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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1)] 1902년 5월 12·13일 밤 대한제국 육군 암구호는 

초여름(肇夏) 보리가 익어간다(麥黃) 

군사기밀 담긴 문서, 대여용 소설책 배접지로 재활용
옛 폐지 한 장도 잘 살피면 귀중한 사료 얻을 수 있어

필자는 고전소설 연구자로 소설 연구를 위해 조선 후기의 다양한 분야에 걸친 자료를 검토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얻은 흥미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 연재가 진행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내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고전소설에 관한 내용도 있지만, 과거시험·대동여지도·남산의 봉수대·판소리 같은 주제로도 독자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편집자 주]


▎서울 광화문 앞에서 훈련 중인 대한제국 군인들.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는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따라 군대 해산을 주도했다. / 사진:권태균
대한민국에서 병역의 의무를 현역으로 마친 사람이라면 ‘암구호’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적군과 아군을 분간할 수 없는 야간에 아군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정해놓은 말. 매일 달라지며, 모든 군이 같은 암구호를 쓴다.”([표준국어대사전]) 이것만으로는 군대 경험이 없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쉽게 알 수 없으니, 간단히 풀이를 덧붙여보기로 한다.

암구호는 군대에서 쓰이는 암호로, 묻고 답하는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된다. 캄캄한 밤중에 보초 근무를 하는 병사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을 때 보초는 상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기 어렵다. 이때 미리 정해놓은 암구호로 묻는다.

예를 들어 오늘의 암구호가 ‘나비/바다’라면, 초병(哨兵)은 ‘나비’라고 묻는다. 상대방이 ‘바다’라고 대답하면 아군임이 밝혀진 것이지만, 만약 답변을 못한다거나 ‘바다’가 아닌 다른 단어로 대답하면 우리 편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이처럼 암구호는 군대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밀사항이므로 밖으로 이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게 매우 주의한다. 암구호는 매일매일 바뀌고, 정해진 시간에 군대 전체에 배포돼 대한민국 군인이라면 모두가 이를 알고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 군대에도 현재 대한민국 국군에서 사용하는 암구호와 같은 것이 당연히 있었다. 이를 ‘군호(軍號)’라고 하는데, 군호에 관한 기록이 옛날 문헌에는 자주 보인다. 필자는 우연히 이 시기의 군대 문서 몇 장을 발견했는데, 이 문서는 말단 부대에서 기록해놓은 일지와 보고서다. 그 가운데 그날그날의 ‘군호’와 이를 전달한 과정을 기록해놓은 것이 있어서 흥미를 끈다.

점(點)을 묵(默)으로 잘못 읽어 귀양 간 장교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대의 암호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유명한 것 가운데 하나로 [삼국지]의 ‘계륵(鷄肋)’을 들 수 있다. 조조가 유비와 한중을 놓고 싸울 때 나아갈지 물러설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조조에게 그날 밤의 암호를 알려달라고 하자, 조조는 ‘계륵’이라고 말했다.

조조의 부하 양수(楊修)는 이날 밤의 암호가 계륵이라는 말을 듣고는 바로 철수하는 짐을 쌌다. 계륵은 ‘닭의 갈비’를 말하는데, 먹을 것은 별로 없지만,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것이다. 조조가 계륵을 그날 밤의 암호로 정한 것은 한중 땅에 대한 그의 심정을 잘 드러낸 것이었다. 과연 양수가 예측한 대로 다음 날 조조는 군대를 철수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조에서 군호를 관리했다. 매일 오후 4시 무렵 병조에서 3품 이상의 당직 관리가 그날의 군호를 써서 승정원에 올리면, 임금이 직접 결재했다. 결재가 난 군호는 29장을 만들어서 국왕이 보는 것 2장을 제외한 나머지 27장은 각 부서의 담당자에게 매우 은밀하게 전했다.

군호는 정확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하므로 흘려 쓴다든가 또는 초서로 쓰는 것은 절대로 금지했다. 왜냐하면 한자를 흘려 쓰면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규정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초서로 쓰거나 흘려 써서 문제가 되는 일이 있었다. 글자를 잘못 써서 담당 관리가 처벌받은 예를 보기로 한다.

정조 18년(1794) 5월 22일, 이날 군호는 ‘경점(更點)’이었다. 대궐을 순찰하는 장교가 군사에게 군호를 물었더니, 한 곳은 ‘경점’이라고 대답했고, 다른 한 곳은 ‘경묵’이라고 답했다. 경묵이라고 잘못 대답한 이유를 확인해보니 한자 ‘점(點)’ 자가 ‘묵(默)’ 자와 비슷했기 때문에 ‘경묵(更黙)’이라고 잘못 읽어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 일로 담당자 두 사람이 귀양을 갔다.

