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Home>월간중앙>사람과 사람

[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23)] 최다안타 기록 안고 은퇴한 ‘LG맨’ 박용택 

“하고 싶은 것 말고 해야 할 일을 하라” 

사진 김민규 기자 kim.mingyu@joongang.co.kr
KBO 역대 최다 2236경기 9138타석 기록도 남긴 ‘꾸준택’
26년 동안 우승 없는 LG 트윈스 흑역사 고스란히 버텨내


▎지난 연말 JTBC빌딩에서 열린 일간스포츠 행사에서 만난 박용택은 트레이드 마크였던 콧수염을 말끔히 정리한 깔끔한 모습이었다.
LG트윈스는 국내 프로야구 KBO리그에서 가장 많은 열성 팬을 보유한 팀이다. 수도 서울의 잠실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쓴다. 개성 강한 스타 선수들도 많다. 그런데 1994년 이후 26년째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다. 2002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9-6으로 이기고 있다가 9회말 1사 후 이승엽에게 동점 스리런 홈런, 곧바로 마해영에게 끝내기 솔로 홈런을 맞았다. 야구팬들에게 가장 강력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을 LG가 연출했다. 그 뒤로 LG는 한국시리즈에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이 팀에서만 19년간 뛰고, KBO리그 역대 최다안타 기록을 갖고 은퇴한 선수가 있다. ‘꾸준함의 대명사’ 박용택(41)이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2002년 쌍둥이 유니폼을 입은 박용택은 2020년 시즌까지 통산 2236경기에 출장해 9138번 타석에 섰고 2504개 안타를 쳤다. 이 모두가 KBO 역대 1위 기록이다. 개인 통산 200홈런-300도루를 KBO리그에서 처음 달성했을 정도로 장타력과 빠른 발도 갖췄다. 무엇보다 10년 연속 3할 타율(2009~2018)을 기록할 정도로 기복 없이 좋은 플레이를 보여줬다.

박용택은 LG가 깊은 침체기에 있을 때 팀의 주장을 맡아 온갖 비난과 욕설을 뒤집어썼다. 그럼에도 팀을 떠나지 않았고, 팬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유니폼을 벗을 수 있었다.

지난 연말 서울 상암동 JTBC 빌딩에서 박용택을 만났다. 옷 잘 입기로 유명한 선수답게 박용택은 깔끔한 세미 정장 차림으로 나타났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콧수염도 말끔히 정리한 모습이었다.

요즘이 현역 때보다 더 바쁘신 것 같네요.

“그러게요. 은퇴 후에 말도 안 되게 바빠졌어요. 현역 땐 시즌 끝나면 못 보던 지인들도 만나고 하는데 요즘은 그럴 시간도 없이 여기저기 불려 다닙니다. 인터뷰에다, 방송에다, 연말 행사도 많아서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먹고사는 걸 해결하기 위한 구직활동인데요. 다행히 한 방송사 해설위원을 맡기로 결정이 됐어요. 구단들이 겨울 전지훈련을 해외로 못 나가니 지방 전지훈련장 돌아다니며 스케치부터 해야죠. 콧수염을 정리한 것도 방송에서 보니 별로 예뻐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하하.”

야구 시작하면서 세운 꿈이 ‘LG 입단’


▎박용택은 KBO 최초 200홈런-300도루를 달성했을 정도로 빠른 발을 자랑한다.
앞으로는 지도자를 하실 거죠?

“그건 모르죠. 초등학교 5학년 야구선수를 시작할 때부터 한 가지 목표와 꿈을 갖고 열심히 했는데…. 야구선수 외 어떤 걸 잘하는지 못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죠. 지금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2 인생이니까 내가 어떤 걸 잘하는지, 좋아하는지, 어떤 곳에서 절 필요로 하는지부터 알아가야겠죠.”

야구선수 시작할 때부터 가진 꿈은 뭔가요?

“서울 고명초등학교 5학년이던 1990년 6월 3일 일요일 야구선수가 됐어요. 그때 품고 있던 개인적인 꿈은 150% 이상 이뤘다고 생각해요. 가고 싶은 학교인 휘문중-고를 나왔고, 대학도 제가 가고자 했던 고려대를 졸업했고요. 당시엔 연·고대 중 연대를 다들 선호했는데 전 훈련도 기강도 빡빡한 고대에 가서 빡세게 하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어릴 적 꿈이었던 LG 트윈스에 입단해 은퇴할 때까지 뛰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죠. 그런 건 150% 이룬 것 같은데, 딱 하나 모자란 건 우승 트로피가 없다는 거죠.”

