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14)] 성군이 택한 국정철학 ‘성리학’ 

패러다임 전환 통해 문명사회 꿈꾸다 

'남녀칠세부동석’ 강조하며 조혼 정착시켜… 근친혼 및 동성혼 금지
도덕적 의무 담긴 [삼강행실] 편찬… 예법 다룬 [국조오례의] 기반돼


▎세종은 성리학적 이념을 토대로 새 문명국가를 건설했다.
시간이 흐르면 기존의 제도나 사고방식으로는 문제를 풀지 못한다. 그러면 누군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 새 패러다임을 펼친다. 21세기 한국 사회도 낡은 운영체계를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세종의 시대는 어떠했을까. 그 시절은 한국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세종은 유교적 문명국가의 건설을 자신의 책무로 삼아, 법과 제도를 새로 만들었고, 계몽 서적을 많이 펴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도 성리학적 전환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어떤 역사가는 조선이 고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왕의 성씨만 바뀌었을 뿐 지배층은 그대로였고, 경제적·문화적으로도 큰 변화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잘못된 주장이다. 가령 조선의 태종처럼 성리학에 정통한 군주가 고려에 있었던가. 특히 세종처럼 왕자 시절부터 성리학을 철저히 배워, 윤리와 도덕을 내면화한 왕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조선 왕실의 새로운 교육제도 덕분에 엄청난 사회 변화가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성리학을 통해 심신을 닦았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고려 시대부터 전해온 관행과 풍습이 수치스럽고 야만적인 행태로 보였다. 그 때문에 왕은 쉬운 것부터 뜯어고쳤다. 성리학적 도덕과 윤리에 충실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원나라의 영향으로 조정에서는 회회교(이슬람) 의식을 거행했는데, 왕은 이를 단번에 폐지했다(실록, 세종 9년 4월 4일). 악습 중 하나였던 ‘고려장(高麗葬)’도 없앴다. 세종이 예조에 내린 교지에는 “고려 말기에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은 부모의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바깥채(外舍)에 내버렸다. 회생할 수 있는 부모조차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나와있다. 이 말끝에 왕은 간곡히 당부했다. “그대들은 옛 풍습의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새로워져, 어질고 효성스러운(仁孝) 풍속을 이루라.” (세종 11년 4월 4일) 왕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성리학적 기준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여러 폐습 때문에 상심이 적지 않았다.

왕을 괴롭힌 근친 간의 밀애


▎세종은 고려장을 잘못된 풍습이라며 없앨 것으로 명했다. 영화 [고려장]의 한 장면.
문명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세종에게 더 큰 좌절을 안겨준 것은 사회지도층이었다. 세종 초년, 대신들은 대궐에서 고성을 지르고 주먹질을 하곤 했다. 성리학적 교양이 없는 관리들의 구태의연한 모습이었다. 이에 왕은 본보기로 총제(당상관) 허권을 파면했다(세종 5년 9월 12일). 동료 대신을 폭행한 죄를 물은 것이었다. 또 하나, 그 시절에는 성리학적 교양이 있을 법한 관리들조차 부모의 상례를 예법대로 거행하지 않았다. 미신과 풍수지리설에 현혹돼 장례의 기일을 넘기는 이가 많았던 것이다(세종 5년 6월 20일).

왕에게는 차마 말 못 할 고민도 있었다. 태상왕(태종)은 두 번이나 젊은 과부를 후궁으로 삼았다. 부왕은 고령이었음에도 정승 이직의 딸과 군자감 이운로의 딸을 궐내로 불러들였다(세종 4년 1월 6일). 친형 양녕대군은 기생과의 애정문제 때문에 세자 자리에서 쫓겨났건마는 그 뒤에도 비슷한 소동을 여러 번 일으켰다. 왕의 며느리 중에도 성적인 문제를 일으켜 쫓겨난 이가 있었다. 세종은 성리학적 윤리를 지켰으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운 사건이 아주 가까이서도 되풀이됐다.