군호에 관한 제반 규정은 매우 엄격했는데 왕이 군호를 결재할 때는 재상이라 하더라도 이를 볼 수 없었다. [임하필기(林下筆記)]라는 방대한 저서를 남긴 조선 말기의 인물 이유원(李裕元)은 1880년 1월 어느 날 고종을 면담한다. 이 자리에는 7세의 세자(훗날 순종)도 함께 있었다.

이때 군호의 결재가 올라왔는데 고종은 옆에 있던 이유원에게 군호를 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유원은 군사 담당자가 아니면 현직 재상이라도 군호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처럼 좌의정과 영의정을 모두 지내고 현재 영중추부사라는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도 군호는 볼 수 없는 것이 규정이었다.

군호와 관련된 재미있는 자료로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된 것이 있다. 이 자료는 1794년 5월 3일 당시 병조참의 윤장렬(尹長烈)이 군호를 결재받기 위해 작성한 문서다. 그날 병조에서 정조에게 결재받기 위해 올린 군호는 ‘장양(長養)’이었다. 당시 5세였던 왕자(후에 순조)가 정조 곁에 있었는데 왕자가 이 결재 서류에 ‘태평(太平)’이라고 두 글자를 쓰고 낙서도 했다.

고종 때 세자가 임금 옆에서 군호를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조도 왕자에게 군호를 보여줬다. 조선시대 왕은 어린 아들을 집무실에 데리고 나와 나랏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후에 아들이 임금이 됐을 때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군호와 고소설은 아무 관련이 없지만, 필자가 발견한 대한제국 군대 문서가 고소설에 붙어 있던 것이므로 고소설 얘기부터 해보기로 한다.

조선시대 한글소설은 여러 종류가 있어서 [춘향전]이나 [홍길동전]같이 한글로 창작한 소설이 있는가 하면 [삼국지]나 [수호전]처럼 중국소설을 번역한 것도 있다. 번역소설 가운데 [설인귀전]이 있는데 중국 당나라 시대의 장군 설인귀(薛仁貴)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설인귀전]은 중국에서 매우 인기가 높은 작품이고, 조선에서도 꽤 인기 있었다. 현재 몇 가지가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이화여대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자료다.

이화여대 도서관에는 1939년 1월 26일 도서관 서고에 들어왔다는 스탬프가 찍혀 있는 한글소설이 현재 30권 정도가 있다. 이 한글소설이 처음에 도서관에 들어왔을 때는 100권 이상이었을 것이지만, 현재는 30권 정도만 남아 있다. 그동안 전쟁 등의 여러 변란 속에서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현재 서울 성동구 금호동 지역에 있던 도서대여점에서 20세기 초에 빌려주던 것으로 모두 붓으로 쓴 한글소설이다.

이화여대 도서관 소장 '설인귀전' 배접지의 비밀


▎정조 18년(1794) 5월 3일 병조참의 윤장렬이 군호를 결재받기 위해 작성한 문서(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0호). / 사진:이윤석
조선시대 도서대여점은 1750년 무렵 서울에서 처음 생겨났다. 이 도서대여점을 ‘세책집’이라고 불렀는데, 세를 받고 책을 빌려주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세책집에서 빌려주던 책은 모두 손으로 썼다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1910년대부터는 인쇄한 책을 빌려주기 시작했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 필사한 책도 함께 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가 되면 이런 전통방식으로 필사한 책은 도서대여점에서 모두 사라지게 된다. 대부분의 책은 인쇄본으로 유통됐으므로, 더는 필사본을 읽는 시대가 아니었다. 1939년 1월 이화여자전문학교 도서관에 들어온 한글소설은 붓으로 쓰는 전통 방식으로 제작한 마지막 시기의 책이었다. 앞에서 말한 [설인귀전]은 바로 이 금호동 세책집에서 빌려주던 것이다.

세책집의 책은 일반 책과 비교해서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책을 매우 튼튼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빌려 가는 책이므로 웬만해서는 찢어지거나 상하지 않도록 제작한다. 표지는 말할 것도 없고, 본문도 내용을 필사한 다음 뒤에 다른 종이를 덧대서 두껍게 만들었다. 이렇게 본문이나 표지를 보호하기 위해 덧댄 종이를 ‘배접지’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글씨나 그림을 표구할 때 뒷면에 덧대는 종이를 생각하면 된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말기 세책을 조사하면서 배접지로 쓰인 종이를 확인해보니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관청에서 폐기한 문서, 시효가 지난 장부, 못 쓰게 된 책, 인쇄가 잘못된 종이 등 여러 가지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관청에서 폐기한 문서들이다. 이화여대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설인귀전]도 세책집에서 빌려주던 것이었으므로 표지와 본문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 배접했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돼 책의 가운데가 터져 배접지가 드러나게 되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을 볼 수 있게 됐다.

