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14)] 숙종 후궁 숙빈 최씨의 사당 육상궁(毓祥宮) 내력 

출신 콤플렉스 극복 애쓴 영조의 유산 

경복궁 북쪽에 생모 사당 짓고 재위 기간 내내 추숭 작업 벌여
왕을 낳은 후궁 지위 격상 이어져 7개 사당 모인 칠궁도 형성


▎통일신라 시대인 진성여왕 8(894)년 왕명에 의해 국가 비보사찰로 지어진 파주 보광사 가람(伽藍) 전경. / 사진:이성우
파주에 가면 보광사(普光寺)라는 절이 있다. 고령사(高嶺寺) 또는 고령사(高靈寺)라고도 불렸던 보광사는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해발 622m의 고령산 자락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앵무봉이 정상인 고령산은 1968년 1월 김신조 일당이 임진강을 넘어 진관사 계곡까지 올 때 통과했던 산 중의 하나다.

필자가 처음 보광사에 갔던 1993년에는 벽제 화장터를 지나 고양에서 됫박고개라고 불리는 구불구불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됫박고갯길은 지금도 여전히 아슬아슬하면서도 가파르다. 그러나 그런 길인 만큼 주변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주말에는 마장호수를 비롯해 주변을 찾아오는 여행객들의 차로 교통이 많이 붐비는 편이다. 그러나 평일에는 보광사 일주문을 지나 절 바로 앞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고 고즈넉하다.

보광사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통일신라 시대 진성여왕8(894)년 왕명에 의해 국가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지은 절이다. 신라 말의 승려인 도선국사의 풍수설에 따라 지기(地氣)가 쇠퇴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장소를 골라 전국에 세운 3800개 비보사찰 중 하나다. 경기도 파주·양주·고양시에 걸쳐 있는 고령산은 고령산(高嶺山) 또는 고령산(高靈山)으로 기록돼 있다. 그만큼 산세나 풍광이 예사롭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2020년 10월 보광사를 찾았던 것은 산세나 풍광을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보광사가 숙빈 최씨의 묘(墓)인 소령원(昭寧園)의 원찰(願刹)이었기 때문이다. 원찰이란 창건주가 자신의 소원이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하는 사찰을 말한다. 신라나 고려에 이어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원찰 건립은 지속됐다. 예를 들어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의 능 광릉(光陵)의 원찰은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봉선사(奉先寺)이며, 코엑스 건너편에 있는 봉은사(奉恩寺)는 제9대 임금인 성종의 능 선릉(宣陵)의 원찰이다.

아버지 숙종의 냉대, 어머니 장지 결정 속앓이


▎MBC 사극 [동이]에서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역을 맡은 배우 한효주.
숙빈이 사망했을 때 숙종은 “관판(棺板)을 수송하게 하고 제수를 넉넉히 보내어 예장(禮葬)하라”며 국장(國葬) 다음 등급의 의전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교했다. 그러나 상례를 치르면서 연잉군(훗날 영조)은 부왕인 숙종과의 갈등으로 적지 않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특히 힘들어했던 것은 숙빈의 장지를 정하는 문제였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연잉군은 장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처음 장지로 정한 석관동 묵장산이 이미 왕릉터로 정해진 곳이니 쓰지 말라는 숙종의 전교를 받았다. 두 번째 장지는 경기도 고양 신원(新院)으로 정했으나 묏자리를 쓰지 못하게 하는 산 주인 이진의 저지로 이 역시 허사가 됐다.

다음으로 찾아서 정한 곳은 경기도 광주 세동이었으나 이번에는 숙종이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역이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장소를 선정한 내관을 파직하는 조치를 취했다. 명선공주는 숙종의 친누나고 명혜공주는 누이동생이다. 두 사람 다 혼례를 얼마 앞두고 각각 천연두(명선공주)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명혜공주)으로 급서(急逝)했다.

그런데 혈육의 묘역 근처에 이미 출궁한 지 한참 지나 사망한 후궁의 장지를 쓰겠다고 하니 허락하지 않은 듯하다. 물론 그동안 숙빈과의 관계가 소원해졌을 수 있음도 추정해볼 수 있다. 다시 장소를 찾은 곳은 선릉(宣陵: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 근처였는데 능이 바라보인다는 이유로 이번에도 역시 다른 장소를 찾으라고 했다.