올해까지만 하겠다고 선언하고 들어간 2020시즌에도 딱 3할을 쳤는데요. 이 정도 성적을 예상했나요?

“베테랑으로서 팀에 민폐 안 끼치고 도움 될 수 있을 정도 되려면 타자로서 200타석 이상 나와서 타율 3할 이상은 쳐야지 생각은 했어요. 딱 그 정도 한 거죠. 정규시즌 마지막 플레이가 도루였는데, 1점 차로 뒤진 상태에서 볼넷을 얻어 주자 1, 2루가 됐어요. 다음 타자 초구에 2루 있던 신민재가 기습적으로 3루 도루를 했어요. 원래 2루 주자가 도루하면 1루 주자도 같이 뛰잖아요. 제가 두 살만 어렸어도 따라갔을 텐데, 주춤하다가 못 갔어요. 그게 좀 아쉽더라고요. 근데 투수 킥 모션 보니까 나한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아서 가다가 넘어지지만 않으면 살겠다 해서 뛰었죠. 그게 제 마지막 플레이가 됐네요.”

포스트시즌엔 안타를 못 치고 끝나버렸죠. 경기가 끝난 뒤 어떤 마음이 들던가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되게 후련했어요. ‘아이고 이제 진짜 야구 끝났다’ 싶어서요. ‘야구 하면서 언제가 가장 즐거웠나요. 언제가 행복했나요’ 이런 질문 많이 받는데 사실 야구 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기분 느껴본 적이 별로 없어요. 항상 ‘힘들다. 힘들지만 이겨낼 거야. 해낼 거야’ 이런 느낌으로 야구를 했죠. 그래서 정말 후련하고 눈물도 안 났는데…. 11월 30일 밤에 와이프 앞에서 울었어요. 2002년 2월 1일 공식적으로 LG 트윈스 선수가 돼서 2020년 11월 30일이 계약 종료일이었거든요. 그 얘길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확 나더라고요. 꽁꽁 막아놨던 눈물보가 확 터져버린 거죠.”

2002년 데뷔 시즌에 박용택은 타율 0,288을 기록했고, LG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삼성 라이온즈와 맞섰다. 야구 팬들의 뇌리에 오래오래 새겨질 역사적인 2002 한국시리즈 6차전. 9-6으로 이기고 있던 LG는 9회 말 원아웃 뒤 이승엽에게 동점 스리런 홈런을 맞았다. 삼성 팬들의 함성이 대구 구장을 들었다 놨다. 그 여진이 사라지기도 전에 마해영이 끝내기 홈런을 오른쪽 담장 너머 스탠드에 꽂았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 LG는 그 이후 2020년까지 18년 동안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김성근 감독 만난 덕에 19년간 버틸 수 있었다


▎2017년 7월 9일 LG 이병규 선수(가운데)의 은퇴식에 함께한 정성훈(왼쪽)과 박용택.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을 잊을 수 없죠?

“아∼ 하하하. 믿기지 않았죠. 그 경기를 지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우린 다들 시리즈 7차전 얘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좌익수에서 우익수로 위치를 바꿔서 승엽 형 홈런, 마해영 선배 홈런이 내 키를 넘어서 스탠드에 꽂히는 걸 봤거든요. 그 타구 포물선이 너무 길고, 그 시간이 너무너무 길었어요.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이런 느낌이었죠. 초·중·고·대학 때 제일 잘하는 팀에서 우승을 밥 먹듯 했잖아요. 한 번도 그런 좌절과 실패를 맛보지 못했거든요. 충격이 컸지만 그래도 ‘프로 첫해 3할 못해 좀 아쉽고 팀도 좀 아쉽게 됐지만, 뭐 첫해 그런대로 했네. 다음 시즌에는 나도 3할 치고 팀도 우승하면 되지’ 그랬는데…. 그때부터 야구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됐죠.”

그런데 왜 LG는 우승을 못하나요?