세종과 15세기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도덕과 윤리를 문명의 척도로 여겼다. 그런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사회 현실은 비참했다. 전통적으로 한국사회는 자유분방한 이성 교제를 허용했기 때문에 성리학적인 기준에서 크게 빗나갔다. 왕은 도덕의 기치를 세우리라 결심했고, 공권력을 동원해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적발했다. 범죄자는 모두 중벌로 다스렸는데, 대형사건도 일어났다.

세종 5년(1423) 9월 25일, 대사헌 하연이 지신사(도승지) 조서로를 고발했다. 조서로는 퇴직한 대신 이귀산의 처 유씨와 내연 관계였다. 왕은 조서로의 관직을 빼앗고 경상도 영일로 유배 보냈다. 그의 정인(情人) 유씨에게는 사형을 집행했다(세종 5년 10월 8일). “유씨는 대신의 아내인데도 음탕한 짓을 하였다”라며 임금은 그를 사흘 동안 저잣거리에 세웠다가 목을 베었다. 조서로는 개국공신 조반의 큰아들이라 극형은 모면했다.

조서로와 유씨는 친척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출가한 유씨는 승복을 입고 친척 조서로의 집에 출입했다. 조서로가 14세가 될 때부터 그들은 연인이었다. 얼마 후 환속한 유씨는 대신 이귀산과 결혼했으나, 조서로와의 연인 관계는 이어졌다. 유씨는 이따금 조서로에게 편지를 보내 친척 집에서 만났다.

이 사건을 끈덕지게 추적한 이는 지금의 검사와 비슷한 종 5품 사헌부 지평의 남지였다. 그는 조서로의 하인(丘史)들을 체포해 상전의 행적을 낱낱이 조사했다. 또, 밀회 때 유씨의 심부름을 한 노인을 다그쳐 두 사람의 내밀한 관계를 확인했다. 세종이 혼외관계를 척결할 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남지는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했다고 전한다.

[세종실록]에는 혼외정사로 고발된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은 대개 친척 관계였다. 세종 10년(1428) 윤4월 1일 자 실록에는 홍양생과 유연생의 사건이 나와 있다. 양반 홍양생은 모친 상중이었음에도 사촌 유연생과 몰래 만났다. 유연생은 어엿한 관리의 아내였고 부친상을 입은 처지였다.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가 드러나자 유연생은 매를 맞고 경상도 울산으로 귀양 갔고, 홍양생도 매질 당한 후 유배지인 경상도 고성으로 쫓겨났다.

조혼 통해 자유로운 연애풍속 바꾸려


▎세종은 근친혼의 폐단을 막기 위해 조혼 제도를 관습으로 정착시켰다.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세종은 풍속을 뜯어고칠 결심을 더욱 확고히 다졌다. “중국은 남녀 간의 분별이 엄해서 친자매의 얼굴도 못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 풍속은 남성이 자매를 만나는 것을 미풍이라 한다. 그래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 (세종 11년 6월 16일) 왕은 누나든 누이동생이든 남성이 여성을 만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우의정 맹사성은 “이성 사촌이면 상복은 입지 않는 친척이지만, 서로 만날 수 없게 하신다면 풍속이 너무 야박하지 않겠습니까”라며 반대 의견을 넌지시 밝혔다. 그러나 세종은 도덕 최우선 정책을 고집했다. “풍속이 박해지더라도 남녀 간의 분별은 뚜렷이 하겠다.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세종 11년 6월 23일)

유교 고전을 중심으로 예법을 다시 정비하는 것이 세종의 목표였다. 왕은 대신 황보인에게도 거듭 강조했다. “옛사람이 말씀하기를, ‘형수와 시동생(嫂叔)은 물건을 직접 주고받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풍속은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니 크게 잘못된 것이다.”(세종 12년 윤12월 24일)

왕은 성리학의 고전을 기준으로 삼는 한편, 자신에게 익숙한 궁중의 관행도 새 예법에 포함할 뜻을 보였다. 부왕 태종 시절의 관행대로 왕비의 처소(내전)에서 잔치를 열 때면 왕자는 물론이요, 사위(부마)도 함께 자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왕은 이 문제를 중대한 사안이라고 여겨, 대신의 의견을 널리 청취하기로 했다. 대신들은 왕의 사위가 내전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주장했고, 왕은 두말없이 그들의 의견을 따랐다. 너그러운 왕이었다.

