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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 ‘착한 역사’에 반기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암기식 역사교육으론 전략적 사고 못 키워” 

최근 신간에서 한국사의 흐름을 바꾼 판단 18가지 소개
‘피해자 조선’ 등 선입견 벗어나야 과거의 실패 반복 안 해


▎2020년 5월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한국공인회계사회에서 최중경 당시 회장이 인터뷰하고 있다. / 사진:박종근 기자
1904년 2월 6일, 당시 대한제국의 실세 이용익은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과 인터뷰했다. 기자는 “자신의 힘으로 뒷받침 못하는 조약은 소용없다”며 물었고, 이용익은 “한국의 독립은 미국과 유럽이 보장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사흘 뒤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2월 9일 일본군 5만 명이 제물포항에 상륙했고, 곧이어 한일의정서가 체결됐다. 이듬해 을사늑약의 전조였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은 다를까? 신간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를 낸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정통 경제관료 출신인 최 전 장관은 2005년 세계은행 상임이사, 2008년 주필리핀 대사 등을 역임하며 국제정세 안목을 넓혔다. 2011년 장관직을 마친 뒤엔 미국 헤리티지재단에서 3년간 방문연구원 생활을 했다.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2016)를 펴내기도 했다.

최 전 장관은 책 머리말과 에필로그에 걸쳐 6년 전의 사건을 다룬다. 2014년 7월 일본이 집단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헌법 해석을 바꾼 사건이다. 바뀐 해석에 따르면 유사시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 상륙할 수도 있었다. 2013년 11월 열린 미·일 장관회담에서 미국의 동의를 받아낸 뒤에 벌인 일이었다. 일본의 발표에 우리 정부는 “한국 동의 없이 한반도 상륙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미국 워싱턴 DC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최 전 장관은 “1904년이 떠올랐다”고 말한다. 100여 년 전에도 일본은 대한제국에 파병하면서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한일의정서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독립과 황실의 안녕을 위해’ 일본군을 주둔한다고 했다. 힘의 논리가 명분을 앞선 셈이다. 2014년 정부 입장에 대해 최 전 장관은 “이용익의 말과 같은 수준”이라면서 “정부 대응뿐 아니라 잠잠했던 국내 여론도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는 큰 소요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몸으로 식민지를 경험했었기 때문에 들고일어났다. 그런데 2014년 때는 국내에서 시위 하나 보기 어려웠다.”

최 전 장관이 보기에 이런 문제는 암기식 역사교육에서 비롯된다. 우리 교육에서 가르치는 것은 러일전쟁의 발발 연도, 전쟁 끝에 러시아와 일본이 맺은 강화조약 이름(포츠머스 조약) 정도다. 최 전 장관은 사실의 나열에서 벗어나 “역사의 중대한 고비에 선조들이 내린 결정을 면밀히 분석하고 더 나은 대안이 있었는지 검토하고 토론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승전 역사뿐 아니라 몰락 원인도 가르쳐야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은 신작 [역사는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에서 전략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한국사 18가지 장면을 소개한다. / 사진:한울
최 전 장관은 책에서 백제 멸망을 첫 번째 케이스로 소개한다.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협공으로 멸망할 때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었던 고구려는 침묵했다. 나·당 연합군은 곧이어 고구려를 침공했다. 책은 “그렇다면 고구려는 왜 백제를 구원해서 미래의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역사 수업에서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 최 전 장관은 계백 장군의 황산벌 전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 등 18가지 케이스를 책에 담았다.

한국사의 여러 장면을 다루지만, 최 전 장관은 그중에서도 조선시대에 초점을 맞춘다. “세계가 농업 중심의 중세사회에서 산업혁명을 거쳐 근대사회로 전환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조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최 전 장관은 “나라를 세울 때만 해도 선진국이었던 나라가 어떤 과정을 거쳐 식민지로 전락하는지 분석해야 같은 실수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 전 장관이 보기에 선진국 조선이 결정적으로 쇠락에 접어든 계기는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으로 사람이 죽고 농토가 황폐해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최 전 장관은 “종전 후 이뤄진 논공행상에서 조선의 정신세계가 무너졌다”고 진단했다.

“선무공신(왜적을 토벌한 무관 대상)은 18명이었는데 호성공신(선조 몽진을 호송했던 인원 대상)은 86명이었다. 특히 호성공신 중 내시가 24명이었다. 그런 결정을 보고 어떤 사람이 나라를 위해서 일어나겠나.” 실제로 40여 년 뒤 병자호란에선 이렇다 할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다.

승전으로 기록된 역사도 다시 들여다본다. 1866년 강화도 정족산성 전투가 대표적이다.

“프랑스군을 상대할 병력으로 조선군 547명이 동원됐다. 그런데 그중 3분의 2가 민간인이었다. 인근에서 꿩·노루를 잡던 포수들이었다. 수도 지근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정규군 1개 대대를 동원 못하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가. 승전만 가르칠 게 아니라, 조선말 정규군 체계가 왜 무너졌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최 전 장관은 사학계 일각의 자학 사관을 꼬집었다. 식민지근대화론이 주 대상이다. 근대화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이 최 전 장관 주장의 요지다. 최 전 장관은 이런 사례를 소개하면서 “성공한 역사뿐 아니라 실패한 역사도 있는 그대로 다뤄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오랜 논란거리였던 독립운동사도 다룬다. 한국의 사학계·정치권은 ‘무장투쟁론이 맞느냐, 외교독립론이 맞느냐’를 두고 다퉈왔다. 최 전 장관은 양자택일하지 않는다. “무장투쟁을 보다 전략적으로 해내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말한다.

“독립군 역사를 보면 기구하다. 주도적으로 운명을 결정하기 어려웠다. 중국 국공내전에 동원되고, 6·25전쟁 때도 조선의용군이 선봉에 서지 않았나. 미국과 교섭해서 태평양 전선에 참여했으면 어땠을까. 드골의 자유 프랑스처럼 전승국 지위를 얻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인터뷰 내내 최 전 장관의 어조는 높았다. 최 전 장관은 “과거 역사교육이 부실했던 대가를 오늘날 치르게 될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2016년부터 4년간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을 지내는 동안에도 역사 공부를 멈출 수 없었던 이유다. 최 전 장관은 “최소한 공직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역사교육을 의무로 받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202101호 (20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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