결국 연잉군은 직접 지관을 데리고 장소를 물색하러 다닌 끝에 경기도 양주군 고령동 옹장리(지금의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를 장지로 확정했다. 그곳이 지금의 숙빈의 묘역인 소령원(昭寧園)이다. 소령원은 옛날에 한 지관이 ‘금계가 울며 활개를 치니 왕기가 옹장에 감춰 있구나(金鷄鳴而搏翼王氣藏於甕匠)’라고 읊었다는 명당이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숙빈 최씨의 사망일인 숙종 44(1718)년 3월 9일부터 5월 22일 연잉군이 기복(起復: 상제의 몸으로 상복을 벗고 벼슬자리에 나오게 함)하기 직전까지 숙빈 최씨의 장례와 관련된 사실들을 기록한 [무술점차일기(戊戌苫次日記)]와 [숙종실록]에 잘 나와 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숙빈의 장지를 간심(看審)할 때 내관 장후재가 (…) 법금을 무시하고 명선공주·명혜공주 묘산(墓山) 내의 청룡의 터에 입장(入葬)하려는 계책을 세웠으니, 일이 해괴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파직시키고 관원을 더 정하라. 그들로 하여금 우선 들어오도록 하고 다른 산을 바꿔 구하게 하라” 했다([숙종실록] 44(1718)년 4월20일). 또 선릉 근처로 택점했는데, 임금이 그곳이 선릉과 서로 바라보는 곳이란 말을 듣고는 (…) “다른 산으로 바꿔서 택점하는 것이 낫겠다” 했다([숙종실록] 44(1718)년 4월 29일).

소령원에서 보광사까지는 4㎞ 남짓하다. 보광사에는 숙빈 최씨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어실각(御室閣)이 있다. 그리고 어실각 앞에는 약 300년 된 향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이 나무는 영조가 어실각을 지을 때 심은 나무로 전해지고 있다. 어머니 숙빈 최씨를 생각하는 영조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영조가 보광사를 소령원의 원찰로 삼게 된 시기는 영조16(1740)년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영조 32(1756)년 1월 12일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따르면 ‘경기 안 각 사(各寺) 가운데 능원(陵園)의 수호는 일의 체모가 자별(自別)하다. 미타사(彌陀寺)·봉헌사(奉獻寺)·봉선사(奉先寺)·봉은사(奉恩寺)·봉인사(奉仁寺)·고령사(高嶺寺)·봉원사(奉元寺) 등 일곱 절은 방번전(防番錢: 당번을 서지 않는 대신에 바치던 돈)을 분배할 때 영원히 거론하지 않는다’고 해 고령사, 즉 보광사가 경기도 내의 능원을 수호하는 7개의 절 가운데 하나임을 알려주고 있다. 비변사는 임진왜란 이후 의정부를 대신했던 정치의 중추 기관인데 비변사등록은 비변사에서 논의·결정된 사항을 날마다 기록한 책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영조 35(1759)년 3월 28일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교서를 내려 ‘보광사는 능원의 수호사찰이며 일찍이 머물러 잤던 곳(命書傳敎曰, 普光寺, 卽園守護之刹, 曾宿處)’이라고 하고 있어 보광사가 숙빈 최씨를 위한 원찰이며, 영조가 과거 언제쯤인가 보광사에서 유숙했었음을 알 수 있다.

300년 전 영조가 보광사에 향나무 심은 뜻


▎파주 보광사의 어실각과 향나무. / 사진:이성우
왕자였을 당시 사망한 친어머니 숙빈 최씨의 장지를 결정하는 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영조는 숙종과 경종 시대 당쟁의 틈바구니를 거치면서도 어렵게 보위에 올랐다. 왕자나 왕세제일 때는 할 수 없었던 숙빈 최씨에 대한 추숭 작업을 영조는 보위에 오르자마자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숙빈 최씨에 대한 추숭 작업은 여의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신권(臣權)이 왕권을 견제하며 가문을 중시하는 조선 관료사회의 속성상 수시로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사망하자 서인 계열의 인현왕후 민씨가 제1계비로 뒤를 이었으며, 인현왕후 사망 후에는 인원왕후 김씨가 제2계비로 내명부 최고 어른이 됐다. 그 사이사이에 희빈 장씨, 숙빈 최씨, 명빈 박씨, 영빈 김씨, 귀인 김씨, 소의 유씨 등이 후궁으로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는 중인이지만 당시 장안에서 제일 부유한 역관(통역) 집안의 출신이며, 연령군(延齡君)의 생모 명빈 박씨의 부친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박효건이다. 영빈 김씨는 자손은 없었으나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인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정식 간택을 거쳐 입궁한 후궁이었다.