세종은 근친 간의 은밀한 애정 관계를 악습으로 규정하고 그 뿌리를 뽑으려고 했다. 마침내 왕은 조혼제도를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왕에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해의 일이었다. 왕이 이 문제로 대신들과 거듭 상의했는데, 대제학 변계량은 법령을 엄격히 집행해 친척 간의 이성 교제를 금하자고 했다. 허조는 조선 여성의 경박한 정조 관념을 문제 삼는 한편, 남성들도 성폭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비난했다. 그는 도덕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봤다.

대신들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세종은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여성이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은 결혼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라며 누구든지 혼기를 절대 놓치지 않게 만들자고 왕은 주장했다. 그러자 변계량이 결혼 연령을 15세로 정하면 좋겠다고 했다(세종 9년 9월 4일). 조혼법을 강화하자는 의견이 대신들의 지지를 얻자, 세종은 이 문제를 자세히 논의해 결과를 보고하라고 주문했다. 10여 일 뒤 신하들이 숙의한 결과가 윤곽을 드러냈다.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 즉 주희(朱熹)가 정한 예법에 근거한 결정이었다.

예법을 주관하는 예조가 올린 최종 보고서의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현행법에 명시한 대로 남성은 15세, 여성은 13세부터 결혼을 허락한다. 다만 언제까지 결혼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어서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는 사람이 많은데, 이제부터는 [주문공가례]에 따라서 여성은 14세부터 20세까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관청의 허락을 얻어 조금 미룰 수 있다. 관청은 혹여 약속한 기한을 넘기는 사람이 있는지 조사해서 법대로 처벌한다.”

세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법에 조혼을 상세히 규정했다. 왕은 동성혼의 금지법도 정밀하게 살펴봤다. 일찍이 어느 대신이 아뢰기를, 고려 때는 왕족들도 서로 결혼했고, 양반들도 근친혼을 했다고 했다. 성리학자 정몽주가 동성혼을 없애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대신의 말을, 세종은 기억하고 있었다.

고전 중시하되 유연성도 발휘


▎삼강행실도. / 사진: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조선 왕조는 동성혼을 법으로 규제했고, 타성이라도 5~6촌까지는 결혼하지 못하게 했다. 세종은 이 법이 좋다고 칭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그 영향으로 근친 간에 연애 사건이 발생하는지 모르겠다고 근심했다. 왕은 의문을 풀기 위해 집현전에 명하여 결혼제도를 역사적으로 조사하게 했다(세종 12년 12월 18일). 친족 간의 이성 교제를 근원적으로 타파하기 위해서 다방면에 걸쳐 노력한 셈이다.

다년간의 노력으로 조혼은 조선의 새로운 관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근친인 남녀의 사귐도 사회적 금기로 굳어졌다. 우리 귀에 익숙한 조선사회의 엄격한 남녀구별이야말로 세종이 만든 신(新) 풍속이었다.

세종이 정한 조선의 새 패러다임은 ‘성리학적 전환’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그런데 그때 왕에게는 한 가지 고뇌가 있었다. 중국 제도를 무조건 따라야 옳은가 하는 문제였다. 예컨대, 조선에서는 신하가 편전을 드나들 때는 바닥에 엎드려 왕에게 절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황제 앞에서 신하가 엎드려 절하는 법이 없었다. 과연 어느 편이 옳은 것일까. 세종은 헤아려 보았으나 잘 알 수 없었다. 대신 허조에게 묻자 “중국은 사람도 많고 사무도 번거로워 예절을 생략한 것”이라고 답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세종 5년 7월 3일).