“밖에서 여러 가지 평가나 이런저런 얘기가 많다는 걸 알지만 전 그런 거 다 부정합니다. 어쨌든 뭔가 하나 부족한 게 있으니까 못하는 거겠죠. 제가 그걸 알았다면 팀의 최고참이자 리더로서 바꾸려고 노력했을 텐데 아직은 모르겠어요. 제3자로 나와서 보면 보이는 게 있겠죠. 해설을 하고 다른 팀들도 찾아가고 그러면 보이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팀 내부 분위기나 여러 가지 사안들은 팬이나 미디어보다 제가 더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밖에서 봤을 때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은 ‘그것 때문이 아니다’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LG가 우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지금 드릴 수는 없겠죠. 만약 2021시즌에 우승을 하면 답이 나오는 거죠. 제가 있어서 그동안 우승 못했다는 걸로. 하하하.”

우승도 못하는 LG 한 팀에서만 뛴 이유는 뭔가요?

“제 꿈이었으니까요. 야구선수로서 꿈은 LG 트윈스에 입단하고 LG 트윈스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선수생활 은퇴하는 것이었죠. 일단 팀에서 트레이드 대상이 안 됐다는 게 쫓겨나지 않은 이유고요. 둘째는 세 번의 FA(자유계약) 때마다 LG 트윈스랑 계약한 거죠. 사실 두 번째 FA 때는 좀 위험했어요.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을 좀 했거든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외국은 안 나갔습니까 못 나갔습니까?

“못 나간 거죠. 첫 FA 계약할 때였으니까 2010시즌 앞두고 서였지요. 2005년 시즌부터 어깨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면서 송구 능력이 떨어졌어요. 외야수로서 경쟁력이 처지니까 1루수로 포지션 변경을 하면서 일본 진출을 모색해 보자는 에이전트의 제안을 받았어요. 서른 살이니까 충분히 포지션을 바꿀 수 있는 나이였죠. 그런데 제가 크게 마음이 동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또한 처음에 꾸었던 제 꿈에서 어긋나는 것이었으니까요.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제안이 온다면 원래 꿈보다 좀 더 큰 거니까 할 수는 있었겠지만요.”

어깨가 나빠진 게 신인 때 김성근 감독이 수비 훈련을 너무 많이 시켜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야구는 그런 게 어렵습니다. 많은 연습을 하면 기술적으로 좋아질 수 있지만 몸이 못 따라 줄 수도 있거든요. 그 가운데서 적절한 균형을 맞추기가 어려워요. 시대에 따라 관점도 바뀌는 거고요. 당시에는 당연했지만 지금 눈으로 보면 왜 저렇게 혹사시켰나 할 수도 있죠. 팬들이 보는 것과 선수 본인이 받아들이고 느끼는 부분은 다릅니다. 저는 김성근 감독님을 신인 때 만난 게 너무너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프로가 어떤 곳이라는 걸 어리고 팔팔한 나이에, 정신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셨거든요. 프로야구판이 이렇게 힘든 곳이로구나 하는 걸 느꼈기 때문에 19년간 잘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LG 트윈스는 어떤 팀인가요?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매력 넘치는 팀이죠. 수도 서울을 홈으로 쓰는 팀. 오랜 시간 우승을 못했는데도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고 그 팬들이 엄청나게 열성적인 팀입니다. 가장 야구를 좋아하는 모기업 등에 업혀 있기도 하죠. 선수들이 성적을 못 내는 게 일반 팬이 봤을 때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좋은 성적을 냈다면 ‘메이저리그=뉴욕 양키스’ ‘일본 프로야구=요미우리 자이언츠’처럼 KBO리그 하면 LG트윈스가 됐을 겁니다.”

빼어난 패션 센스로 ‘수트택’ 별명도


▎2017년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지명타자 부문을 수상한 박용택.
LG 트윈스 팬은요?

“제 얘기 먼저 하자면 전 어느 누구보다 많은 팬의 사랑을 받은 선수는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의 깊이로 따지면 가장 깊고 진한 사랑을 받은 선수라는 건 어디 가서도 얘기할 수 있어요.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정말 팀이 힘든 시간에 제가 욕받이도 하고, 저 혼자도 감당하기 벅찬 실력을 갖고 있는데도 그냥 제가 팀의 성적까지도 화살을 받아야 하는 시간을 다 봐 오셨잖아요. 그러면서 뭔가 좀 성숙해지는 저를 보셨고. 그런 것들을 같이 겪다 보니까 그냥 좋아하는 선수라는 느낌보다는 저를 정말 아끼는 동생·오빠·형 그런 느낌으로 봐 주시더라고요. LG 팬의 사랑은 그런 겁니다. 같이 느끼고, 같이 슬퍼하고….”

서울 라이벌인 두산 베어스 팬과 비교하면?

