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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국보 '세한도' 국가 기증 손창근 선생, 아들이 말하다 

“176년 세월 중 50년… 잠깐 맡고 있었을 뿐” 

2018년 서화 304점 기증할 땐 “손 아무개로 해 달라”
돈 벌 때도, 쓸 때도 가치 좇았던 ‘개성상인 핏줄’이 바탕


▎손창근 선생의 차남인 손성규 연세대 교수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세한도]를 관람하고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의 대표작 [세한도(歲寒圖)](1844년 작, 국보 제180호)는 가로 70㎝, 세로 33.5㎝ 크기로 알려져 있다. 추사가 직접 그린 서화의 크기가 대개 그렇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이하 박물관)에 전시된 [세한도]의 길이는 15m에 이른다. 특별전시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다. 176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청나라와 조선의 문사들이 쓴 감상평이 줄줄이 그림에 덧붙여져서 그렇다.

개성 출신 실업가 고(故) 손세기(1903~1983) 선생은 1970년대 [세한도]를 사들였다. 이후 그의 장남 손창근(91)이 2020년 1월 박물관에 기증하기까지 약 50년을 손세기-손창근 부자가 소유했다. 176년 세월의 3분의 1을 함께한 셈이다. 그런데도 손씨 부자는 감상평을 남길 종이를 덧대지 않았다. 손창근 선생은 [세한도] 기증에 앞서 2018년 서화 304점을 먼저 중앙박물관에 내놓을 때는 “손아무개 기증으로 해달라”면서 자신의 이름을 숨겼다.

이들 부자는 개성상인의 피를 잇는 기업인이다. 투자와 보상에 관한 관념이 누구보다도 확실하다고 할 만하다. 그런 이들이 한사코 무명(無名)을 고집했던 이유는 뭘까. 답을 찾기 위해 손창근 선생의 차남인 손성규(61)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를 만났다. 그간 언론에 나서길 꺼려왔던 손 선생이 아들에게 자신을 대신하게 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 [세한도]를 봤을 때가 언제였나?

“2019년 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마지막으로 봤다. 정작 아버지가 소장하실 땐 집 금고에 보관하셔서 보기 어려웠다. 한번 꺼내서 보여주셨을 때 본 것이 전부다. 사실 내일(인터뷰 다음 날인 12월 15일) 지인들과 특별전을 관람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약속을 취소했다.”

박물관은 손창근 선생의 세한도 기증을 기념해 특별전(‘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평안平安’)을 기획했다. 2020년 11월 24일부터 새해 1월 31일까지 약 두 달간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 계획이었다. 그러나 특별전을 연 지 2주일 만에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해 박물관 전체가 12월 8일부로 기약 없는 휴관에 들어갔다.

‘마지막 한 점’ 두고 고민한 1년 2개월


▎2020년 12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를 방문한 손창근(가운데) 선생과 함께 환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2019년이면 아직 아버님께서 소장하실 때 아닌가?

“2005년 5월, 2010년 12월 두 차례에 걸쳐 각각 170점, 135점을 박물관에 기탁하셨다. 이때 이미 [세한도]를 포함해 모든 컬렉션을 맡기셨기 때문에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었다. 2010년 아버지께서 경기도 용인의 실버타운으로 거처를 옮기시면서 보관이 어려워진 사정도 있다.”

이때 기탁한 문화재 305점은 손세기·손창근 컬렉션으로 불린다. 손세기 선생과 장남 손창근이 대를 이어 수집한 작품들이어서다. [세한도] 외에도 추사의 걸작 [불이선란도], 최초 한글서적인 [용비어천가] 초간본(1447) 등이 주요 작품으로 꼽힌다.

손창근 선생은 2018년 11월 21일, 구순을 맞아 [세한도]를 제외한 기탁품 304점을 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박물관 측은 이를 기념해 상설전시관에 ‘손세기·손창근 기념실’을 마련하고 기념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손 선생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들 앞에서 작품을 내놓는 소회를 밝혔다.

“한 점 한 점 정(情)도 있고, 한 점 한 점 애착이 가는 물건들입니다.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 고민 생각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 앞으로 내 물건에 대해 손 아무개 기증이라고 붙여주세요.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인사치레로 한 말이 아니다. 손 선생은 기념식에서 소회를 말하지 않을 생각도 했었다고 손 교수는 전한다. 손 교수는 “아버지께서 처음엔 말씀조차 안하신다고 했다”며 “‘당신께서 안하면 누가 하시겠냐’고 설득해서 나서신 것”이라고 돌이켰다. 손 선생은 이후 언론 인터뷰만큼은 한사코 사양했다.

