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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이 쓰는 생명의 비밀] 쌀알에 알집 만드는 ‘쌀 바구미’ 

 

알 낳고 젤라틴 분비해 입구 막아, 부화한 유충 쌀 녹여 먹으며 성장
영하 18℃ 이하나 60℃ 이상 되면 알 죽어, 마늘·생강도 퇴치 효과


▎쌀 바구미 번데기가 우화해 나온 자리에는 구멍이 뻥뻥 뚫리고 쌀알이 부스러져 품질이 떨어진다. / 사진:getty images bank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년퇴직을 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껏 아침만 먹으면 가방을 들고 집 근처 글방으로 향해 해 질 녘에나 집을 찾아든다. 3층으로 된 15~17평짜리 연립주택단지에 서재(書齋)가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지가 꽤 오래되어 나무들이 하늘 똥구멍을 찌른다.

동네엔 젖 먹이는 말할 것도 없고, 초·중·고등학생도 눈 씻고 봐도 없으며, 온통 외톨이 늙은이들뿐이다. 노인들 집단 수용소라고나 할까, 물론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런데 1·2층 집 문 앞에 ‘나라미’라 쓰인 쌀 포대(10㎏)가 자주 놓여있다. 도대체 나라미가 뭐며, 왜 저 노인들은 저 쌀을 먹는지 또 불쑥 궁금증이 발로한다. 그래서 찾아봤다. “나라미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군 등 정부기관과 쌀을 구매하기 어려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영세빈곤자나 식량난을 호소하는 사람, 독거노인 등이 주요 대상이며, 그 외에 국공립학교, 공기업 등 공공기관과 경찰서·소방서·군부대·교도소 등 공공부문의 급식에 사용된다. 이전에는 흔히 정부미(政府米), 정부 양곡 등으로 불렸다가 2000년대 후반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됐다고 한다.”

이제 왜 쌀포대가 거기 문 앞에 있는지를 알았다. 다시 말하면 나라미는 시중에서 판매 보급하는 일반미와는 달리 상업판매나 보급이 아닌, 국가에서 공인으로 보급하는 쌀로 농림축산부에서 보급한다고 한다.

그런데 나라미에서 쌀벌레가 나왔다고 언론에서 야단법석이다. 다름 아닌 쌀 바구미(Sitophilus oryzae)이다. TV에서, 쌀 포대의 쌀을 쏟으니 자잘한 벌레가 새까맣게 ‘거미알 슬 듯’ 온통 갈피를 못 잡고, 목을 빼고는 사방팔방으로 옴질거리며 줄행랑을 친다. 벌레들이 어두운 곳을 좋아하기에 햇빛을 피하느라 그런다.

절지동물인 쌀 바구미(rice weevil)는 딱정벌레목의 왕바구미과 곤충이다. 몸은 긴 원통형이고, 매우 딱딱하다. 몸길이는 3~4㎜이고, 흑갈색으로서 앞가슴의 등과 굳은 딱지날개(앞날개) 위에는 넓고 둥글면서 우둘투둘한 얽은 자국이 많이 있다. 성장 과정은 번데기 과정을 거치는 완전 변태를 하며, 성충은 공중을 날기도 한다.

쌀 바구미의 원산지는 인도로 여겨지는데 한국·일본·인도·유럽 등지에 서식한다. 곡식의 수출입 탓에 더욱 빠르게, 널리 세계에 퍼졌는데, 한국에는 쌀바구미 속(屬)에 딸린 바구미가 14종이 있다 한다. 바구미들은 자극을 받으면 다리와 더듬이를 움츠리고 죽은 척하며(가사, 假死, feign death) 꼼짝 않는다. 이런 습성은 포식자들이 죽은 것은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생긴 것이다.

바구미류의 쑥 뻗은 긴 주둥이(snout)의 길이는 약 1㎜로 몸길이의 3분의 1에 가깝다. 주둥이의 크기나 생김새는 종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수컷의 주둥이는 뭉뚝하고 짧고 암컷의 것은 가늘고 길다.