그에 비해 숙빈 최씨의 가문은 거의 내세울 부분이 없었다. 영조의 가계(家系)를 기록한 팔고조도인 ‘주상전하팔고조도(主上殿下八高祖圖)’를 보면 숙빈 최씨의 부친 최효원은 정6품의 무관직인 충무위사과(忠武衛司果)였으며 조부 최태일, 증조부 최말정, 고조부 최억지까지 모두 추증된 당상관들이었으니 당대에는 변변한 벼슬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최씨를 숙원으로 삼도록 명했다”는 [숙종실록]19(1693)년 4월 26일과 같은 해 10월 6일 “왕자가 탄생했는데, 숙원 최씨가 낳았다”는 실록의 기록으로 봐 숙빈 최씨가 숙종을 처음 만나 승은을 입었을 때는 숙빈의 나이 23세였던 숙종 18(1692)년일 것이다.

숙빈의 어렸을 때와 관련해서는 일부 전해지는 얘기만 있을 뿐 구체적인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신뢰성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담양군지(潭陽郡誌)] ‘용흥사 범종’ 편에는 영조의 어머니인 최복순 여인이 용구사(龍龜寺)라는 절에서 기도해 영조를 낳은 후 이 절 이름을 용흥사(龍興寺)로 고쳤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또한 정읍시청 홈페이지의 ‘대각교터(大脚橋址)와 최숙빈’의 내용에 따르면 숙종의 제1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의 어린 시절, 부친인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부임 가는 길에 이 다리에서 쉬어가다 자기 딸을 닮은 여덟 살짜리 거지 소녀를 데려다 길렀는데 자기 딸이 왕후가 될 때 따라 들어간 그 소녀가 후일의 최숙빈이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 역시 전해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실록에서는 숙빈 최씨가 한성부 서부 여경방(餘慶坊) 서학동(西學洞), 지금의 신문로 근처에서 탄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조 어머니는 정말 무수리 출신이었을까


▎1. 영조의 가계를 기록한 ‘주상전하팔고조도 (主上殿下八高祖圖)’. / 2. 경종 때의 역사를 기록한 [수문록] 가운데 숙종과 숙빈 최씨의 첫만남 관련 내용.
지금부터 10여 년 전 숙빈 최씨를 모델로 했다는 [동이]라는 TV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적이 있다. 이 드라마는 숙빈 최씨를 궁중 최하층 무수리 신분에서 내명부 최고의 품계에 오른 신데렐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숙빈 최씨는 궁중에서도 청소나 세수간 일을 하는 ‘무수리 출신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수사(水賜)라고도 하고 수사이(水賜伊)라고도 하는 무수리는 원래 몽골어로 ‘소녀’라는 뜻이다. 고려 말기 원나라 공주가 부마국인 고려 왕실에 들어오면서부터 여종(女婢)을 무수리라 부르게 된 것이 조선에 이어져 궁중 용어가 됐다고 하는데 담양이나 정읍의 숙빈 최씨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에도 숙빈이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입궁 당시의 최숙빈에 관해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숙빈 최씨 신도비’에 나오는 내용뿐이다. 신도비란 ‘혼령을 무덤으로 인도하는 길의 근처에 세운 비석’을 가리키는데 숙빈의 신도비는 소령원으로 들어가는 길 초입 왼쪽에 있는 신도비각에 보존돼 있다. 이 신도비에는 “병진년에 뽑혀 궁궐에 들어가셨으니, 겨우 일곱 살이셨다”라고 기록돼 있다. 병진년은 숙종 2(1676)년이므로 1670년생인 숙빈의 입궁 당시 나이는 7세였으며, 또한 뽑혀 들어갔다고 했으니 궁녀로 선발돼 입궁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무수리의 경우에는 정식 선발 절차가 없었다. 그러므로 기록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숙빈 최씨는 처음부터 일반 궁녀로 입궁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숙종을 만나게 되기까지 궁녀로서의 생활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문신 이문정(1656∼1726)이 쓴 [수문록(隨聞錄)]에 따르면 궁녀 당시의 숙빈은 인현왕후의 시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문록]은 4년 2개월 동안 재위한 경종 때의 역사를 들은 대로 기록한 책이다. [수문록]에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첫만남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내용도 이문정이 전해 들은 이야기인지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선대왕(先大王)이 하루는 밤이 깊어진 후에 지팡이를 들고 궁궐 안을 돌아다니다가 나인들의 방을 지나가게 됐다(先大王一日則夜深後扶杖周行 於宮闈之內歷過內人房). (그런데)유독 한 나인의 방만 등촉이 휘황찬란해 밖에서 몰래 엿보니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 나인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상 아래 꿇어앉아 있었다(獨一內人房燈燭煒煌自外暗覘陳設盛饌一內人拱手跪坐於床下). 선대왕이 매우 이상히 여겨 그 문을 열고 연유를 물어봤다(先大王深怪之開其戶而下詢其故).