손 선생은 많은 작품에 대한 애착을 내려놨지만, [세한도]에 대해선 내려놓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린 듯하다. 추사의 작품 중에서도 ‘무가지보(無價之寶)’로 불리는 작품이었다. 손 선생은 2018년 기증 이후 1년 2개월여가 지난 2020년 1월 29일, 비로소 [세한도] 기증서에 서명했다.

父子이자 동지였던 손세기-손창근


▎고(故) 석포 손세기 선생이 1973년 서강대에 고서화 200점을 기증하면서 써 보냈던 기증서. / 사진:손성규
손 선생께서 [세한도]만큼은 고민을 더 하셨던 것 같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농담으로 ‘이건(세한도는) 가치가 조 단위’라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아끼셨던 작품이다.”

가족에게 의견을 묻기도 하셨나?

“아버지의 기증 결심을 1월 중순에 알게 됐다. 2018년 때도 결심을 굳히고 나서 가족들에게 알렸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대기업 2, 3세들도 상속 재산을 둘러싸고 숱하게 싸우지 않나. 자식들하고 의논하기 어려우시지 않았을까. 원체 과묵한 분이시다. 혼자 고민하느라 힘드셨을 거다.”

손 선생이 홀로 판단했던 데는 가족에 대한 믿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2년 그가 경기도 용인시 소재 산림 약 6600㎡(200만 평, 시가 약 1000억원)를 산림청에 기부할 때는 자녀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손 교수는 “2012년 때 그렇게 의견을 모아주니 ‘내가 하자고 하면 존중해주나보다’라고 믿음을 가지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손 선생은 산림청에 ‘아들딸 등 가족도 손씨 뜻에 적극 동의했다’는 점을 함께 알려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번 결정에는 선생의 부인이자 손 교수 어머니께서도 도움을 줬다고 들었다.

“2018년 기증 때 어머니께서 ‘왜 한 점(세한도)만 뺐느냐, 이럴 거면 나한테 달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그 말씀을 듣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손 선생은 지난 12월 8일 문화훈장 중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4년 문화재청이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포상’을 시작한 이래 금관문화훈장 수훈은 처음이다. 하지만 이날 훈장은 손 선생의 자녀들이 대신 가서 받았다. 다음날인 9일엔 청와대 초청도 받았지만, 이것 역시 처음엔 사양할 마음이었다고 한다. ‘손 아무개 씨’의 진심으로 읽혔다.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멀어서 안 간다’고 하셨다.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자손들이라도 와달라고 하더라. 저도 ‘(참석은) 대통령직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렸다. 설득 끝에 아버지께서 마음을 돌리셨다.”

청와대 방문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세한도] 복제본이 청와대에 있더라. 원래 만들면 안 되는 건데, 행사 담당자가 저한테 양해를 구하더라. 별달리 이야기는 안했지만, ‘이제 우리 아버지 것도 아닌데, 우리한테 미안할 필요가 없는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손 선생의 고서화 수집·기부는 집안 내력에 가깝다. 손 선생의 부친 손세기 선생은 “간송미술관 특별전이 열리면 전시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서화 감상에 열중했다”(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고 할 정도로 고서화에 관심이 많았다. 손창근 선생도 아버지를 따라 1960년대부터 수집 활동을 시작했다.

손세기 선생께서 개성 인삼 업계에서 ‘떠오르는 실업가’로 불렸다고 들었다. 인삼 재배·무역으로 축적한 자본이 밑천이 됐을까?

“6·25전쟁이 나면서 다 두고 부산으로 피란 가셨다. 이후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자리를 잡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셨다. 광물사업으로 일어서셨다고 들었다. 아버지께서도 스위스계 상사에 수 년간 계시다가 나와서 할아버지와 사업을 시작했다. 할아버지 성함 ‘세’ 자에다 아버지 성함 ‘창’ 자를 써서 ‘세창물산’이라는 회사를 경영하셨다. 지금은 정리하셨다.”

상인의 감각과 수집가의 안목


▎‘손세기·손창근 기념실’에서 사진 촬영하는 손성규 교수 뒤로 추사 김정희의 말기 대표작 [진서완석루]가 전시돼 있다.
조부께선 어떤 계기로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셨다고 들었나?

“간송 선생처럼 거창한 가치로 시작하셨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미술품이 한 국가에 갖는 의미는 고민하셨던 것 같다. 1973년 조부께서 서강대에 작품 200점을 기증하셨을 당시 쓴 글에 그런 마음이 드러난다. 조부께서 쓰셨지만, 아버지 조언을 바탕으로 해서 여러 번 고치셨다고 하더라. 아버지의 마음도 담겨있는 셈이다.”