성충이 쌀알 뚫고 나오면 싸라기만 남아

암컷은 날카롭고 뾰족한 주둥이로 딱딱한 생쌀을 끌이나 드릴처럼 갉고 파서 구멍이 뚫어 알을 낳고, 끈적끈적한 젤라틴(gelatin) 물질을 분비해 구멍을 틀어막는다. 곡식을 찧은지 오래된 쌀 포대의 쌀알들이 덩어리를 지우는 수가 있는데 바로 이 물질 때문이다.

바구미는 보통 곡식 한 알에 길이 0.7㎜, 폭 0.3㎜인 알 하나를 낳고, 그 알은 3~4일 후에 부화한다. 부화한 알은 아주 작고 하얀, 다리 없는 유충이 되어 19~34일 동안 쌀을 녹여먹고 자라 번데기가 된다. 쌀 속에 든 번데기는 환경조건이 좋으면 3~6일 후에 우화(羽化,날개돋이)한 후 성충이 되어 쌀알을 뚫고 나온다.

번데기가 우화해 나온 자리에는 구멍이 뻥뻥 뚫려서 그만 싸라기(부스러진 쌀알)가 되고 만다. 그래서 성체보다 앳된 유충이 더 해롭다. 쌀 바구미가 갉아먹은 쌀을 들어내 체에 쳐보면 하얀 쌀가루가 먼지처럼 쏟아지니 놈들이 곡식을 갉아먹으면서 생긴 부스러기이다.

애벌레는 딱딱한 저장 곡물에 해를 끼치지만, 밀가루 같은 가루 식품에서는 살지 못한다. 그리고 알곡 안에서 자라는 유충의 호흡으로 수분이 높아지고, 열이 발생해 쌀알이 부드럽게 되어 갉아먹기 쉽게 되며, 쌀은 결국 변질, 부패해 품질이 떨어진다.

과거에는 바구미가 들끓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쌀자루나 쌀독에 마늘이나 생강을 넣기도 했는데, 요새는 놈들이 싫어하는 냄새를 풍기는 포장된 약을 시판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쌀의 해충을 박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하 18℃ 이하에서 약 3일간 냉동시키거나 60℃에서 15분간 두어서 바구미 알을 죽이고 보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릴 적에는 집에서는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정미소(방앗간)에서 도정(搗精)했다. 그런데 지금은 집집마다 쌀 찧는 도정기가 있어 그때그때 필요하면 내다 쓰니 참 좋은 세상이다. 방앗간에서 유래된 말도 많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저 지나랴’란 욕심 많은 사람이 이익을 보고 가만있지 못함을, ‘참새에 방앗간’이란 늘 바라던 것을 만났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참새가 방앗간에 치여 죽어도 짹 하고 죽는다’라는 말은 아무리 약한 것이라도 너무 괴롭히면 대항한다는 말이다.

필자도 디딜방아를 많이 찧어 봤다. 디딜방아는 한 사람이 찧는 외다리 방아와 한쪽이 가위다리처럼 벌어져서 두 사람이 찧는 양다리 방아가 있었다. 다리에 힘을 주기 위해 방앗간 천장에다 늘여 맨 굵직한 새끼를 팔로 세게 잡아당기며 발로 디딤대를 힘껏 밟았다. 물론 시간을 보내느라, 이야기를 나누거나 노래를 불러 가면서 말이다.

한데 외다리 방아는 일본, 중국 등지에도 있지만 양다리 방아는 한국 고유의 발명품으로서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다고 한다. 쿵당, 쿵당, 쿵쿵 짓찧느라 지축을 흔드는 그때의 방앗소리가 귀에 쟁쟁하도다!

※ 권오길 - 1940년 경남 산청 출생. 진주고, 서울대 생물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수도여중고·경기고·서울사대부고 교사를 거쳐 강원대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05년 정년 퇴임했다. 현재 강원대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간행물윤리상 저작상, 대한민국 과학문화상 등을 받았으며, 주요 저서로는 [꿈꾸는 달팽이] [인체기행] [달과 팽이] [흙에도 뭇 생명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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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호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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