나인이 부복해 아뢰기를 “소녀는 중전의 시녀로서 특별히 총애를 받았습니다(內人俯伏奏曰小女卽中殿侍女而偏承寵愛之恩矣). 내일은 중전의 탄신일입니다(明日卽中殿誕辰). 폐위돼 서궁(西宮)에 계시면서 죄인으로 자처하며 수라를 들지 않으시고 조석으로 드시는 것이라곤 거친 현미뿐입니다(廢處西宮罪人自處不御水剌朝夕支供乃是麤糲). 내일이 탄신일인데 누가 좋은 음식을 올리겠습니까?(明日誕辰誰進饌羞) 소녀는 사람의 도리로서 슬픔을 이길 수 없어 이것을 차렸습니다(小女情理不勝悵然設此). 중전께서 좋아하시는 것들이지만 도저히 진헌할 방법이 없어서 실제 진헌하듯이 소녀의 방 안에 차려놓고 정성을 드리고자 했습니다(中殿所嗜之物而萬無進獻之路以進獻樣陳設於小女房中欲伸誠悃).”

임금이 비로소 생각해보니 내일이 과연 중전의 탄신일이었기에 깊이 느껴 깨닫는 바가 있어 그 성의를 가상히 여기시고는 마침내 그를 가까이하셨다(上始思之明日果中殿誕辰也卽有感悟之意而嘉其誠意遂近之)([수문록] 1권 35쪽).

여기에서 선대왕(先大王)은 숙종이며, 중전은 폐비 신분인 인현왕후를 의미한다. 이 당시의 실제 왕후는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였다. 서인 계열이었던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는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을 거스르던 송시열 등 서인들이 몰락하며 폐비가 됐으며 숙종15(1689년) 10월 22일 그 뒤를 이어 희빈 장씨가 왕후로 책봉된 것이었다.

[수문록]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숙종과의 만남이 우연을 가장한 의도적일 수도 있다. 인현왕후의 시녀였으며 궁중 생활 16년 차인 숙빈이지만 야심한 밤에 궁중에서 음식을 차린다는 게 주변의 눈도 있고 해서 쉽지는 않았을 듯하며, 숙종이 상차림의 연유를 물었을 때 자신이 폐비가 된 인현왕후의 시녀였음을 먼저 밝히고 상차림에 대한 이유를 밝히는 것으로 봐 의도적일 수 있음을 추측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계기가 됐는지는 몰라도 실록의 내용처럼 숙빈 최씨는 숙종 19(1693)년 4월 26일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으로 책봉됐으며, 이듬해인 숙종 20(1694)년 6월 2일 숙종이 특별히 명하여 종2품 숙의(淑儀)가 됐다. 물론 훗날 영조 임금이 되는 둘째 아들 연잉군 금(昑)을 이미 회임(懷妊) 상태이기도 하지만 숙의 책봉 전날인 6월 1일 인현왕후의 복위식이 거행된 것을 보면 숙빈 최씨가 숙종으로 하여금 인현왕후 복위에 모종의 계기를 마련해줬음 직도 생각해볼 수 있다.

폐비 인현왕후 생일상 챙겨 승은 입은 궁녀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 며느리의 신주도 함께 모셔져 있다. / 사진:이성우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국법에 의거 희빈도 왕후에서 다시 빈으로 환원돼 창경궁 취선당에서 생활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숙종 27(1701)년 8월 14일 인현왕후가 창경궁 경춘전에서 35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그런데 인현왕후 사망 뒤 희빈이 취선당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해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자신이 왕후로 복위하기를 기도한 사실이 발각됐다. 크게 노한 숙종은 인현왕후를 무고했던 희빈의 오빠 장희재를 처형하고 이어서 희빈도 자진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를 무고의 옥(巫蠱之獄)이라 하는데 실록에서는 취선당 사건을 숙빈 최씨가 숙종에게 알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 무고의 사건이 과연 발각되니, 외간(外間)에서는 혹 전하기를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해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고했다”고 했다([숙종실록] 27(1701)년 9월 23일).

경종의 강력한 지원 세력이 될 수 있었던 생모 희빈이 죽임을 당함으로 인해 숙빈은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아들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는 디딤돌을 만들어준 셈이 됐다. 인현왕후 사후 약 1년이 지난 숙종 28(1702)년 10월 3일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이 16세의 나이로 두 번째 계비에 책봉됐다. 그녀가 인원왕후였다.