도덕적 기준을 정할 때 왕이 가장 중시한 것은 고전이었다. [논어]를 비롯한 성리학 고전을 바탕으로 왕은 예법을 제정했다. 그 과정에서 왕은 대신 허조와 논의할 때가 잦았다. 한 번은 신하들의 행동거지가 너무 느린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서 왕이 [논어]를 인용했다. “빨리 나아가면서도 새가 날개를 펴고 날듯이 단정히 한다”는 공자의 말씀처럼 임금 앞에서는 행동이 민첩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세종 8년 9월 22일).

그러나 고전이라고 늘 기준이 되기는 어려웠다. 세종 7년(1425) 골치 아픈 사건이 일어났다. 전직 관리 최주가 사위 이미를 고발한 것. 이미는 성균관 사성(종3품)이었는데 아내가 있음에도 다시 장가를 갔다. ‘유처취처(有妻娶妻)’의 죄에 해당하는 범죄였다. 그러나 이미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칠거지악’을 근거로 내세웠다. 아내 최씨는 이미 45세가 넘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으므로 강제이혼의 사유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미는 성균관에서 유생을 가르치는 학식 높은 관리였던 터라 ‘칠거지악’을 이론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아내를 내보낼 7가지 조건 중에도 경중이 있다면서, ‘질투하면 버린다’ ‘몹쓸 병에 걸리면 버린다’ ‘말이 많으면 버린다’라는 세 가지는 가벼운 잘못이라 이혼 사유로는 미흡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에게 대들면 버린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버린다’ ‘음란하면 버린다’ 그리고 ‘도둑질하면 버린다’라는 네 가지 사유는 매우 무거워서 그 뜻을 깊이 새길만 하다고 분석했다.

특히 ‘아들을 낳지 못하면 버린다’라는 조목은 윤리적으로 지극히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면 조상에게 큰 ‘불효’이기에 자신이 최씨 부인을 쫓아낸 것이 합당하다는 자기 변론이었다. 요컨대 그는 윤리 도덕에 충실하려면 아들을 낳지 못한 아내를 쫓아낼 수밖에 없다는 견해였다. 그러나 세종은 이미를 범죄자로 판단했다. 왕은 ‘칠거지악’ 정도로는 이혼을 허락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에 사헌부에서는 이미에게 곤장 90대를 때리자고 했고, 왕은 그대로 집행하게 했다(세종 7년 11월 16일).

남녀 분별 강조가 여의(女醫) 탄생 이끌어


▎고려말 초판돼 1428년(세종 10년) 설순(循) 등이 개정해 간행한 [효행록]. /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성리학 고전에서는 남녀의 분별을 강조했다. 이를 세종은 도덕적 원칙으로 수용했다. 전직 대신 허도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남자 의원이 여성의 살을 주무르게 할 수 없습니다. 남녀의 분별을 삼가는 고전의 가르침에 비춰볼 때 해괴한 일입니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죽는 여성도 있어, 저는 늘 깊이 걱정합니다.”

허도는 부왕 태종 때 여자 의원(女醫)을 기르자고 주장한 대신이었다. 태종은 그의 주장대로 관청에서 근무하는 총명한 어린 여종을 골라 의술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서울에서는 평민 여성들까지도 의료혜택을 누렸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허도는 이제는 지방에 여자 의원을 둘 때라고 말했다. 관청의 여종 가운데 영리한 소녀를 골라서 서울에서 침과 뜸(針灸)도 가르치고 약을 짓는 기술도 가르치면 지방의 여성도 의료혜택을 볼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세종은 허도의 견해에 따라 우선 경상도와 전라도에 여자 의원을 두기로 했다(세종 5년 11월 28일). 남녀를 엄히 분별하는 성리학적 도덕관념이 조선의 의료제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니 흥미롭다.