“두산이 잘하니까 좋아하겠죠. 하하하. 어릴 때부터 좋아했으니까, 또 좋아하는 선수가 있어서 좋아하지만 LG 팬들이 갖고 있는 그런 감성은 없다는 거죠. 10여년을 가을야구 한 번 못하면서도, 주위에서 ‘LG 팬을 왜 해?’ 이런 얘기 수없이 들으면서도 ‘진짜 이 자식들 언제까지 못하나 보자’ 이런 마음에 오기까지 생기는 거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열정적인 팬들은 좋은 성적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좋지 않은 성적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어요. 실제로 메이저리그 팀들도 월드시리즈 우승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해요. 월드시리즈 올라가지만 준우승, 아메리칸리그·내셔널리그 우승하거나 아깝게 2위 하거나 그 정도가 더 좋다는 겁니다. 더 높은 기대치가 있어야 팬들이 계속 관심을 갖는다는 거죠. 2016년 시카고 컵스가 108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하고 나서 관중 수가 그렇게 줄었대요. 100년 넘게 기다렸는데, 우리 증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 때부터 기다렸다는 우승을 해 버렸잖아요. 어쩌면 LG 트윈스가 그렇게 사랑받는 것도 이런 맥락과 통하지 않나 싶어요.”

루틴의 시작은 경기 전날 밤 상대 투수 분석


▎2014년 4월 팀이 극심한 부진에 빠지자 박용택은 삭발을 하고 경기에 나섰다.
박용택은 ‘별명 부자’다. 한 경기 끝나면 하나씩 새로운 별명이 나오는 것 같았다. 별명의 대부분은 끝에 ‘택’자가 붙어 있다. ‘찬물택’은 찬스에서 무기력하게 물러났을 때, ‘용암택’은 타석에서 맹활약 했을 때 붙은 별명이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게 ‘꾸준택’이고,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별명은 ‘팬덕택’이다. ‘수트택’이라는 별명은 빼어난 패션 센스에서 유래했다. 그는 “죄송하고 외람된 얘기지만 야구 선수 중 누구와도 패션에 관해 비교하는 게 자존심 상합니다. 안경 주머니에 선글라스 6~7개, 안경 6~7개씩 있어요. 제 외모는 2004~05년 잠깐 완성됐다가 결혼하고 한순간에 아저씨가 됐습니다. 저는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출연자의 옷을 봅니다”라고 했다.

꾸준함의 비결은 뭔가요?

“저는 나이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방망이가 좀 안 맞으면 아버지께서 ‘이제 나이가 먹어서 스윙 스피드가 떨어졌구나’ 이러시는데 그러면 ‘아이구 아버지, 좀 가만 계세요’라고 역정을 낼 정도로 그런 생각들을 머릿속에 요만큼도 넣지 않았죠. ‘20대에 2할 타자였고 30대 3할 타자였으니 40대엔 4할 타자 한다’ 이런 마음을 갖고 늘 시즌을 준비해 왔습니다.”

연습이나 경기 준비에서 남달랐던 게 있나요?

“계속 어떤 시도를 했고 변화를 줬습니다. 타격 메커니즘을 바꾸는 거죠. 그게 어떨 땐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나이와 반비례해서 떨어지는 신체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그런 변화가 꼭 필요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3할 타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타격 폼 바꾸는 게 모험일 수 있고 평생 못 바꾸는 친구도 많습니다. 저는 매일 뭔가를 준비했다고 보면 됩니다. 저는 루틴의 시작은 경기 전날 밤이라고 생각해요. 다음날 상대 선발투수의 전력을 분석하고, 경기 영상을 보면서 내가 어떤 타법·자세·느낌으로 공략할지를 연구하고 ‘이렇게 공략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겠구나’ 하는 기분 좋은 느낌을 갖고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본인의 플레이 스타일로 다재다능·호타준족·중거리타자 등이 거론되는데 강력한 임팩트를 주는 게 부족하지 않나 싶기도 한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송구 능력 때문에 수비수를 일찍 그만두면서 전문 지명타자를 하게 됐지만 제가 공 잡으러 다니는 거는 괜찮거든요. 수비를 계속했다면 훨씬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방망이 하나 들고 밥 벌어먹고 살아가야 한다면 일반적인 이미지로는 장거리 타자가 돼야지 임팩트가 크잖아요. 그게 안 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세 번에 한 번은 안타 쳐서 3할3푼3리 이상 치는 타자가 돼야겠다고 다짐했죠.”