필자가 [설인귀전]을 처음 본 것은 1983년인데 이때는 세책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왜 이렇게 책을 두껍게 만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배접지로 사용한 종이가 군대에서 사용한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왜 이런 종이를 덧붙였는지도 또한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이 돼서 조선시대 세책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을 갖게 되면서, 이화여대 소장본 [설인귀전]의 배접지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알게 됐다.

1908년 현재 서울 성북구 금호동에 있던 세책집에서 제작해서 빌려주던 [설인귀전]의 본문 배접지는 거의 모두 대한제국 군대 문서다. 만약 이화여대 도서관의 이 책을 해체해서 배접지의 내용을 다 확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학 도서관의 책을 함부로 해체할 수는 없으니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책의 가운데 부분이 찢어지거나 터진 곳의 내용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사진을 찍어둔 것은 다섯 장인데, 이 다섯 장의 사진에 들어 있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상부에 보낸 보고서와 이를 결재한 문서로 두 장이 있고, 둘째는 부대의 일지(日誌) 한장이며, 셋째는 군호를 전달한 일지 두 장이다.

첫째, 보고서 두 장 가운데 하나를 보기로 한다. 이 보고서는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진위(鎭衛)제4연대 제2대대의 문서로, 제2중대장 서리 육군 부위(副尉) 조재돈(趙在弴)이 대대장 홍창걸(洪昌杰)에게 광무 7년(1904)년 12월 27일에 올린 결재 서류다. 그 내용은 정교(正校) 강문경(康文璟)이 3대대로 옮겨 가고 대신 새로 정교 김필용(金弼用)이 지금 사무를 보고 있으니, 정교 서리 임기준(林基俊)을 해임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 보고에 대해서 해임하라는 대대장의 결재 내용이 뒤에 붙어 있다.

둘째, 일지다. 이 문서는 서울의 시위(侍位) 제1연대 제1대대에서 1904년 2월에 작성한 일지다. 이 문서는 먼저 양력 날짜와 요일 그리고 날씨를 적고, 음력 날짜는 난외에 썼다. 1896년부터 양력을 쓰기 시작했으나, 이때까지는 음력을 많이 썼으므로 참고로 적어뒀던 것으로 보인다. 날씨 다음에 이 문서를 작성한 부서 근무자의 직책과 계급 그리고 이름을 적은 다음, 그날 있었던 일을 썼다. 2월 10일은 내의를 지급하는 일로 겨울 내의 50벌을 주번실에서 받아서 각 소대 사병에게 나눠주었다는 내용이다. 11일에는 궁성까지 행진하는 일이 있었는데, 행진할 때 동원되는 인원과 필요한 경비의 액수를 기록했다.

셋째, 군호 일지다. 군호 일지의 형식은 먼저 요일과 날짜를 쓰고, 그다음에 군호를 적어놓았다. 그리고 이 군호를 전달한 사람을 순서대로 나열했다. 그림의 가운데 부분의 내용을 원문과 함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月曜日(陰四月五日, 陽五月十二日) 軍號 肇夏
週番小隊長陸軍參尉崔光根 傳語週番小隊長陸軍副尉李章珍 週番下士崔永俊 風紀下士署理金振模 南新營週番小隊長陸軍參尉金得成 傳語週番小隊長陸軍參尉安濟漢 週番下士朴吉亨 風紀下士梁啓奉.

월요일(음력 4월 5일, 양력 5월 11일) 군호 ‘조하’
주번소대장 육군 참위 최광근은 주번소대장 육군 부위 이장진, 주번하사 최영준, 풍기하사 서리 김진모에게 전했고, 남신영 주번소대장 육군 참위 김득성은 주번소대장 육군 참위 안제한, 주번하사 박길형, 풍기하사 양계봉에게 전했다.