손세기 선생이 당시 서강대에 써 보낸 기증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선조께서 물려주신 유품들을 영구보존 하여주시고, 귀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 박물관을 통해 우리의 옛 문화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바라나이다. 1973년 1월 30일 석포 손세기’(사진2)

작품들은 그동안 어떻게 수집하셨나?

“두 분이서 같이 수집하셨다. 수집을 시작한 직접적인 계기는 말씀하신 적 없다. 다만 개성 출신 분들이 고서화 수집에 관심이 많으셨다. 할아버지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고(故) 최순우(1916~1984) 선생님과 교분이 깊었다. 이외에도 개성 출신인 고(故) 서성환(1924~2003) 태평양그룹(현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고(故) 이회림(1917~2007) 동양제철화학그룹(현 OCI) 창업주 등도 고서화에 투자를 많이 하셨다. 호림미술관을 세운 고(故) 윤장섭(1922~2016) 성보화학·유화증권 회장은 아버지의 고종사촌이시기도 하다.”

좋은 작품 찾으러 두 분께서 발품을 많이 파셨을 것 같다.

“가회동 집에 살 때 두 분께서 인사동을 자주 다니셨다. 그동안 수집한 작품 대부분을 인사동에서 구하셨다. 당시 집에서 두 분이 ‘어느 작품이 좋더라, 뭘 살까’ 논의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나머지 형제분이나 저희 자녀들은 지식이 없어 말을 나누기 어려웠다. 나중에 특별전에서 조부님 안방에 걸려 있던 작품들을 보고 가치를 알았다.”

조부에 대한 다른 기억은 있나?

“제가 스물네 살일 때 돌아가셔서 희미하다. 생전에 할아버지께서 경기도 광주에 묘소를 만들어두셨다. 예전 어르신들은 가실 곳 미리 만들어두시고 흐뭇해하지 않나. 할아버지께서도 묘에 등을 기대고 느긋하게 앉아계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개성사람에게 돈은 어떤 의미였을까?

“개성사람만큼 부에 대한 관념이 투철한 사람들이 없다. 이름 뒤에 상인이란 단어가 붙는 지역은 개성이 유일하다. 그런데 개성사람은 돈 버는 감각도 뛰어나지만, 돈 쓰는 방식도 범상치 않다. 과시하듯 쓰지 않는다. 굉장히 검소하신 분이 많다. 돈을 쓸 땐 가치 있는 데 쓰길 원한다. 그런 맥락에서 조부와 부친은 고서화에 투자하셨다고 생각한다.”

부친도 검소하신 편이었나?

“아버지는 지금도 이면지 쓰신다. 택시 탈 때도 목적지와 반대방향 도로에서 타는 것 용납 안하신다. 저도 부지불식 간 아버지를 따라할 때가 많다. 집안 내력이다. 자식한테 검소하게 살라고 일일이 말하지 않는다. 삶을 보고, 묵묵히 배운다.”

“세한도, 이제 국민의 것”


▎[세한도]에는 조선의 문사 4명과 청나라 문사 16명의 감상평이 추사의 서화와 함께 수록돼 있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그렇게 살뜰히 모은 부를 모두 내려놓으셨다.

“할아버지께서 칠순에 서강대에 기부하셨고 팔순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께서 팔순 때 용인 땅을 내놓으시고 2018년 구순 때 고서화 304점을 기부하셨다. 할아버지의 족적을 지켜보며 계획해 오셨던 것 같다.”

연세대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손 교수와 함께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측은 손세기-손창근 기증자의 후손인 손 교수를 위해 [세한도] 특별전시실과 손세기·손창근 기념실 두 곳을 공개해주었다.

손 교수와 함게 1시간여 동안 전시실들을 둘러봤다. 세한도 특별전 전시실은 손 교수도 첫 방문이었다. 작품들을 하나씩 곱씹던 손 교수는 이따금 “옛날 할아버지 안방에서 본 것”이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손창근 선생 소유의 미술품은 없다. 아들로서 아쉬운 마음은 없을까. 작품 관람을 끝낸 손 교수에게 물었다.

“1844년에 세한도가 세상에 나왔다. 조부께서 1970년대에 사셨고, 부친께서 2020년에 내놨다. 176년 역사 중 약 50년이다. 이 작품이 앞으로 100년, 아니 1000년 갈지 모르는데, 50년이면 짧은 시간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가족이 잠깐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국민의 것이다.”

- 글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 사진 박종근 비주얼에디터 jokepark@joongang.co.kr

202101호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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