그 결과로 나온 게 최다안타, 최초 2500안타, 최다출장 등인데요.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기록을 꼽자면?

“최다출장이죠. 어디 가서 ‘한국 프로야구에서 야구 제일 많이 한 사람이야’라는 말 할 수 있잖아요. 나보다 게임 많이 뛴 사람도 없고 나보다 타석 많이 들어가 본 사람도 없으니까요. 잘 버텼구나 하는 생각뿐이죠.”

후배 중에 본인의 기록을 넘어 3000안타까지 갈 만한 타자가 있을까요?

“김현수(32·LG), 손아섭(32·롯데), 최정(33·SK) 세 명은 나이도 비슷하고 안타 수도 비슷하지요. 그 친구들은 대충 계산했을 때 지금 기량으로 41살까지 주전 유지하면 3000개 가까이 가더라고요. 그 정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잘 지켜봐야죠. 사실 이 친구들은 2500안타는 시간문제입니다. 양준혁 선배님이 2000안타를 처음 치시고 인터뷰 때 ‘후배들의 징검다리가 되는 기록’이라고 하셨는데 저 또한 마찬가집니다. 2500안타라는 하나의 징검돌을 놓은 겁니다. 그래야 후배들이 진심으로 3000안타라는 기록을 목표에 두고 갈 수 있으니까요.”

야구만 했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해서 아쉬운 게 있죠.

“공부를 못한 게 가장 아쉽죠.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한 거잖아요. 그게 너무 아쉬워서 내년에는 해설하면서 가을학기부터 대학원 다니려고 합니다. 또 야구 관련되지 않은 친구들을 사귈 기회가 없었고, 중·고·대학다니면서 일반 친구들이 갖는 학창시절 추억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죠. 열네 살이 된 제 딸도 운동신경 좋지만 저는 절대 운동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야구하면서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어요.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해야 되니까 했어요. 슬픈 얘기죠. 전부 나 같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더라고요. (이)병규 형 같은 경우는 자기는 진짜 야구를 재밌게 했고 야구하는 게 좋다고 하거든요.”

요즘은 학생 선수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죠.

“제 경험이 대한민국 사회 엘리트 스포츠를 한 선수들이 대부분 겪었던 아픔 아닐까 싶고, 그걸 바꾸자고 해서 ‘공부하는 학생 선수 만들기’ 차원에서 주말리그도 하는 거잖아요. 방향은 맞는데 방법은 계속 머리를 맞대고 보완해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주말에만 경기하니까 에이스 투수가 매번 등판해서 혹사를 당하고, 다른 선수들은 경기 뛸 기회가 줄어들거든요.”

공부 못한 게 아쉬워 대학원 진학 예정


▎박용택이 입은 유광점퍼는 LG 가을야구의 상징이자 LG 팬들의 염원을 담은 옷이다.
한국 야구가 더 성장하려면 어떤 쪽을 들여다봐야 할까요?

“지금 학생야구의 방향성은 맞지만 이 정도 연습량과 시스템으로는 프로 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가끔 좋은 선수가 나오는 쪽은 투수뿐이죠. 공·수를 갖춘 타자는 이정후(22·키움) 정도? 강백호(21·kt)는 엄청난 공격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수비할 때 보면 우리끼리 ‘쟤는 중학교 때 배팅 수비도 안 해봤나’ 할 정도예요. 워낙 운동능력이 있으니까 올 시즌은 1루수 보는데 잘하더라고요. 결국 프로에 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얘기가 되잖아요. 아마야구가 이런 부분들은 더 고민해야 합니다. 미국 일본과 비교해선 안 돼요. 일본은 4000개 고교 팀에서 어떤 선수가 튀어나올지 몰라요. 미국은 더 말할 나위도 없죠. 전 세계에서 야구 좀 한다는 사람들이 다 모이잖아요.”

피해갈 수 없는 마지막 질문. 레전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박용택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하고 싶은 걸 하면 안 되고 해야 할 일을 해야죠. 하고 싶은 건 참아야죠. 그래야 한 분야에 이름 석 자를 남기지 않을까요?”

정말 하고 싶은 걸 참으면서 살아왔는지 재차 물었다. “정말로, 정말 많은 것들을, 아 이건 도저히 못 참겠다 하는 것도 참으면서 살아왔어요. 그래서 유니폼을 벗은 지금 후련합니다.”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2101호 (2020.1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