요일·날짜·군호·전달자 등 기록한 일지


▎1. 진위(鎭衛)제4연대 제2대대의 보고서(이화여대 도서관 소장). / 2. 시위(侍位)제1연대 제1대대 일지(이화여대 도서관 소장). / 3. 진위연대(鎭衛聯隊) 군호 일지(이화여대 도서관 소장). / 사진:이윤석
이 문서에는 몇 년에 어느 부대에서 작성한 것인지 씌어 있지 않지만, 양력 5월 12일이 음력 4월 5일인 해를 찾아서 작성한 해가 1902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문서에 나오는 이장진(李章珍)과 안제한(安濟漢) 같은 장교가 1902년에 어느 부대에 근무했는지를 [승정원일기]에서 확인해보니, 이들은 모두 평양에 주둔한 진위연대(鎭衛聯隊) 소속이었다.

1902년 5월 12일 대한제국 육군의 군호는 ‘조하(肇夏)’였고, 다음 날인 5월 13일은 ‘맥황(麥黃)’이었다. 조하는 초여름이라는 의미이고, 맥황은 보리가 누렇게 익은 것을 말한다. 둘 다 시절에 잘 맞는 군호다.

앞에서 말한 자료를 군사 관련 전문 연구자가 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7∼8년 전에 여기에 관한 정보를 어떤 연구소에 알려주면서 자료를 몇 장 보내준 적이 있다. 당시 필자로서는 이 자료가 꽤 흥미 있는 것이니 혹시 군사 관련 전문 연구자가 관심을 갖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다.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 연재를 쓰면서 다시 생각이 나서 대한제국 군대의 일지나 보고서에 관한 글이 있나 찾아봤는데 아직은 그런 글이 없다.

세책집에서 빌려주던 소설 [설인귀전]에 붙어 있는 대한제국 군대 문서에 들어 있는 내용은 대부분 군대의 일상적인 사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병졸이 제대하게 되면 어떻게 충원했는가, 군호는 어떻게 전달됐는가, 매일 시위연대의 군사들은 몇 명이 궁성까지 행진했는가, 그리고 여기에 얼마의 경비를 지급했나’와 같은 것이다. 또 이 문서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높은 계급은 대대장인 부령(현재의 중령)이고, 나머지는 중대장 이하 위관급 장교와 부사관, 그리고 병졸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대한제국 군대의 진로를 결정하는 지도부의 인물들은 아니다.

망국의 군대 아픈 역사 알아낼 실마리 제공

그렇다면 1902년 5월 12일 대한제국 군대의 군호가 ‘조하(肇夏)’라는 사실이나 1904년 2월 10일 평양에 주둔한 진위연대의 어느 중대에 내복 50벌을 지급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내는 일이 대한제국 군대를 이해하는 데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필자는 이런 문서가 그저 호사가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한제국 군대의 말단 부대가 어떻게 운영됐는지 모르면서 이 시기 군대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문서가 이제까지 발견된 일이 없으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 연구자들이 다루지 않았을 뿐이다. 만약 본격적으로 이런 문서를 발굴해서 연구한다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대한제국 군대의 실상을 좀 더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자가 육군에 입대한 1968년 말에 대한민국 군대의 암구호는 영어단어여서, 이를 우리말로 발음하면 두 글자가 넘는 것이 많았던 것 같다. 아마도 미군이 암호를 정해서 한국군에 전달했을 것이다. 당시 병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이들은 암구호의 뜻도 모를 뿐만 아니라 이를 외우는 것도 매우 힘들어했다. 대한민국 군대의 역사를 잘 알기 위해서는 이처럼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기억해둬야 한다.

1902년 평양의 진위연대에서 작성한 군호를 전달하는 일지가 어떤 경로로 1908년 서울 금호동에 있던 세책집에서 배접지로 사용됐나 하는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 평양에 있던 부대의 일지를 서울까지 가지고 와서 파지로 처분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아마도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앞에서 본 1902년 5월 12일 평양에 주둔한 진위연대의 군호를 전달하는 일지에 등장하는 안제한이나 이장진 같은 장교들은 1907년 7월 26일 해임된다. 며칠 후에 있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에 맞춰 이들을 미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군대의 해산은 군인만이 아니라 문서에도 영향을 미쳐 대부분의 군대 문서는 휴지가 된다. 만약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다면 안제한 등의 장교들은 계속 군대에 남아 있었을 것이고, [설인귀전]에 붙어 있는 이런 문서들도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폐기되거나 재활용됐음에 틀림없다.

1902년 5월 12일 대한제국 육군의 문서 한장은 단순히 그날의 군호가 ‘조하(肇夏)’였다는 것만을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과거의 자료를 제대로 잘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이 문서를 실마리로 삼아 대한제국 군대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30여 종의 [홍길동전] 이본(異本)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30여 권의 저서와 8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102호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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