숙빈 최씨는 노론 권문세가 출신의 영빈 김씨뿐만 아니라 17년 연하의 인원왕후와도 매우 가깝게 지냈다. 인원왕후의 집안은 소론 성향이었지만 인원왕후는 숙종 사후 노론으로 당색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숙빈 사후에도 최씨 소생의 연잉군을 지지해 경종 1(1721)년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종 1(1721)년 12월에 발생한 환관 박상검 일당의 왕세제 살해 기도 사건과 관련해 생긴 경종과 왕세제 간의 불화에는 인원왕후가 가담자의 이름을 써서 내려주면서까지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등 위기에 몰린 왕세제를 보호했다.

이는 인원왕후가 왕세제의 양모(養母)이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숙빈 생전 인원왕후와의 긴밀한 관계에서도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왕세제 연잉군은 당쟁의 격랑을 헤치고 드디어 조선의 21대 임금이 됐다. 1724년 8월 30일의 일이다.

왕이 된 서자, 왕좌 디딤돌 놓아준 어머니

후궁 소생의 왕자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희빈 소생의 이복형 경종은 태어난 지 채 100일도 되기 전에 이미 세자의 지위를 확보한 상태이기에 이복동생인 연잉군이 왕위를 이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그러나 기회는 예상치 않게 찾아왔다. 경종이 병약하고 자손이 없다는 점은 당시 노론계 조정 대신들로 하여금 연잉군을 왕세제로 옹립할 수 있게 하는 빌미로 작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왕대비였던 인원왕후 역시 자신의 의중을 묻는 경종과 대신들에게 연잉군을 왕세제로 인정한다는 자교(慈敎: 왕의 어머니가 내리는 명령)를 내리게 된 점 등은 숙빈이 생전에 인원왕후나 노론 집안의 영빈 김씨를 든든한 후견인으로 만들어놓는 나름의 정지작업을 했던 결과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영조로서는 생모 숙빈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며, 인원왕후와 영빈 김씨에 대해서도 역시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왕위를 이어받은 영조는 경종의 국상이 끝나자마자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 건립 문제를 논의했다. 최초에는 잠저였던 창의궁을 염두에 뒀었으나 최종적으로는 경복궁 북쪽 청릉군(靑陵君)의 아들 이언형의 기와집 168칸과 빈터 3115칸을 2250냥 5전에 매입해 완성했다. 즉위 후 약 1년 4개월만인 영조 1(1725)년 12월 23일의 일로서 그 자리가 지금의 칠궁 지역이다.

사당은 완성됐으나 아직 경종의 국상이 진행 중이었기에 가보지 못하고 있다가 국상이 끝난 영조 2(1726)년 11월 6일에서야 비로서 첫 전배례(展拜禮)를 올릴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영조가 돌아가신 생모 숙빈 최씨의 생신을 맞이해 사당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고자 짓고 쓴 ‘영조어필-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英祖御筆-淑嬪崔氏祠宇祭文原稿)’를 보면 “아! 오늘에야 (선빈의 삼년상 이후) 육 년 동안 펼치지 못한 회포를 펼치옵니다”라고 하면서 그동안 국법에 따라 제사를 지낼 수 없어 참아왔던, 생모에 대해 애틋하고 절절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영조는 재위 기간 내내 추숭 작업을 해왔다. 이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본인의 출신 내력을 보완해야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숙빈의 부모에 대한 추증은 영조 10(1734)년 2월 18일에 숙빈의 조부모와 증조부모는 영조 20(1744)년 1월 19일에 추증했으며 같은 해 3월 7일에는 사당과 묘소 이름을 각각 육상묘(毓祥廟)와 소령묘(昭寧墓)로 고쳤다.

그 후 영조 29(1753)년 6월 25일에는 화경(和敬)이란 시호를 올리면서 사당과 묘소를 육상궁(毓祥宮)과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했다. 마침내 재위 30년 만에 추숭 작업을 마무리한 셈이다. 이는 조선 후기 궁원제도로 확립돼 이후에도 후궁 소생의 왕자가 세자가 되거나 왕위에 오른 경우에는 생모의 지위를 격상시켜 사당을 궁(宮)으로, 묘소를 원(園)으로 승격하고 시호를 올리는 전례가 확립됐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칠궁의 7개 사당도 이러한 전례를 따른 결과물인 셈이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02호 (2021.0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