이 있었다. (세종 30년 12월 6일) 신기전은 성과가 입증됐기 때문에, 세조 때에는 더더욱 활발하게 사용됐다. 훗날 임진왜란 때도 왜적을 무찌르는데 신기전이 상당한 효과를 냈다고 한다.

세종이 적극적으로 화포 개발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천과 박강 등 다수의 화포 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약도 대량으로 생산해, 특수부대인 총통군을 전국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왕은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하였고, 무기 부품까지 표준화해 전투력이 충실해졌었다. 실용과 효율을 추구하는 세종의 리더십이 찬란하게 빛난 대목이었다. 만약 세종이 세운 무기개발의 전통이 계속 이어졌더라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수치와 굴욕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사정이다.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하려면 외국의 값비싼 신무기를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스스로 신무기를 꾸준히 개발해야 할 터인데, 업자들의 배만 불린다는 지적이 많다. 실질적 효과가 나올 수 있게 하는, 진정한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다.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101호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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