왕은 성리학적 가치를 실천해 백성의 일상생활이 예법에 부합하기를 바랐으나,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세종 10년(1428), 경상도 진주에서 한 백성이 아버지를 살해했다. 충격에 빠진 왕은 신하들을 불러놓고 효성과 우애(孝悌)를 실천하고, 풍속을 방안을 널리 검토할 것을 명령했다. 그날 변계량이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대책을 내놓았다. 그는 [효행록]을 널리 반포해 백성들이 익히게 하면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두터워진다고 주장했다(세종 10년 10월 3일).

여러 날 숙고한 세종은 집현전 직제학 설순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자식이 자식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효행록]을 간행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치고 싶으니, 기왕에 편찬한 24명의 효자 이야기에 새로 20여 명의 효행을 추가하라. 고려와 삼국 시대의 이름난 효자들 이야기도 수록하여 한 권의 책을 편찬하라. 이 일은 집현전에서 주관하라.” 왕의 명령을 받들어 예조는 고을마다 효자, 순손(順孫) 및 절부(節婦, 열녀)를 발굴했고, 집현전은 기록에 힘을 쏟았다(세종 10년 10월 28일).

성리학자는 격식에 알맞게 제사를 올리는 것을 자손의 도리이자 효행으로 여긴다. 그럼 몇 대 조상까지 제사해야 맞는 것인가. 왕은 이 문제도 대신과 함께 상의했다. 좌대언 허성은 고조까지 제사를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세종은 반대 의사를 표했다. “4대까지 제사하는 일은 옛 선비(先儒)도 합의하지 못한 것이다. 3대(부, 조, 증조)를 제사하는 예법은 우리 조상께서 정한 법도로서, 이 또한 고대의 법도에 부합한다. 만약 누구나 4대를 제사한다면, 지위의 높고 낮음을 구별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스럽다.” (세종 11년 3월 13일) 먼 조상까지 제사를 지내게 되면 예법도 번거롭고 가계의 지출도 많아질 것이며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도 구별할 수 없게 되는 점을 세종은 깊이 염려했다.

왕은 성리학자들과 함께 그들이 신봉하는 성리학적 이념을 토대로 새 문명사회를 건설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효자뿐만 아니라 충신과 열녀의 본보기도 널리 수집해 책자로 정리했다. 백성들의 이해를 도우려고 삽화도 많이 그려 넣어 [삼강행실(三綱行實)]을 편찬했다. 나중에는 백성의 도덕심을 키우고, 그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왕이 직접 발 벗고 나서 한글을 창제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세종은 한글로 [삼강행실]을 다시 간행할 뜻도 품었다.

우리만의 예법 통해 국가 질서 재정립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吉禮)에 속하는 종묘대제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진 정전과 영녕전에서 왕이 직접 거행하는,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다.
집현전 학사 정창손은 세종의 이러한 포부를 비웃었다. “[삼강행실]을 반포했으나 충신, 효자, 열녀가 쏟아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도덕을 실천하고 못 하고는 저마다의 자질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한글로 이 책을 번역하면 많은 사람이 본받는다고 말하겠습니까?”(세종 26년 2월 20일) 정창손의 발언에 세종은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다. “이따위 말이 어찌 이치를 아는 선비의 말이랴! 아무 데도 쓸모없는 너절한(庸俗) 선비로다!” 이후 왕은 정창손의 벼슬을 빼앗았다. 인자한 세종으로서는 참으로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아무려나 왕은 교육의 힘을 굳게 믿었으므로, 나라의 ‘오례(五禮, 각종 예절)’도 다시 제정해 책자로 편찬하려 했다. 중국의 옛 제도와 우리나라의 의례를 비교·검토해 가장 합리적인 예법을 마련하자는 생각이었다. 예법이 바로 서야 올바른 문명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왕의 강한 신념이었다. 왕의 뜻은 대대로 이어져 성종 5년(1474)에 드디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완성됐다. 세종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조선에는 새로운 사회질서가 등장했다. 유사 이래 성리학 이념에 가장 충실한 나라가 조선이었다는 데 이론이 있을 수 없는데, ‘성리학 국가’라는 새 패러다임은 다름 아닌 세종에게서 나왔다.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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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호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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